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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교사가 갖추어야할 관계성(Relationship)
Ⅰ.들어가는 말
세상은 빨리 움직이고 있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화 사회 속에서 기술을 계발하며, 새로운 정보를 얻는 자만이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사람은 인간의 상실을 가지고 올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인간은 상대방과의 일대일의 관계,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적인 요소들이 주일학교 운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관계성 회복이 안 되는 교사들이 과연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관계성이 무엇이며, 관계성의 여러 영역들을 통해서 교사들이 가져야할 관계성이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Ⅱ.관계성이란 무엇인가?
⑴정의
관계성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경의 큰 주제는 바로 관계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성도들의 생활 속에서의 삶도 크게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는 교만 속에서 관계성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송제근 교수는 언약 신학에서 특히 출애굽기를 다루면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모든 언약 관계에 당사자들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신혼 부부의 관계성을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많이 말하고 있다.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신혼 부부의 관계를 연상한다는 것이다. 신혼 부부의 사이에는 사랑과 진실함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이것이다. 신혼 부부와 같은 사랑과 진실함으로 연결된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과 진실함으로 관계성을 맺으신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와 이 같은 관계를 원하신다. 기독교의 관계성이란 바로 일대일의 사랑과 진실함의 만남이 바로 관계성이라 할 수 있다.
⑵공동체 안에서
교회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모이든 장소를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모인 곳이 교회라고 말하며 이 세상에서 사탄의 권세와 싸움을 하는 전투적인 교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이곳으로 왔습니까? 교회는 하나의 예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모인 곳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일까요? 바로 삶의 상호 의존관계볼 수 있다.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우리 생활 안에 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거부 할 수 없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죄로 인한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 죄의 공포로 인해서 쉽게 잊어버린다. 인간은 세상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아담이 이브와 결혼을 한 것과 같이,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상호보완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의 선거와 법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제도도 아테네에서 나왔지만 하나님의 간접 계시라고 볼 수가 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죄가 온 인류에게 왔다는 대표성의 원리를 정치에 인용하여, 직접 민주정치 즉 국민의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 국회의원를 통해서 국민의 기본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이 사회 전체에게 주는 이익인 것이다. 법 같은 경우는 인간의 방종과 잘못된 행동으로 사회의 해악을 일으키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가 개인을 보호하고 이익을 주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는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데 한계가 있다. 바로 경제라는 힘으로 인해서 재산의 고저를 통해서 차별성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렇지만 교회는 사랑을 목적으로 헌신을 위주로 하는데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교회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값싼 구원이 아니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값싼 구원으로 하락시키는데 문제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는 개인 중심의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가 하나의 특기를 가지고 큰 것을 만들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이다. 그렇지만 지역이기주의와 특정부류의 권력 독식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다. 이것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정체되고 있다. 많은 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실망하고 돌아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새로 들어오는 신자들에 대해서 기존에 있는 교회 사람들은 그들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교회에 정착하기보다는 사람들로 인하여 실망하고 외면하는 모습 속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에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장년에게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다. 주일학교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교사는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민감하게 관찰해야 한다.
첫째로 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바로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교회의 일은 내가하는 일이지만 솔직히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도구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으니까? 내가 시간을 투자하니까? 여러분 이것은 위험한 교회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철저한 헌신이며 하나님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예로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처음에 바알 신상을 무너트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300명의 용사와 같이 미디안의 군대와 싸움을 해서 이겼습니다. 그 후 그의 말년은 불행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그 만큼 사사로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되자 않겠냐는 식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년에 성적 물란으로 낳은 아들들이 신본주의 나라를 인본주의로 만들려고 하다가 망하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사란 백성들의 목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처음에는 믿음이 좋았지만 나중에는 신앙이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에서 정탐꾼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께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돌아와 두려워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뺀 모든 자들이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 또한 하나님은 이들 모두를 죽이려고 하셨으며, 이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 이들과의 관계성을 파기하시려고 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그 한사람을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는다. 교사가 갖추어야 할 관계성이 바로 모세와 같은 관계성인 것이다.
