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7
3월25일[성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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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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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AQF5V3rwFE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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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도 유난히 가깝고 편안하고 절친한 가족이 있었으니, 바로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 마리아네 집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끝도 없이 늘어선 환자들의 치유, 적대자들과의 거듭되는 논쟁으로 온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즐겨 찾던 집이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작스레 우르르 들이닥치곤 했었는데, 그럴 때 마다 세남매는 그들을 극진히 환대하였습니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식사를 준비했고, 감춰두었던 값진 포도주를 내어놓곤 했습니다.
베타니아의 그 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오아시스이자 베이스 캠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신 성주간 첫날 베타니아의 그 집을 또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마르타는 마음이 급해지고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지지고 볶고, 삶고 굽고 정신없었습니다. 라자로는 예수님 맞은 편에 앉아 귀빈 접대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깊이 일치하고 있었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직감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드디어 사랑하는 주님과 작별할 날이 가까이 다가왔구나. 이제 드디어 그분을 떠나보내 드려야 하는구나.
뭐라도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마리아는 자신의 소지품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즉시 찾아냈습니다. 자신의 소지품 가운데 가장 아끼던 물건,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챙겼습니다.
식사 중이던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마리아는 그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아낌없이 통째로 예수님 발 위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둘러 앉아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저런저런 저게 얼마나 비싼 향유인데...저런 행위는 아무 사이나 하는 행위가 아닌데...공개석상에서 무슨 꼴불견이람.
그러나 마리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고 거리낌없이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여인들이 아주 중요시 여기는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의 발을 닦아드린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겠습니다. 너무나 그를 사랑한다는 표현,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대상이라는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마리아가 보여준 특별한 행위는 일종의 장례 절차였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해드리는 것도 좋지만, 살아생전 해드릴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예를 주님께 바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갸륵해보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신이 지니고있는 가장 귀한 것을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내가 지닌 가장 귀한 것을 대체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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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라디오 <참 좋은 오늘, 은빛수녀입니다>
성주간을 맞이하며 - 양승국 신부
Ep.1 희망과 사랑, 행복으로 가는 인생조언!!
https://youtu.be/eU-F147yr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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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1YE1tgIy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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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비로운 사람에게만 은총을 주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자 하느님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방금 죽은 라자로를 살리셨습니다.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로 닦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그걸 가난한 자에게 주면 더 좋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아끼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겐 은총입니다. 은총을 주시는데 전혀 반응이 없다면 그분도 더는 바보가 되려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비를 입으려면 먼저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 순서도 있습니다. 하느님, 부모, 형제, 이웃들입니다.
SBS TV 동물농장, 애니멀봐에서 같은 날 태어난 풍산개 남매가 서로 밥 먹을 때만 싸우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매우 친하지만, 밥만 나오면 유독 오빠 개는 자기 먹을 것은 먹지도 않으면서 동생 개가 밥을 먹지 못하고 뭅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서열 정리라고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형제에게 자비롭지 못한 개에게 밥을 더 주겠습니까? 주인은 그 오빠 개를 묶어놓고 동생 개에게만 음식을 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줍니다. 그다음에 오빠 개도 주기는 합니다. 음식은 주는 일은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가 음식을 주는 대상도 자비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에게 자기가 자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강탈당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 문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밤, 방정환 선생의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칼을 든 강도를 만난 선생은 차분히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그냥 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칼까지 들이대고 그러시오.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소.”
너무도 부드럽고 친절한 방정환 선생의 말에 강도가 더 당황했습니다. 선생이 준 뭉칫돈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 하는 강도에게 방정환 선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달라고 해서 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하지 않소.”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경찰에게 강도가 붙잡힌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 집으로 들어온 경찰과 강도를 본 선생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허허. 또 오셨네! 방금 준 돈을 벌써 다 쓰셨단 말이오.”
그러자 경찰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자가 여기서 강도질을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경찰의 말을 들은 방정환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 내가 그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내가 준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저자가 강도입니까.”
