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마태오 12,1-8)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말씀의 초대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침공하기 전에 히즈키야 임금은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으며, 이사야 예언자도 그의 임종에 관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이사야의 권고대로 주님께 간청하여 병이 낫고, 열다섯 해나 더 살게 된다(제1독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 조문이 결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기록한다.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인 예수님께서는 성전보다도 더 위대한 분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임을 제시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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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주님께 시비를 겁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이라면 당연히 절도죄로 고발당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배고픈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밀 이삭 한 줌을 뜯어 먹었다고 절도죄로 몰아 부칠 정도로 인심이 흉흉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천 년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인심의 후덕함 여부를 떠나, 안식일 법을 가지고 주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앞서 법을 먼저 따집니다. 이는 주님의 행위에 트집을 잡거나, 법을 앞세워 실추된 자신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욕심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법보다 사랑이 우선이며,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참된 예배임을 제시하시면서, 당신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십니다. 신앙인은 법을 따지기에 앞서,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실천이 삶의 기본 정신임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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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제자들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배가 출출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항의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추수는 율법에 금지된 노동이었습니다. 그러니 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억장이 무너질 일입니다. 이삭 몇 개 비벼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보다니 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경직되어 살았습니다.
계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도 추수 행위로 보셨을까요?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기에 앞서 다윗의 예를 드십니다.
다윗은 배가 고파 제단에 바쳐진 제사 빵을 먹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금지된 일입니다. 하지만 배고픔이 참작되어 용서받습니다. 그러한 다윗도 용서받았는데 이삭 몇 개 비벼 먹은 것에 웬 호들갑이냐는 예수님의 반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단에 바쳐진 음식보다 다윗이 더 소중합니다. 안식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아니,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서 더 위대하시다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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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은 하느님의 자비,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도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흠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작가는 일찍이 악인들의 못된 짓을 체험하고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재앙을 모르는 그자, 저주만을 퍼붓습니다. 마을 으슥한 곳에 숨어 앉아 죄 없는 사람을 몰래 죽이려 그의 눈은 힘없는 이를 살핍니다. 그는 덤불 속의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서 노립니다. 가련한 이를 잡아채려 노리다가 그물로 끌어당겨 잡아챕니다. 이렇듯 가련한 이는 두들겨 맞아 쓰러지고, 힘없는 이들은 그의 폭력에 넘어집니다.” 오늘날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을 곳곳에서 노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악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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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안 들어
- 나명옥 신부-
한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안 들어’ 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정말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반대로 예뻐 보이면 이에 낀 고춧가루도 애교로 보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 몇 개 잘라먹은 행동을 가지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가지씩이나 말입니다. 첫째, 추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에, 둘째,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셋째, 키질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에 저촉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니 장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숨이 탁탁 막힙니다. 법 (法) 이란 바로 물이 흘러가듯 숨통을 터주는 것이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지나치게 법이나 규칙만을 앞세우면 세상살이가 삭막해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율법만 보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율법 너머 배고프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자비가 필요한 이들이 보였습니다. 안식일은 법대로 지키고 안 지키는 것에 참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고 살리며, 이웃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날로 살아갈 때 그 참뜻이 있음을 명심합시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 방으로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곤 하지요. 하지만 제 방에 손님이 올 때마다 솔직히 부끄러운 마음이 늘 가득했답니다. 왜냐하면 무척이나 지저분한 방이 바로 제 방의 모습이거든요.
솔직히 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깨끗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리를 해도 그때뿐이지 결코 깨끗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지요.
“난 이렇게 지저분한 것이 편해.”
사실 지저분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저히 정리를 할 수 없으니 천성적인 것처럼 미루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깨끗하게 방 정리를 하는 사람이 부럽고,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난 달 간석4동 성당에서 교구 성소국으로 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번만큼은 정말로 정리 정돈 잘하면서 깨끗하게 살아 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지저분한 것을 과감하게 버렸고, 정리할 것을 먼저 정리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항상 아깝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했고, 버리지 못하는 것을 이것저곳에 놓아두다보니 방이 지저분해졌지요. 또한 나중에 정리하겠다는 미루는 성격 때문에 항상 어수선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잘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달이 지나도 괜찮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더불어 이제까지 그냥 체념하면서 시도도 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반성하게도 되네요.
이것 또한 제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나도 할 수가 있는데,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자기 자신을 하나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한 그리고 그것이 주님 뜻에 벗어나지 않는 한, 반드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따지는 바리사이들 역시 안식일 법이라는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예수님 제자들이 어겼다는 이유로 예수님 역시 옳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근본적으로 모르고 있었던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고정관념이 나를 위축되게 만들며, 더 나아가 내 주변과 세상을 위축되게 만듭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 정반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무엇일까요? 또한 나의 고정관념으로 내가 지금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른 사람들 역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하나씩 버리는 연습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얻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은 버릴 줄 아는 것이다(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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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신효원-
지난 스승의 날 아침에 수호가 꽃바구니를 불쑥 내밀었습니다. 장미 열 송이가 예쁘게 담겨 있었습니다. 수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4년간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속을 무던히 썩이다가 지난 가을에 우리 대안학교로 왔습니다. 수호는 오히려 선생님과 부모님이 자신의 속을 무척 썩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그 점에 대해서 분이 덜 풀렸는지 자주 화풀이할 데를 찾았습니다. 결석을 많이 했고 수업시간에도 영 게을렀습니다만 새학기 들어서는 표정이 밝아지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수호가 변했다고 기뻐합니다. 들어주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분위기에 많이 편안해진 것 같았습니다. 꽃바구니를 가져온 것도 누구에겐가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겠지요. 꽃바구니에서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고마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특별한 물건보다는 밝은 미소와 상냥한 인사가 더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물은 언제나 반갑습니다. 관계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지요. 그런데 가장 좋은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정겨운 눈빛, 설렘과 용기를 주는 말, 감사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내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
-김찬선신부-
오늘은 웬일일까?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주님의 제자들에 대해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의 역성을 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에는 이들이 참으로 심통 사납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런 사람은 아니리라는 것이지요.
