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 굽는 남자
양 승복
불가마 앞에 앉아 벌겋게 타는 가마에 장작을 넣는 남자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집하며 옹기 굽는 장인 이야기로 꾸며진 다큐를 보며, 수십 년 전 이천에서 만난 옹기 굽던 남자가 아닐까. 아니 그 사람으로 단정하고 그 프로를 끝까지 보았다.
어설피 해가 넘어가는 저녁 날에 옹기를 만들고 있는 사내를 만났다. 그는 어둑하고 넓은 곳에 홀로 앉아 옹기를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야트막한 천정과 넓은 바닥에 앉아 작업을 하다 나를 보고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난데없는 손님들에게 불편한 눈으로, 왜 왔느냐고, 무슨 볼일이냐고 물었다.
나와 함께 한 사람은 일본에서 도자기 굽는 사람이었다. 백자와 청자에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던 그는, 소문난 도요지를 찾아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전시장과 작업장을 돌아보고, 무엇인가를 더 보고 싶다고 하여 찾아간 곳이 옹기장이다. 이천을 돌면서 길섶에 있는 흙을 맨 손으로 쥐고 주무르던 그는, 우리나라 살이 부드러운 흙에 감탄을 하며, 흙을 만지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다.
옹기 만드는 사내는 뚝배기 같이 거칠게 대했다. 고려도예에 들려왔다는 말에 뚝배기가 깨지는 듯이 화를 내며 구경 다 했으며 가라고 우리를 들여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함께 있던 도예가는 안으로 들어가서 끼웃거리며 거기서도 흙이 좋다며 감탄을 했다. 그 눈치 없는 외국인의 행동에 마음이 조금 풀어진 그는, 할 일없이 구경 다니는 사람이니 밥을 사라고 했다. 사내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었다.
그날 그와 저녁을 먹었다. 일본 도예가와 우리나라 옹기 굽는 청년은 내 통역과 손짓과 표정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옹기 만드는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싫지만, 그렇다고 도자기 문하생으로 앉아서 책을 보고 그대로 옮겨내는 일은 더욱이 싫다고 했다. 도자기에 비해 장인 대접은커녕 돌아보는 사람도 없다는 일에 자존심이 상한다는 심경을. 그래도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거나하게 취해가며 옹기같이 투박하게 털어놓았다.. 그 청년이 횡설수설 털어놓는 옹기에 대한 사랑을 들으며, 옹기장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했었다.
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 흙이 훌륭하다는 감탄을 하고 또 했다. 우리가 밟고 다니는 흙은 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천혜의 자원인 것을 그 청년에게 강조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자원은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좋은 가마도 있고, 넓은 작업장도 있는 그에게 넘버 원, 원더 풀을 외치며 희망을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화훼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 꽃이 훨씬 더 선명한 색을 낸다고 했다. 공기가 맑아서 냄새가 다르단다. 흙살이 좋아서 생육을 부드럽게 해서 아름다운 색과 향을 낸다는 말도 했다. 일본 친구들이 한국에 오면, 드높은 가을 하늘에 감탄하고,, 매일 당연하게 먹고사는 공기와 흙에 감탄을 연발하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그 청년같이 알지 못하고 산다.
고려청자와 백자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옹기를 굽는 청년에게 술을 부어가며, 자존감도 부어주었다.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색이 다른 말들은 공중을 튀어 다니지만 술잔으로 진실은 넘어가고 있었다. 횡설수설 속에 모든 것을 품고 녹여 주는 흙 같은 진실은 스스로를 취하게 만들었다.
화면 속에서 가마에 불을 넣고 있는 중 노인을 그 청년으로 단정을 지을 만큼 기억에 있다. 사랑하는 만큼 다가오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그는 앓고 있었다. 화도 냈다. 사랑이 지쳐버릴까 고뇌하고,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책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일들의 반복으로 영위되는 삶 아닌가. 그 깊이를 예술의 혼으로 승화시켰을 것만 같은 그 청년을 화면에서 만난 것 같아 좋다. 그 날 밤 그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함께 했던 그 일본인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단아하고 맑은 백자가 궁금해 한국 여인을 만나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 여인이 하필이면 나였으니 다소곳한 한국의 여인상은 금이 가고 말았다. 그래도 그 여인 덕에 그리던 한국의 도요지를 돌아보고, 살이 고운 흙을 영접할 수 있지 않았는가. 백자와 청자를 빗은 후예도 만나 소주도 한잔 했으니 충분한 가치가 있는 만남이었다는 생각이다. 소식을 모르는 그도 청자와 백자를 꿈꾸며 물레를 돌리고 있지 않을까.
그 시절 그 청년이 만든 항아리는 곳곳에서 장을 담고 맛나게 익어가고 있을 거다. 좋은 흙으로 빗어 숨을 쉬니 그 생명 오래갈 거니까.
첫댓글 사랑하는 만큼 다가오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그는 앓고 있었다. 화도 냈다. 사랑이 지쳐버릴까 고뇌하고,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책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일들의 반복으로 영위되는 삶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