방정환 선생의 말에 경찰은 의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강도를 풀어주었습니다. 경찰이 가고 나서 강도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강도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선악과, 혹은 십일조, 혹은 작은 감사의 기도라도 받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은총으로 악해지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만이 자비를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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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교구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복음화’를 중심으로 소공동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육담당 사제였기에 복음화에 대한 교육을 각 지구로 돌아다니면서 하였습니다. 교재는 반장학교 1단계, 2단계, 3단계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첫 번째는 ‘죄인까지 품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들도 자기들의 자식은 사랑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전에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어미가 어찌 젖먹이 아이를 잃어버리겠느냐? 설령 어미가 자식을 잃어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결코 잃지 않겠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습니다. 죄인일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마귀 들린 사람일지라도, 아픈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모두 다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배반하여 다락방에 숨어 있을지라도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끝까지 믿어 주는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제 이웃이 제게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비록 둘째 아들이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 왔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반지를 주고, 잔치를 벌여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다섯 번째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동굴이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누일 자리조차 없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열정적인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화의 4가지 요소입니다. 첫 번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독서 토론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는 강론은 진정한 강론이 아니라 사제 개인의 넋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곧 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지역’입니다. 지역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신심단체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지역이 활성화 되면 본당은 더욱 활성화되기 마련입니다. 네 번째는 ‘활동’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은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소동동체 모임은 그저 친목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묵상하며 복음화의 4가지 요소를 삶으로 실천하는 성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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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1-11: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1절) 베타니아로 가셔서 라자로의 집에서 식사하신다. 그 식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파스카 양을 준비하기 전에 잠시 흥겨운 시간을 가졌는데, 양을 마련한 후에는 축제 때까지 단식이나 정화하는 데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식사 준비를 하고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영예를 갖는다.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족의 시중드는 것을 흐뭇해하시면서 받아주신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유이다. 자선을 베풀고, 병자를 찾아가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겸손, 친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 향유가 온 집안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내로 가득 채우는 값진 향유가 될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유다는 열두 사도 중의 하나였고, 돈주머니를 관리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믿음이 없고 사악한 유다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를 횡령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믿어준 주님을 배반하고 만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 여기서 보면 유다가 순수하게 말하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당신 신비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즉, 당신이 곧 돌아가실 것이며 향료와 향유로 당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고 하신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8절)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이 살려주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러니까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려고 결의한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눈먼 자의 눈먼 생각이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을 죽이더라도 당신은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죽은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고 죄를 용서받아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샘하며 그들이 다시 죽기를 바라고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살해에 또 살해를 저지를 생각을 한다. 라자로를 죽이면 그 기적의 힘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면서 이 성주간을 지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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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베타니아의 잔치를 배경으로 합니다. 참혹한 수난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잔치, 향유, 여성의 머리카락 등의 소재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음에도 다시 살아난 라자로의 이야기는 오늘부터 엿새 뒤에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1년 치 품삯에 해당)이나 하는 비싼 향유를 한 번에 사용하며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 때문에 유다 이스카리옷은 분통을 터뜨립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러나 본문은 분명하게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냥 놔두어라.” 하시며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행위와 당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사실 ‘향유’를 쏟아 ‘예수님의 발을 닦는 행위’는 당신의 ‘피와 물’을 온전히 쏟아 ‘인간의 죄를 닦으신 예수님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던 것처럼 십자가 주변도 예수님의 피 냄새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듯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예수님의 발을 닦았듯이 예수님께서도 허리를 굽혀 인간의 발을 닦으시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성실하게 공정을 펴시며,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분께서는 “백성에게 목숨을 ……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이시기에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이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숨과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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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1-8)
1)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일을 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장사하는 다른 많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2코린 2,15-17ㄱ)
