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54
5월11일[부할 제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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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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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OAJUfCJzhg
[서울대교구 이승훈 마르티노(반포1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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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정말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실건가요?>
무엇인가를 청하기 좋아하고 받기를 좋아하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희소식 한 가지를 건네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제 개인적으로 ‘무엇이든지?’라는 표현에 의문 부호를 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고 주실 것인가요? 진짜? 확실한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손이 닳도록 빌면서 청하고 또 청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던 지난 세월은 어떡합니까? 누가 책임져 줄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보상해주실 건가요?
결국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건인 듯합니다. 물론 세상에서의 성공과 승승장구, 건강, 합격, 승진, 화목, 평화...이런 것들, 당연히 청해야 마땅합니다. 우선 내가 건강하고, 내 가족이 평화로워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느님도 섬기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절히 청하는 그런 요소들이 지닌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잠시 손에 넣는다 할지라도 손에 움켜쥔 한줌 물과 같이 순식간에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멸성, 영원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 하신 것은 그런 작은 것,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영원한 대상, 보다 충만한 대상,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대상을 추구해야 마땅합니다.
그 대상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청원기도 때 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작은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청해야겠습니다. 세월 흐르면 다 지나갈 별것 아닌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대상인 성령을 청해야겠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도록, 내 안에 머무시도록,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도록 간절히 청하는 나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흘러넘치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오실 때면 좋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안갯속 같았던 우리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만사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꽃이 피는 시절에도 기뻐하지만, 꽃이 지는 시절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감사하지만,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지만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를 큰마음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실 때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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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KRhWNhAL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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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을 배제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임금이 한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상태에서 임금에게서 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는 이에게 복을 줄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외시키고 아버지께 은총을 받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돈벌레라고 불리는 그리마가 또 한 마리 집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징그러워서 휴지로 집어 변기통에 내렸는데, 이것이 해충을 잡아먹는 좋은 벌레라고 하기에 그다음부터는 고이 잡아 창문 밖으로 놓아주었습니다. 돈벌레란 이름도 한몫을 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엔 책 표지 위에 그놈이 올라오게 만들어서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몸집이 큰 놈이라 귀찮아서 손으로 집어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벌레는 저에게 잡힌 자신의 다리들을 자르고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손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다리 몇 개 잃은 벌레를 책표지 위에 얹어서 내보내 주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는 마치 사람과 돈벌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너무 이해할 수 없어서 책 표지 위에 올라오는 조금의 부자유스러움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조금이나마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이용한 책 표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아버지께 청을 드려 무엇을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무엇이든 아버지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이 대신 청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우리가 직접 청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름’은 ‘본성’을 말합니다. 본성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면서 아버지께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상태에서 아버지께 청하면 예수님은 소외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보화를 얻게 됩니다. 그 보화가 성령이십니다.
본당 신부를 잠깐 하며 보았더니 본당에서 수녀님의 위치가 매우 애매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자의 생각이 옳다고 하여도 그것을 들어주면 수녀님 처지가 난처해지는 청이라면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신부님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울상이 되어 돌아갑니다.
이런 일들은 본당 신자들과 주교님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본당에 발령받아 온 사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임기도 안 끝났는데 바꿔 달라고 투서를 하면 주교님으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조금 나은 신부님이 새로 부임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주교님과 그 이전 신부님과의 사이를 안 좋게 만든 본당으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내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자녀의 청을 모두 들어주겠습니까?
