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여름
근원 이장희
1960년 대에는 여름 방학이면 학생들이 無錢旅行을 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돈한푼 없이 삼복 더위의 폭염속에 고난을 극복하고 심신을 수련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無錢旅行 준비를 했다
우선 배낭은 군부대 주위에 살고 있으니 군 부대에서 배낭과 판쵸 우의 및 반합 수통 식사도구를 빌리고 비상시 갈아입을 옷과 쌀 한되박을 넣은 초라한 배낭을 지고 마을 동생 두명과 함께 강원도 설악산을 향해 제천행 기차에 무임 승차를 하였다
나는 기차 통학을 했던터라 기차에 대해 익숙했다
같이간 두 동생이 걱정이 태산이다 기차 안 에서 굳은 표정에 초조해 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슬그머니 두렵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두 동생들과 함께 한달 동안 무일푼으로 무사히 여행 할수 있을까 왈칵 겂이 앞선다
차라리 혼자 나설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前進하는 수밖에 없다
제천역 에서 화물 하차하는 곳을 통해 무사히 통과하여 대합실 시간표를 확인 한후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내 구경을 하다 기차 통학을 하다 사귄 친구를 만났다
제천에 산다는것만 알았지 이렇게 만나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배고픈 참에 홍재를 만났다. 점심을 잘 얻어먹고 강릉행 완행 열차를 타려고 했는데 하루 묵었다 가란다. 그 친구가 제천에서 주먹을 좀 쓰는 친구로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웬 숙박까지 약간 당황은 했지만 그친구의 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하루밤 지내면서 자기를 과시 할려고 끼가있는 친구들을 소개 시키면서 어깨를 으쓱인다.
이튼날 제천을 뒤로한채 강릉행 완행열차에 승차를 하였다 그 당시 충북선이나 강원선은 객차 3량에 화물칸을 달고 다녔다. 차장(승무원)이 한사람으로 검표를 해도 앞칸부터 시작되기에 계속 밀려나가 마지막칸 에서 다시 원위치하면 제천에서 강릉까지는 무사히 통과가 가능한데 이날은 운이 안좋았는지 승객이 적어 검표를 받게 되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차장(승무원)이 다가오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뛴다. 도비(기차가 운행중 뛰어 내리는 것)를 하느냐 차장(승무원)한테 무릎 꿇고 사정을 하느냐 순간적으로 판단을 해야한다
그순간 살았다! 하고 마음속으로 외첬다 기차가 오름막길에서 걷는것보다 약간 빠를 정도로 힘들게 달린다 순간적이다 내가먼저 기차에서 뛰어내리며 기차가 달리는 쪽으로 뛰어하고 내려서 긴장된채 돌아보는 순간 성공이다!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좀 빨리 달린다 해도 충분히 타고 내릴수 있지만 두 친구들이 해냈다는 것에 감동적인 눈물이 났다.
삼복의 뜨거운 태양아래 눈처럼 푹푹 빠지는 먼지를 밟으며 황지역에 도착하니 초라한 역에 석탄을 싣는 화차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
기차를타고 큰 도시역 에서 내리게 될 경우 두명의 꼬리를 달고 기차역을 통과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승하차는 작은역을 택하기로 했다
이름있는 도시역 전후에는 작은역이 있고 그곳에는 한두명의 역무원이 있기에 4통 팔달인 역사를 쉽게 통과할수 있다.
혹여 잡힌다 해도 한두명이 근무하는 곳에서는 사정을 하면 제법 잘 통한다
작은 역에서 하차를 하고나면 시골길을 걷게된다 식사 시간이 되면 민가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아니면 버스에 승차를 하기도 한다.
차장(안내양)에게 누님이라 부르며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고향 이야기 현재의 느낌 등 있는 이야기 없는이야기 하다보면 상대방이 어느쪽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다 그때부턴 그쪽 방향으로 공략을 하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고 무임 승차에 성공한다
어째든 여자는 모성애 때문인지 퍽이나 잘 품어준다 . 끼니를 때우는 것은 도시보다는 농촌으로 가서 학생이며 무전 여행을 나왔다고 솔직한 표현을 하면서 끼니를 부탁하면 깡보리 밥에 열무김치를 차려주며 고생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영문 모르는 눈물이 핑돌고 집에서 차려주는 진수성찬보다 더 맛있게 먹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곤 하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농촌이 인정이 더많다
밥을얻어 먹는것도 당당해야 한다 축처진 어깨를하고 한끼의 식사를 부탁하면 거지 취급을 하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면 제대로된 대접을 받는다
고행을 자처해 나온터라 어려움도 견디며 한달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행과 배고픔도 있고 어쩌다 한적한 마을 모퉁이를 돌다 참외밭을 보면 먹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부모님 생각이 절로난다 집에 있었다면 참외서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따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부모님이 보리쌀 한되박 들고가서 사서라도 주었을 턴데 너무도 먹고 싶은 마음에 침이 꿀꺽 넘어간다
어려움을 극복할줄 알아야 내 인생 종착지까지 갈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으며 우여 곡절 끝에 설악산 까지 도착했다 거대한 울산 바위는 산정상까지 누가 옮겨 놓았는지 자연의 이치는 무한의 세계다
대청봉 소청봉을 지나 봉정암을 거처 백담사까지 숭고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다
뙤약빛의 강렬한 태양.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그위를 지나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는 계곡의 회파람소리로 돌아와 흐르는 땀을 씻어주고 파고드는 산 바람은 가슴을 서늘하게한다
산사에 깊은 정을 남겨두고 푸른물결이 넘치는 경포대의 소나무 숲에서 강렬한 태양을 피하려니 출렁이는 바닷물이 모래위를 쉴새없이 넘나들고 잔잔한 파도물결은 하얀 색으로 모래와의 경계를 표시한다
힘차게 출렁이는 바다만 보아도 젊음이 충동질하고 푸른 바다의 손짓에 매혹되어 뛰어 들었던 즐거웠던 시간.
그때 그시절 수영복도 없이 사각 팬티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채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해수욕을 즐겼던 아름다운 추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된다
1960년대 그때는 지금과 같이 수영복이 원색적으로 야하지도 비키니도 아닌 원피스 수영복인데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도 그것은 충효예와 윤리를 유난히 강조하던 조선시대의 선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해수욕장이 아닌 도시에서도 뜨거운 여름을 이기려고 핫팬티에 배꼽을 내놓고 다녀도 개념치 않는다
윤리와 충.효.예. 는 고조선때 부터 내려온 사상으로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호혜사상 이라고 한다 “임금은 義로와야하고 臣下는 國家에 忠誠하고. 父母는 子息을 사랑하고 자식은 父母에 孝道하고. 夫婦간은 서로 尊敬하는 것이 忠孝禮 의 근본 이란다
1970년대에는 잡지의 삽화에 모든 곳을 가리고 배꼽만 구경시키며 돈을 받는 해수욕장의 진풍경을 실리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에 흥미 꺼리가 되기도 했는데 지금 같으면 아무 감정도 못 느낀다
세월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혹 지나친 조상들의 윤리의 덕이 아닌가?
아무튼 나는 강렬하며 원색적인 것을 좋아 한다
뜨거운 여름이 있어 곡식이 자라고 가을이 있어 곡식을 거둘 수 있으니 여름이 그 얼마나 고마운 계절인가? 그 또한 수평적 나눔의 사상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