사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향유 냄새는 구원의 향기였고, 생명의 향기였습니다. 그러나 배반자 유다에게는 그 향기가 ‘돈 냄새’였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죽음의 향내’가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라는 말을 바탕으로 해서, 마리아 자신이 향유였고, 향기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향유가 비쌌다는 것은,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바친 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향유가 순수했다는 것은, 마리아가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봉헌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는 유다의 말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나는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라는 복음서 저자의 설명은, “유다의 말은 위선자의 ‘빈말’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라는 말은, 유다에게 ‘도벽’이 있었다는 뜻은 아닌 것 같고, 공금을 자기 돈처럼 썼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아마도 그는 그런 짓을 하면서도 늘 돈이 부족하다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왜 그런 사람에게 돈주머니를 맡겼을까? 우리는 자세한 상황을 모르지만,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맡긴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 자신이 맡겠다고 자청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랑 실천은 ‘돈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었더라도, 남을 도와줄 돈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합니다.>
3) 마리아와 마르타와 라자로 남매는 부자였을까? 가난했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들 남매를 사랑하셨다는 것이(요한 11,5) 중요하고, 그리고 그들 남매가 예수님을 사랑했고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든 마리아에게 돈이 많아서 그 비싼 향유를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으로,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난한 이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마리아에게 주었고, 그 돈으로 마리아가 향유를 마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한 말에 대해서, “가난한 이들은 받기만 하는 존재인가? 가난한 이들도 주님께 무엇인가를 봉헌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부자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무엇을 얼마나 바쳤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성으로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전 두 닢을 바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도(루카 21,3-4)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삼백 데나리온어치 향유’와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은, 그 사랑과 정성에서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4)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고,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은 특별한 비상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나는 늘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또 가난한 이들 안에서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나의 장례를 미리 거행했음을 기억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과 희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한 장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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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하나의 장례처럼 여기는 상징적인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향유를 붓는 행위는 장례 의식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마태 26,12; 마르 14,8; 요한 12,7 참조)
고대 유다교 전통에서도 장례는 당시 유다인들과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권장되었던 선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토빗 1,17-18; 사도 9,36-37 참조)
후대 유다교 라삐들에게 장례는 단순한 자선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산 이들과 죽은 이들 모두에게 베풀 수 있는 선행으로 이해되었습니다.(마태 25,35-45; 마르 15,42-47; 사도 8,2 참조)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묵상합니다.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 한 리트라, 곧 320그램 정도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예언적 행위이며, 그분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선행을 상징합니다.
마리아의 이 선행은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종말론적 행위를 의미합니다.(마태 26,11; 마르 14,7; 요한 12,8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유다, 예수님께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를 하나의 ‘표징’으로 확인하려고 몰려든 유다인들, 그리고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그분과 함께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하는 수석 사제들이 있습니다.
성주간 월요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 가운데 누구에 가깝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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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성주간 동안 펼쳐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극적인 사건들에 하루하루 동참하는 가운데,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과 닥쳐올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우리가 죄에서 구원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베타니아에서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리는 아름다우면서 슬픈 예감의 이야기를 묵상하게 됩니다.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타는 감사와 우정의 선물로 식사를 마련합니다. 특별히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바릅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척 자선을 내세우지만 감출 수 없는 탐욕으로 비열한 속내를 드러내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소름 돋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이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목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내놓으시려는 예수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향유는 거룩하신 분의 죽음을 준비하는 도유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도유의 궁극적 의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에게 그분께서 부어 주시는 영’ 곧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의 탐욕은 생명의 소중함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탐욕에 빠지면 성령을 간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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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교회의 전례는 이사야의 예언과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 이야기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민족사의 암흑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70년에 걸친 유배생활의 직전과 직후까지 모두 3세대에 걸쳐 학파를 형성하며 예언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동족이 처한 상황이 암울했던 만큼 이사야는 당대의 민중인 아나빔들과 기도로 통공하며 그 어둠을 몰아낼 희망을 하느님께 탄원하여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언의 백미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자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었고, 이 사상이 ‘고난받는 종의 노래’ 네 편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그 첫째 노래로서,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이룩하실 새로운 미래를 아주 선명하게 내다보았습니다. 그분은 민족들에게 공정을 펼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볼 것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의 진실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줄 것이며, 억눌려 갇힌 이들을 풀어줄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메시아의 이런 활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새 역사를 펼치시는 것이라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전망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사야가 활약한 시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5백 년이나 이른 때였는데도, 마치 눈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알려주듯이 이사야는 예언한 것입니다. 