이는 마치 죄를 용서해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였는데 교회는 소외시키고 직접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받겠다고 성당에 나와 고해성사를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파견한 이를 먼저 소외시키지 않는 한에서 주님께 무엇을 청해야 합니다. 그 청하는 것이 중간에 있는 이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것이고 그러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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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아드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97세의 어머니는 노환이 심해져서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타주에 있던 아들은 휴가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1달 전에 아들은 어머니의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직무입니다. 보름 전에 아들은 어머니의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점차 나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곡기를 끊으신 어머니는 정말 많이 야위었습니다. 아들은 한 번 더 전화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호흡이 가빠진다고 하였습니다. 미사시간이 아직 2시간이 남았기에 기꺼이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비록 말은 못하시고, 알아듣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효성이 지극했고, 어머니는 1달 동안 3번의 병자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는 둘째아들 부부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 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도 말없이 묵묵하게 봉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다가 성당으로 온 형제님도 있습니다. 오랜 동안 냉담하다가 다시 성당으로 온 형제님도 있습니다. 매주 점심 준비를 해 주는 구역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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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23-28: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26절)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영적인 사람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 영광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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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과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곧 ‘기도’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본문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강조 용법으로 시작되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청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마치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바라는 것이 뚝딱 이루어진다는 현혹처럼 들리기도 하고, 무모한 약속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뒷부분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전제하시며, 당신께서 대변인처럼 우리의 처지를 하느님께 청하여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곧 기도는 청탁이나 거래, 주문을 외우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소통하는 자리임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그렇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그 만남이 주는 평화와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들어주십니다. 주문이나 주술로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에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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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3ㄴ-28)
1)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기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 아버지와 신앙인의 관계, 당신과 신앙인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당신의 ‘신원’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앞의 10장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이 있고(요한 10,30), 또 14장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4,13-14) <요한복음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라는 신앙고백으로 시작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된 책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2)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앞의 14장 13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는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과 ‘예수님께 청하는 것’은 ‘같은 일’이고, 청하는 그것을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도 ‘같은 일’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시고, 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에(요한 14,11),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는 곧 ‘예수님께’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께’라는 뜻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아버지께 기도할 때도 있고 예수님께 기도할 때도 있고 성령께 기도할 때도 있지만 모두 ‘같은 기도’입니다. '이름’이라는 말에서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이 연상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여기서 ‘이름’이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고,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다.”라는 말은, 예수님만이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3)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그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도의 대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고, 하느님께만 기도를 바쳤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또 ‘메시아’로 믿긴 했지만, 아직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능동적으로’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느님께 청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하든지, 아니면 예수님께 청하든지 간에, 원하는 것을 받으려면 청해야 하고, 주시는 것을 잘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마태 6,8),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그것을 주시지만, 그것을 능동적으로 청해서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청하지 않고(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주시는 것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은 원래 능동적으로, 또 스스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받을 것이다.”는, 청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기쁨’은 ‘구원의 기쁨’을 뜻합니다. ‘청하는 일’의 최종 목표는 ‘구원’이고, ‘받는 일’의 마지막 완성도 ‘구원’입니다. 그래서 ‘받다.’와 ‘기쁨이 충만하다.’는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4)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간 위치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도를 당신이 직접 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뒤의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될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요한 17,9.20)
겉으로만 보면 앞의 말씀과 모순되는 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모순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 7,25)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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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조영만 요한 세례자 신부님]
<완전한 일치>
사실 사제의 입장에서 강론을 한다는 일이 당연하면서도 참 어려운 일인데, 그중에서도 부활 시기가 되면 꼭 만나야 하는 요한복음 강론은 여타 공관 복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론이나 묵상이 참 어렵습니다.
요한 복음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놓고 벌이는 거대한 ‘묵상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과 그 공동체가 그 시대의 각박한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신앙고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의 음성으로 당신이 친히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주심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은 이미 이 지상에 계실 때부터 완전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처신하십니다.
요한복음서 속에서의 예수님은 번뇌하시거나 피땀을 흘리시거나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메시아의 수순대로 밟아 가십니다. 당신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주도권을 마치 당신 스스로 행사하시는 하느님처럼 그려내십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저 뛰어난 인간이라거나, 아니면 사람으로 났다가 훌륭한 업적을 통해 하느님(神)이 된 어떤 성현 정도가 아니라, 그래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지창조 이전부터 말씀으로 함께 하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셨노라고, 그 하느님께서 몸소 임재하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니, 이제 우리에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 한 분 뿐이시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분은 이제 나의 모든 주도권을 나의 인생 안에서 몸소 행사하시는 분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자리 내어드리는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내 인생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기도도 그렇고 성체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달라고 청하는 것이 기도라 하지만, 실상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그리스도의 그 농밀한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살과 피를 미사 통해 먹고 마심은 바로 그 친교에 우리도 함께 동참하는 본질적인 일입니다.
세상이 미혹해 모르는 것도 많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 속에 머무르는 사람은 압니다. 모든 것이 명약관화한 빛 속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턱없는 두려움과 불안함, 불만과 욕심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다른 것,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꾸만 이 세상과 머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보다는 세상의 자리를 더 넓혀가려고 안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된다고도 많이들 말씀하시고 믿음이 깊어지지 않는다고도 말씀들 많이 하시지만, 정작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십시오. 주십시오...’는 필요할 때마다 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구한 모든 것들은 사실 나의 관심사였지, 하느님의 관심사는 구하지 않았던게지요.
하느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와 나누었던 그 일치 속에 자녀인 우리도 함께 머물기 만을 바라십니다.
우리도 그 일치를 살고, 우리도 그 사랑을 살며, 우리도 그 친교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만을 바라십니다.
