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고통까지 사랑하라
욥기 5:6,7,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나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찬송가 338장(내 주를 가까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바는 인생은 고생을 위하여 났다는 말처럼,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고 슬픈 일을 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숙명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남 자체도 울면서 태어나고, 낯선 곳에서 너무나 연약한 인간으로서 태어나 아프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슬픈 일도 당하고 사고도 겪게 되고 환난을 만나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성공하고 잘 되기를 바라지만 다 뜻대로만 되지 않고 속기도 하고 다 빼앗기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이기도 합니다. 고난의 바다와 같습니다. 고통과 고생은 이처럼 인간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본질적 요소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인간은 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고난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핍박과 손해가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모든 인생에게 고난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인데, 그 고난은 아무런 뜻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고난에는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고 유익이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 119:71 말씀에 이르기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고난이 뜻이 없고 유익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낭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의미가 있고 숨은 뜻이 있고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과 고통, 시련, 고생에 어떠한 유익이 있을까요?
먼저, 고난과 고통은 자기를 돌아보게 해줍니다. 전도서 7:13~14 말씀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인생에 형통한 날만 계속되어 멈추지 않고 자기 반성 없이 앞으로 달려만 가다가는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자기의 가는 인생의 방향을 수정할 기회를 놓치고 결국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잠언 14:12 말씀에 이르기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
고 한 대로, 자기 반성 없이 그대로 가다가 멸망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고난과 실패와 고통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미국의 석유 재벌 록펠러는 석유 독과점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이 50대에 수많은 스트레스를 통하여 암에 걸려 1년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신자였던 그는 목사님으로부터 이제 모든 것 내려놓으라는 권면을 받자 순종하여 일년 동안 살면서 사회 유익을 위하여, 도서관, 병원, 학교, 교회를 짓는 자선 사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놀랍게 그 때부터 건강이 좋아지더니 97세까지 더 살았습니다. 1년 시한부 선고를 받고 43년을 더 살았습니다. 만약 그가 아프지 않고 건강했다면 그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더 많은 돈벌이에 매진했을 것이고 그는 베푸는 기쁨과 재물 욕으로부터 자유함의 행복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고 더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질병이 그에게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멈출 수 있게 하고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게 해준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고난은 우리의 길을 멈추어 서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기회입니다.
또한 고난은 죄를 멈추게 해주고 잊어버린 죄도 생각하여 회개하게 합니다.
사렙다 과부가 자기 아들이 죽었을 때에 자기 집에 묵고 있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열왕기상 17:18)
그렇습니다. 고난은 죄의 길로 가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장입니다. 계속 죄를 짓게 되면 더 큰 재난이 있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평안 중에 있다가 고난이 찾아오면 잊어버린 죄를 상기하게 됩니다. 자기의 죄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기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혹시 범했을 수 있는 죄에 대하여 더듬어 찾게 되고 근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과 고생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멈추게 만들고 근신하게 만들어주고 자기 속에 숨겨진 죄악이 있는지 성찰하게 만드는 영적인 신호입니다.
또한 고난과 고생은 이해의 폭을 넓히게 해줍니다.
고난과 고생을 통해서 인간은 고난당하는 자들에 대하여 깊은 이해심을 갖게 됩니다. 아파봐야 아픈 사람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아플 때 겪는 슬픔,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사회적 고립감, 공포심, 무력감 등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겪고 싶어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겪지 않으면 충분히 그러한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의 마음과 육체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품고 기도해고 돕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누구나 원치 않는 데도 그렇게 하나님은 섭리 속에 고난의 구렁텅이에 우리들을 밀어넣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같은 고난을 겪는 이를 보면 더 공감하게 되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느끼면서 그들을 품고 기도해줄 수 있고 마음을 기울여 도울 수 있도록 자원하게 합니다.
또한 고난과 고통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고 겸손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해줍니다.
고난 앞에 인간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도 질병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현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거대한 지진, 엄청난 태풍, 산더미 같은 쓰나미, 무서운 산불과 몇 년을 끄는 전쟁과 세계적인 전염병 펜데믹 앞에서는 너무나 초라하고 연약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외없이 맞이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합니다. 그래서 겸손해집니다. 고통과 고생과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손을 붙들게 만듭니다.
또한 야고보서 5:13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고 하였으니, 고난과 고생이 찾아올 때 느슨해진 기도를 뜨겁게 간절히 하라는 주님의 손짓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중 누구도 고난과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상대입니다. 하지만 인생 길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상대입니다. 하지만 고통과 고난은 그 속에 값진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총이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7:3 말씀에 이르기를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깊은 깨달음과 자유함과 영적인 평화와 차원이 다른 감사가 주어지고 우리 삶이 깊어지고 기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사랑할진대 고통까지도 사랑하도록 해봅시다. 우리에게 던져진 고통, 고난, 시련까지도 기꺼이 품고 그 고통과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도록 합시다. 길을 멈추고 생각해보고, 내 속에 감추인 죄를 찾아 더 깊이 회개하고, 더 낮아지고, 마음을 더 순결하게 하여 주님께 기도의 손을 간절히 모읍시다. 그리할진대 그 고난들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과 은혜의 창고를 여는 황금 열쇠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