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의지처를 삼을려고 하는 사람은
세속을 초월하여 온갖번뇌를 이겨내고
자연속에서 유유자적하며 무애의 삶을 살고 있는
도가 높은 어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분은
내가 유혹을 해도 마음이 아랫도리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위에 있는 단전(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지족선사를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그가 이미 생불로 소문이 나있는 고승(高僧)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나의 시험을 면제받을 수가 있겠는가.
색이 무너지면 남자의 세계에서는 인품은 말뿐이고
오십보백보로 그넘이 그넘 아니겠는가.
그분의 수도처가 천마산 지족암이라고 했겠다.
그럼 날을 받아 작업에 들어가야지!
지족이 황진이의 시험에 걸려 든 것이다.
천마산 지족암에 색기(色氣)가
짙은안개구름처럼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어찌하랴.
일진광풍을 몰고 올 황진이의 육탄공세를
지족은 온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인가.
지족은 꿈결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깨어 버렸다. 아직은 이른 새벽이다.
“참으로 요사스러운 꿈이 아니냐. 내 법랍 30년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도인의 마음에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불길한 예감이다.
평소에는 꿈을 꾸지 않는데 그것도 요망한 기운이 자기를 덮치는 꿈이라니...
잠자리를 걷어치우고 아침예불을 올리기 위해 법당으로 나갔다.
천마산 맑은 기운이 운무에 쌓인 산세와 어울려져 선경(仙境)을 방불케 하는데
기분은 야릇한 감정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지족선사를 시험할 궁리를 나름대로 하며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모시두루마기를 손질하여 지난번에 시장에서 사온 삼배고깔과 함께 보자기에 쌓다.
아침식사를 하고 오가며 먹어야 할 먹거리도 챙겼다.
동료기생에게는 몇 일전부터 산사에 불공을 드리려 갈 것이라 일러둔 터이라
간단히 눈인사만 하고 집을 나섰다.
계절은 녹음이 말없이 짙어가는 늦은 봄이다.
집을 나서니 마음이 설렌다.
이런 감정은 좀처럼 느껴보지를 못하였다.
왕의 팔촌동생이라는 종실 백계수를 만날 때도, 개성유수 송공, 판서 소세양,
선전관 이사종 등속을 만났을 때도 이런 설레임은 없었다.
분명 지족에게만 존재하는 끌림이다.
마음을 다독이며 산을 오른다.
천마산에 접어들어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갑자기 물소리가 요란하다.
조금을 올라 옆으로 나아가니 너럭바위 절벽위에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박연폭포였다.
장관이다.
어릴 적부터 가무를 익히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이나 올적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취하고
폭포의 위용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황진이는 폭포수 아래에서 가슴설레임도 벗어 던질 겸 지족선사 앞에서 뽑을
승무 춤사위를 노래와 함께 춘 다음 싸가지고 온 주먹밥을 점심으로 때웠다.
쉬엄쉬엄 쉬어가며 산을 올라 암자에 도착하니
당거미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조그마한 암자가 천마산 깊은 산속에서 다소곳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황진이는 불 켜진 법당 앞으로 나아갔다.
법당에는 지족으로 보이는 스님이 저녁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황진이는 예불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암자 곳곳을 살펴보았다.
어둠이 내린 산사에는 숲속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가 적막을 깨우고 있다.
한참을 지나니 법당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스님이 법당에서 나와 바로 옆에 붙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황진이는 세속에서와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세상 앞에 서있다는 것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약간은 설레이고 있다.
그러나 황진이가 누구냐.
한번 뜻을 세웠다면 성취를 하고 마는 여인이 아니던가.
황진이는 스님의 방앞에서 인기척을 내며
“대사님 산 아래에 사는 아낙입니다.
지족암을 찾을려고 헤매다 보니 이렇게 어두운 밤이 되었습니다.
대사님을 뵙기 위해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소저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지족은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