부디 하느님의 관심사가 내 일생을 통한 관심사가 되길 바랄 따름입니다. 내 좋자고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 좋으시라고 살아가는 그 자녀들이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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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청하고 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상대를 나의 삶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눌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기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청하는 것도 그분의 존재에 나의 존재를 살며시 포개어 놓고 서로를 생각하고 나누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먼저 예수님의 삶을 좇고, 그 삶이 지향하는 가치를 되새기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 말씀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가 예수님을 통하여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는 이 세상에 구원의 소식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뜻이 곧 우리 신앙인의 뜻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 안에 함께할 내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시듯, 우리의 삶이 오롯이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우리만의 청이 아니라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실천하는 것으로 우리의 청을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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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청하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에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에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약속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보면, 첫째,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이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이요, 예수님의 의화에 힘입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임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아들로서 드리는 ‘자녀의 기도’임을 밝혀줍니다.
셋째,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이 구하면 받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는 말씀입니다.
넷째,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로 우리에게 기쁨이 선사된다는 기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곧 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하게 해 줍니다. 특히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해본 적이 없다.”(요한 16,24)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를 비춰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도 온갖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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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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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16,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16,24)라는 이 말씀은 당신이 오시기 전까지, 당신께서 이 땅을 사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기에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아무것도 청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16.27)에 이젠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16,26) 하고 말씀하십니다.
흔히 사람은 자기 생긴 대로 산다, 는 말처럼 우리 기도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의 태도처럼 예수님과 관계, 기도의 관계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기도를 자주 드리지 못합니다. 물론 저의 성향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가야 할 길을, 살아야 할 삶을 주님께서 미리 아시고 안배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청원의 기도보다는 단지 주님 사랑과 자비하신 손에 저를 내어 맡기는 감사의 기도를, 특히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도록 내어 맡김 기도와 의탁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16,24)라는 말씀은 이미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지만, 사랑이신 당신께 간절히 청하는 그 자체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며 사랑의 의탁입니다. 만일 지금 청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16,28) 하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그 길은, 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기에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청할 뿐입니다. 제 삶이 마침 하는 그날까지, 그 길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지금처럼 당신의 아들로, 당신의 사제로 제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오늘 복음의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16,28) 하고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되돌아가신 그 길은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이 길에서 진리인 예수님과 함께 사노라면 우리는 어제의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참된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때 모든 묶임에서 벗어나 삶의 온전한 자유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체험하게 되면, 체험할수록 우리의 삶은 생명으로 넘치고 넘쳐 마침내 생명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그리고 성령의 사랑 안에서,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온 존재로 청해야 할 기도입니다. 좋은 몫입니다.
이런 기도가 선행될 때 우리 모두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처럼, 아폴로처럼 예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길, 하느님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걷도록 이끌어 들일 수도 있습니다.(사18,26 참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의 인도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참된 ‘하느님의 길’로 아폴로를 이끌어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생각과 출신은 다르지만, 예수님을 중심에 둔 삶이 그들 모두를 끈끈하게 연결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폴로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로부터 하느님의 길을 정확히 배운 뒤 성령을 힘입어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18,28)을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선포함으로써 유다인을 논박할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것”(18,27)을 본보기 삼아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 오늘 당신은 저희에게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하고 가르치신 말씀에 의지하여 간절히 청합니다. 이 땅에 참된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세상이 되도록 평화와 기쁨의 성령을 내려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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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만난 할머니를 말씀하시면서, 이 할머니는 신학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훌륭하고 경건하고 소박한 할머니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할머니께 “성모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할머니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당신의 생각을 이렇게 전해주셨습니다.