둘째로 교사는 성도와 관계성이 바로 되어야 한다. 엡4:12절에서는 교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라고 세운자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성도란 주님의 양들 즉 교사가 맡은 학생들이다. 주께서 이들을 온전케 하라고 교사를 세우셨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헬라어의 καταρτισμον으로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시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또한 온전케 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다. 사람은 온전한 자가 없다. 예수님을 닮은 만큼 온전케 되어 간다.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과 삶을 닮아 성화되고 성숙해 가도록 도와주며 이끌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이며(마11:29) 예수님의 성품은 사랑과 거룩이며, 예수님의 삶은 섬김과 희생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요13:15)따라서 교사는 예수님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닮도록 학생들을 이끌어주는 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씨로서 심령을 거듭나게 하며(벧전1:3)
○젖으로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며(벧전2:2-3)
○검보다 예리하여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히4:12)
○성령의 검으로서 사단 마귀를 물리치고(엡5:17)
○등이요 빛으로서 삶의 길을 밝혀주며(시119:103, 105)
○불이요 방망이로서 말씀이 심령 속에 들어갈 때 심령이 변화되고 거듭나고 성장하며 깨끗게 되고 죄성들을 태우고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며 세상과 죄의 유혹을 이기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렘23:29)
교사는 주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학생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회심시키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게 하는 의무가 있다. 그렇지만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헤메고 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 교회에 나오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사랑을 받기 위해 교회에 오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관심을 받길 원한다. 이들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길 원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해소하지 못할 때 밖에서 겉돌게 되고, 방황과 방탕의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교사는 이들과 관계성을 맺길 원한다. 따뜻한 한마디, 따뜻한 악수, 따뜻한 포옹을 받기 위해서 이렇게 오고 있다. 교사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
Ⅲ.관계성의 도구들
⑴언어를 통해서
언어는 일대일의 관계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언어를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서 창조하셨다. 또한 자신이 언어를 통해서 인간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서 언어를 만드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욕심과 탐욕으로 인하여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간의 언어는 수천, 수만 가지로 전세계에 흩어져 나갔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언어는 철저히 일대일의 관계를 통해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통해서 사회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효율적으로 하길 원하셨다. 인간의 언어는 철저하게 사랑의 원리로 만들어졌다.언어는 철저하게 영적인 것이다. 언어는 공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또한 언어를 통해서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변화한다. 인간의 사고와 정신이 바뀌려면 100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신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180도로 변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언어를 잘 사용하던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히틀러였다. 그는 언어를 통해서 군중심리를 조장하여 많은 유태인과 슬라브인들을 죽였다. 언어가 가진 파괴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힘은 실로 놀랍다. 언어를 통해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어록들은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아람 방언에도 능숙하셨다.그 당시는 희랍어와 아람어를 동시에 사용하던 시대였다. 이런 것들은 지금 발견되는 예수님 당시의 사해 사본,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달리다굼, 아바, 바알, 게헨나, 게바들은 희랍어 성경에 보존되어 있는 용어들이었다.
대화법
대화를 의사소통이라 하며 Communication이라 한다. 신과 인간의 대화, 교사와 학생사이의 대화, 소재와 그 내용과 구조가 되는 반면에 구원의 행위와 약속으로 이루어진다. 대화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의미하며 동질 방향으로서의 발전이나 변화를 유발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대화 속에 훌륭한 정신들을 배울 수 있다. 그것들은 훌륭한 마음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거기에는 선천적인 능력이 나타나 있다. 지성이 나타나고 있다. 정신에 대한 훈련 역시 세밀히 나타나 있다. 훌륭한 기질, 관대한 성품, 솔직성, 동정심, 열정, 진지성, 겸손 등이 나타나있다.
예수님께 그의 지성적 비판자들을 대화로 침묵 시켰다는 사실이 선천적인 능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즐거워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과의 대화에 대한 마리아의 기쁨을 보여 주고 있다. 고르반에 관하여 바리새인과 더불어 나누신 대화에서는 예수님의 관대한 성품을 보여 주고 있으며, 빌라도와 더불어 자신이 왕 되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실 때 보여주고 예수님의 정직성을 보여주고 계시다. 또 가정의 일들에 관하여 마르다와 말씀하시는 가운데 보여주신 동정적이며 함께 생각하시는 통찰력은 예수님의 훌륭한 대화법에 대해 알 수 있다.
내가 바알 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는 나(눅11:19)라는 말씀 속에는 일종의 신랄한 윗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화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①간략하다(마4:4, 9:29, 요5:6, 막8:23)
②의미심장하다.
③둘러대어 말하는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직설적이고 분명하다.
④인격적이다.
⑤상대방에 따라 차이를 두고 있다.
⑥교훈적이며 의사 소통이 활발하다.
⑦눈길을 사용하시어 목적을 달성한다.(막10:27)
⑧반응적이다.
⑨용감하다.
⑩책망하는 것이 있다.
⑪경이적이다.(막12:17)
⑫친밀하다.
⑬평판을 불러 일으켰다.(막12:34)
⑭기쁨을 주는 동시에 통렬한 아픔을 주기도 한다.(막12:37,10:22)
⑮독백일 때도 있고 대화 일 때도 있다. 주심과 취하심이 병행하고 있다.