심통 사나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심통 사나운 사람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든 그를 깎아 내리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귀신같이 그의 나쁜 점과 잘못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를 헐뜯습니다.
바리사이 중에는 이런 못된 인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 바리사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상당수의 바리사이가 나쁘고 못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곳에 법으로 대표되는 당위와 의무만 남습니다.
가끔 저를 보며 놀랍니다.
남이 잘못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심통 사나운 사람처럼 잘못된 점만 봅니다.
상대의 문제도 그리 크지 않고 저도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어떤 때 사랑보다 분별심이 더 커서 시비가림이 날카로워지고
옹졸하고 까칠하게 법, 원칙을 들이댑니다.
그러다 이런 저를 보며 깜짝 놀라
분별심과 시비지심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잘 못보다는 그의 고통을 보자”는
연초의 결심을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의 반복이 인생이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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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를 벗고
-전삼용신부-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랍스터를 단 한 번 먹어보고 그 이후엔 절대 먹지 않는 사연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신부가 부자동네 본당에서 제 2 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식사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다고 합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 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 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그 신부님은 워낙 럭셔리해서 니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워낙 잘 사는 집 아이들이라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 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할 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나오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하려고 했는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촌스러웠던 그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대며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테이스팅은 포도주 숙성동안 공기가 들어가서 맛이 변하지 않았는지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 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아마 음식 전문가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먹어서 맛있으면 좋은 음식입니다.”
정말 자기 자신을 감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은 자신을 지옥에서 살게 합니다. 특별히 자신을 감추고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격식을 차리는 것입니다. 상류사회에서 쓰는 언어가 따로 있고 그 사람들이 가는 쇼핑몰이나 레스토랑도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감추는 가식적인 것일 때에는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운 감옥으로 바뀌고 위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긁어 비벼서 먹자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다고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법의 본질이 중요하지 겉모양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또 상황에 따라서는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법도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예로, 다윗이 도망 다닐 때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고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은 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바로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만이 계시다면 그 성전의 모양이 어떻든 성전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성전은 그 모양이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하더라도 돌무더기에 불과합니다. 성체가 없고 미사가 드려지지 않는 성전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성전의 겉모양이 바로 법입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이고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고 있으면 그 성전의 모양은 변형되어도 괜찮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안에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고 그저 가식적으로 보이는 면만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를 저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예루살렘의 위대한 성전도 저주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수 없이 복잡한 외형 안에 본질인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인사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그 어른들을 존경해서 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칭찬해주니 만나는 어른들에게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물론 인사하는 사람을 다 그만큼 존경하고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보다는 어른들을 더 존경합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예를 차리는 사람들의 겉모양이 아니라 그 사람 안의 진심을 봅니다.
공자는 덕의 최고의 경지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것들에 그 내용을 채워가다 보면 그 외형과 내형이 같아지는 경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안의 내용인 것입니다. 겉으로 그런 척 하며 살면서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 줄 알고 착각하며 사는 것보다, 법도에 어긋나더라도 껍데기를 벗고 솔직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본질을 완성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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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이 텁수룩한 거지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을 지나가던 장난기 많은 사람이 이 거지의 수염에 구린내가 몹시 나는 썩은 치즈를 발라놓았지요. 그러니 잠에서 한참 만에 깬 거지는 기분 좋게 일어났을까요? 아니지요. 비록 지저분한 자기였지만, 구린내가 몹시 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잠자고 있는 사이에 이 근처에 누가 큰일(?)을 보았나?’
하지만 냄새는 분명히 가까이 났지만, 큰 일 자국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지요. 거지는 ‘내가 아직 술이 덜 깨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하고는 해장술을 한 잔 먹기로 했지요. 술을 한 잔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여전히 풍겨대는 수염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로 술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술집을 나온 거지는 꽃을 향해 걸어가서 꽃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꽃향기와 치즈 썩은 냄새가 석여서 더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성에게서 냄새를 맡았습니다. 이 여성에게도 화장품 냄새와 썩은 냄새가 섞여서 더욱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경찰관이 자기 옆을 지나가는데 경찰관에게서도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거지가 투덜대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젠장, 낮잠 한숨 자고 났더니 온 세상이 다 썩어 버렸구먼.”
