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五衛都摠府都摠管趙公諡狀
濟恭嘗以史官。晒史五臺。讀己卯諸賢獄中書。未嘗不太息流涕。未終篇而爲之掩卷。今於仁壽堂趙公家狀。得公重逢己卯感懷詩讀之。亦足以一字一涕。然當其時。士大夫喪魄於士禍連仍。惴惴然直氣消靡。肆爲指目。互相訾嗸。猶有有情人可與公論往事。詩云。民之秉彝。好是懿德。秉彝之不可泯。有如是矣。公諱抃。字浩然。漢陽人。在麗朝。世有達官聞人。至諱仁璧。官左政丞。漢山伯。諡襄烈。夫人李氏。卽我太祖姊也。三世而至郡守諱承源。娶大提學文僖公辛碩祖女。生內贍寺正諱瑋。內贍正娶宗室銀川君女。生縣令諱光彦。寔公考也。妣文化柳氏。節度使睇女。判書季聞孫也。以弘治庚申正月十五日生公。公幼而聰敏。稍長。魁偉醇愨。年幾志學。遊靜菴先生之門。博於文辭而不屑爲擧子業。用力於古人爲己之學。學日進爲儕流冠。先生亟稱詡之。已而己卯禍作矣。士多改換頭面。要以保性命。公痛泣憂憤。如欲無生。不以一身禍害纓其念。公素與安公處謙相善。辛巳。安氏家爲人構陷。安公被鞫。公爲之變服擔舁。出入問候事連。公酷被拷掠流康津。嗚呼。三代以後。羣賢之生此王國。莫如己卯。明良相遇。非堯舜不學。廩廩乎朝夕至治。又莫如己卯。不幸小人惎之。際遇不終。羣賢騈首就死。則千古志士仁人之痛。又孰如己卯也。孟子曰。誦其詩讀其書。不知其人可乎。是以論其世也。士生於世。名列己卯錄。斯亦足矣。况公年未弱冠。以文正爲依歸。毅然與羣賢同禍福。後之論其世者安得無高山景行之誠也。公之居謫康津。以承重遭祖母喪。作廬設几筵。喪制一遵古禮。公早失父母。祖母李氏撫育之。常欲爲父母追服。以侍祖母不敢。至是因居廬毁瘠。疾病淹歲。未克成其志。每以爲終身痛也。戊辰蒙宥還。自是隱遯不出門數十年。以琴書自娛。平生患腓。出碎骨五片者三。萬曆己卯。公年八十。諸孫設壽筵。公贈弟以詩曰。兄年八十弟稀一。身世重逢己卯春。往事悠悠多感慨。不堪論與有情人。歲壬午。患微恙。一日解衣帶倚枕曰。吾今大卧。遂卒。是九月五日也。享年八十三。後以己卯名賢。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如例。公寬裕和易。敦睦隣族。尤眷眷於奉先。遺書與諸孫曰。先君早世。汝父亦夭。皆不得奉祭吾祖父母。至汝當祧。情甚愴痛。須倣古禮祭高祖可也。十二月丁酉。葬于龍仁蒲谷先塋西岡。配廣州安氏。弘文館博士漢英女。判書潤德之孫。生於甲子。以己未終。享年五十六。墓在公塋之左。嗚呼。己卯今五周矣。公之文章德行之載於家乘者。屢閱兵燹無一存。可攷者。惟己卯錄。然病於略。又失實矣。槩公問其師則靜菴先生。問其友則當世羣賢。氣節則履禍變而靡渝。孝慕則逮遅暮而不衰。雖其姿質有過人者。而學問之力。雖在百世之下。可以推知。錄之詳略踈密。又何足增損公也。公生一男壽麟。先公歿。壽麒卽副室男也。壽麟生六男一女。長詡察訪,次詢,次誠,次誼武科大將,次諶監察,次訒郡守。詡生二男。國弼參判,國瑞。詢生一男國廉僉正。諴生一男二女。國馨。誼生二男四女。國哲宣傳官,國信縣令。諶生一男三女。國老奉事。訒生一男一女。國俊判官。國家待己卯賢。無不侈以節惠之典。公之贈秩。又法當諡。玆以獻太常氏。
제공(濟恭)이 일찍이 사관(史官)으로 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라의 사기(史記)를 햇빛 쬐일 때메 기묘(己卯) 여러 현인(賢人)의 옥중의 글을 읽고, 한숨 쉬며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어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덮어 두었더니, 지금 인수당(仁壽堂) 조공(趙公)이 가장(家狀)에서 공의 『다시 己卯年을 만난 감회를 지은 시(詩)』를 얻어 읽었는데, 또한 한자 마다 눈물 한 번씩을 흘릴만하다. 그러다 그때를 당하여 사대부(士大夫)가 사화(士禍)에 넋을 잃고 줄곳 벌벌 떨고 있어 올바른 기운은 사그러져 없어지고 마을대로 지목하여 서로 헐뜯었으므로 오직 정이 통하는 사람이라야 지난 일을 공론할 수 있었다.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백성이 타고난 천성을 지키는 것은 이 떳덧한 덕(德)을 좋아 함이라. (민지병이호시의덕民之秉彝好是懿德)』하였으니 천성을 지키는 것을 없앨 수 없음이 이와 같다.
