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6년 다해 11월19일 토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수도회]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묵시 11,4-12
† 복음 루카 20,27-40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체험하고 터득해 갑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만, 그 체험을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 인간들은
동물들과 달라서,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이라도 독서나 학습 등의 간접
체험을 통해서 익혀 나가고, 이 간접 체험은 우리 삶의 질적 차원을
완전히 상승시켜 놓았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독서와 학습을 통해서는 세상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신앙을
통해서는 부활과 하느님의 나라라는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 나라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간접 체험을
통한 삶의 질적 상승과는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원의 새 삶의
지평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질문은 역시 이 현세의 삶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는 삶과 죽음, 인연과
악연 등의 고통이 없는 온전한 기쁨의 세계입니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그리 큰 감동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2016년 다해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4-12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0 이란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국어사전 속에는 값이 없는 수를
‘0’이라고 정의하더군요. 그렇다면 값이 없는 수라고 해서 오늘부터
없애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0이라는 숫자가 처음 사용된 것은 6세기 상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0’이라는 숫자가 없었을 때에는 그냥 빈
공간으로 썼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예를 들어 303원의
경우, 3과 3 사이에 공간을 두고 표현을 했는데, 그러다보니 어떻게
보면 33원인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303원처럼 구분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 또 받는 사람 역시 정확하게 숫자를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숫자 ‘0’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값이 없는 수이지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1억이라는 돈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1억을 숫자로 표현하면 맨 앞에 1이라는
숫자가 붙고, 연이어서 0이라는 숫자가 8개 붙습니다. 그런데 0은 값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냥 다 없애버리십시오. 그렇게 되면 1억 원이 1원이
둔갑하고 맙니다.
이렇게 값이 없는 수이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숫자 ‘0’입니다. 따라서
이 ‘0’을 없어진다면 어떨까요? 세상은 상상도 못할 혼란에 빠져서 큰
일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문득 이 ‘0’이라는 숫자가 주님처럼
보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또 내 귀에 대고 뭐라고 말씀도
해주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값이 없는 수이지만 다른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라는 존재에 큰
의미를 계속해서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과 사두가이 사람들과의 논쟁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세오경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편이나 다니엘서 등에 부활 신앙이 나옵니다.
하지만 모세오경이 율법 그 자체이기 때문에, 모세오경이 없으니 부활
역시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의 예를 들지요.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사두아기의
주장대로 이미 죽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하느님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다고 생각했으니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0’이라는 숫자로 다른 숫자들이
정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처럼, 주님이 계시기에 죽음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값이 없어도 '0'이란 숫자는 너무 중요합니다.
홈쇼핑에서 배우는 인생철학(김은주, ‘1cm+’ 중에서)
비 오는 날에 짚신, 햇볕 쨍쨍한 날에 우산까지 팔아치울 것 같은
TV 홈쇼핑에서도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품질은 명품 가방 못지않습니다! 진짜 송아지 가죽 같은 부드러운
이 놀라운 질감!” -> 어떤 것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한 팩 더해서 최대 혜택, 오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전화 주세요!” ->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교훈.
“반품은 일주일 이내에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 누구나 잘못된
선택에 만회할 기회 또한 있다는 증거.
