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은 기생충(기식자)의 행동 방식을 보여준다. 기식자인 기택(송강호) 가족이 하는 일은 거짓말이라는 소음을 만들어냄으로써 숙주인 박 사장 가족들 사이에 진짜 정보가 유통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기생충에 의한 감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은 영화 ‘에일리언’의 한 장면.
■ 기생충으로 본 세상의 모습
거짓말로 숙주의 판단을 흐린 뒤 침투하는 방식에 영화·문학·음악서도 극한의 혐오대상
크리스털에 불순물 넣으면 트랜지스터 되듯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키는 ‘매개자’역할하기도
“가련한 인생아. 인종의 거머리야. 가치 없는 인생아. 밥 버러지야, 기생충아!”
이 욕설이 기생충(넓은 의미의 모든 기식자)에 대한 나의 첫 예술적 체험은 아니다. 기억할 수 있는 첫 자리에 ‘시골 쥐와 서울 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읽었던 김동인의 ‘붉은 산’에 나오는 저 구절은, 중학생 시절 조국 없이 만주에서 기생충으로 살아간 한 민족의 이야기에 줄곧 젖어들게 했다. 그렇게 기생충 또는 기식자는 예술을 통해 삶을 체험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이 개념을 통해 체험해 본 세계는 다양하다. 기식자가 전자화되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로 체험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영화 ‘기생충’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기식자, 기생충, 바이러스 등은 한편에선 엄밀히 구별되는 개념이지만, 이 글에선 ‘숙주를 통해서만 기능하는 자들’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기생충이라는 개념에서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바라보기 위한 어떤 열쇠를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이 이 글에서 우리가 답을 얻고 싶은 물음이다.
기생충은 전근대에서 ‘위생적인’ 근대로 들어서기 위한 문턱으로 체험되었다. 근대국가는 위생이 생존을 위해 달성해야 할 과제임을 간파했기에, 근대문학은 수시로 기생충과의 긴장 관계에 들어간다. 가령 이상의 ‘날개’에서 “19세기는 되도록 봉쇄하여 버리오”라고 말할 만큼 앞서나가는 모더니스트의 정신은 맑은 은화로 표현된다. 반면 그의 육신은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표현되는데, 불편한 이 횟배는 어쩌면 근대정신이 메고 가는 전근대적 유산 같은 것이 아닐까? 다른 맥락에선, 기생충에 대한 실생활에서의 두려움도 목격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 ‘도련님’(1906)의 주인공은 고기를 구워 먹으며 말한다. “그쪽은 아직 덜 익었잖아요. 그런 것 먹으면 속에 기생충 생긴다니까요.” 부정한 음식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시대건 있었으나 그 두려움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생충 알을 통해 체험하는 것은 과학 또는 현미경이라는 수단을 손에 꼭 쥔 채 국가 보건을 염려하는 근대의 두드러진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끔찍한 기생충의 예술은 미셸 투르니에의 ‘메테오르’에서 읽을 수 있다. 무도회를 겸한 약혼식 연회에서 여주인공은 짧은 치마를 입고 박수를 받으며 중앙에 선다. 그런데 뭔가가 그녀의 무도화 위를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길고 희끄무레한 한 줌의 스파게티였다. 그러나 그것은 느린 연동운동으로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물체였다. 나는 즉시 고리 모양의 띠로 얽힌 그 타래 속에서 도로 청소부들의 촌충을 알아보았다.”(이원복 역) 약혼식 날 춤추기 위해 무대에 오른 여주인공의 배 속에서 촌충이 빠져나와 마룻바닥에서 살아있는 스파게티처럼 여주인공 대신 춤추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애인은 옆에서 케이크를 먹던 부인의 접시를 뺏어 얼른 그것을 치우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접시와 작은 숟가락을 빼앗고 두 걸음 나가서 파비네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작은 숟가락을 이용해서 접시 안에 촌충을 담았다. 녀석은 한 줌의 뱀장어처럼 미끈거리며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 일은 아주 까다로웠다.” 더러운 장면이 많은 토머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도 이 엽기적인 광경을 당해낼 수는 없다. 손님들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다음 날 예비신부는 혼자서 신혼 여행을 가게 된다. 사람들 앞에서 촌충을 좀 흘렸다고,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결혼과 파티가 끝날 만큼? 어쨌든 이 흥미로운 소설은 기생충이 사회가 거부하는 극한의 혐오 대상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겠지만 사실 기생충은 사회적인데, 숙주에게 침투해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매개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기생충은 완전히 박멸될 수 있는가? 위생의 기준이 더할 나위 없이 높아져서, 기생충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사라졌고, 기생충에 대한 혐오감 역시 더욱 가차 없어졌다. 그러나 형태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늘 기식자와 함께 살아왔다. 하찮아 보이지만 떠나지 않는 온갖 고질적인 질병이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숙주로서의 삶이다. 베토벤과 무소륵스키가 곡을 붙였던 괴테의 ‘벼룩의 노래’에서, 왕궁이 간신배를 근절하지 못하듯 가련한 숙주는 벼룩에게 물리면서도 그놈을 꼭 눌러 박멸하지 못하는 그런 운명을 가졌다.