사실 썩은 냄새는 자기 코 밑의 수염에 바른 치즈 때문인데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들을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에서 찾으려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남의 문제점을 먼저 보기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때, 진리에 더욱 더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척이나 시장했는지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지요. 이것을 보고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하지요.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를 한 것이고,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남의 죄만을 바라보니,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장 강조하신 계명인 ‘사랑’의 계명은 오히려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윗 일행의 이야기를 전해 주시면서, 안식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혹시 나의 문제점은 항상 뒷전이고, 남의 문제점만을 세세하게 꼬집어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사랑 역시 맨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문제점을 찾기보다는 나의 문제점을 먼저 찾아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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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는 안 되는 일
- 조성숙 수녀-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어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손으로 뜯어 먹은 일을
노동으로 판단하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주장입니다.
이 논쟁 내용을 가볍게 읽자면 저는 당연히 안식일 법보다 사람을 아끼시는
예수님 편에 서서 율법주의로 눈이 먼 바리사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과연 저는 어떻게 행동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사람들이 일단 그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흔히 이 가르침들은 신앙 세계에
대한 헌신과 얽혀져서 철옹성이 되어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극단적인 한 예를 최근 <신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힌두교의 카스트에도 포함되지 않는 비천한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경제학자가 된 인도의 나렌드라 자디브가의
가족사입니다. 전생의 악업 때문에 미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불가촉천민들에게는 경전을 읽거나 교육을 받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
이었습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가르침을 깨는 데 3,500여 년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그것은 “하느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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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기정희 수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또 트집을 잡으며 예수님께 도전한다.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먹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안식일의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그네들의 눈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보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명쾌한 말씀을 던지신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관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었다는 것, 성전보다 큰 이가 바로 당신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가수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들을 때면, 서울역 근처에서 학교 다닐 때 일이 떠오른다. 그곳은 행려자들이 많아 저녁 시간에는 사실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걸음을 빨리 하곤 했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나를 향해 달려오더니 어깨를 덥석 잡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소리를 지르자 아저씨가 얼른 손을 내리며 “놀랐어요?” 하며 당황해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데 아저씨가 “수녀님, 저 안드레아예요. 복지병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아 반가워서 인사했는데….”라고 말했다. 순간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던지 “바삐 가던 길이라 놀랐어요.” 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버렸다.
과연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 그들을 보고 있는가? 세상이 말하는 실패한 인생들,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진 사람들로 치부해 버린 건 아닐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을 만큼 무엇이 나를 그들과 경계 짓게 했던가?
우리 수도회 설립자께서는 가장 가난하고 작은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마음이 문제다. 주님은 마음에 대해 말씀하시며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나오는 법이다.”라고 하셨다. 비록 사회와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 속에서 마음이 어두워지고 깨어지기는 했어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듯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 그들을 위해 주님이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 그분이 바로 오늘도 성체 안에서 당신을 내어 주고 계시다는 것,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이 사람을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건은 내가 평소 사람들과 사건을 어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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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사랑
-김찬선신부-
우리는 율법을 사람 위에 놓는 바리사이를 비판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하는 그 짓을 똑같이 하곤 합니다.
나를 미워하건 다른 사람을 미워하건,
우리가 미워하는 것 대부분이 같은 이치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해야 하는데 내가 왜 이러지’, 또는
‘이러해야 하는데 저 사람 왜 저러지’ 하고 미워합니다.
당위성을 나름대로 정하고 그래야만 된다고 스스로 강제합니다.
어제는 미사를 봉헌하는데
어떤 분이 뒤에 멀찍이 혼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속으로 저는
‘저 사람 왜 저 모양이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모양이 어째서’하고 즉시 반발이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쩨쩨할까?’ 자책을 하였습니다.
쩨쩨함.
어떤 때 우리는 무진장 쩨쩨해집니다.
돈 몇 푼에 버들버들 떨고 인색한 쩨쩨함도 있지만
마음을 통 크게 쓰지 못하고
정한 작은 원칙이나 결정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 심지어는
지극히 주관적인 선호와 바람들에 집착하는
옹색하고 옹졸함의 쩨쩨함도 있습니다.
작년 북한 평화 봉사소 합의와 관련하여
북한과 마지막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때
북한 관계자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저에게 말을 전하여 왔습니다.
“김 찬선 신부 선생, 거 통 좀 크게 쓰시라고 전해 주세요!”
우리 신부가 북한에 상주하는 것,
편의 시설이 아니라 평화의 집이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원칙과 조건을 제가 끝까지 고집하니까
마음을 통 크게 쓰라는 얘기지요.
저의 고집이 작은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인데
북한 인민을 먹이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는 얘기지요.
우리의 마음을 다 읽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약점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작은 원칙과 조건 때문에 더 중요한 것 망치지 말고,
조건 달지 말고 합의하라는 일종의 압박이지요.
고민스러웠습니다.
‘너희들이 너희 인민을 소중히 여긴다면
너희 인민을 위해 너희가 양보하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떤 원칙과 조건보다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큰 메아리로 저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결국 제가 저의 조건,
아니 우리의 조건을 관철시켰지만
통 크게 쓰라는 말,
사람이 율법보다 소중하다는 북한식의 이 말이
저에게는 지금까지 깊이 남게 되었습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통 크게 쓰는 것.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 중요하고 하느님이 중요하다는 것.
불교에서는
‘불경이 너를 집착케 하면 불경을 태워버려라!’,
‘부처가 너를 집착케 하면 부처를 죽여 버려라!’합니다.