공의 휘(諱)는 변(抃)이오 자는 호연(浩然)이오 성은 조씨이니 한양 사람이다. 여조(麗朝)에서 대대로 높은 벼슬과 드러난 사람이 있었는데 휘 인벽(仁壁)이라는 이에 이르러 좌정승(左政丞) 한산백(漢山伯) 양렬공(襄烈公)이며, 부인 이씨는 곧 태조(太祖)의 맏누이이다. 증조의 휘는 승원(承源)이니 군수이고, 조부의 휘는 위(瑋)이니 내첨정(內瞻正)이고, 도(考)의 휘는 광언(光彦)이니 현령(縣令)이다. 비(妣)는 문화유씨이니 절도사(節度使) 제(睇)의 딸이다.
홍차경신(弘治庚申:1500 燕山君 六0 明孝宗 弘治 十三)에 공을 낳았눈데 공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더니, 조금 커서 체격이 크고 훌륭하며 성질은 삼가며 성실하였다.
十三·四世 때부터 점암선생의 문하에 노닐면서 문장에 박흡(博洽)하였으나 과거를 위한 공부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옛 사림의 자기를 위한 학문에만 힘썼다.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같이 공부하던 제배의 의뜸이 되었으므로 선생이 극히 칭창하고 도와주더니 머잖아 기묘의 화(禍)가 일어났다. 선비들이 머리와 얼굴을 고치고 바꾸고 하는 이가 많았으나 슬픔과 근심과 분한 마음으로 살고져하는 생각이 없는듯하여 자기 일신의 화액과 의해로써는 마음을 스지 않았다.
공이 전부터 안공 처겸(安公處謙)과 더불어 찬하게 지냈었는데 신사(辛巳:一五二一~中宗一六)에 안씨의 집이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안씨가 국문(鞫問)을 당할 때에 공이 변복하고 <지게를>)에 지고 메고 하면서 출입하여 안부를 물었더니 일이 공에게 까지 연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강진(康津)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슬프다! 삼대<三代: 夏, 殷, 周>이후에 많은 어진이들이 이 왕국에 난 것은 기묘(己卯) 때와 같이 맡을 때가 없었다. 밝고 어진이가 서로 만나 요순의 도덕이 아니면 배우지 아니하여 아침 저녁으로 용기(勇氣)가 왕성(旺盛)하여졌으므로 지극히 착한 정치도 또한 기묘때와 같은 대가 없었다. 그런데 불행하게 소인(小人)이 이를 기탄(忌憚)하므로 잘 만날 것을 맺지 못하고 여러 어진이들이 머리를 나란이 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니 천고(千古)에 뜻있는 선비의 슬픔이 또 오느 것이 기묘때와 같으리오! 맹자의 말에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고서 그 사람을 모르면 되겠는가!』하였다. 이러므로 그 세상을 평론하메 있어 선비가 세상에 사서 이름이 기묘록(己卯錄)에 나란이 적혀 있기만 하여도 족한데 하물며 나이 약관(二十世)도 못되어 문정(文正:靜庵 趙光祖)으로써 의지할 곳으로 삼았으며, 여러 어진이로 더불어 화(禍)와 복(福)을 같이 하였으니 뒤에 그 세상을 평론(評論)하는 자가 어찌 높은 산과 같이 사모(思慕)하고 우러러 보는 정성이 없으리오!