어디에서는 배울 것이 없을까요? 자기 자신이 배우려는 마음만
갖는다면 분명히 배울 것이 너무나도 가득한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배운다는 마음보다는 가르치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물론 가르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보나 지식을
가르치는 거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무조건 따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낮춰서 배워야 합니다. 이 배움의
끝이 있을까요? 계속 낮추고 낮춰서 돌 하나, 풀 한 포기에서라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지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홈쇼핑이 정말로 많네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토, 루카 20,27-40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 사이에 있었던 부활에 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가이들은 유다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귀족계급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순수 종교와
동떨어지게 살았으며 외적 신심에는 충실했지만 조상들의 전통은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율법을 근거로
(신명 25,5-10), 어떤 사람이 아내를 남기고 죽어 그의 형제들이
차례로 형수를 맞아 대를 이으려다가 모두 죽으면, 부활 때에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받아들이는 율법을 근거로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십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으며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20,35-38)
예수님께서는 부활이란 육신이 되살아나고 영혼이 어떤 상태로 변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생명과 영원성을 살게 되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부활은 육체적인 차원,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 묶이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부활과 사후세계, 영원한 생명을 부인하거나 그런 것에
관심을 끄고 살아가는 현실주의자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고 복음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방향은 필연코 물질과 돈을 중시하고 현세의
쾌락과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데 몰두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몰두하고
현세에 대한 애착이 커 남의 처지에도 무관심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사두가이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현실주의는 현실의 조건이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며 그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출발점이나 목표가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현상계인 셈입니다. 가시적이고
감각적이며 현상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니 영원성과는 동떨어진
피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적인 것에서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니 현세 물질이나 돈,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안달복달하지 않게 되지요. 부활의 삶은 어떤 처지에서도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가난하지만 영원히 풍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늘 하느님 앞에 있음을 자각하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포기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일상의 죽음을 살아갈 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성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은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의 ‘살아계신 하느님’이 되시며, 우리
또한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겠지요.
오늘도 ‘사랑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영원히 사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이런
믿음 속에 현세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루카 20,34-35)
여러분은 결혼하셨나요? 아님, 미혼이신가요?
결혼은 했지만 사별이든 이혼이든 홀로이신가요?
결혼하셨다면 다음 세상이 있다면 또 결혼하시겠어요?
또 지금의 배우자와 살고싶나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하냐구요?
저는 결혼을 안 해 봤지만
다시 태어나도 꼭 결혼을 하고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아마 그런 인연이 맺어질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부질없는 이야기인 줄 잘 알지만
죽어서 다른 세상이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더 멋진 삶을 살고싶다는
작은 꿈들이 있기에 해 보는 소리일 겁니다.
내가 살아 온 삶이 멋지다 하여도 누구나 아쉬움과 미련은 있기에
저 세상이 있다면 더 멋지게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고싶다는 내면의 갈증이
그런 환상을 그리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꿈을 깨야 합니다.
환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미완의 현실에서 도망치며
죽음 이후의 새 세상만 꿈꾸는 것이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미래의 완성된 삶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는
현세에서 도망치면서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부활신앙은 현세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도록 만들어 줄 때만
올바른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의 처지와 신분 안에서
더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 부활신앙을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죽은 이둘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사랑합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인연을 맺어주신 이들을
더 치열하게 사랑하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내세의 부활과 천국의 삶을
벌써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기쁨을 누리시길 두손 모읍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 38)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 38)
살아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는 생명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가야 할 곳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깨어나게 하십니다.
깨어난 생명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이신 하느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생명 하나가 병든 생명을 치유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존재하시기에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는 하느님안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돌아가는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위령성월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2016년 다해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 20,27-40
제가 어려워하는 과목 중에는 ‘수학’이 있었습니다. 중학교까지는
재미있었습니다. 방정식, 미분, 적분, 함수를 시작하면서 어렵기도
했고, 흥미도 잃었습니다. 제게는 사칙연산과 도형의 면적을 구하는
것까지가 적당했던 것 같습니다. 독한 마음을 먹고, 열심히 했다면
아름다운 수학의 세계를 좀 더 여행했을지 모릅니다.
철학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자연철학, 고대철학, 중세철학, 합리론,
경험론, 존재론, 논리학 등을 배우면서 지식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지만
형이상학은 쉽지 않았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하이데거의 존재,
해석학 등을 배우면서 철학의 세계가 깊고, 넓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솔직히 어려웠습니다.
운전은 하지만 자동차의 구조와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모릅니다.
많은 부품들이 조립되고, 전자 장치들이 결합되면서 자동차는 완성될
것입니다. 돌아보면 제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 능력과 제 눈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의 것들만 해도 제가 모르는 분야가
너무 많습니다. 하물며 죽음 이후의 세상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마치 땅 위를 기어
다니던 애벌레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같은 것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생명의 연속성에서는 같은 면이 있지만, 그 기능과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상식과 기준으로 부활 이후의 삶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삶이 또한 부활 이후의 삶에도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부활은 우리들의 삶이 천사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천사와 같은 삶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산 이들의 하느님|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 20,27-40
산 이들의 하느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
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