아무 것도 집착할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크리스챤적으로 이해하면
꽃보다 중요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법과 원칙보다 중요하고
사람보다 중요한 하느님은 말할 것도 없이
법보다도
원칙보다도 그리고
그 모든 인간관계보다도 중요하다는 얘기라 저는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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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바리사이파
-김종근 신부-
신학교 아침기도 시간의 풍경. 성당은 학년별로 모여 앉도록 좌석 배치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아침기도와 묵상을 하는 뒷모습만 봐도 학년 구분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졸고 있는 뒷모습이 학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아래 학년일수록 머리의 출렁임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가 다르게 조는 기술은 늘어나고 신학교 전 과정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꿈속에 있으면서도 거의 머리를 움직이지 않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사제품을 준비하는 신학생 시절이나 성품성사를 받을 때 가졌던 열정과 정의가 사제생활 중에도 변함없이 지켜나가기가 참 어렵다. 심지어는 사제들이 강론을 통해 강조하는 신앙생활의 모범은 오로지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인 양 강론 따로 생활 따로인 경우도 있다.
본당에서도 처음 시작하는 신앙인들이 기존의 신자들보다 더 순수하고 열심인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더 많이 알고, 더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때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사제로서 한 해 한 해 햇수를 더해가는 것, 본당에서 직책(봉사자리)이 하나씩 더 늘어나는 것, 더 책임있는 자리를 맡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바리사이파가 될 수 있는 유혹이 더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정신차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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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주인
-조욱현 신부-
예수님 시대에 밀밭은 길고 좁은 밭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러한 밭 가운데 있는 이랑은 언제나 통로로 쓰였다. 오늘 복음의 사건은 바로 이러한 밀밭 사이를 걷고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법은 단순히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율법 해석가들은 이것을 39가지 조목으로 세분하여 가르쳤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제자들의 죄목을 따져 보면,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는 것이고,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는 것이며, 알곡의 쭉정이를 가리는 것은 키질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는 것이니, 따라서 이들의 전체 행동은 안식일에 음식을 장만하지 말라는 그들의 율법을 어기는 죄였다. 이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며 예수님을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민수 28,9에 나오는 안식일이라도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예로 들어 답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어떠한 율법이나 제사를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위하는 것이 하느님께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호세 6,6을 인용하여 강조하신다. 즉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 앞에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이웃에 대해 선행을 베푸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책하시는 것이다.
가끔 고해 때, 단식재와 금육재를 궐했다고 고백들을 한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사순절에 대림절에 이러한 재를 시행할 때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흔히 인간적 관습에 따른 예의를 지킨다든지 성당에서 오래 기도할 줄 알면서도, 형제와 이웃을 위할 줄 모르고, 이런 경우에는 이랬어야 하지 않았느냐 하는 식으로 냉엄하게 판단하여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복음을 보고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오래 또 자주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던 표양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 오랫동안 기도도 하고 인간들 서로가 갖추어야 할 관례적인 예의도 존중해서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신,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래서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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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신부-
저는 양파를 좋아하고 즐겨 먹습니다. 양파를 좋아하는 이유는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양파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파만 있고, 속으로 갈수록 더 진짜 만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도 쉽고 먹기도 쉽습니다.
?세상도 아주 쉽고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일이나 모두 진심으로 대하고 진짜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특별히 신경 쓸 일도 긴장할 것도 없습니다. 진심으로 대하면 그 모든 것이 진짜로 이루어집니다. 너무나 쉽고 편합니다.
?신앙생활도 쉽고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무엇이든지 진심으로 대하고 진짜로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제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전례, 기도, 성사, 신심, 봉사, 자선, 공부 같은 모든 신앙생활이 아주 쉽고 편해집니다.
?독서의 히즈키야도 아주 쉽고 편하게 병을 고쳤습니다.
“몹시 앓아 거의 죽게되었을 때, “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주님께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진짜로 울면서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진심을 보시고 “그의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히즈키는 진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도 진짜 배가 고팠습니다. 진심으로 먹을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법도 성전법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답니다. 바리사이들도 어렵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람 앞에, 하느님 앞에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한번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일생을 가식과 위선으로 살면서 하느님과 백성을 기만하였습니다. 평생을 허례허식으로 허영의 삶을 살았습니다. 살기가 어렵고 힘이 듭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진실한 마음을 보시고 그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인”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뭐든지 진짜로 해야 합니다. 머리나 혀끝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무엇이든지 기쁘게 다 받아 주십니다. 진짜로 살아야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다 이루어 주십니다.” 진짜로 살면 모든 것이 쉽고 편합니다.
무엇이든지 진짜로 해 봅시다. 한번만이라도 ..
“하느님은 진실하시며, 그 하시는 일마다 자애로우시도다. 진실하심 우러르며 당신이름 찬양 하오리니,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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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김경식 몬시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예부터 밀 이삭을 낫으로 베어 가는 것은 안 되지만, 그 자리에서 손으로 잘라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신명 23,25).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곡식을 따서 비비는 것은 금지된 사항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인 질서를 내세워 제자들의 행동을 변호하십니다.