그도 역시 하느님의 영을 받아 말씀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과연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공생활 동안에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로써 실현하셨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 이후에는 부활과 발현으로써 실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메시아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성령으로 발현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도록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메시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고,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인류로서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거룩하게 변화시키라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복음화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새 인간이신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이를 부활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부활 신앙으로 성령을 따르면, 당신이 공생활 중에 이룩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증하셨습니다. 당신이 믿는 이들 안에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부활 신앙이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절친했던 벗 라자로가 죽었을 때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부활 신앙의 성사적 예표로 삼으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하느님의 부활 권능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소생은 육신이 되살아나는 일이라서 수명이 다하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부활은 영혼이 되살아나는 일이라서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때가 파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였고, 또 라자로의 집은 예루살렘 근처인 베타니아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은 급속도로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에게로 퍼져나갔고, 그 덕분에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질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한 민중봉기를 염려하는 로마 총독이나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은 물론 라자로까지도 죽이려 들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럴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시고도 감행하셨습니다. 그럴 만큼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려는 예수님의 뜻과 각오는 엄중한 바가 있었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을 기뻐하는 잔치는 그래서 열렸고, 동생 마리아는 귀한 나르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림으로써 임박한 그분의 장례를 미리 치루고자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기를 무릅쓰고 자신의 오빠를 살려주신 데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하고 싶었던 것이고, 예수님으로서는 복음선포로 일관한 공생활 3년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보시는 예우였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복음을 듣거나, 기적으로 병을 치유받았거나, 마귀를 쫓아내어 주시거나 등 혜택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어도, 그분께 감사를 드리거나 예우를 갖춘 사람은 그만큼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카리옷 유다는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값비싼 향유를 아까워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말리지 않고 마리아의 행동을 고맙게 받으셨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마리아가 행한 이 ‘거룩한 낭비’를 계승하는 예절입니다. 그래서도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바는 부활 신앙의 의미와 중요성입니다.
말씀과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계승하기로 다짐하는 일이 우리로 하여금 부활 신앙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를 향해서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메시아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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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베타니아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 잔치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마리아가 예수님께 하는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잔치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잔치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은 그 숨은 의미까지는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저 예수님 덕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 정도로 생각했겠지요.
잔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순 나르드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오늘날 우리 화폐 가치로 약 3천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물품입니다. 그 귀한걸 예수님 발에 아낌없이 쏟아붓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다 이스카리옷이 왜 그 비싼 향유를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더 가치있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낭비’하느냐고 마리아에게 핀잔을 주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가난한 이들을 그만큼 많이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했겠지만, 그 진짜 의도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그 향유를 온전한 상태로 예수님께 드리면 그것을 처분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울 속셈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결코 비싼 향유를 그냥 ‘낭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 자기 오빠를 살려주신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기꺼이 ‘봉헌’한 것이었지요. 또한 온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려는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드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왕을 추대하거나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을 파견하는 의미가 있다면,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은 시신에 향유를 발라 ‘염’을 하는, 즉 장례를 치르는 의미가 있기에, 마리아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죽음이 임박한 예수님의 장례를 먼저 치뤄드리려 했던 겁니다.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기념하고 간직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었으니 돈이 얼마가 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지요. 마리아는 더 비싼 것이었다고 해도 기꺼이 바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리아의 깊고 순수한 사랑이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졌던 주님께 더할 나위 없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것저것 재거나 계산하지 않고 아낌없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고통과 시련, 손해와 희생까지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사랑은 숫자로 판단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기 자신까지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을 지내고 있는 지금 나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유다처럼 돈과 효율을 먼저 따지며 주님을 앞세워 제 몫을 챙길 생각만 하는지, 아니면 마리아처럼 주님과 그분 뜻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그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로 사는지.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유다처럼 재물 먼저 챙기면 주님을 잃게될 것이고, 마리아처럼 주님을 먼저 챙기면 그분을 통해 ‘전부’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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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신학생 시절 어느 여름 저학년 신앙학교 때의 일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수영장에 갔는데 한 유치부 여자아이가, 아빠가 선물해준 이천 원이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교사들과 제가 아무리 좋은 말로 구슬려도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계속해서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급기야 저는 아버지가 사주셨다는 그 지갑 보다 더 예쁘고 좋은 것을 당장 사와 돈 이천 원을 넣어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그 지갑, 아버지가 직접 주신 그 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지갑의 경제적 값어치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보다 훨씬 좋고 예쁜 것이라도 마다하는 마음. 그것은 곧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신뢰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시중을 드는 마르타, 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는 마리아,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라자로가 첫 번째 그룹이고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 이스카리옷과 예수님뿐만 아니라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하는 수석 사제들이 두 번째 그룹입니다.
