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
강 순
모두가 잠든 밤
얼굴이 창백한 말총머리 소녀가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각혈을 받아낸 하얀 천 위에서 남몰래 빛나던 붉은 문장, 달빛 암호 지시에 따라 빨랫물이 출렁이고 소녀가 신도 자세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온통 붉은색을 뒤집어쓰고 남모르는 언어를 고집하던 그 종교는 자꾸 달빛 그늘 쪽으로 교리를 넓혀 나갔다 한밤의 비밀이 쌓일수록 소녀가 나를 신으로 상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오래전 시골집 마당의 꽃들 나무들만 기억하는 그 나라, 내게 암호 해독가가 되는 훈련을 처음 시켰다
슬픔의 방향 쪽으로 달빛이 흐르는 밤이 올 때
그 소녀, 어떤 교리를 항해하고 있을까
폐기차, 너머의 몽환도
질주와 정지의 기억 아롱진 너머로
봄 햇살이 내리고 어지럼증 쏟아져
헐거운 심신, 불현듯 철로 너머로 사라져
너머의 감정은 파도가 멈춘 세상
해변에 발자국도 남지 않은 곳, 길을 잃었지만
예정된 철로의 방향이 가없고 버거웠어
이생이 요란하게 덜컹거려 무서웠어
백수와 홈리스의 표정일 때 봄의 정령이 내게 묻네
너는 저 너머에서 왔니? 그러면 나는 되묻지
나를 여기 덩그러니 놔두고 사라진 너는 나이니?
기억 속 마지막 문장의 말줄임표니?
침묵에 녹물이 번질 때 창문은 적막에 지쳐가고
버려진 의자들은 허연 비듬같이 슬픔이 바래가
심장을 달구었던 이름들 바닷속으로 사라져
한때 추억했던 발목과 등이 다 잊힐 때
봄이 아지랑이 너머를 잡고 흔드네
모국어를 잊은 검붉은 화사花蛇가
풀어 놓은 물감처럼 스미는 중이야
벼린 독침은 백 년의 고독을 건넌 증표
끓는 독백 같은 혓바닥 허공에 날름거릴 때
이런 방식이 너머의 새 언어구나
표피 무늬가 너무 아름다워 꿈이 된 후생
녹슨 쇳덩이 버리고 황홀하게 넘어라
억센 발도 없이 가볍구나
삼만 칠천 일 시름시름 이생을 앓다가
이제 관객 없는 무대 너머 은밀히
스며라 서러운 망각 너머
더 이상 목적도 없이 온몸 힘을 빼고
살포시 스며라
병약한 심신으로 봄을 앓으면
너머가 한창 아득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