원래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주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안식일 법이 오히려 사람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간의 생명이 법률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다윗이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은 행동을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즉 어떤 법이든지 인간생명에 이바지하는 법이라야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예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9,3)한 호세아서의 말씀을 빌려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 사랑, 신뢰, 정의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정신을 가지고 제사를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같은 정신으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 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애쓰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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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는 신앙
-경규봉 신부-
믿음과 눈물로 드리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유다 왕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된 상황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그의 죽음을 예고한다. 이에 히즈키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간구한다. 당시 사람들은 일찍 죽는 것은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히즈키야는 자신이 일찍 죽는다면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므로, 이에 대해 슬피 울면서 주님께 눈물로 간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히즈키야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병을 낫게 해주시고 그로 하여금 15년을 더 살게 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마르코복음(9,14 이하)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악령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악령을 쫓아주시기를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마르 9,23) 하고 말씀하신다.
아이의 아버지가 큰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거나 악령을 쫓으실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이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사무엘 상권(1장)을 보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녀가 겪는 내적 고통은 상당히 컸다. 더구나 브닌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곤 하였을 때, 그녀의 아픔은 더더욱 컸다.
한나는 실로에 있는 신전에서 슬피 울면서 서원을 하며 하느님께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녀가 그처럼 눈물로써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녀로 하여금 사무엘을 낳도록 해주셨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좋으신 아버지이시다. 우리를 벌하시고 괴롭히시길 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녀인 우리가 깊은 믿음을 가지고 눈물로 간청했을 때,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아버지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항상 가르치셨다.
그리고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9-11) 하고 말씀하셨다.
히즈키야가 눈물로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눈물과 믿음을 보시고 그의 청을 들어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더 오래 살면서 주님의 은총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믿음 깊은 신앙인이 되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되자. 그리고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눈물로 호소하는 신앙인이 되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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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참된 의미
-장효강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시작하셨나요?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복음은 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율법의 준수에 대한 바라사이파 사람들과의 갈등을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시며, 모든 사물의 질서가 예수님 안에 주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데 대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합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분은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낸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을 해방하신 분이 인간을 해방코자 주신 계명인데, 그 참된 의미를 잃은 바리사이파들은 그것을 통해 거꾸로 인간을 억압하였습니다. 즉 본(本) 말(末)이 뒤집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뒤집어진 본말을 바로 세우고자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바리사파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첫 번째 예로써 신명기 23장 25절의 말씀, 즉 "이웃집 밭에 서 있는 곡식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집 밭에 있는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는 말씀을 통해 안식일 율법에 대한 분명한 해석과 함께, 참된 안식일을 지내는 방법이 모두 주님이신 예수님께 예속되어 있음을 전합니다.
두 번째 예에서는 사제들의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 말씀 하시면서, 성전에서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만 보증되지만 예수님 안에는 하느님께서 볼 수 있게 현존하여 계신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세 번째 논증은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의 제물을 원하시며 순종과 신뢰와 사랑과 참된 정의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성취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제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이 폐지되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나아가 온전히 안식일 규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시며 완성해 주신 것입니다. 즉 안식일 규정보다 더 중한 의무들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의무들을 더 촉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확립하신 사물의 질서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에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 삶에 역사하심을 감사드리는 찬미의 날로 봉헌하고 있습니까?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날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날로 봉헌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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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우연히 살찐 여우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의문이 생겼어요.
“여우가 어떻게 살이 쪘을까?”
그는 여우의 습성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 비밀을 알 수가 있었지요. 여우는 스스로 힘들게 사냥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자가 먹다 남긴 먹이로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옳거니! 여우처럼 사는 법이 가장 쉬운 방법이구나!’
마을로 돌아온 그는 큰 장사꾼이 장사하는 가게 옆에 조그만 가게를 내었습니다. 그는 큰 장사꾼을 위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조달했고, 그럼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작은 만족을 얻을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큰 장사꾼은 더 큰 사업을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기댈 곳을 잃게 되었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점점 모았던 재산을 탕진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그가 어느 날 거리에서 한 현자가 말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사자가 남긴 것을 먹겠느냐, 네가 남긴 것을 여우가 먹게 하겠느냐?”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영유하면서 살고 계신지요? 사자가 남긴 것이나 먹으면서 편하게 살려는 여우의 삶을 지향하시는지, 아니면 힘들고 어렵지만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사자의 삶을 지향하는지요?
여우의 삶이라는 것은 편하지만 분명히 별 볼 일 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삶을 꿈꾸고 있으며, 나 역시도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예수님께서도 그런 모습을 지향하셨을까요? 아니지요. 그분께서는 항상 창조적인 일을 하셨고, 그래서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과감하게 행하셨습니다. 바로 사자의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장면을 복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밀을 두 이삭 이상 따는 것만으로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로 간주했으며,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을 탈곡으로 생각했거든요. 따라서 제자들이 십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자처럼 주도적이며 창조적인 커다란 생각을 하지 않지요. 대신 여우처럼 작은 것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율법의 정신보다는 율법의 세세한 조문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는 가운데에서 율법의 조문만을 실천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제 우리들의 모습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여우의 삶이 아닌, 비록 힘은 들지만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처럼 창조적이며 주도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자의 삶으로 말입니다.
사자가 남긴 것을 먹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남긴 것을 여우가 먹게 하겠습니까?
빠다킹신부
진정한 자비는?
-여성국 신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 6,6). 호세아서의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신학교 때 봉헌 봉투가 생각납니다. 봉헌 봉투에 이
말이 적혀 있었는데, 토요일 저녁기도가 끝나고 봉헌 봉투를 가져와 방안
책상에 올려놓은 순간부터 마음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싸워야 했습니다.