이들을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시선과 관심이 극명하게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기 위해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광야성 기후였기에 유대인들은 외출했다 들어오면 반드시 먼지가 묻은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종도 아닌 여성이 다가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가져온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의 가치를 알아보자면, 일단 나르드 기름은 히말라야와 같은 고산 지대, 구체적으로는 해발 2,000에서 3,000 미터의 환경에서 채취할 수 있는 것으로 전량 동방에서 들여오는 수입품이었습니다.
한 리트라는 327.45그램으로 로마식으로 따지면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 약 삼백 데나리온 정도의 가격이었습니다. 지난 사순 제 3주간 화요일의 강론 때에 제시했던 공식을 대입하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일 데나리온 이었으니 나르드 한 리트라는 현대의 최저 임금 기준으로 약 이천만 원의 값어치를 지닌 셈입니다. 일반 서민이라면 감히 만져볼 수도 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값비싼 향유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옷도 아닌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겸손,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존경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모든 시선과 관심은 예수님께 집중됩니다. 또한 마르타는 예수님의 시중을 들고 있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한 식탁에 머무르고 있으니 이들의 시선 역시 예수님께 온전히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유다의 시선과 관심은 예수님이 아닌 비싼 향유에 쏠려 있습니다. 왜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의 속마음에는 그것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모시고 떠돌아다녔던 제자의 입장에서 ‘이정도 돈이면 우리도 이렇게 궁색할 필요가 없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바로 여기서 이 두 그룹의 명백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나르드 기름은 예수님을 향한 선물, 그분을 향한 존경을 드러내는 사랑의 수단입니다. 즉, 그녀에게 세상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면 유다에게 있어서 나르드 기름은 그저 경제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신학생 시절 수영장에서 서럽게 울던 어린 아이를 떠올려 봅니다. 그 아이가 울음을 그친 것은 어머니와의 전화를 통해 전해 듣게 된, ‘아빠가 다른 지갑 사준 대’ 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모든 시름을 잊은 듯 다른 아이들과 신나게 물장난을 하며 다시 뛰어 놀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지갑을 사주었는지, 이천 원을 똑같이 지갑에 넣어주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시 선물해준 그 지갑에,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애정이 담겨져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미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과연 나는 이 아이가 아버지에게 의지하듯 얼마나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 많은데 그것을 어느덧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 소중함을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사랑을 표하는 이들은 주님의 사랑의 가치를 아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계산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눈먼 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고(요한 9,3) 가난한 과부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었으며(마르 12,44) 이방인이 오히려 놀라운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습니다.(루카 7,9)
이들의 공통점은 아무런 계산 없이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랑을 드리고자 하는 의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 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에는 어떠한 경제적인 논리도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께로 향하는 나의 신뢰는 어떠한 지, 그리고 그 신뢰의 행위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가 선언 하듯, ‘의로움으로 우리를 부르고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는’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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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12,7)
예전 어느 잡지의 신간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용기」라는 책 제목이 신선해서 기억하게 되었는데, 책 저자가 ‘이라영’ 이더군요. 그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이나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사람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의 사람될 권리를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용기’라는 책을 집필했다고 하네요. 저의 관심사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 제목이 가져다주는 영감입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이42,3.6)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것은 그 가족과의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에서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자비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무슨 칭찬이나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다시 살아난 것에 감사하면서 기쁨과 환희에 넘친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넘친 잔치 가운데 특히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은 비싼 향유보다 더 귀하고 귀하신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환대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녀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음은 그들 가족의 생명의 ‘빛이요 구원이신’(시27,1참조) 예수님께 대한 애절한 감사와 報恩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충분히 ‘환대받을 권리’가 있으며, 마리아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미움받을 용기’를 감내하려는 의도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환대할 용기’를 지닌 여성임이 드러납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 가운데 유다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12,5)하고 빈정댑니다. 어쩜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12,3)는 표현은 단지 나르드 향유 냄새라기보다는 마리아의 주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 씀씀이와 영혼의 향기였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유다에게서는 돈 썩는 냄새와 함께 썩어가는 영혼의 냄새가 풍겼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냄새를 맡았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 평소와 달리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12,7) 하고 옹호합니다. 어떤 누구도 예수님의 장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하고 연연했으나, 오직 한 사람 마리아만이 그날을 알고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고 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만일 사랑하는 부모나 자녀가 엿새 후에 죽는다는 것을 감지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론 우리에게도 사랑의 거룩한 낭비도 필요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주는 것 곧 사랑의 낭비임을 마리아는 알고 실천한 것입니다. 사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로 믿는 사람이 늘어났고 적대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그날이 이미 임박했음을 감지한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바로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12,8) 하고 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성주간 동안, 또 사랑의 분별 차원에서 지금 우리의 사랑을 먼저 우선해서 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다음에 사랑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이며, 이를 빙자해서 이웃을 돌보는 일을 미루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 비싼 나르드 향유를 당신 발에 붓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장례를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저희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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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마을에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둘 다 곡물의 씨앗을 뿌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씨앗을 뿌리려는데, 곡물 씨앗 안에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한 농부는 “나는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이 씨앗을 뿌리지 않겠다.”