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복수하고자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인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인 사건이다. 1896년 백범이 20세 때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투옥되자 아들을 걱정하며 자주 면회를 찾아가 아들에게 힘을 주었으며 백범이 탈옥하게 되자 탈옥자 부모라는 이유로 남편이자 백범의 아버지 김순영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남편인 김순영이 옥고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가난한 환경과 가정생활을 견디며 백범을 키워왔고 백범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임정 식모를 자처하며 가정부 노릇을 하였다가 1926년 귀국하였고 1934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백범이 지목되자 다시 상해로 건너와서 백범을 격려하였으며 백범이 생일비용으로 주었던 돈을 독립군 자금 및 무기비용으로 충당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곽낙원은 1922년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 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함께 지냈다. 그러나 며느리가 일찍 병사하자 곽낙원은 1925년 12월에 다시 안악으로 돌아와 손자들을 돌보며, 생활비를 절약하여 김구에게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34년 3월 다시 손자 둘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장손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한편,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서 군사훈련중인 청년 20여명을 돌보는 등 고락을 함께하였다. 제때 식사를 잇지 못할 정도의 곤핍한 생활 속에서도 생활비를 아끼고 생신축하금으로 단총 2정을 구입, 독립운동에 쓰도록 하는 등 별세하기까지 김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청년들에게 “오늘 신문 읽었나? 왜놈이 또 어데까지 밀고 들어 왔나? 비행기 공습이 심하다지” 등 전황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때문에 청년들은 중일전쟁의 전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팔순 잔치 대신 총보다는 붓으로 일본과 싸우라는 의미에서 50자루의 만년필을 사서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언제나 독립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곽낙원은 언제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임시정부내에서 어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손자를 고아원에 맡겨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울 때는 변절한 독립운동가의 가정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으나, 독립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았으며, 김구와 임정의 독립운동을 한결 같이 지지, 격려하였다
김구와 아내 최준례가 다투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며느리의 편을 들어줬다. 그래서 내외 싸움에서 김구는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고 아내의 말에 반대하거나 불쾌해 하면 여지없이 곽낙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현대보다 더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시대인 20세기 초에 며느리와 아들을 이렇게 대했다는 것은 좀 특이한 일인데, 이는 아마도 고부가 오랜 세월을 함께 고생하면서 사이가 많이 돈독해지고 오히려 독립운동하느라 가족 못 챙기는 아들 남편에게 알게 모르게 쌓인 것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백범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귀국해 달라는 요청을 읍소하였는데 이에 곽 여사가 회초리를 들어 민족의 매라 하면서 백범에게 종아리를 때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백범이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짙었으며 이를 통해서 자랑스런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9년 4월 26일 평생소원이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 에서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