사실 신학생 때 한정된 용돈으로 한 학기를 살다 보면 학기 말 즈음이면
용돈이 거의 바닥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학기 초에 십일조로
나눠놓았던 봉헌금을 야금야금 털어먹기
시작합니다. 담배 값으로, 외출 때 맥주 한잔 걸치는 가격으로….
그때부터는 저도 ‘어쩔 수 없는 천주교인’(?)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은 결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느님께
나를 봉헌했잖아!’라고 애써 자위해봐도 봉헌 봉투 겉에 쓰인
호세아서의 압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은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천 원만 내니 천주교인이라고
이죽거리고 있습니다. 봉헌하지 않는다고 큰소리 땅땅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자비의 안경은 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일말의 양심의
안경마저도 벗어던졌나 봅니다. 그래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한마디 일갈로 가슴에
다가왔으니 다시금 달려야겠습니다. 혹시 지금 저처럼 무딘 가슴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함께 달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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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정원순 신부-
◆“아파트 당첨될 가능성이 영순위이기 때문에 유리해.” 지하철 안에서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어느 중년 아주머니들의 대화 내용이었다. 경쟁이 치열한 인생살이에서 남보다 순위가 앞선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가! 남보다 무엇인가를 선점했다는 것은 승부가 속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세상에서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인생살이 가운데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기 마련이다. 우선순위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가치관이다. 우리는 가치관에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체로 한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말하자면 가치관은 인생살이에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바꾸기가 힘든 모양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제자들이 하고 있다고 예수님께 따지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12,1-2). 이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마태 12,3-4) 하시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앞이고 뒤인지를 바리사이들에게 한 수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신앙생활이 인생살이이고, 인생살이가 신앙생활일진대 나는 어떤 가치관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음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밀 이삭을 뜯어먹은 제자들
-김대성 신부-
스승을 보면 제자를 알 수 있고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은 것을 가지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고 있습니다. 안식을 규정은 율법의 여러 규정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규정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하여 하느님을 올바로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안식일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너무도 쉽게 이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도무지 이 장면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서인지 제자들은 율법에 그다지 크게 얽매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율법을 하찮게 여기신 것은 분명 아니셨지만, 그분은 율법 규정 그 자체 보다는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강조하셨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종종 율법주의자들을 꾸짖고 그들과 대립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누구를 위한 율법입니까? 무엇을 위한 안식일 규정입니까?
예수님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계속해서 대립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철저하게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당신이 베푸시고자 하는 사랑과 자비가 넘쳐흐르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오히려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어야 합니다. 자비를 위한 안식일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을 위한 율법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 앞에 머물면서, 단죄하고 판단하는 편에 서 있지는 않았는지 나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로 흘러갔듯이,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이웃들에게로 흘러갈 수 있기를 간청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양승국 신부-
<확대해석>
며칠 전 전철 안에서 겪은 일입니다. 전반적으로 자리가 널널하길래 노약자 석에 앉은 제 잘못이 컸던 것 같습니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한 중년남자가 자기도 거기 앉아있으면서 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더군요.
애써 모른 채 하고 혹시 열차표 살 돈이 남아있는지 용돈을 넣어 다니는 흰 편지봉투를 꺼내 살짝 열어보는 순간, 건너편 아저씨, 가만있지 않고 또 한 마디 건네십니다.
“어허, 저거 봐라. 어디서 뇌물 받았구나. 얼굴은 착하게 생겨가지고 그러면 못써. 이래 뵈도 나는 평생 나쁜 돈 한번 안받아봤어! 얼마나 받았어? 마누라한테 안 갖다 주려고 작전 짜고 있는 중이지?”
기가 차지도 않아서 대답하지 않으려다, 사람 좋게 생기고 주변에 사람도 없어서 이런 저런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에이, 제대로 들켰네. 어찌 그리도 족집게같이 잡아내버리네.”
제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뒤로 순식간에 따발총 같은 질문공세를 폅니다. 나는 인테리어 하는 사람인데, 그쪽은 뭐하는 사람이냐? 나는 58년 개띤데 그쪽은 몇 년생이냐? 우리 큰 딸애는 올해 고3인데, 그쪽은 어떤가?
그리고 결론,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앞으로 형 동생하자, 보아하니 내가 몇 살 형 같은데, 오늘부터 내가 형이다. 서울 올라오면 꼭 전화하라며 핸드폰번호도 교환했습니다.
내려오면서 속으로 엄청 웃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비가 아직 남아있나 확인하려는 제 행동이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웃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답지 않게 엄청 붙임성이 있는 사람, 초스피드로 가까워지려고 기를 쓰는 ‘지하철 형님’ 핸드폰에 제 핸드폰 번호를 찍어주면서, 이거 괜히 나중에 낭패 보는 것 아냐, 얼굴 생긴 것 보니 만만치 않은데 나중에 큰 코 다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엄청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지하철 형님’ 못지않게 확대해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가끔씩 큰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확대해석’ ‘과장된 추측’ ‘억측’입니다.
