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백과 - 나주목사고을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24.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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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나주목사고을시장
요약 나주목사고을시장은 과거 호남의 도읍지가 있던 나주에 개설되어 있는 전통시장이다. 상설시장인 금계매일시장과 정기시장인 성북시장을 통합해 2012년에 새롭게 개설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주의 특산물과 농산물, 생활필수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1. 나주목사고을시장 개요
나주는 영산강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조선시대까지 호남의 도읍지가 있던 중심 도시였다. 나주의 성장은 영산강 유역에 펼쳐진 나주평야와 영산강의 수로를 활용한 교통의 편리함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주는 인접한 무안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장이 개설되었다.
풍부한 물산과 교통의 편리함을 토대로 18세기에 무려 15개의 시장이 개설되어 있었지만 19세기에는 잦은 농민운동과 자연재해로 인해 7개로 줄어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부상한 시장은 영산강의 수로 교통과 호남선의 이점을 살린 영산포장이었다. 그러나 이후 영산강 상류의 댐 건설로 수로 교통의 이점을 잃었고,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나주읍이 상권의 중심지가 되면서 장세가 약화되었다.
나주 시내에는 나주읍내장의 명맥을 이은 성북시장과 옛 장터에 개설된 상설시장 금계매일시장이 있었는데, 도시의 복원 계획에 따라 두 시장이 통합되어 2012년에 나주목사고을시장으로 변모했다. 나주목사고을시장은 2013년에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고 토요문화장터, 토요야시장 등을 통해 성공적인 전통시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대식 건물로 단장한 나주목사고을시장의 외관
마트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시장 내부
2. 나주목사고을시장의 어원
나주 지역은 백제 때에 발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통일신라시대에 금산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때에 금성이라고도 불렸다. 발라라는 말은 들이 넓은 곳이라는 의미로 발라가 발음의 편의상 바라가 되었다가, 그것이 비단으로 차용되어 비단을 의미하는 금(錦)과 나(羅)가 들어간 금성(錦城)과 나주(羅州)가 되었다. 중국의 광동성에 있는 나주에서 빌려왔다는 주장도 있다. 나주목사고을시장은 지역의 이름에 더해서 조선시대에 나주목사가 있던 것에서 유래했다.
3. 나주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딴 이름으로, 나주가 호남을 대표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주가 호남의 중심 도시가 되었던 것은 비옥한 나주평야와 영산강이라는 교통의 편리함에 힘입은 것이었다.
나주 지역은 영산강을 품고 있는 평야 지대로 농산물은 물론이고, 수산물이 풍부해 시장이 형성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영산강의 풍부한 수량을 관개용수로 삼아 영산강 유역의 땅을 기름지게 했고, 이렇게 생산된 농산물을 바탕으로 영산강의 물길을 이용해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영산강이 지닌 2가지 역할, 즉 관개용수와 수로는 조선 전기의 문인이던 서거정이 일찍부터 지적한 것이었다. 서거정은 이런 글을 남겼다.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만물이 번성하다. 땅이 또한 바닷가에 있어 메벼가 많이 나고 물산이 풍성하여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고 사방의 상인들이 몰려든다.”
이런 이유로 영산강 유역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장이 개설되었다. 즉 영산강 유역에 위치한 나주와 무안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시장이 형성된 것은 성종 연간이었다. 《성종실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전라도 무안 등 여러 고을에서 이익을 쫓는 무리들이 장문이라고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친다고 하니(하략).”
여기서 장문(場門)이 시장이다. 당시 영산강 유역의 시장은 한 달에 두 번 서는 15일장이었다. 시장이 형성된 것은 기근 때문이었다. 기근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이후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시장들이 개설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 따르면 훗날 나주에 편입되는 남평현을 포함해 무려 15개의 시장이 개설되어 있었다. 나주목 13곳, 남평현 2곳에 장이 섰다. 즉 나주 읍내장(2, 7일)을 비롯해 창흘장(5, 10일), 용두장(2, 7일), 부마교장(4, 9일), 박산장(3, 7일), 부야장(1, 6일), 남창장(2, 7일), 대산장(1, 6일), 음산장(1, 6일), 선암장(8일), 접의장(1, 6일), 초동장(3, 8일), 남문장(4, 9일)에 더해 남평현의 남평 읍내장(1, 6일), 대초장(3, 8일)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박산장과 부야장, 선암장, 접의장은 훗날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광주에 편입이 되었고, 남평현의 대초장은 1970년대 나주호댐의 조성으로 수몰되어 사라졌다.
그런데 60년 뒤에 편찬된 《임원경제기》(1830)에 따르면 나주 지역의 시장은 반으로 줄어 7개의 시장만이 개설되어 있었다. 창홀장, 부마교장, 남창장, 초동장, 나주 읍내장, 남평 읍내장, 대초장이 그것이다.
이런 사정은 《군현지도》(1872)에서도 다를 것이 없었다. 《동국문헌비고》에 있었다가 《임원경제지》에서 빠졌던 남문장이 남문외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다. 하지만 부마교장이 사라지면서 숫자에는 변화가 없었다.
19세기 들어서 이렇게 시장이 크게 줄어든 것은 나주 지역뿐만 아니라 삼남 지역의 공통된 현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시기에 활발해진 농민운동과 홍수, 가뭄, 병충해 등 지속적인 자연재해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고, 사회경제의 혼란으로 농촌 경제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0년대에는 시장이 9개로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 개설되었다가 사라진 대야장이 삼도장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고, 영산포장이 새롭게 개설되었다. 특히 영산포장은 일제강점기 때 크게 번영을 누렸던 시장이다.
그것은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던 영산포에 1914년에 개통된 호남선이 지나면서 영산포가 수로와 육로를 겸비한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해 물류의 핵심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생산된 수산물과 일본에서 생산된 공산품이 목포항을 통해 나주와 광주로 들어오는 창구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영산포장은 순식간에 나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이미 영산포장의 매출액이 나주 읍내장을 크게 뛰어넘었고, 남평 읍내장과 비교하면 4배 이상 차이를 보였다. 당시 목포항과 영산포 사이에는 월 15회 운항하는 29t급 영포환(榮浦丸)이 있었고, 50여 척이 넘는 황포돛배들이 영산강을 오르내렸다. 영포는 영산포의 다른 이름이다.
목포에서는 생선, 소금, 건어물, 식료품, 잡화, 건축재료 등을 실어왔고 영산포에서는 나주 지역에서 생산된 쌀과 잡곡, 면화, 가마니, 새끼 등이 실려 나갔다. 이처럼 영산포에서 물자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영산포역 주변으로 술집과 숙박업소들이 생겨났고, 나주 지역의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다.
영산포 주변인 대흥동에는 정미소가 15곳 내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부터 이곳이 곡물이 집산되는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영산포에는 추자도의 멸치젓, 흑산도의 홍어, 영광의 굴비, 임자도의 새우젓과 멸치젓, 낙월도의 새우젓과 밴댕이젓 등의 생선과 젓갈이 계절에 따라 모여들었다. 이렇게 물자가 모여드는 영산포장은 일제강점기 때 나주 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번성했다.
1930년대 후반에 나주 지역에는 모두 9곳에 시장이 개설되어 있었다. 영산포장을 중심으로 나주장과 남평장이 지역의 상권을 주도했다. 당시 시장의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 말 나주 지역의 정기시장 개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