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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한겨레 hook `훅` _ `악의 꽃` La Fleur du Mal
달마_김이구 추천 0 조회 86 10.09.23 10: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감상적 sentimental’이란

용어의 사용에 대해...

 

예술작품을 마주한 우리는 자주 감상적인 상태가 된다. 감상적, 이는 작품의 특징을 서술할 때 그에 대한 반응을 묘사해주는 단어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이 용어는 급격한 의미 변화를 거쳤는데, 예를 들면 플로베르의 소설 <감정교육 L’?ducation sentimentale>에서처럼 원래 ‘풍부한 감정’을 의미했던 이 말은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본래의 의도가 무색해질 정도의 부정적 뉘앙스가 가미되었다. ‘넌 감상적이야’ 혹은 ‘이건 지극히 감상적인 평가’ 등의 표현에는 네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절의 뉘앙스가 저변에 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 또는 감상자의 반응을 묘사하는 경우 특히 이 ‘감상적’이란 서술은 부정적 함의를 포함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지적처럼 어느새 이는 ‘값을 치르지 않은 채 어떤 감정의 사치를 누리려는 사람’을 특징짓는 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센티멘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2010년 1월 11일, 우리는 에릭 로메르의 죽음에 대한 비보를 접했다.
    그리고 9월 12일, 끌로드 샤브롤이 별세했단 짤막한 인터넷 뉴스가 떴다.
    누벨바그의 위대한 이름들이 차례로 세상을 등지고 있다.

 

 

                       유작이 되어버린 <벨라미 2009>를 촬영할 때의 끌로드 샤브롤 

 

고다르의 <아워 뮤직>이 칸 영화제에 소개되던 2004의 봄, 작품 자체가 주는 감흥보다도 난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고백하자면 영화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당시 그가 살아있다고는 상상조차하지 못했다(그런건 교과서에 없더라). 그러니 산책을 하던 중 그 이름이 적힌 포스터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이란. 그를 북불의 어느 영화학교 교수 리스트에서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위대하다며 상정해버린, 살아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몽환적 호칭인 ‘장 뤽 고다르 Jean Luc Godard 선생님’은 그 이름만으로 죽어버린 우리의 예술 심장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꾸준히 자신의 작품을 창조하고 있다. 누군가의 이름이 주는 생기, 이건 일종의 종교 같은 것이다.

 

‘누벨바그 Nouvelle vague’란 단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니 고전의 영화라 인식된 특정 집단을 동시대의 예술로 받아들이는 과정일 수 있다. 바래진 책 속에나 등장할 법한 트뤼포와 로메르의 이름이 그 속엔 포함되고, 리베트와 레네, 바르다의 최근 활동이 한국의 영화 잡지에도 등장한다. 12사도와 같은 이 이름들이 교실에서 불리고 현장에서 호명되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감사하는 심경까지 갖게 만든다.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만으로도 역사를 함께한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신문의 사회면을 읽는 것보다 더,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 소식을 담은 문화칼럼에서 충만한 만족을 얻는 것처럼, 역사와 시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 내감 internal sense의 기쁨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예술적 호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샤브롤의 작품이 누벨바그의 위대한 작가들 속에서 비교적 덜 주목받았던 이유에 대해 평론가 정성일은 그가 이 ‘순수하게 새로운 경향의 영화 운동’에 아주 지대한 관심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다만 당시를 살았고, 또 훌륭한 재능을 지녔을 따름이다. 고다르나 레네처럼 샤브롤은 형식을 부수는 자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샤브롤의 영화는 누벨바그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적’이란 인상에 더 가깝다. 우아하고 무거우며 부르주아적이라고 평가되는 프랑스 영화, 혹은 샤브롤의 영화.

 

형식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의 쇼트들은 어쩌면 스릴러라는 장르의 인상마저도 허문다. 하지만 굳이 샤브롤의 영화를 누벨바그의 테두리 밖으로 끌어낼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세계 영화 예술의 역사>에서 정태수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영화 발전의 전환점을 ‘소비에트 몽타주와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 두 가지로 압축한다면, 샤브롤의 영화는 누벨바그 전체의 특성을 꽤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일차적으로는 몽타주가 그러하겠지만 이차적으로) 누벨바그를 통해 영화는 형식을 내용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형식은 누벨바그를 거쳐 일반적인 영화 언어가 되었고, 샤브롤은 그 대표격이라 말할 수 있다. 소설을 각색한 <마담 보바리>에서도 이런 테크닉은 잘 드러난다. 이 영화는 전지적 시점에서 진행된다.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의 중심을 꿰뚫는다. 그리고 (고다르 등의 작가처럼) 쇼트의 연결이 아니라 ‘인물의 얼굴과 구도’가 캐릭터의 내면을 대변한다. 결론은 어느 정도 열려있고, 전체의 시놉시스에 힘을 싣는 것은 여성의 심리이다. 이미 평범한 것이 되어버린 누벨바그의 모더니즘적 특성이 샤브롤의 작품 속에서 되살아난다. 평범한(banal) 인상을 주는 영화가 평범한 영화가 아니란 것을 이는 일깨운다.