상대방 의도는 전혀 그게 아닌데,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다보니, 자신의 틀 안에 갇혀 좁게 생각하다보니 사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적정선에서 서로 이해해주고, 서로의 상황을 고려해주는 노력,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내용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팠던 나머지 밀 이삭 몇 개를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비벼서 나온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이 득달같이 예수님께로 달려와 따지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심심풀이삼아 밀 이삭 몇 개씩 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식사를 준비하려고 밀을 빻았다 던지, 반죽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물을 끓이기 위해 장작을 패거나 불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밀 이삭 몇 개씩 먹은 것에 불과합니다. 생 밀 이삭 먹어봐야 또 얼마나 먹겠습니까?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제자들의 그 생각 없는 행위, 단순한 행동 하나 조차도 일로 생각했고, 안식일 규정에 어긋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친 확대해석입니다. 억지입니다. 무리한 끼워 맞추기입니다.
안식일 규정의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엿새간의 노동으로 피곤해진 육체에 하루간의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기력을 재충전하고, 활력을 되찾자, 이러한 휴식을 기반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경배하고, 노동에 더욱 열심히 매진하자는 좋은 취지에서 안식일 규정이 설정되었겠지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안식일 규정이 세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인간을 편안히 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에 부담을 주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혹시라도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조바심 속에 살아가다보니, 안식일 규정이 백성들에게 선물이요 기쁨이 아니라 고통과 부담의 원인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가정공동체, 수도공동체, 교회공동체, 직장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규칙이나 규범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무엇에 앞서 구성원 각자를 위해서입니다. 공동선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성 회복과 증진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자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규칙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까? 죽이는 것입니까? 사람을 성장시키고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까? 사람을 꼼짝 못하게 가두어놓는 족쇄 같은 것입니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38,1-6.21-22.7-8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복 음 : 마태 12,1-8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딱 걸렸다?‘는 말 아시지요? 잔뜩 벼르고 있는데 트집 잡을 거리가 생겨서 한 번 넘어뜨릴 수 있게 된 상황을 두고 재미있게 표현한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이 그렇지요. 늘 예수님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딱 걸린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마태12,1)먹은 것이지요. 이를 본 바리사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12,2)하며 예수님께 따지고 듭니다.
??밀 이삭 몇 개 잘라먹은 것이 무슨 그리 큰 일이라고 비난하고 나서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밀 이삭을 잘라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은 그 당시 안식일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고 죄를 짓는 행위였지요.
바리사이들은 십계명 중 세 번째 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씀을 근거로 주님의 날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낼 것인가를 심사숙고하였고,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조항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될 조항이었지요.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도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세 가지씩이나 위배가 되었지요.
첫 번째로, 밀 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에 걸리는 것이고, 두 번째 손으로 비벼서 먹은 것 역시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난 것이며, 세 번째 후후 불어 털어 내어 먹었다는 것 역시 키질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 조항에 어긋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리사이들은 일상적인 행위 중에 어디까지가 일에 해당되는 것인지를 상세하게 법으로 정해 놓음으로써 안식일 법을 철저하게 지켜나갔는데 안식일에는 산책을 해도 1Km 이상 하면 일에 해당이 되었고,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것도 금지사항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닭이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먹어서도 안 되었지요.
바리사이들이 철저하게 안식일 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사람들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보통의 사람들을 범법자로 몰아가는 바리사이들의 극단의 율법주의를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12,7)
안식일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법 조항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야단 맞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야단 맞아도 싸지.?‘하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야단을 맞아야 할 사람은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철저히 지키려고 해서 문제가 될 바리사이들에 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8)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안식일을 ??일요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일요일이 주님의 날이라는 신앙 고백이지요.그런데 실제 내용 면으로도 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내고 있는가 되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날이 아니라 내가 쉬고 내가 놀러가고 나하고 싶은 대로 지내는 나의 날로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지요.
그것은 주님의 날이 아니라 일요일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면 주일을 알 리가 없지요. 그러니 주일이 되면 마음대로 놀러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지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 주님의 날로 기억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일주일 중 육일 동안을 나와 가족을 위해서 썼다면 칠일 째는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내고 이웃을 위해서 자선을 행하는 사랑의 하루를 보냅니다.
자, 여기에 신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토요 특전 미사를 하고 그 날 저녁부터 주일날 늦게까지 매주 산과 계곡을 찾아 놀러 다니느라 바쁘게 지냅니다. 반면에 또 한 사람은 이발사로 가까스로 새벽 미사를 하고 일을 해야 생활이 유지되는 사람인데 쉬는 날이면 양로원에 다니며 하루종일 이발 봉사를 하느라 바쁘게 지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누가 더 안식일을 잘 지내는 사람일까요? 당연히 이발사이지요. 이것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으로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일요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도 않고 안식일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그런 비신자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다가 미사에 빠지고 또 해서 안 될 일을 하는 신자들이 제법 많지요. 바뀌어야 합니다. 오히려 신자들이 비신자들로 하여금 주일을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우리의 방법이고, 또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요일을 즐기듯이 여기저기에서 흥청망청 보내고 자기와 가족만을 위해서 지낸다면 그것은 안식일도, 하느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일날이 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주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삶의 계기를 만들어냅니다. 주일은 단지 쉬는 날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날로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날인 것입니다.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주일을 나의 날로 보내고 있습니까, 주님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단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을 하느님께서 반기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내고, 한 주일에 한 번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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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을 선행(先行)하는 법제정 정신
-박상대 신부-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는 유대교의 핵심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유일신관(唯一神觀)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다신론적인 근동 아시아 세계 안에서 오랜 시간과 노력을 거쳐 얻어낸 그들 신앙의 핵심이다. 신앙은 무릇 내용(contents)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행위(action)를 수반해야 하듯이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유대교 신앙의 내용은 그분이 내려주신 율법(토라, 모세오경)이며, 신앙의 행위는 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실제로 지킨다는 것이 곧 그들 신앙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율법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유대교 안으로 율법의 관리와 해석을 담당하는 그룹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랍비(선생)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이다. 이 선생들이 율법을 관리하고 해석하면서 ‘시행세칙’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이다.
