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장 ㅣ 전 국회의원, 전 육군소장
나는 진심으로 푸랜세스카 여사님을 존경하고 있다. 그렇다고 여사님과 연고가 있는 사이도 아니다. 사연을 말한다면, 휴전직후 내가 일선에서 합참 전신인 연합 참모본부 창설요원으로 선발되어 잠시 마땅한 청사가 물색될 때까지 우리는 경무대 별관을 사용하게 된 것이 굳이 기연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자연 호기심도 들어 겉으로나마 경무대를 눈여겨 볼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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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오후의 일이다. 이대통령께서 쉐터만을 걸치신 채 몇 사람의 경호원과 같이 손수 톱과 도끼를 가지시고 별관 옆에 쌓인 나무토막을 자르시는 것을 창문을 통해서 넋을 잃은채 내다보았다. 그때 우연히도 내 눈에 띤 것은 쉐터와 바지의 여러군데를 깁고 꿰맨 것이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대통령의 참모습을 보는듯 싶었다. 이럴 일과 옷차림은 그날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자주 볼 수 있는 일이 되었지만 근래의 청와대에는 그때 말고는 영영 보기 어려운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미 국방장관이 내한했다. 경무대에서 오찬이 있게 되어 그 자리에는 우리 군 수뇌들도 합석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모시고 있던 연참의장도 처음 있는 일이라 호기심과 기대속에 몹시 고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막상 그날 오찬에서 돌아온 의장은 미국 친구가 몰라서 다행이지 한일관 정식이 도리어 나을 정도라면서 기대와는 달리 매우 간소한 오찬이었다고 말하면서 놀라는 눈치였다. 이런 일은 외국 귀빈중에서도 특별한 분에 한해서 1년에 한두번 정도 있을 뿐 국내 인사에게는 기것해야 다과정도 대접이 고작이라는 것을 뒤에 가서야 알았다. 따라서 요즘 청와대의 과도하리만큼 잦은 접대와 풍성한 살림살이와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매사 검소하고 절약의 본보기였다. 대통령 자신은 물론 뒤에서 직접 살림을 맡아 보시는 여사님의 배려없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 후 내가 육본 인사국장 때의 일이다. 종종 나는 경무대로부터 도미시찰에서 돌아온 장교들의 여비($) 반납통지를 받았다. 내용인즉은 1개월 예정으로 나가서 22일만에 귀국했으니 나머지 8일분의 여비는 반납하라는 것이어서 지금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 무렵, 단기교육의 하나로 실시되었던 도미시찰과정은 미국측에서 21일간의 공식일정과 8일간의 출입국을 포함한 자유시간으로 짜여져 있었으나 막상 꽉 짜여진 공식일정을 마치고 나면 그동안 쌓이 피로가 일시에 덮치는데다가 언어와 식사의 불편은 물론 여비조차 충분치 못하다 보니 대개의 경우 남은 여비로 가족 선물을 사고는 서둘러 귀국하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여비가 남을리도 없거니와 더욱 반남이란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으므로 매우 난처했지만 공사가 엄격하고 명분이 뚜렷한 이상 나로서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뿐인가 그 어느날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경무대에 급히 불려간 일이 있었다. 비서의 안내로 여사님을 만나 뵌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오래 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친절히 맞아주신 여사님은 자리를 권하면서 두툼한 서류를 내놓으셨다. 바로 도미유학 장교단의 여비($) 청구였다. 내소관은 아니었지만 말씀인즉은 여비가 1.3배나 과다청구되었으니 다시 검토해 보자면서 미국관광 안내서를 펴보이고는 일일이 헌 편지봉투를 뒤집은 종이 위에 계산하며 설명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끝으로 우리가 돈 한푼 물건하나 절약하는 것도 애국하는 일 아니냐면서 오해 ㅁ라아 달라고 하실 때 나는 순간 감정이나 된 듯 몸이 굳어졌다.
이렇듯 여사님은 절약과 검소가 철저히 몸에 배신분으로 하나를 알면 열을 미루어 알듯이 어찌 이 한 두가지 예뿐이겠는가만은, 참으로 우리 모두가 존경하고 따라야 할 사표라고 지금껏 굳게 믿고 있다.
비록 몸은 이국출신이시지만, 공사간에 재덕이 겸전한 훌륭한 내조자였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일이고 그간 청와대에 몸담아 온 영부인들조차도 이점은 서슴없이 자인 하리라 생각된다. 이제는 가신 여사님 앞에 한치의 부끄럼도 없을 정도가 되었고, 또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움 추억거리가 되고 있다.
여하간에 오늘의 청와대는 여사님을 본보기로 삼아 개혁의 산실답게 거듭나기를 바랄 분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청렴한 통치자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웬일인지 그때가 자구만 그리워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푸랜세스카 여사님의 서거 일주기가 되는 3월 19일 이화장에서 추모유품전을 연다는데 누구보다도 배울점 많은 여사님의 참모습을 뵙고 모든 국민이 본받기 바란다.
*그림설명
최초의 국산 모직으로 우리 솜씨로 만들어 34년간 입은 정장(1958~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