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하 수상해서 일까, 꽃나무조차 계절 감각을 잃어버렸나 보다.
동짓달 칼바람이 외투 앞섶을 바짝 여미게 하는 시절인데도, 산책길 모퉁이의 양지 바른 둔덕을 따라 난데없이 개나리가 무리를 지어 피어나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무엇이 그리도 급해서 이 척박한 계절에 저렇게 가녀린 꽃망울을 터뜨린 것일까. 살을 에는 추위에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화사하다는 느낌보다는 외려 안쓰럽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철을 잊고 있는 건 이 개나리뿐이 아니다. 이따금 차례상에 올릴 제수祭需를 장만하러 농산물 공판장에 가 볼라치면, 동지섣달임에도 도무지 없는 과일이 없다. 사과나 배처럼 늦가을에 수확하여 겨우내 갈무리해 둔 것들이야 어련하랴마는, 한여름에나 썩 어울릴 법한 수박이며 참외며 딸기 같은 과일들이 마치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버젓이 가게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땐 엉뚱하게도 ‘역리逆理’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쳐가곤 한다. 역리, 그렇다. 계절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설자리를 망각한 역리가 아니고 또 무엇이랴. 위험천만하게도, 이건 필시 조물주의 섭리 앞에 내미는 하나의 도전장이다.
어찌 꽃이며 과일 따위에 한할까. 우리 사는 세상일에 온통 역리가 판을 치고 있다. 자신의 직분을 헌신짝처럼 팽개친 채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답지 못한 일을 마구잡이로 꾸며대는 사악한 무리들이 대관절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사람들은 역리에 자신을 내맡기고 애써 정도正道를 외면해 버리길 좋아한다. 정도는 대개 험난한 가시밭길일 때가 많은 까닭이다. 누군들 굴곡 지지 않은 평탄한 길을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비도非道는 마왕처럼 사탕발림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이즈음의 세상은 사회적 정의며 도덕적 양심이며 삶의 정신적 가치 같은 것들이 깡그리 실종되어 버린 지 하마 오래다. 때문에 역리가 순리 앞에 폭군처럼 군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모질고 독한 인물의 간악한 흉계에 말려들어 강물보다 깊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참을 수 없는 역리, 이 같은 어지러운 세상사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마천司馬遷 같은 역사가는 “천도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가.”라며 통탄하지 않았던가. 이천 년 전 그 시절이 정녕 그러했었다면, 오늘날같이 비정하고 삭막한 세상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하랴.
남에게 휩쓸리지 아니하고 홀로 바른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지난至難한 여정이다. 그러기에 옳다는 믿음 하나로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삶은 얼마나 당당하고 가치로운가. 그런 삶은 당장은 힘에 부대껴 휘청거릴는지 모르지만 역사가 그의 둘도 없는 응원군이 되어 준다. 아니, 거창하게 역사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올곧음 하나를 지향하며 걷는 자세야말로, 설사 고독하기는 할지언정 스스로 떳떳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어느 호스피스의 고백이 생각난다. 천년만년 살 줄 알고 억만금의 불의不義한 재물 그러모았지만 결국 불치의 병마로 쓰러진, 한 기업 회장 부인의 사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렸을 때, 너무도 억울해한 나머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서 단말마斷末魔 같은 비명을 지르며 숨져 갔다고 했다, 손아귀를 꽉 움켜쥔 채로.
“안 돼! 안 돼!”
그 호스피스의 말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면, 정말 이보다 더 추해 보일 일이 없을 것 같다. 아니 추하다 못해 차라리 측은하게까지 여겨진다. 죽음에의 길이 안 된다고 부르짖는다 해서 멈추어질 수 있으며, 재물의 속성이 움켜쥔다고 하여 붙들어 맬 수 있는 것이던가.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두고 차롓걸음이라 일렀고, 일찍이 다산 선생은 단단히 쥐려 들면 들수록 더욱 미끄러워 빠져나가는 것이 재물이니 그래서 재물을 메기 같은 물고기라고 했다.
우리는 내남없이 비도非道의 끝이 이렇게 허망한 줄을, 아무 일 없이 살고 있을 때는 늘 잊고 지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우리들 생의 마지막 순간이란 마음으로, 인과의 이법理法 앞에 옷깃 여미며 살아가야만 할 것 같다. 내가 지은 과보果報는 설사 내 당대에 받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불탄 뒤의 재처럼 흔적으로 남아 먼 훗날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할아비의 선업善業은 손자 삶의 거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한살이란 그야말로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는 것. 부와 권력, 명성이며 쾌락은 풀잎 위의 이슬과도 같다고 했다. 하여 누구라도 이 덧없는 찰나적 가치들을 위해 서슴없이 역리를 저지르는 어리석음에 빠져들어서는 아니 되리라. 이따금씩 시끄러운 바깥 세상에 귀를 닫고, 사람살이에서 진실로 소중하고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헤아려 보며 살아가야 하리라.
삼 일 동안 닦은 공덕 천 년의 보배이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 하루아침에 티끌이라고 했다. 회심곡回心曲의 말씀이다.
문득 이 서늘한 가르침이, 하늘 저 먼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영혼의 음악이 되어 귓전을 두들긴다.
(곽흥렬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