탈무드는 유대교 율법의 시행세칙과도 같은 것으로서 율법의 해설, 구전(口傳, 미슈나), 전통적 관습, 축제, 민간전승 등을 총망라한 책으로서 유대인의 정신적, 문화적인 유산으로 평가된다. 탈무드는 약 1만 2천 권의 엄청난 규모로서 유대인들 지혜의 총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금도 이 책은 계속 기록되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율법과 그 기본적인 정신에 관하여 다시 한번 들려주신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참조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는 말을 삭제하였다. 그 이유는 자칫 이 부분이 안식일 법을 폐기하려는 의도로 착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태오는 이미 예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는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을 통하여 율법의 완성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안식일’과 ‘제자들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밀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를 놓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대립상황을 묘사하고 있다.(1-2절) 율법은 ‘이웃집 밭에 서 있는 곡식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신명 23,26)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의 행위는 범법행위가 아니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안식일법과 관련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의 행동(1사무 21,1-10)과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사제들에 대한 안식일의 예외규정(레위 24,9)을 들어 그들의 생각을 흩어버리신다.(3-5절)
오늘 복음의 요점은 사람의 아들이 바로 법(法)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8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지칭한다. 그분은 메시아의 상징인 다윗이나 대사제인 아론보다 크신 분이시며, 유대교 신앙의 요람인 예루살렘 성전(聖殿)보다 크신 분이시며, 율법의 주인이시다. 어떤 법이든 그 법이 제정되기까지의 정신이 있다. 이 말은 법을 제정하는 정신이 제정된 법을 선행(先行)한다는 말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 마태 9,13)는 구약의 인용이 바로 율법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사(祭祀)는 곧 규정된 율법이요 자선(慈善)은 이 율법을 제정한 정신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좋은 양심과 도덕이 법을 앞질러 간다는 말씀이다............◆
배가 고파서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이의를 제기할만도 하다.
왜냐하면 율법규정을 곧이 곧대로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온 바리사이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하다.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일(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은 해서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이 분명하다. 이런 원칙을 세워 놓고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도 삶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준이 없을 때 혼동이 오고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혼동이 올 수가 있다. 그러나 삶의 원칙을 정해 놓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고 정말 우리가 지켜야할 삶의 원칙은 어떤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은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인간이 법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즉 법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고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어떤 특정인만을 위해서 또는 인간을 법이라는 굴레에 메어 놓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선을 위해 만들어 놓은 법이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공동선을 해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런 일은 법을 만들어 놓은 본래의 취지를 잘 못 알거나 공동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인만을 위해 잘못 이용될 때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인간이 만든 법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해야 하고 올바른 해석이 뒤 따라야 한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하더라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게 되면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악법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이의를 들으시고 그들의 이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그래서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레위 24,8과 민수 28,8-9에 나오는 내용을 들어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예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인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로 바리사이들이 이의에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의 잘못은 인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본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가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무시하거나 죄없는 이들을 단죄해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이 얼마나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일어나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 1-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그것이 잘한 일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이 잘한 것인지 아니면 잘 못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만 설명해주셨을 뿐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의 행동에 가장 큰 잘못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보다는 법을 우선시 하였다는 것이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이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사랑의 법이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는 법은 없고 사실 사랑의 법보다 우선시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단 한 가지의 법만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법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릉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코전 13, 1-7)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행동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를 올바로 알아 들을 수 있다면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은 안식일에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한 것이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라는 말은 단순히 밀 이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밀 이삭이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 미사 참례 때에 밀떡으로 만들어진 성체를 받아 보시듯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성체를 받아 모셨다는 것이다.
한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였다."는 것은 주일에 성체를 받아보시지는 않고 다시 말해서 주일 미사참례는 하지 않으면서 미사 참례하는 다른 사람들을 잘못했다고 판단는 하는 행위를 하고 있으니 그들이야 말로 안식일에 해야할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주님을 모시는 일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야 말로 안식일(주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주일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 대해서 배가 고픈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먹어야 한다. 매일 먹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주일만이라도 주님을 먹어야 한다.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표현은 성체성사를 표현하는 언어이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는 늘 주님에 대한 배고픔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주님을 먹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낀다는 것은 제자들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주님의 제자이면서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전혀 주님에 대한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는데 어떻게 주일 미사를 기다릴 수 있으며 말씀을 일고 묵상할 수 있겠는가?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는 사람만이 아침 저녁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주린 배를 채우고 목마름을 해갈시킨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마태 5, 5)리하고 진복팔단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목마름이 해갈 되지 않는다. 오늘 부터라도 우리가 진정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나를 안식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또 나 자신이나 주위 환경도 아닌 바로 사람의 아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