⑯너무도 눈치와 재치가 빠르다.
⑰비타협적이다.
⑱고결하다.
⑲친구를 만드는 동시에 원수도 만든다.(막12:12)
⑳고무적이다.
위의 내용과 같이 예수님의 대화들 속에는 선천적인 능력이 나타나고 있고 지성과 정신적 훈련이 세밀히 나타나 있으며 훌륭한 기질, 관대한 성품, 솔직성, 동정심, 진지성, 겸손 등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명심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 찾아 가셔서 그곳에서 대화하시고, 부르셨고 또한 가르치셨던 것을 명심하고 주일 학교와 평신도를 가르칠 때 이런 내용을 생각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질문법
질문이란 것은 상대방이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시정하고 바로 알게 하기 위해서 질문법이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질문은 행동을 자극하기도 하고 행위의 방향을 제시, 인도하기도 한다. 질문은 마음에 문제를 제시하며, 모든 생각의 근원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목적이 있고 위해한 교사이신 예수님은 이미 12세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었다. 이런 문답식 교육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많이 사용하셨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보다.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 내용에 대해 살펴본다면 예수님이 질문법을 통한 교육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 100여 개 넘는 내용을 보여 주지만 몇 가지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 지 못하셨나이까?(눅2:49)
∙무엇을 구하느냐?(요1:38)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2:4)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3:12)
∙내가 당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 하거든 하물며 하는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 겠느냐?(마7:3-4)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 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마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 탈하겠느냐?(마12:29)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이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12:34)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마12:48)
유도신문이란 질문자가 요구하는 대답을 바로 그 질문 속에 암시하는 형식의 질문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유도신문을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질문을 하셨다.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1)예수님 자신이 무엇인가 아시기 위해 물으신 질문(눅8:30)
2)감정을 표현하시기 위한 질문(요3:10, 눅5:22-23, 마12:34)
3)어떤 이야기를 하시기 위한 질문
4)이야기를 계속하여 말씀해 나가시는 질문
5)이미 알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금 재차 회상시키기 위한 질문(막2:25-26)
6)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질문(마23:17)
7)믿음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막5:29)
8)상황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질문(막3:4)
그러나 마퀴이스는 예수님의 질문법은 예수님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하려고 하는 사람의 영혼을 안정시키려 가 아니라 자극하려고 생을 더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교육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예수님이 질문한 목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보면
1)청중들의 문제를 생각해 내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안식인의 선악의 행위 논쟁, 막 3:4 참고)
2)정보를 입수하기 위해(막10:36)
3)상대방이 대답을 생각할 하여 예수님의 하시고자 하는 뜻을 전하기 위하여(마16:13-15)
4)질문을 논증으로 사용하기 위하여(막10:38)
5)궁지에 몰아넣는 질문에 대한 대책으로(마6:30)
6)그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예시하기 위하여 (눅10:36)
7)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사용한 것은 주의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던진 질문들 가운데 그를 비판한 자들이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있었다. 안식일과 요한의 세례의 질문은 대표적이다. 예수님은 우선 청중들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가르치시므로 하여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교육하시며 질문법을 사용하심으로써 더욱더 효과적인 교육을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질문을 통한 교육을 많이 사용하여 가르치셨다.
⑵행동을 통해서
①말씀을 통해서
교사의 의무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교사의 재산은 말씀이다. 교사의 무기도 말씀이다. 교사는 한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학생을 온전하게 세움받게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이 나를 살렸다고 증거하고 있으며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 하시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사의 가장 주된 사역은 학생들에게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 교사로서 친히 가르치는 사역에 힘쓰시고 하늘로 가시기 전 제자들에게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교육적 사명을 위임하시고 하늘로 가셨다.또한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능통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이사야를 예로 들며 가르치시는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의 교육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성경 사용법을 알아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왜 왔고, 해야 할 일, 위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그당시에 상류층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나타나 실때에 구약을 사용하시어 설명 하셨다. 또한 공생애 시작 전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셨을 때에도 구약에 나오는 말씀을 사용하여 사단의 시험을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비공식적인 교육현장에서 그의 교과서로서 구약성경을 사용하셨다. 이러한 예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마25:56)
2)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4)
3)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25:56)
4)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이 날이니라(눅21:22)
5)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대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 하와 지키었나니 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신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 이다.(요17:12)
예수님께서는 기초적인 사실로 공고히 한 것들 역시 구약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시는 사실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들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그냥 인용하시지 않으시고 나름대로의 독창적으로 하셨다. 그 중에 가장 독창적인 것은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사셨다는 것이 가장 독창적이다.