“저를 어루만져 주실까요? 아니면 제 이름을 부르실까요? 아닙니다. 성모님은 (할머니는 자기 집게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이렇게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교황님은 할머니께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성모님은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대답에 교황님께서는 감탄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 가리키신 것이 성모님의 삶이었고, 그래서 십자가의 가장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언제나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보다 세상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을 가리키며 세상의 논리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즉 세상 안에서 나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더 큰 주님의 뜻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자주 흔들리면서 세상의 뜻을 따르려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그 확신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사람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할머니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즉,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유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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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길 바랍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알아듣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며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이로 거듭나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용기 있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시련과 역경, 슬퍼하거나 마음 아파할 일이 생기더라도 내일 맞이할 더 큰 기쁨을 생각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서는 안 됩니다. 기쁨의 원천은 예수님이시고 동시에 헌신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이 처음에는 근심이었지만. 나중에는 기쁨이 되었듯이 우리가 안고 가는 십자가도 수고와 인내의 근원이지만 언젠가는 보람과 기쁨이 될 것.”(송봉모)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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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외길이려네>
요한 16,23ㄴ-28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나 외길이려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나
외길이려네
온갖
어둠의 갈레길
삼키려 해도
빛에게서 나와
빛과 함께 빛내다
빛에게 돌아가는
빛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슬픔의 갈레길
잡으려 해도
기쁨에게서 나와
기쁨과 함께 기쁘게 하다
기쁨에게 돌아가는
기쁨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탐욕의 갈레길
손 내밀어도
사랑에게서 나와
사랑과 함께 사랑하다
사랑에게 돌아가는
사랑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죽임의 갈레길
벗하려 해도
살림에게서 나와
살림과 함께 살리다
살림에게 돌아가는
살림의 외길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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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시편 8,10)
5월은 신록의 계절이자 꽃의 계절입니다. 끊임없이 피고지는 야생화 들꽃들을 보니 흡사 땅이 살아있는 보물밭처럼 느껴집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보물같은 곱고 신비로운 꽃들을 끊임없이 피어내기 때문입니다. 요즘 새롭게 눈에 띄기 시작한 붓꽃도 참 맘이 끌려 사진도 찍어 예전 써놨던 시와 함께 여러 지인들과 나눴습니다.
“사람이든 꽃이든
화려하여 깊지 못하면
얼마 못가 싫증난다
그늘진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보랏빛 붓꽃
은은하고 그윽하고 신비로워
늘 봐도 좋고 새롭고 정겹다”-1998.5.5.
26년전 시인데 지금도 5월 때되면 한결같이 피어나는 붓꽃들에 감동합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은은하고 그윽하고 신비로워 늘 봐도 좋고 새롭고 정겨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싯귀처럼 그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관계의 주님이요 도반이요 부부관계라면 얼마나 멋지고 바람직하겠는지요!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5월 성모성월은 기도의 달이자 참 행사가 많은 달입니다. 참 많이 기도해야 하는 5월입니다. 기도도 젊고 힘있을 때 많이 해야 하듯 이런 신록의 아름다운 계절에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더 잘 어울립니다. 오늘은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한 법정기념일입니다. 정부는 2018년, 1984년 부패정치와 외세에 맞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과정중 황토현전승일인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정했고 올해로 130주년이 됩니다. 한국사람이라면 특히 기억해야할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요,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서방 수도생활 개혁의 중심지 역할을 한 클뤼니 수도원의 초대 성인 아빠스들을 기립니다. 성 오도(927-942), 성 마욜로(948-994), 성 오딜로(994-1049), 성 후고(1049-1109), 가경자 베드로(1122-1156) 아빠스들은 무려 200여년동안 탁월한 능력과 지혜로 당시 쇠퇴했던 수도생활을 성공적으로 개혁했던 분들입니다.
괄목할 사항은 수도회 연합을 이루었고 영주들과 주교들로부터 자유를 획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성했던 클뤼니 수도원이 멸망한 결정적 이유는 기도와 일, 성독의 균형이 무너져 노동은 사라지고 전례기도가 하루를 가득채웠기 때문이라 합니다. 수도자는 물론 신자들의 일상에서 기도와 일, 성독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좋은 교훈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일하라”에서 우선 순위는 중요합니다. 기도가 우선이라는 것이며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가 적용되는 기도생활입니다. 하루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기도입니다. 2014년 안식년중 8월말부터 10월초까지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지 올해 10년째 됩니다. 그동안 참 많이 나눈 순례여정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희망의 여정중 희망의 순례자로 살것을 강조했고, 순례여정중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의 네 요소중 특히 결론 부분인 기도에 대해 그 일부를 나누고 싶습니다.
“궁극의 희망을 활성화시키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식이자 약입니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없으면 희망도 시들어 버립니다. 희망의 순례 여정후 주님께 갔을 때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입니다. 기도가 얼굴꼴을 만들어 줍니다. 기도할 때 주님을 닮습니다. 순례 여정이 끝난후 주님은 당신의 얼굴을 닮았는지 우리 마음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기도는 테크닉(기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사랑과 생명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매순간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숨쉬듯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기도요, 역시 기도에도 우리는 영원히 초보자 일 수뿐이 없습니다.”
