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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오직 십자가
□ 본문 : 누가복음 23장 39-43절
교회력으로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 길거리로 달려 나온 수많은 백성들은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길에 자신들의 겉옷과 종려나무가지를 베어 바닥에 깔고는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왜 종려나무로 예수님을 환영했을까요?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로마를 물리치고 승리를 안겨다 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 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종려주일인 동시에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번 주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다음 주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승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실 승리는 로마를 물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이기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창조된 순간부터 멸망하는 순간까지 모든 사람이 지었던 죄, 지금도 짓고 있는 죄,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의 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을 속죄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수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죄에 합당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의 값이 무엇인지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입니다.(롬6:23) 여기서 말씀하는 사망은 단지 육신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육신의 죽음을 첫 번째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첫 번째 사망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육신의 죽음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죄 있는 자는 이 심판을 통해 두 번째 사망, 즉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받습니다. 지옥의 심판입니다. 이것이 죄인이 치러야할 죄의 값입니다.
이 세상에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겉으로 나타나는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만이 죄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동으로 나타난 죄만 아니라 마음속에 품은 죄도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인만 죄가 아니라 미워하는 것도 죄입니다. 간음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음란한 마음을 품는 것도 죄입니다. 도둑질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탐심도 죄입니다.
교만, 시기와 질투, 거짓말, 부모님을 거역하는 것도 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죄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이 되는 성경말씀으로 판단하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말씀 앞에 서지 않더라도 양심 앞에 서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인정하기 싫습니다. 세상이 그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상은 그것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괜찮아. 이건 죄가 아니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32)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가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 천국에 가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지옥에 보내시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의 심판으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의 값을 모두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하신 것을 믿으면 됩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을 열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예수님 좌우편에 행악자들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린 한 행악자가 예수님을 비방하며 말합니다.
39절 말씀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 행악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는커녕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이 때 다른 행악자가 그 사람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42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특별한 죄수들에게만 행해졌던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에 반역을 꾀했던 죄수들에게 행해졌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열심 당원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행악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 아래 살인과 약탈 등을 일삼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라면 친구도 가족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 만큼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어’ 이런 말을 듣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구원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용서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능히 구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1. 죄를 인정하라.
41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구원받은 행악자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죄인이 아니라 십자가형을 받을 만한 큰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사역하던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고,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크면 클수록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티는 너무 잘 보이지만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악자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요?
이 행악자도 예수님처럼 조롱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온갖 악설과 저주를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과 조롱과 침 뱉음과 채찍질 앞에서도 잠잠하셨습니다. 자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셨습니다. 행악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셨던 기도도 들었습니다.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
행악자는 예수님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이 받는 십자가 형벌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는 죄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똑같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서니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가 보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믿어야 만 천국에 가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확신도, 구원받았다는 감격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 때문에,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았습니다. 친구와 싸웠던 것, 부모님 돈을 움쳤던 것, 거짓말 했던 것, 이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죄 때문에 내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회개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죄를 인정할 때, 회개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가 됩니다.
2.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라.
42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42절 말씀을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킹 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And he said unto Jesus, Lord,"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악자의 고백 중에 제일 중요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주님입니다. Lord입니다. 행악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구원받는 길입니다. 행악자의 회개와 신앙고백도 놀랍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더 놀랍습니다.
4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행악자가 어떤 죄를 짓고 살았는지 다 아십니다. 십자가형을 당할 정도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일초도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행악자가 회개하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자 곧장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종말의 순간까지,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이 잠시 거하는 곳입니다. 천국으로 이해하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즉시 구원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행악자가 즉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 1993년 7월부터 1994년 9월까지 1년 2개월에 걸쳐 살인, 강도, 성폭행 등의 범행을 저지른 일명 지존파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지존파 사건의 첫 공판 후 검찰은 ‘이들처럼 반성의 빛이 전혀 없고 개선이 불가능한 흉악범들은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켜야 한다.’고 공언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들만큼은 절대 사람이 될 수 없고, 이들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인들이라고 해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죽이지 못하고 잡혀 억울하다’며 사람이기를 거부했던 이들이,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까지도 사랑하시고, 이런 죄인까지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1995년 초 겨울 서울구치소에서 지존파 두목인 김기환과 행동대장 김현양의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사형집행을 앞에 두고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찬양을 부르는 이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습니다. ‘죽음으로써 피해자 가족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큰 죄를 짓고 왔지만 이곳에서 구원을 얻게 되어 그것이 감사합니다.’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약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던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지존파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스스로가 사람이기를 거부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들의 얼음장 같은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서도, 이들의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로 이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이들에게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 오직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를 보며, 지존파를 보며 자신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죄를 지었나, 얼마만큼의 죄를 지었나’를 따지면서 그들과 우리들을 구별시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극악무도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배에 구멍이 났습니다. 그것이 큰 구멍인지 아니면 작은 구멍인지, 구멍이 백 개인지 열 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멍을 막지 않으면 결국은 배가 가라앉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서 두 행악자가 걸어갔던 길을 걸어갑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비방하며 부인하거나,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십자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의 삶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십자가, 오직 십자가만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전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에게는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학문인 가말리엘 학파에서 공부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회의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 오직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받지 못하다면 영원한 사망의 심판,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로마의 시민권이, 가말리엘 학파에서 공부한 것이, 산헤드린 공회 회원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일 죽는 자에게 오늘의 부귀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음의 시간이 1년 뒤로 10년 뒤로 밀려난다고 소망이 있습니까?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한 사망,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영원에 비하면 일초도 되지 않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도대체 무슨 소망이 되겠습니까?
십자가 없는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오직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십자가로 죄 사함 받고 십자가로 구원받은 이 복을 세상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똑같습니다. 십자가의 죄 사함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십자가로 내 모든 죄 용서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보다 더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것 없이는 참된 평안도 참된 기쁨도 참된 소망도 없습니다. 이것 없이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평안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기쁨, 십자가의 감격이 있습니까? 십자가로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받았으면서도 평안도 기쁨도 감격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었는데 여전히 예수님 없는 세상 부귀영화가 부럽고, 십자가 없이 살아가는 세상 성공이 부럽다면 정말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도 붙잡고 십자가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오직 십자가만 붙잡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신은 너무 큰 죄를 지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던 행악자도 용서하는 십자가입니다. 지존파도 용서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용서 못할 죄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로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처럼 죄를 회개하고, 입을 열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됩니다. 그러면 용서받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습관적인 죄에 묶여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이 죄는 끊을 수 없나보다’ 하며 낙심하고 포기한 죄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모든 죄의 결박을 끊으셨습니다. 일평생 우리를 묶고 있는 죄의 권세를 끊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믿으십시오.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죄를 이깁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이기지 못할 상황도 없고, 십자가를 붙잡으면 이기지 못할 죄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도 없고, 십자가를 붙잡으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오직 십자가만 붙잡고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이번 한 주간 새벽을 깨우며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합시다. ‘예수님, 내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 예수님, 습관적인 죄에서 나를 자유하게 하소서. 예수님, 십자가의 평안과 기쁨으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나를 채워주소서.’ 그러면 지금도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강같이 흐르는 고난주간을 보내고, 기쁨의 부활절을 맞이합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