라며 씨 뿌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반면 다른 농부는 그럼에도 씨앗을 밭에 정성껏 뿌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곡물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다른 씨앗이 섞여 있어도 씨앗을 뿌린 사람이 분명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라지는 독보리라고 불리는 잡초로, 밀의 뿌리와 뒤엉켜 자라기 때문에 이 가라지를 뽑으면 밀까지 뽑히게 됩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점과 약점을 얼른 뽑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가지려고 하지만, 이 부정적인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밀과 같은 좋은 모습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면서 대충 막살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겸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라지를 억지로 뽑으려 하지 않습니다. 즉,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잡초의 힘을 빼앗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잡초를 솎아내고 그 힘을 빼앗습니다. 물론 전부 제거하거나 완전히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그 불순물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며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유다는 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쓸데없는 낭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사리사욕이 가득 찬 계산 속에서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발에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낭비일까요? 아닙니다. 사랑만이 보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받아주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완벽주의자가 굳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삶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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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요한 12,1-11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유다인들이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하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
나 있는
지금 사랑
언제든 사랑
나 머문
여기 사랑
어디든 사랑
내 앞에
당신 사랑
누구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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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 줍니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다 퍼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심장이라도 내어주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 12,3)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눈이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감사와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얘긴데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남모르게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돈만 보일 뿐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늘, 그 사랑을 외면한 채 약삭빠른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능력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모두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2,11)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기득권을 누리려는 욕심이 있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반면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도 커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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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종>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라?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오늘 성주간 월요일 복음의 주인공은 단연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부은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찾았던 환대의 집, 베타니아집에 살았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였고,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또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삼남매였습니다. 이중 마리아의 주님의 종,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가장 뛰어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
화답송 후렴의 고백은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는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상징하는 바 참으로 주님의 종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제 옛 자작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그대로 주님의 종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며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은총의 성주간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무려 26년이 지났어도 참 많이 인용했던 시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도 분명 이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한 듯 마리아는 사랑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말그대로 한폭의 살아 있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화같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했다.’
순 나르드 향유 냄새가 상징하는 바, 마리아의 향기, 사랑의 향기,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 같습니다. “난같은 당신”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바로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당신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있음자체만으로
향기롭고 평화로운
난같은 당신, 마리아입니다.”-1998.3.37
흡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드리던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이 연상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가 말하는 주님의 종은 그대로 마리아가 참으로 사랑했던 예수님이심이 환히 계시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폭적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주님의 종,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은 마리아는 물론 사랑의 관상가의 삶을 지향하는 우리 모든 이들의 이상적 인간상입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공정을 펴리라.’
한결같이 자비롭고 섬세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고, 고요하고 자상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하느님을 고스란히 닮은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이자 믿는 모든 사랑의 관상가들이 닮고 싶은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다음 하느님의 모습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 이런 하느님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자초한 인간의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새삼 이런 하느님을 경외하고 흠숭하고 찬미하고 감사함이 우리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며 살길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관상가, 신비가, 영성가로 불림 받은 우리의 보편적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사명을 부여받는 주님의 종은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주님의 종들, 세례받아 주님의 종, 주님의 자녀가, 복음의 일꾼이 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우리를 무지와 허무에서 해방하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종 예수님을 모심으로 무지의 눈이 열려 보게 되고, 무지의 감옥, 무지의 어둠, 허무의 감방에서 해방되어 우리 역시 주님의 종이 되고 참 자유인이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 참으로 자유로운 주님의 종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꿰뚫어 본 주님의 종, 사랑의 관상가가 오늘 복음의 주인공 마리아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신원을 깊이 깨달아 알았고 이심전심 참으로 마리아를 사랑했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에 속했으면서도 장차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길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과는 극명히 대조됩니다. 말그대로 영적으로 눈먼 유물론자 유다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사랑에 눈멀었기에 이런 계산이요 판단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어찌 사랑을 계산할 수 있겠는지요. 유다가 보기에 마리아는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물론 우리는 압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임을!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했다 합니다.