공이 강진(姜晉)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승중으로 조모상을 당하였다. 여막과 괴연을 베풀었으며 상제(喪制)는 모두 예전 예절에 따랐다. 공이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모 이씨가 어루만저 길렀다. 항상 부모를 위하여 추복(追服:나중에 입는 것)을 하고저 하여도 조모를 모시고 있으므로써 감히 못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여막(廬幕)에서 살면서 애통하고 수척하여 병든 것이 해가 지나도 낫지 않아 종신토록 않았다.
무진(戊辰一五六八:宣祖一,當六九世)년에 놓여서 돌아왔는데 이로부터 숨어 살면서 문을 나가지 않기를 수 십년이며 거문과와 글로써 평생을 즐거이 지났다. 아랫 다리를 앓아 부스러진 뼈를 빼닌 것이 세 번이나 되었다.
만력 기묘(萬曆己卯:一五七九:宣祖一二,明神宗一0)에 공의 나이 八十이다. 모든 손자들이 수연(壽筵)을 베풀었는데 공이 아우에게 시를 지어 주었으니 이르기를
兄年八十弟稀一(형년팔십제희일)
身世重逢己卯春(신세중봉기묘춘)
형의 나이는 팔십이오 아우는 칠십일인데,
몸과 세상은 거듭 기묘년을 만났다.
往事悠悠多憾慨(왕사유유다감개)
不堪論與有情人(부감론여유정인)
지난 일은 멀고 멀었으나 감개가 많으나,
유정한 사람과도 함부로 말할수 없네.
임오 (壬午: 一五八二, 宣祖二五, 當八十三세) 九月에 대수롭지 않은 별을 앓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크게 누으리라』하고 드디어 마쳤으니 향년이 八十三이라. 뒤에 기묘의 명현으로써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세자이사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義禁府使都摠府都摠管)을 증직(贈職)하였다.
공은 너그럽고 상냥하며 이웃과 일가에 돈목하였으며 조상을 받드는데 알뜰히 돌보았다. 모든 자손에게 유서를 주었으니 이르기를
『내 아버지<先君>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네 아비가 또한 일찍 죽어 나의 조부모의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되었다. 네가 이르러서는 의당히 조매(祧埋) 할 것이니 정리에 매우 슬프고 쓰라리다. 모름지기 옛 예절을 모방(模倣)하여 고조까지 제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용인 포곡(龍仁 蒲谷)에 장사하였다.
배(配)는 광주안씨(廣州安氏)이니 홍분박사(弘文博士)인 한영(漢英)의 딸이다. 묘는 공의 묘의 왼편에 있다.
슬프다! 己卯년이 지금까지 오번이 돌아왔다. 공의 문장과 덕행은 가승에 실려있었는데 여러 차례 난리에 불 타버려 한가지도 상고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으며 오직 기묘록(己卯錄) 뿐인데 이것도 너무 간략한게 병이며 또 실물은 잃어져 버렸다. 대개 공의 스승을 물어보면 정암선생이라 하고 그 벗을 물어보면 그 당시의 여러 어진이라한다. 기개와 절조는 화변을 당하여 변하지 아니하고 효심은 늙어 임종할 때까지 쇠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자질(資質)은 보통사람에 지난 것이며, 학문의 힘 비록 백세이후(百歲以後)라 할지라도 미루어 알만하다. 기록의 자세하고 간략한 것이 어찌 공을 더 훌륭하게 하거나 못하게 하리오.
아들 하나를 낳아 수린(壽麟)이라 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돌아가고 수린이 六남 일녀를 낳았으니 말은 허(許)인데 찰방(察訪)이오, 다음은 순(詢)이오, 다음은 함(諴)이오, 다음은 의(誼)이니 무과(武科)로 대장(大將)이오 다음은 심(諶)이니 감찰(監察)이오, 다음은 인(訒)이니 군수라 한다.
국가에서 기묘의 어진이를 대우하는데 누구나 절조에 대한 은전(恩典)의 영광을 베풀기로 하였으니 공에게 벼슬을 올려 증직한 것과 또 법으로 마땅히 시호(諡號)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이에 이 글을 태상씨(太常氏:典禮를 맡은 官吏)에게 드린다.
번암(樊巖) 평강 채제공(平康 蔡濟恭)
樊巖先生集卷之四十一 / 諡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