 

    확실히 현대 영화사에서 누벨바그가 주축이 된 프랑스 영화의 특정한 경향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프랑스 영화의 인상을 좌지우지한다.

 

 

                                  <악의 꽃 2003> 촬영장에서의 끌로드 샤브롤

 

그의 영화를 보아도 그가 쓴 글을 살펴도, 확실히 샤브롤이 영화 외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충실히 히치콕을 추종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연구의 방면에선 트뤼포나 레네에게, 감독으로의 후계는 드 팔마나 버호벤에게 샤브롤은 ‘히치콕의 2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 우린 그를 제2의 히치콕이라 부르기 주저한다. 그토록 지독하게 히치콕식 심리스릴러를 지향했건만 오히려 샤브롤의 영화를 ‘프랑스의 히치콕’이란 관점에서 살피면 놓치는 부분이 더 많아진다. 그렇다면 대체 샤브롤이 히치콕에게 취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들) Les Fleurs du Mal’의 제목을 변경한 영화 <악의 꽃 La Fleur du Mal>을 살핀다. 이 작품 역시 소위 말하는 샤브롤리떼 chabrolit?는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부르주아지가 등장하고 주역은 역시나 여성이다. 촬영의 시점이나 인물의 관점도 명확하다. 모든 면에서 예의 그 샤브롤을 벗어나는 지점은 없다.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어조로 인간의 내면을 조명하는 작품 <악의 꽃>은 말하자면, 2003년에 만들어진 누벨바그 작품이다. (물론 누벨바그를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모더니즘의 일환으로 읽을 때에 그렇다.)

 

표면적인 제목도 흥미롭다. ‘악 mal’은 일차적으론 수식어이지만, 전체를 보면 ‘악으로부터의 미, 고통에서 기인한 아름다움’ 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du (영어의 of 혹은 from)’를 사이에 두고 꽃과 악은 모호한 의미로 서로 열려있다. 1855년 보들레르가 시집의 제목을 정할 때 의도가 그러했듯, 이 두 의미는 결코 단정적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금지된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아찔한 매력이 모두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것이 이 조합의 핵심이다. 그 과정에서 인물이나 관객이 이 혼동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 보인다.

 

악의 꽃, 이는 예술에의 세계로 인도하지만 결국엔 악마적인 무한을 열어놓은 단테의 베아트리체 혹은 보들레르 시의 제목 ‘베아트리체’처럼, 샤브롤의 부르주아 역시 그들의 은밀한 매력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음을 알린다. 그러니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샤브롤이 뒤집어 쓴 히치콕에의 집착이 아니라, 히치콕이 바라 본 세계의 모양이다. 점점 더 역설적으로 꼬여가는 사건들과 그 속에 구겨진 감정, 그리고 마침내 중요해진 것은 선이건 악이건 그것이 우리의 정신을 활짝 열게 만든다는 사실 뿐이다. 스릴러라는 명칭보다 어쩌면 ‘블랙코미디에서 코미디적 요소를 제외한 나머지’, ‘낭만주의를 타파한 일종의 이미지즘’으로 샤브롤의 작품 세계가 정리되는 이유다.

 

감상성엔 항상 함정이 도사린다. 어떤 상황에 대한 적절한 인식은 결코 감상적일 수 없다. 하지만 최근 2년간 우리 사회가 개인 전체에게 던져준 일련의 사건들은, 이 감상성에의 두려움을 뛰어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믿게 된다. 어쩌면 감상에서 센티멘탈에 대한 오해는 뛰어넘어야 할 벽이라고. 정작 위험한 것은 감정의 함정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자기기만의 덫일 수도. 끌로드 샤브롤의 별세 소식을 접한 후 쓰기 시작한 이 글을 마무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변명이다. 감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느 측면에서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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