②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기 전에 기도를 많이 하셨다. 특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다. 또한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훈련을 쌓으셨다. 특히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시길 원하셨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실 때 열심히 기도하셨다. 우리의 교사들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귀신에 걸린 아이를 얻고 온 아버지를 보시고 아이를 고치시고 기도외에는 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대일의 깊은 교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사는 이러해야 한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아이들 중에서 부모가 믿는 집안이 있고, 안 믿는 집안이 있다. 특히 안 믿는 집안에 아이들은 영적 전쟁이 심하다. 사탄은 아이들이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부모를 통해 핍박을 하거나, 병을 통해서, 깊이 잠을 들게 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 교사는 이런 사탄의 계략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한 교사와 기도 하지 않은 교사를 보면 차이가 난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교사는 그 만큼 아이들이 영적으로 건강하며 하나님께 예배와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사가 기도하지 않을 때 교사 자신이 힘들 뿐 아니라 아이들도 영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Ⅳ.관계성을 저해하는 도구들
⑴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웃고 즐겁게 살기도 하지만, 쉽게 우울해 지기도 하며, 상처를 받기도 한다. 특히 감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그러하다. 교사는 특히 유․초등부, 고등부 학생들에게 신경을 써야 한다.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 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걱정과 근심 속에 있는데 누가 장난으로 하는 말에도 쉽게 잃어버리기도 한다. 미네소타 대학 소장 외인버그 박사는아이들에게 소리치거나 욕을 하는 등의 언어 폭력을 가하는 것을 얼굴을 주먹으로 치는 것 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대학 입시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을 본다. 친구들과 경쟁의 상대로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 친구가 나보다 한 문제라도 더 맞추면 나보다 먼저 대학에 들어간다는 공포심과 부모님들은 쓸모 없는 놈, 쓰레기 같은 놈, 독한 놈 등의 언어로서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 알콜 중독이나 어머니가 맞는 가정에서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시하는 행동과 때리는 것 성적 모독으로 폭언을 하는 경우, 친구간에도 친구의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개xx야, 썅XX, 등의 칭호로 부른다. 한국 청소년 문제 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언어들이 잠재적으로 우리의 정신 속에 내재되어 이것이 폭력성, 가출, 이유 없는 반항, 약물 중독, 학습 장애, 기억력 장애, 학습부진으로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우리에게 지적하며, 특히 청소년 때 바른말을 사용하길 원하고 있다. 이런 학생들에게 교사가 심한 폭언을 한다면 학생들은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교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교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⑵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은 행동으로 몸소 실천하셨다.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자신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의 자신의 사역을 몸소 실천하신다는 것을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보여주신다. 그렇지만 기존의 기성 세대는 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담배 핀다고 욕하면서, 자신은 담배를 피는 행위, 길을 가다가 쓰레기를 버리면서 불리 수거 안 하는 사람들을 욕하는 행위,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면서, 성적이 나쁘면 욕하는 부모님, 너는 기도하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 안 하는 교사, 말씀을 보라고 말하면서 말씀을 보지 안는 교사, 우선 순위를 하나님께 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 내키는 데로 하는 교사, 지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지각하는 교사 아이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아이들에게 왜 지금 하는 일이 정당한지 동기성을 부여 해주어야 한다. 동기성을 부여 할 때는 교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이 권위는 행동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권위가 바르지 않을 때 아이들은 실망하게 되고, 교사를 무시하거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사를 세운 것을 하나님이 세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힘으로 한다면 무너지고 만다.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한국의 청소년들의 타락의 원인이 어른들의 권위가 바로 서지 않아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관계성이 없기 때문이다.
Ⅴ.관계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현대
목회는 관계성의 목회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다. 특히 교회의 사역은 관계성을 위주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교회의 일 대부분이 관계성이다. 관계성이
바로 살아야 교회가 산다. 교사의 관계성이 바로 설 때 한국 교회가 바로 설 때 주일 학교가 산다. 관계성이 바로 선다는 것은 내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서 이것을 쉽게 (망각)잃어버린다. 인간의 원죄로 인해서 이것을
쉽게 망각하지만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을 수 있다.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교사는 학생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인도자이며
교회와 학생 사이의 중계자이다. 하나님과 학생 사이로 안내하는 인도자이다. 교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될 때 교사는 어린양들을 다른 길로
잘못 인도하게 되고 이것에 대한 징계를 받게 된다. 교사가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설 때 비로써 어린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게 된다. 교사의
영성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것이 진정한 영성이다. 이것은 말씀과 기도이다. 이것이 잘 못할 때 교사는 아이들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꼴이
된다. 아이들의 영혼을 망치게 된다. 이것을 명심하고 교사는 아이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먼저 관계성이 바로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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