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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11월17일 금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수도회] 독선과 차별과 불의의 벽을 허물고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10,8-11
† 복음 루카 19,45-48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주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놓은 상인들을 내쫓으십니다. 주님의 집은
주님과 만나는 장소이고, 또한 형제들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많은 시간과 장소들 가운데, 그 사람만을 위해 따로
떼어 놓은, 곧 거룩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거룩한 것을 지켜 내려고
우리는 다른 많은 것들을 잘라 내고 포기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 만남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거룩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지요.
주님과의 만남은 단순히 몸만 그곳에 가 있다고 해서, 또는 남들이 하는
기도문을 우물우물 따라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기는 어렵겠지요. 그
만남은 진실하고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처럼
사랑과 기쁨과 신뢰의 대화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전은 얼마나 거룩하게 지켜지고 있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전의 외적인 면이 아니라, 성전에 다가가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점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인들이 성전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했듯이, 오늘날에도 혹시 누군가 자신의
지위나 명예를 지키려고, 또는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으려고 성전을 악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특권은 그
부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울려 퍼지게 하고,
자유와 정의와 구원을 선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한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위한 삶
2016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나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0,8-11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어제는 대학 수학능력평가가 있었습니다. 수능을 치르느라 고생했을
수험생들, 그리고 그 수험생들 못지않게 많은 기도와 염려와 함께 했을
그 가족들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마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기를 수험생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바랄 것입니다. 높은 점수를 맡기를, 점수가 그리 높지 않아도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붙었으면 하는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의 기쁨이 내게 꼭 필요한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분은 지금의 수능과 달리 수시가 없었던 예전 학력고사 세대입니다.
즉, 학력고사 결과로 대학을 진학하던 시기였지요. 아무튼 학력고사를
보았는데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도저히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재수를 결심하고서는 떨어진다는 마음으로
그냥 지원을 했습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고대학이라고 하는 서울대를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글쎄 미달로 합격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어떠했을까요? 그 분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기뻤지요.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서 결국 1년을 못 채우고 학교를 스스로 그만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꼭 나를 절망으로 만들 수도, 또 기쁨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늘 좋은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는 믿음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 한 순간을 바라보고서 미래까지도 스스로 결정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로 기울어지게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그러하셨을까요? 성전이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장사하는 곳이 되었고, 정직하게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면서 하느님의 뜻과는 먼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기도하는 곳에서 장사를 했고, 그것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생활했을까요?
지금의 만족만을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고 있다면 절대로 죄로 기울어지는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지금 한 순간의 만족과 편함을 생각했기
때문에 남을 속이고 등쳐먹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생활이 옳지 못하다면서 막는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없으면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해서 지금의 악한 상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죄로 기울어질 때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분명히 내
마음 안에 주님을 없애고, 지금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늘 내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시고, 한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눈이 갑작스레 보이게 되었다는 건 기적의 참된 의미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불행 속에서 그 불행을 이겨내고도 남을 만큼의
축복을 발견해내는 것, 그것이 진짜 기적이다(소노 아야코).
지오트의 '성전정화'
진짜, 가짜
위조지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인쇄술이 너무나
발달해서 위폐를 구별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위폐감별사는 어떻게 위폐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첫 번째
원칙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화려해 보이는 것은 무조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폐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민 흔적이 역력하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이 진짜 지폐는 자연스럽습니다.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주님을 따르는 진짜 신앙인들은 어떨까요? 절대로 앞에 서서 신앙을
증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낮은 자세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에 반해서 가짜 신앙인들은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데 집중을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사는 모습에 진짜 신앙인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억지로 꾸민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진짜 신앙인일까요? 가짜
신앙인일까요?
단순한 장식인데 참 예쁘더군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독선과 차별과 불의의 벽을 허물고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 루카 19,45-48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독선과 차별과 불의의 벽을 허물고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신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처럼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성전은 하느님 백성의 삶의
중심지이지요.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마자 성전 자체이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집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 한 이스라엘의 사회구조
전반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로 나뉘어 서로를 분리하고 출입에 제한을 두는 분리와
차별의 장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권위와 신분이
우선시 되어 평등한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에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힘 있는 사람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경제생활과 정치생활을 좌우하고 있었으며 그 모든 부당한 일을 종교의
가면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성전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삶 전반이 탐욕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모순과 불평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19,46).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써 거짓된 종교관과 독선과
배타심과 탐욕이 낳은 뒤틀린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바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 성전인데도 여전히 성전은 건물과 장소에
국한하여 바라보는 시각이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우리
각자가 성전이요 성령의 궁전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세상의
한복판이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성전이지요.