다음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으로 사랑했고 자신이 참으로 사랑했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를 더 이상 제발 괴롭히지 말라 당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 어른 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했고, 주님의 종 예수님의 생명도 풍전등화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마리아의 사랑의 향유 추억을 간직하고 주님의 종 예수님을 닮은 향기로운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늘 현존하는 주님이시오, 가난한 이들을 통해 늘 만나는 주님의 종, 예수님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주님의 빛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 27,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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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순환>
오늘 주님께서는 삼백 데라리온 어치의 향유를 발에 바르는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는 항의와 비판을 받으시는데 제 생각에 이 비판은 날카롭고 정의롭기도 하여 참 뼈아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신 것은, 유다의 비판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도 같은 생각이셨을 겁니다.
그 비싼 향유를 당신 발에 바르는 것보다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더 원하셨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께서 그 행위를 마리아에게 허용하신 것도 당신이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 허용하신 것일 겁니다.
사랑의 허용, 사랑의 수용, 사랑을 귀히 여김.
이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적당한 비유가 아닐 수 있습니다만 예전의 저는 누가 무엇을 제게 선물하실 때 칼 같이 거절했습니다.
저의 가난을 위해서입니다. 견물생심처럼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 작은 구멍이 봇물 터지듯 하게 할 것이기에 겁먹고 미리 그리고 아예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주시는 분들의 사랑을 고려하고 배려할 사랑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때 저의 가난은 많이 타락했지만 사랑의 여유는 많이 생겼습니다.
그 선물을 사랑으로 받아 나의 소유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려 사랑이 순환하게 하는 것 곧 돌고 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허용과 사랑의 수용과 사랑을 귀히 여김이
사랑의 순환이 되게 함이 저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주님도 이런 마음이셨을 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발 씻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을 모범으로 보여주실 겁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선언하실 것이고, 주님의 발을 씻어드린 마리아도 주님 돌아가신 뒤에는 주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의 발을 주님 발 씻어드렸듯 씻어줬을 겁니다.
이럴 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도 대립이 되지 않고 순환이 되는데 이 사랑의 순환을 오늘 주님과 마리아의 사랑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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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12,7)
<예수님의 장례!>
오늘 복음(요한 12,1-11)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이 말씀'은 네 복음에서 모두 전해집니다. '루카 복음'은 여인의 이 행위를 '용서 받은 죄인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고, '마태오와 마르코와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장례'와 연결합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파스카 전 주 토요일 저녁)'에 베타니아로 가셨을 때,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약 320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는,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을 100,000원으로 기준하면, '3천만원'이나 되는 큰 돈입니다.
만약 이와 비슷한 일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도 유다 이스카리옷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성당 안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모든 활동(희생과 봉사와 봉헌 등등)의 본질은,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행위',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너의 충실한 활동을 나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오늘 독서(이사 42,1-7)는 '주님의종'의 첫째 노래입니다. 주님의종이신 예수님의 부르심과 소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장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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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8L22wLMb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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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 7)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향유처럼
우리에게
쏟아져내립니다.
향유는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의
이름처럼 더욱
향기롭습니다.
향기가 지나가듯
예수님께서도
수난의 이 여정을
떠나시려 하십니다.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향기는
마음의
향기입니다.
사람만이
간직해야할
마음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가는
세상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세상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더 무겁고
더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무관심입니다.
생명의 문이
환하게 활짝
열리는 길을
알려주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뜨겁게
깨닫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향기도 사라집니다.
삶이 그냥
삶이 아니듯
사랑이 그냥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답고
소중하고
향기로운 것은
간직해야 할
이유를
일깨워줍니다.
하느님의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야 할
삶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밀고
당기며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이 성주간이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성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깊이 간직하신
사랑이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의 부활로
드러나는
은총의 향기입니다.
향기와 사랑으로
깊어지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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