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땅 파미르 고원...
서기 747년에 이 파미르를 넘고 힌두쿠시 산맥을 돌파하여 파키스탄 북부를 점령한 당나라 장수가 있었다. 그 이름은 고선지(高仙之). 신당서에는 고선지가 고구려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 박사는 당시의 원정을 두고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원정보다 더 위대한 업적이었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타슈켄트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내지로 들어가면 찬란한 고대 문화의 유적이 펼쳐지는데 그것은 천여개의 석굴로 이루어져 있는 돈황 석굴이다. 돈황 석굴에는 두개의 깃털로 된 조우관을 쓴 인물이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 인물을 고구려의 사신으로 보고있다. 고구려인이 실크로드를 따라 이 돈황을 거쳐가며 동서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고선지는 751년부터 755년까지 서안에 살면서 선양방과 영안방이라는 두채의 저택을 하사받았다. 당시에 당나라에서 이민족으로 이런 대우를 받은 인물은 흔치않았다.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와 네차례 전쟁을 벌여 세번을 이기고 한번을 졌다. 그러나 그 한번의 패배로 인해 고구려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당은 20만명의 고구려인을 강제이주시키는데 영주땅에 많은 고구려인이 압송되었다. 이때 고선지의 아버지인 고사계는 안서군의 장교로 기용된다.
투르판에서 안서도호부의 치소가 있었으나 후에 쿠차로 옮겨진다. 이에 따라 고선지 일가도 쿠차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안서도호부는 현재의 신강위구르 자치구를 관할했던 기관이었다. 고선지는 쿠차에서 성장하여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에 입대한다.
신당서의 고선지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高仙之基高句麗人容貌佳秀弓奇馬二十世猷擊將軍(고선지는 고구려인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궁술과 기마술에 능해 20여세에 유격장군에 올랐다.)
고선지는 안서절도사 부몽영찰의 신임으로 언기진수사가 되어 투르판에 부임한다. 740년에는 안서군이 톈산산맥 서쪽의 달해부 정벌에 나설때,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안서도호부의 부절도사로 승진하게 된다.
당시 토번이 북으로 돌궐과 관계를 맺고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토번이 북부 파키스탄에 있던 소발률국과 동맹을 맺어 당의 서역 무역로를 차단하려 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안서도호부에 서역 정벌령을 내린다. 이에 고선지는 행영절도사로 임명되어 이사업, 봉상청, 단수실, 장무가, 석원경 등 장수들과 더불어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소발률국을 향해 행군한다.
고선지의 군대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오식닉국에서 전군을 세부대로 편성, 토번 군사들의 집결지인 연운보로 진격했다. 와칸계곡에서 토번군 1만여명과 마주친 원정군은 접전 끝에 적병 8천여명을 참살하고 1천여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린다. 사르하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고선지는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소발률국으로 진격하자는 다소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이에 따라 눈사태를 만나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원정군은 결국 나는 새도 넘지 못한다는 다르코트령을 돌파하여 길기트에 있는 소발률국을 점령한 것이다. 이때 고선지의 군대는 소발률국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온 토번군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그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소발률국으로 향하는 모든 등교를 끊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소발률국이 추후에 토번과 교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막히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서역 이슬람 국가 72개국이 당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고구려는 사라졌지만 서역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고선지는 전승보고서를 작성하여 바로 조정으로 전달한다. 자신을 무시하고 임의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한 고선지에 대해 부몽영찰은 심한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두사람의 불화는 부몽영찰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쉽게 끝난다. 그리고 고선지가 새 안서절도사에 임명된다.
750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 토카라 등이 사라센의 영향력이 커지자 당의 지배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다시 출정명령을 하달받은 고선지는 군사 10만명을 거느리고 두번째 서역정벌에 나선다. 그리 힘들이지 않은 전투 끝에 간단하게 석국을 점령한 고선지는 이어 돌기시, 토카라 등도 정복하여 서역 소국들과 사라센 간의 교섭을 막았다.
세계는 8세기 중엽, 당과 사라센 제국이 축을 이루고 있었다. 파미르 고원으로 세력을 뻗치며 도전하는 사라센과 중앙아시아의 교역권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당나라는 어차피 세계패권을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 조정에서 석국왕 나구차비시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자 나구차비시의 아들은 사라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사라센 제국은 아프라시압 지배권 확보를 위해 인근 소국들과 연합군을 형성한다. 이때, 연합군을 총지휘한 장수는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의 심복인 지아드 이븐 살리였다.
고선지는 7만 군사를 거느리고 사마르칸트를 정복한 뒤, 톈산산맥을 등정하여 타슈켄트 서북부에 있는 탈라스에서 이븐 살리의 30만 대군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였다. 첫번째 교전에서 고선지는 구릉 속에 함정을 파놓고 아랍 연합군의 전차부대를 유인하여 전멸시키는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두번째 교전에서 느닷없이 야습을 감행한 카롤루크 족의 습격으로 군사 4만여명을 잃고 퇴각하게 된다. 패배를 몰랐던 고선지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다.