따라서 성전 정화는 건물 청소에 한정되지 않으며 예수님의 일만은
아니겠지요. 성전정화는 개인 차원, 교회 차원, 사회 차원에서 하느님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안에 있는 차별, 배타심, 독선과
탐욕, 이기심과 같은 벽을 허물어버려야겠지요. 인간이 만들어놓은
신분제도, 계층적 분리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성전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안겨 줄 정의로운
정치적 또는 경제적 구조를 산출하는 자유로운 종교를 생활화 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폐쇄적 태도를 버리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성전이 되어야겠지요.
주님의 성전인 우리도 미움, 분노, 교만, 이기심, 세상재물에 대한
애착과 탐욕, 허영, 사치, 무관심과 냉대, 차별 등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일체의 것들을 청산함으로써 스스로 정화해야겠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과거의 관습이나 사고방식, 지나친 이상 추구, 과거 감정에 대한
집착, 독선 등에서 벗어나야겠지요.
오늘도 나 자신과 이 사회가 독선과 차별을 버리고 사랑으로 서로의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성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거짓 권력의 횡포와 부패,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불의와 핍박에 과감히 맞서는 정의의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이 참으로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우리 시대 성전(聖殿) 정화(淨化)
2016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 19,45-48
우리 시대 성전(聖殿) 정화(淨化)
대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간 한 교우가 직접 체험한 사건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교적을 옮기려고 가까운 본당을
방문했습니다. 사무실에 들러 일을 마치고 성당 온 김에 성체조배나
하고 가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이 너무 추워 이빨이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왜 이리 추울까, 주변을 살펴보니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유리창문마저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단 몇 분도 머물러
있지 못하고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성당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가 작업복 차림에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한 채 열심히 성당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엄동설한에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시는 초라한 아저씨의 모습을
뵈니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홀로 성당 바닥을 박박 닦던
그분은 바로 그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우가 약 2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토요일, ‘혹시나 오늘도 그 신부님께서 홀로 청소를 하고 계시면
도와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성당을 찾았는데, 그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
아니 주임 신부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
안에서 지극정성으로 성당 바닥을 청소하는 그 모습이 그리도
성(聖)스러워 보이더랍니다. 마치도 그 신부님이 성전 마당에 줄지어
서 있던 수많은 장사꾼들 사이에서 홀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처럼
보이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마치 시장 한 복판처럼 시끌벅적한 성전 마당을 둘러보시며
통탄하십니다. 조용하고 경건해야 할 성전 마당이 장사꾼들과
환전꾼들, 고리대금업자들로 빼곡했습니다. 제단에 바쳐질 동물들의
울음소리, 물건을 사고 파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크게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질타하시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으십니다. 갖은 물건들이 쭉 놓여있던 진열대를 둘러엎으십니다.
과격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당신 성전을 정화(淨化)시키십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 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달콤 쌉싸름한 말씀 두루마리
2016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 나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
독서: 요한 묵시록 10,8-11
달콤 쌉싸름한 말씀 두루마리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한 영화 제목인데, 남녀 간의 사랑이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있기 때문에 흔히 사랑과 음식이 비교될
때 ‘달콤 쌉싸름하다’라는 표현이 많이 쓰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초콜릿을 위한 물처럼(Como agua para chocolate)’이란 소설인데,
초콜릿을 탈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멕시코 시골의 명문 가문 데 라 가르사 집안에는 전통이 하나 있는데,
막내딸은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돌보며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의 세 딸 중 막내딸인 티타는 페드로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어머니 엘레나는 이 전통을 내세워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고 페드로에게 큰딸 로사우라와 결혼하기를
강요합니다. 오로지 막내 딸 티타 곁에 있고 싶어 로사우라와 결혼한
페드로의 마음을 이내 티타도 알게 되지만, 처제와 형부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둘의 관계 때문에 티타는 자신의 마음을 오직 요리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티타는 부글부글 끓는 슬픔 마음을 요리로 표현하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그 티타의 마음처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둘의 관계를 눈치 챈 어머니가 페드로의 가족을 다른 도시로
보내버립니다. 그때 충격을 받은 티타를 의사인 존 브라운이 사랑으로
보살피고 이내 티타의 마음은 존에게 기웁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페드로 가족이 돌아오자 티타는 다시 페드로와 사랑에
빠집니다. 몇 년 후 언니 로사우라가 세상을 떠나자 마침내 티타와
페드로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듯 했지만 결국 행복도 잠시, 페드로
또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곧이어 티타는 성냥을 하나씩
씹어 삼키기 시작하고, 티타의 몸에서 타오른 불길에 집과 목장이 전부
타버립니다. 이 화재에서 남은 것은 오직 티타의 요리책뿐이었습니다.
