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문화
중년까지, 파이팅.
문한슬(영화감독)
‘롤 모델이 누구인가요?’ 요즘은 이런 질문을 거의 들어볼 일이 없지만, 청소년기에는 종종 ‘롤 모델’을 주제로 수업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때마다 가족 중 한 사람의 장점을 골라서 말했고, 주변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롤모델’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나 임무 따위에서 본받을 만하거나 모범이 되는 대상’이다. 여기서 ‘본받을 만하다’거나 ‘모범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롤모델을 선정하는 자신의 몫이다. 대상 하나를 고름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나는 사람의 어떤 면모를 가장 중시하는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시무시하기도 한 이 일을 당시에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롤모델을 정해도,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생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그릴 수 있던 미래는 끽해봤자 ‘대학에 가서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한다’ 정도의 타임라인 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30대 이후는 막연했다. 물론 이 고민에 내내 휩싸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쑥 마음에 파도가 일 때면 잠잠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곤 했다. 나라는 사람도, 내 앞에 펼쳐진 너무 많은 삶도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다는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영화 현장을 만났다. 뚜렷한 역할은 없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배우가 기침을 하면 물을 가져다 주거나 필요해 보이면 슬그머니 주변 통제를 하는 등의 일을 했다. 별달리 무엇을 지시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혼자서 분주하곤 했다. 누군가에겐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비춰지겠지만 나는 그 일이 좋았다. 상황을 둘러보고 사람들의 필요를 찾는 일에서 일말의 기쁨을 느꼈다. 아마 그 기쁨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찾았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거다. 막연한 삶에서 명료한 게 하나 생겨서일까, 나는 어느새 영화 스텝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스크립터로, 연출부로, 제작부로, 점차 명료해지는 나의 역할에 성취감을 느꼈다.
현장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출의 꿈을 가지고 제작 현장에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연출부, 제작부는 물론이고 동시기사님도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 틈에서 나는 그저 현장이 좋은 막내였다.
변화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열아홉살, 아빠와 큰아빠가 친할머니를 만나러 일본에 가는 날에 나는 아빠에게 모아뒀던 용돈 10만원을 주며 맛있는 거 먹고 오라고 짧은 인사를 남겼었다. 그런데 그것에 감동한 아빠가 가지고 갔던 돈을 탈탈 털어서 카메라를 한 대 사온 것이다. 현장에서 보기는 많이 봐도 직접 접할 일은 없었던 카메라를 마주하자 문득 나의 지금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포부도 목표도 없이 그렇게 촬영을 시작했고, 10분 분량의 짧은 기록물을 완성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 나의 기호가 담겨 있는 방, 내가 가장 오래 머무르는 학교 등으로 이루어진 영상이었다.
그 이후로는 간간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는 우울증 환자도 다양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어느 공모전을 보고서는 데이트폭력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영화 현장 일을 하다가 “또 보자고 말하면 또 볼 것 같니?”하는 말을 듣고서는 또 보자고 말했지만 다시 보지 못한 두 영화인이 서로에게 쓰는 편지를 영상으로 만들었다. 작업을 할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웠지만 어쩐지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현재는 장편 다큐멘터리 <어신 할망이라 생각허라>를 준비하고 있다. 작품은 나의 가족 얘기다. 오래 전 혼자 일본으로 밀항한 할머니와 부모 없이 남겨진 탓에 어렵게 지냈던 아빠, 이 일화에 대한 가족들의 시각을 담으며 ‘모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실 막상 제작에 돌입한 지금은 매 순간 ‘정말 이 다큐멘터리를 잘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이 밀려온다. 나와의 관계가 있는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다 보니 작업이 내 삶과 너무 밀접해졌는데, 거기에서 오는 괴로움이 크다. 어떨 때는 역량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시작했다고도 느낀다. 그런데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이상하게 늘 후자의 마음이 이긴다.
상담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담은 결코 유쾌한 작업이 아니에요.’ 지나가듯 들은 말이었지만 나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멋대로 상상하곤 했다. 대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말이었다.
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그저 모른 척하고, 덮어두고 지냈던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작업을 하게 되니 그런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가지게 되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의 배경에는 나의 경험과 감정이 있었고, 그것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때마다 나에 대한 이해가 더해졌다. ‘모르는 게 약이다’는 말처럼, 알기 전이 나았겠다 싶은 내면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해는 오래 묵혀왔던 상처를 응시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알게 될수록, 앞으로 내가 어떤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나가고 싶은지도 조금은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결국 나에게 작업은 불확실한 삶 속에서 하나둘 분명해지는 것을 발견하고 나아갈 힘을 얻는 과정인 것이다.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잘 살아보려고, 잘 사랑하려고 하는 일 아니겠니.’
내 삶의 경로는 오래전 그렸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나는 대학을 그만뒀고, 취업 준비를 하는 시기도 없었으며, 하는 일 역시 주변에서 말하는 ‘취직’의 개념과는 다르다. 가끔 부모님이나 친지들이 무슨 일 하느냐고 물으면 변변찮은 대답을 들려주지도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일을 하면서 삶의 동력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을 때조차 작업을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길을 지나다가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며 깔깔거리는 중년의 여성들을 보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나의 중년을 상상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내가 무사히 중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잘 살아낸 어른들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되고, 또 본받고 싶은 사람들을 접하다 보니, 나도 중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잘 살아내자는 결심을 한 것이다.
내가 나아가는 길의 끝에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의 모습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제 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의 중년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