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1월16일 목요일 [(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수도회]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지혜 7,22ㄴ─8,1
† 복음 루카 17,20-25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받으시고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마음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달리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서
싹터, 나날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마음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나가고, 마침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다음으로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되면 갑자기 너희 가운데 있으리라.’
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 시대가 다가온다면,
무서운 재난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징조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요.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시한부 종말론이
더 극성을 부립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며 성실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 마음 안에서 싹튼 하느님 나라는 크게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2017년 가해 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7,22ㄴ─8,1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20-25
메가데스라는 헤비메탈 그룹의 리더인 기타리스트 겸 보컬인 데이브
머스테인(David Scott Mustaine)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대단히
성공적인 음악가입니다. 그가 이끄는 메가데스는 전 세계 최대의 음악
시상식이라 할 수 있는 그레미 어워드 상을 수상했으며, 음반도 자그마치
2,500만 장 이상 팔렸습니다. 전 세계로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로 인기
있는 밴드입니다. 그런데 머스테인은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머스테인이 젊었을 때 밴드 메탈리카에서 실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쫓겨났었다고 합니다. 물론 메탈리카가 성공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 텐데, 이 밴드는 메가데스보다 훨씬 더
많은 1억 8천만 장이라는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보이면서 큰 성공을
거두지요. 이 점을 보면서 머스테인은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메탈리카에서 쫓겨난 실패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배부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음반이 팔리지
않아서 힘들게 사는 음악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자신보다 더
많이 성공했다는 비교를 하면서 스스로를 실패자,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조금만 생각하면 스스로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불행한 실패자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족이 있음에도 없는
편이 더 낫다면서 불평하고, 직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곳이라면서 불행해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외롭다면서 불행한
자신을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을 만듭니다. 이
가치관이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으로도 또 반대로 불행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하길 원한다면 어디에 가치를
두고 또 어떤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를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느님의 나라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내 가치관과 내 시선의 방향에 따라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하늘나라를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가치관을 가져야 할까요? 좋은
집, 많은 돈, 높은 지위, 쾌락 등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삶을 망치는 불행의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우리 삶에 안정감을 주는 진정한 가치에 우선선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 따라 비록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배척도 당할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매일같이 반복하는 일들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작은 통찰을 얻는
순간으로 즐긴다면 하루를 더욱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루이사 톰센 브릿).
인기 헤비메탈 그룹 메가데스.
가을은 독서의 계절입니다.
어느 소설가의 이런 인터뷰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글을 써서 자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글을 쓰는 것에 회의가 옵니다. 그런데 지난 십 년간 등단한
작가 중에 회사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작가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제 짐작에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출판사에서 출판 의뢰를
받았을 때, 엄청난 수입이 들어올 줄 알았습니다. 첫 책이기 때문에
인세가 권 당 5%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따져보니 그렇게 많은 수입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1만 원짜리 책이 1,000권 팔려야 50만원의
인세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베스트셀러로 평가되는 10만 권정도 팔려야
회사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매년 베스트셀러를
출판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왜 이렇게 책을 달라고 하는 분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아마도
저자가 출판사에서 책을 공짜로 받는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러나
저자 역시 책을 직접 사야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첫 책을 통해서 오히려
경제적 손실을 보게 되었지요. 책을 내지 않는 편이 돈 버는 것이라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고요...
객관적으로 볼 때, 글을 쓰는 것이 생계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다보면 글 쓰는 것이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치 없는 것일까 라는 회의가 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가가 글을 쓰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결국 좋은 글을 읽지
못하는 독자의 손해가 아닐까요? 이러한 이유들로 저는 읽고 싶은 책은
모두 구입합니다. 누구는 도서관에서 빌리면 공짜로 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저자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요즘에 책이 비싸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작가의 노력과 정성을 생각하면 어떨까요? 좋은 책
많이 읽어주세요.