광야인생 여정중 저는 늘 세가지 인간 가능성을 말합니다. 성인, 괴물, 폐인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성인이요, 기도에 소홀하여 세상 것들에 유혹, 중독될 때 괴물이나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 훈련, 습관의 영적도식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선택, 기도의 훈련, 기도의 습관입니다. 이 또한 주님 사랑의 자발적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강조하는 바 기도입니다. 역시 한숨에 읽혀지는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날로 사랑하여 예수님을 닮아갈 때,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우리의 기도는 그대로 하느님의 뜻에 따른 기도가 되고 100% 응답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충만한 기쁨이 보너스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기쁨 하면 떠오르는 기쁨과 감사, 기도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사도의 옥중 서간 필립비서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립4,4-6)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바오로 사도의 3차 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선교 여정에 오른 바오로는 가는 곳마다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니 기쁨에서 나오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혜성같이 등장한 아폴로, 어찌보면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기쁨의 선물처럼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사실 기쁨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더불어 충만한 기쁨의 선물입니다. 이런 충만한 기쁨이 없다면 기도에 뭔가 문제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산 정약용 요한 어른의 오늘 말씀입니다.
“아이의 눈에는
부모의 품격이 깃든다.
자식은 곧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워 아이의 눈에 부모의 품격이 깃들 듯, 주님을 보고 배울 때, 우리의 눈에는 주님의 품격이 깃들 것이며, 우리에게서는 꽃향기처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참 귀하고 고맙습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영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위에 빛나는 영원이요 순간이 바로 영원이요 구원임을 기도할 때 깨닫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자존감을, 자부심을 지니십시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나오셨음을 믿기에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된 운명도 예수님을 통해 다시 확인합니다. 허무로 시작하여 허무로 끝나는 덧없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우리들 역시 예수님처럼 아버지에게서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죽음이 아니니, 우리는 갈 곳이 있다는 것이며 이래서 우리의 삶을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천상병 교우처럼 귀천을 노래할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이 귀가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휴가 끝내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귀가할 수 있도록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도록 합시다. 귀가 여정에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기도 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 9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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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버지께 청하라>
오늘 복음은 주님 승천을 코앞에 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 놔두고 내일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이제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게 될 것이니 뭐 청할 것이 있으면 이제 아버지께 직접 청하되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씀이고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당신이 제자들을 위해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시는 점입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당신이 제자들 대신 청해주지 않으실 거면서
왜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대신 청해달라는 뜻, 다시 말해서 전구해달라는 뜻인데 주님께는 이런 뜻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잘 이해해야 할 것이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뜻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일종의 격려입니다. 감히 아버지께 청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용기를 내어 직접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입니다.
첫째로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니 그 사랑을 믿고 용기 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두렵고 그래서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으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분인데 그 하느님이 실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당신이 있으니 용기를 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형제요 친구가 되었으니 이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당신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아버지께 직접 청하라고 오늘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히 부를 수 없는 하느님을 용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격려하면서 그래도 용기가 생기지 않으면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께 청하되 당신을 건너뛰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건너뛰고 아버지께 직접 청하는 것이 아니라, 또 성인들이나 성도들을 제쳐놓고 혼자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이나 성도들과 함께 그리고 당신을 통하여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전구轉求의 뜻도 우리의 기도를 대신 전해달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우리도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성인들도 우리와 함께 기도해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청하면서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가 주님을 건너뛰지 말아야 함은 물론 성인들과 성도들과 같이 기도하고 청해야 함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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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무엇을 청해야 할까?>
오늘 복음(요한16,23ㄴ-28)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매일 아니 매순간 많은 것들을 청하는 우리들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청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 무엇을 청해야 한다는 말씀인가? 누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준다는 말인가?
'성령'입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청합시다!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가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총의 시작이요 출발인 성령을 청합시다! 이 성령이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창고를 활짝 열어놓읍시다! 그래서 많은 은총을 받고,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부활이 됩시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예수님의 고향은 하느님 아버지의 품입니다. 내일은 주님승천대축일인데, 예수님께서 고향인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심을 기억하며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를 떠나가시는 예수님께서 사랑의 마음으로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도 예수님의 고향인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히 기뻐할 수 있도록, 성령을 청하고, 이 성령의 자리인 내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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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8MX_485X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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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 16, 27)
우리의 골수에
새기고
사무쳐야 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가르치고
깨우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올바른
사랑의 순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를
비추는 건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밝은
이정표가
됩니다.
사랑으로
재창조하시는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도
새날을
맞이합니다.
사랑은
기도로 드러나고
진정한 사랑은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한없는
삶의 진리
사랑입니다.
올바른 사랑의
실천을 배웁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생명과
우리
존재에 대한
참모습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에서
만납니다.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 사랑을
믿고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기쁨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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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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