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봄이 오는 것들>/구연식
아침 식탁에 쇠고기 국보다 더 좋아하는 해쑥 된장국이 올라왔다. 하얀 대접에 초록 쑥 이파리가 대조되어 봄의 싱싱함이 물씬 느껴진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서 된장 냄새와 쑥 향이 어우러져 갑자기 인에 박힌 어머니의 손맛과 체취가 떠오른다.
어머니 생전에, 봄에는 쑥국과 자운영 무침을 가을에는 걸쭉한 토란국을 아들 밥상에 올려놓고 먹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아마도 당신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키워낸 아들이기에 그렇게 애틋하여 밥 한 술 국 한 모금도 당신의 가슴에 토렴하고 다독거려 먹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남녀 간의 결혼은 늘그막까지 부모가 안 계시니 부모를 대신할 반려자를 맺어주는 것 같다. 올해 처음 해쑥 국을 먹으니 별의별 생각이 엉키어 올라온다. 그 어머니는 하늘에 계시고 이제는 아내가 쑥국을 끓여주고 있다. 그저 고맙고 미안하다.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내가 어머니처럼 보인다. 어느 사이 젊음은 자식들에게 다 돌려주었는지 머리는 하얀 모시 타래처럼 뒤엉켜 있고 손은 삭정이가 되어 마르고 휘어져 있어 황혼의 모습이 슬프기만 하다.
오늘따라 그 옛날 어머니가 두꺼운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나물 바구니를 들고 고향마을 들녘에서 쑥을 캐던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오늘은 3.1 절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게양해 놓은 태극기가 요란을 떨며 펄럭거려 풍향과 풍력을 알려준다. 섣불리 외출은 삼가라는 몸짓 같다. 공연히 오기가 생긴다. 시계를 보니 오후 한나절이 지나서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이곳에서 고향마을에 걸맞은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북녘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의 향수에 동정이 간다.
전주 난전 들녘을 걷고 삼천천을 돌아오기로 나섰다. 난전 들길 바람을 안고 걸으니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서 실눈으로 바로 앞과 옆을 보며 걸었다. 탱자나무 사이에 가냘픈 회초리 같은 가지에 홍매화는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었는지 아니면 탱자 가시에 주눅이 들었는지 초라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도 올해 들어 처음 꽃을 보니 반갑다. 밭둑에는 냉이가 겨우내 엄마가 덮어준 누렁개비 이불을 살포시 쳐들고 앙증맞은 작은 초록빛 손을 내밀어 햇빛에 비비고 있다.
하늘에는 까치 부부가 새끼를 낳고 기를 작은 나뭇가지를 물고 나르는데 봄바람이 심술을 부리는지 상승기류와 하강기류를 뒤죽박죽 번갈아 놓는다. 까치는 바람에 곤두박질치듯 하강하면서도 악착같이 나뭇가지는 물고 태풍이 불어도 끔쩍 않는 새끼들을 위한 둥지를 짓기 위해 저 멀리 숲 속으로 날아간다. 만물의 영장 인간보다 본능적 모성애가 더 강한 것 같다.
드디어 전주 삼천천에 도착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평소보다 사람이 적게 나왔다. 천변 가에는 본래 물가와 산에서 따로 살았을 테지만 억새와 갈대가 한데 어우러져 정답게 살고 있으니 아웅다웅하며 사는 인간 삶이 부끄럽기도 하다. 물가에는 버들강아지 꽃봉오리가 솜털을 밀어내고 봄 처녀처럼 부끄러운지 노란 꽃 수술을 숨기고 있다.
조금 깊고 멀리 떨어진 물웅덩이에는 기러기 한 마리가 혼자 물갈퀴 질을 하고 있다. 몸이 불편하여 단체에서 낙오되어 있는지, 아니면 이곳에서 오래 살아 텃새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조금 있으면 겨울 나라로 가야 할 텐데 공연한 걱정거리가 된다. 사정이 있어 우리나라에 잠시 머물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처럼 느껴진다.
삼천천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송사리들이 햇빛이 데워놓은 얕은 물에서 노닐다가 나를 보더니 얼굴보다 큰 눈망울을 두리번거리며 흙탕물을 일으켜 숨고 있어 방해한 것 같아 미안했다. 천변 위 도로를 걷고 있으니 온통 붉은색이 산비탈을 물들여 햇빛에 유난히 반짝거린다. 눈을 들어 자세히 보니 복숭아 과수원이다. 벌써 꽃망울을 만들기 위해서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생리적 작용처럼 붉게 보였다. 암탉이 알을 낳기 전에 닭 볏은 유난히 붉어 주위의 적에게 경계의 표시를 주는 것처럼 복숭아나무도 꽃망울을 만들기 위한 봄 준비인 것 같다.
정신없이 욕심껏 봄을 찾기 위해 온 들판과 천변 둑을 마냥 걸었더니 이제는 다리도 지쳐있고 해님도 벌써 모악산 뒤에 숨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등에 촉촉하게 젖은 땀이 식어서 차가워진다. 봄이 오는 것을 탐닉하러 서둘러 나왔는데, 삼라만상이 아직은 춘 3월 봄의 무대를 올리기 전 그들만의 비장한 리허설의 모습인 것 같아 무엇이 성급하여 훔쳐본 느낌이어서 미안했다.
아름다움은 영겁의 산고 끝에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극치이다. 인간이 신의 섭리에 끼어들어 봄을 가타부타함은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까? (20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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