숙주의 입장에서 기생충은 이론의 여지없이 박멸의 대상이며, 기생충에 대한 논의도 박멸이라는 과제에서 완성되고 끝난다. 그러나 기생충의 행위 유형은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성찰 대상이다. 기생충은 다분히 주체의 근본적인 지위를 뒤흔드는 현대 철학적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근대적 주체(가령 데카르트의 실체)와 달리 독립된 주체로 있을 수 없고, 말 그대로 다른 것에 기생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점, 즉 숙주 없이는 정체성이 없다는 점, 동일성을 지닌 주체로서가 아니라 숙주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데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숙주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기식자는 무슨 일을 하는가? 기식자 또는 기생충을 가리키는 ‘Parasite’라는 제목을 가진, 철학자 미셸 세르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어떤 크리스털에 불순물을 집어넣어 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요행히도 트랜지스터를 생산하게 될 것이다. 반도체를 말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도태를 이해했다. 기식자는 재가동자이다. 그는 불가역적인 순환을 창조하고, 하나의 방향을 창조한다. 그는 방향을 만든다.”(김웅권 역) ‘불순물’인 기식자는 숙주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을 열어 새로운 길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예를 ‘에일리언’ 시리즈 중 하나인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에일리언’ 시리즈 전체가 기생충에 의한 감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텐데, 영화가 시작하면 곧 외계에서 온 인류의 창조자는 기생충이라 해도 좋을 뭔가를 마신다. 그러면 그의 동일성이 분해되면서, 불가역적인 시간, 그야말로 새로운 지구의 역사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바로 기생충에 감염된 창조자로부터 인간의 유전자와 세포가 탄생해 자신의 시간과 방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을 담은 ‘프로메테우스’의 공식 예고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얹혀 있다. “왕은 통치한다. 그러고 나서 죽는다. 이는 피할 수 없다.” 어떤 막다른 골목을 뚫어야 할 때 외계인 왕은 이질적인 것, 기식자가 일으키는 동일성의 파괴를 통한 변신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불가역적인 새로운 길을 열어나간다.
불순물로서의 기식자의 역할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을 꼭 집어 말하면, 그것은 세르의 말처럼 ‘메시지의 차단’이다. “기식자는 무엇인가? 조직자이고 관계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체계의 한 장소에서 기관의 메시지들을 차단한다. 그것은 아마 소음일 것이다.” 기식자는 일종의 ‘소음’이다. 이 말에 대한 많은 예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아마도 최근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을 찾자면 ‘랜섬웨어’일 것이다. 불청객, 갑자기 찾아들어 컴퓨터 안에 기식하는 렌섬웨어의 본질은 파일들을 암호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익숙하게 소통하던 파일들 사이에 끼어들어 소음을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 말이 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도록 소음을 만드는 이 기식자의 행동 방식을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다. 아들, 딸, 아빠, 엄마 등 차례로 나타나는 기생충들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바로 거짓말이라는 ‘소음’을 만들어 냄으로써 숙주에게 진짜 정보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한다. 이 영화에서 기생충들은 말(거짓말)을 통해 숙주 속에 침투한다. 기존의 메시지를 차단하는 일종의 소음 만들기가 기생충이 숙주에 침입하는 방식인 것이다. 기생충 서사는 숙주의 관점에서 많은 경우 공포 이야기로 만들어졌지만(에일리언), 기생충의 관점에선 정보를 속이고 숙주 속에 들어앉는 즐거운 이야기가 된다.
기식자로서, 말이 통하지 않게 하는 소음을 만들어 낸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리스도이리라. 헤롯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왕국에 침투해 숙주의 왕 자리를 차지하려는 명백한 기식자, 박멸의 대상인데 결국 이 기식자가 한 일이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라고 불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소음을 만들어 기존 종교와 사람들 사이의 정보 체계를 차단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 기식자는 지금껏 없었던 “하나의 방향을 창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식자라는 개념을 숙주의 관점에서 박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 개념의 더 넓은 가능성에 눈을 감는 일이다. 기식자는 숙주를 새로운 차원, 새롭게 창조된 길 위에 올려놓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생리학자 레리슈(Leriche)의 말은 매우 흥미롭다. “질병은 더 이상 인간에게 붙어 살고 있는 기식자, 그것이 탈진시키는 인간을 뜯어먹고 살아가는 기식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생리학적인 질서의 일탈, 처음에는 미미한 그런 일탈의 결과를 본다. 질병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생리학적인 질서이다. 치료학은 병에 걸린 인간을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적응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단지 생리학에만 해당하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 ‘기생충’이 결국 한국 사회에서 가리켜 보이는 지점 역시 저 말에 포개진다. 우리가 가진 사회적 벽들은 타인(기식자)의 개입을 통해 부서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침투는 방어되거나 거부될 문제가 아니라, 침투받은 자를 변화하게 만드는 문제, 새로운 신체와 질서를 탄생시키는 문제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미셸 세르(1930∼2019): 과학과 철학을 결합해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프랑스 철학자. 라이프니츠 연구, 인식론 연구를 통해 바슐라르를 잇는 프랑스 인식론계의 거장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생전에 프랑스 소장지식인들에게 들뢰즈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선정될 만큼 프랑스 안에서 최고 지성으로 평가받으면서도 대중 강연 등을 통해 대중과도 친숙한 사상가였다. 1930년 프랑스 남서부 아장에서 태어나 클레르몽페랑대, 파리 8대학, 파리 1대학,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프랑스 한림원 회원을 지냈다. ‘헤르메스’ 5부작을 비롯해 ‘기식자’ ‘천사들의 전설’ ‘엄지 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등 5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