중국의 역사학자 후이타오 교수는 "매우 중요한 전쟁이다. 학자들은 이 전투가 이슬람 문화를 동쪽으로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탈라스 전투 이후 이슬람 세력이 동쪽으로 진출해 지금처럼 발전할수 있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당나라는 탈라스 전투 패배 이후,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해졌다. 그 대신 아랍권 군대가 주둔하면서 실크로드는 상당부분 사라센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탈라스 전투의 영향은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나 세계 문명의 역사에 변화를 몰고 오게 된다. 바로 중국의 전통 종이 제조 기술이 서방으로 전파된 것이다. 탈라스전투에서 아랍 연합군의 포로가 된 당나라 군사들 가운데 많은 제지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이 사마르칸트로 끌려와 종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탈라스 전투로 알려지기 시작한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거쳐 다마스커스로 전파된다. 그리고 12세기 초에는 유럽에까지 전해져 서양의 학문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고선지의 비참한 패배가 도리어 동서 문화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것이다.
탈라스 전투 이후 안서절도사에서 해임된 고선지는 장안으로 이주하여 비록 패군지장이지만 그간의 공을 인정한 현종 황제로부터 우우림대장군이라는 벼슬과 함께 저택을 하사받게 된다.
고선지가 장안에 돌아와 은거하고 있을 무렵, 당나라의 황제 현종은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양귀비와의 사랑에 빠져 조정은 내분에 휩싸였다.
고선지가 장안에 머문지 4년째 되던해에 동복절도사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고선지는 반란군 토벌의 책임을 맡아 부원수가 되어 10만명의 군사를 소집, 천무군이라 명명하고 출전하게 된다.
옛 부하장수였던 봉상청이 사수관에서 반란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패하고 퇴각하자 고선지는 천연요새인 동관에서 진을 치고 반란군과 싸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반란군에게 득이 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군량을 두달치의 분량만 남기고 모두 소각해버렸다.
그러자 감군 변영성이란 자가 고선지를 모함하여 국고를 탐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 이리하여 고선지는 진중에서 봉상청과 함께 참형을 당하고 만다.
고선지의 최후와 함께 동관은 함락되고 당나라도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실크로드는 고선지가 지배했을때 가장 번성했고 그가 떠나면서 쇠퇴를 거듭했다.
고선지의 원정결과로 서방에 전해진 제지기술은 그후 유럽 르네상스의 기폭제가 되고, 서양문물은 빠르게 발전해갔다.
세계 문명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고선지. 그는 고구려인이었다. 한국 역사에도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책의 내용은 마지막에 이정기라는 고구려의 후예인 장수가 산동반도 한복판에 제라는 나라를 세우고 4대간 다스린것을 쓴 내용입니다.(이것은 사실로서 우리나라 역사책에만 기록되지 않은 아주 가슴아픈일입니다.) 저도 매우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써 여러분도 읽기를 바라는 책입니다. 전3권이니 가볍게 읽어보세요^^
조선시대 때 북쪽 역사서나 사료를 제거했다는 자료는 본적이 없는데 한번 증거를 보여주시길. 오히려 자신들의 건국명분을 위해 만주 지역을 지배한 단군조선의 고조선을 치켜세우며 역사서도 만들었죠. 중기에 사림들이 집권하면서 기자조선이 중시됬으나 고구려나 고조선의 존재가 부정된 적은 없습니다.
단지 중국에 더 관심있었던 그 당대 지식인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한편으로 조선말기때 지식인들 사이에 실학이 일어나며 북방 국가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이때 최초로 유득공에 의해 발해사를 우리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관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미 고려 중기때부터 실증중시의 중국 역사에 심취한 많은 문사들이 과거 삼국시대의 여러 사서들을 허황된 미신과 신화로 가득한 것이라고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김부식이 바로 대표적인 자이죠. 어차피 책의 전승이야 당대 지성인들의 필사로 이어지는 것이라 보면 조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부당하죠.
첫댓글 아 맞다 이거 어떤 책에서 봤어요.. ^^
좋은 내용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고선지에 대한 이야기는 '고구려를 위하여'라는 소설에도 중간에 등장합니다. 거기서 고선지가 벌인 전투도 자세하게 나옵니다.(최후는 언급되지않았습니다.저도 이걸읽고 알았음)
그 책의 내용은 마지막에 이정기라는 고구려의 후예인 장수가 산동반도 한복판에 제라는 나라를 세우고 4대간 다스린것을 쓴 내용입니다.(이것은 사실로서 우리나라 역사책에만 기록되지 않은 아주 가슴아픈일입니다.) 저도 매우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써 여러분도 읽기를 바라는 책입니다. 전3권이니 가볍게 읽어보세요^^
꼭 중요한 인물은 모함받아 죽네요..
그 제라는 나라 역사스페셜인가 거기서 봤어요.
조선시대 때 북쪽 역사서나 사료를 제거했다는 자료는 본적이 없는데 한번 증거를 보여주시길. 오히려 자신들의 건국명분을 위해 만주 지역을 지배한 단군조선의 고조선을 치켜세우며 역사서도 만들었죠. 중기에 사림들이 집권하면서 기자조선이 중시됬으나 고구려나 고조선의 존재가 부정된 적은 없습니다.
단지 중국에 더 관심있었던 그 당대 지식인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한편으로 조선말기때 지식인들 사이에 실학이 일어나며 북방 국가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이때 최초로 유득공에 의해 발해사를 우리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관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미 고려 중기때부터 실증중시의 중국 역사에 심취한 많은 문사들이 과거 삼국시대의 여러 사서들을 허황된 미신과 신화로 가득한 것이라고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김부식이 바로 대표적인 자이죠. 어차피 책의 전승이야 당대 지성인들의 필사로 이어지는 것이라 보면 조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부당하죠.
길다.... 그냥 꼬릿말대신 답글을 다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