티타는 가문의 전통 안에 살아갑니다. 그 전통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 전통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오로지 불살라버리는 고통을 이겨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또한 우리가 당신 나라에 머물게
하시기 위해 우리 모든 욕망을 살라 바치는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땅과 바다를 디디고 있는 한 천사의 손에
놓여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그런데 그 천사의 말대로
그것을 삼키니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참으로 ‘말씀’을 먹으면 입에는 달고 큰 깨우침으로 기쁨이 솟아나지만,
정작 속으로 들어가면 그 말씀이 나를 괴롭혀 삶을 변화시키게 만들고
복음적 삶으로써 그 진리를 증거하게 만들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이 그 말씀을 깨달아 참 구원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맞기야 하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나를 괴롭혀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는다면 실상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령의 힘으로 일곱 봉인을
떼어낸 참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면 나는 내 뜻대로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태워버려 내
안엔 오로지 말씀만이 남게 만듭니다.
성모님께서 말씀을 잉태하셨을 때도 마니피캇을 부르시며 참으로
기뻐하셨지만 결국 당신 영혼이 예리한 칼에 꿰뚫리는 고통을
감수하셔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이제 당신을 지배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뜻에 의해 당신이 십자가에서 성령으로 불살라지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이 남겨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자캐오도 예수님을 받아들여
기쁘기는 하였지만 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남게 되었고,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말씀은 마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처럼 그 맛으로 그것을
먹는 사람을 불살라 아프게 만들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봉사팀을 만났는데 그 팀의 리더가 “저는 저희 팀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에게 같은 것을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이 주시는 그 은총으로 쓰라린 삶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생명의 두루마리를 먹어야 합니다. 삶의 쓰라림은 내 삶을 차지할
말씀이 주실 약속된 행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콤
쌉싸름한 말씀 두루마리를 먹은 요한은 모든 인간이 어떻게 말씀으로
구원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2016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 19,45-48
언제부터인가 저의 이름은 ‘신부님’이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저의 이름인 ‘조재형’은 거의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자분들은 제가 ‘사제’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가지고
저를 ‘사제’라고 호칭하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하게 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처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섬기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 아픈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어제는 수학능력 시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며, 수학능력 시험은 무엇을 평가하는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12년을 배웁니다. 대학교에서도 배우기 때문에
16년을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배우면서
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오직
지식을 배우는 것에 치중해 있습니다. 그것도 수학, 영어, 국어와 같은
주요과목의 비중이 절대적입니다. 역사, 사회, 문화, 음악, 미술, 윤리,
철학과 같은 과목은 배우는 시간도 짧고, 학생들도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식만 배워서는 학원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봉사와 희생, 인내와 절제와 같은 가치를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하고,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배운다는 것은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난 사람은 똑똑한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
운동을 잘 하는 사람, 음악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난 사람도
중요합니다. 든 사람은 지식을 많이 가진 전문가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들이 이끌어 가고 있기에 든 사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된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그 말씀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이번에 시험을 본 학생들이 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든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번에 시험을 본 학생들 중에서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성전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가진 능력을
더욱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덧
우리의 마음에는 ‘욕심, 시기, 질투, 미움’과 같은 것들이 들어오곤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정화시켜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강도의 소굴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 19,45-48
강도의 소굴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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