과일을 보면 가을인데, 많이 추워졌습니다. 곧 겨울이 오려나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루카 17,20-25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을 기다렸습니다. 참다 못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17,20)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며, 너희 가운데 있다."(17,20-21).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다는 말씀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치유기적(루카 10,9)과 구마기적(11,20)을 통해 이미 그 위력이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려면 예수님을 삶의
중심이요 궁극적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지요
(12,54-56). 그러나 그들은 눈앞에 계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으며, 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보기
전에 가짜 그리스도, 반(反) 그리스도가 “저기에 계시다. 여기에
계시다”(17,23) 하며 그들을 현혹시킬 것이라 하십니다. 또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에 국한되지도 않고, 번개가 번쩍 비추듯 어디에나
임하실 것이기에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아야 한다.”(17,23-24)
고 이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언제'라는 시간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주님께서는 '지금 바로 여기'에 '이미' 와 계십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순간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영원의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지금이
바로 주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과거에 매이거나 미래에 대한
근심걱정에 자신을 내맡기며 허송세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주님을 잊어버린 채,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세계나 현상적인 것들에 눈을 팔며 살아갈 때가
많지요. 이미 나의 손이 미치는 곳에 오시어, 우리 안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며, 사랑으로 나에게 손을 내미시는 그분의 손을 잡지 않고
밖으로 눈을 돌리고 주변을 서성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 원하는 것을 따라다니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씁니다. 그러는 사이 주님과의 거리는 멀어져가고
영혼은 세상것들로 채워져갑니다. 말씀에 따라 살기보다는 현세의
경험이나 지식을 앞세우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그러나 이미 와 계신
하느님을 믿고 사라져버릴 헛되고 헛된 것들에서 눈길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한 개인의 내면
안에만 현존한다는 뜻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여 십자가를 져야겠지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선과 정의와
자비를 오염시키는 거짓과 불의에 저항함으로써 발견되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 21)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분명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를 놓치게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음을 향해 가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마음을 살도록 하는 나라입니다.
마음을 되살리시는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길은 분명 마음의 길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나라이며
마음 안에 십자가를 심는 십자가의 나라입니다.
마음이 회심으로 이어지지 않고서는 세상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세상도 바뀝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위령성월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들 가운데 있으며
이미 예수님을 통해 따뜻하며 뜨겁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십자가를 마음 안에 깊이 받아들입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삶!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그들도 군중들도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행위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왔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십자가와 죽음이 당신을 덮칠 것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사랑과 인내로 그들의 비방을 비방으로, “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1베드 2,23)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애써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사탄이 쫓겨나고 더 이상 죄가 다스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무지, 즉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나라나 사탄의 왕국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의로움에 대한 사랑이나, 죄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악마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희미하게 또는 은밀하게 내려오시지
않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이제
먼저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시편 96,13)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고 그러한 변화를 청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감정의 행복과 마음의 행복/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복음: 루카 17,20-25
감정의 행복과 마음의 행복
알렉산더가 정복전쟁을 통해서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넓은 땅을
일국의 휘하에 두고 대왕으로서 군림하던 시절, 그곳에는 알렉산더와
비견되는 명성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디오게네스’였습니다. 알렉산더는 대왕이었고, 디오게네스는
거지였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인간의 정신이 물질에 대한 욕심에 의해서 흐트러짐의
폐해를 그 시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극빈’의 생활을 강조하면서 술통으로 만든 집에서 그의 유일한
재산인 물을 떠먹을 때 쓰는 ‘표주박’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헌데 그가 유일한 재산인 표주박을 버리게 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걷고 있는데, 개가 한 마리 웅덩이에서 물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해 보았더니 괜찮아서 개와 같은
방법으로 물을 먹었고, 그래서 그를 시조로 하는 ‘견(犬)유학파’가
생겼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일찍이 들어 알고 있던 알렉산더는 여러 차례
디오게네스를 궁으로 초대했지만 디오게네스는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괘씸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견딜 수 없었던 왕이 한 명의 거지를
만나기 위해 행차하였습니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가 살고 있는 술통집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디오게네스는 그의 술통집에서 다리를 죽 뻗고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말에서 내려서 낮잠을 자고 있는 그를 좀 더 잘 보기 위해서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거기에는 온 몸이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는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
코를 골고 자고 있었습니다. 명성에 맞지 않게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는
디오게네스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낀 알렉산더는 때마침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부시시 뜨고 있는 디오게네스에게 말했습니다.
“선생, 나는 알렉산더 대왕이요. 뭐 필요한 것이 없소?”
알렉산더가 ‘선생’이란 말을 쓴 것은 매우 존경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안에는 역시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왕이고 당신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요.’ 라는 으쓱함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그러하시다면 거기 자리 좀 비켜 주십시오. 햇빛이 가려집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한 방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다가 디오게네스는 또 다른 공격을 가합니다.
“대왕께서는 앞으로 어디로 가실 작정이시지요?”
알렉산더가 말하기를 “세계를 정복하러 인도로 갈 것이요.”
디오게네스가 묻기를 “그런 다음에 뭘 하시렵니까?”
알렉산더가 말하기를 “그야 편히 쉬어야지요.”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다음과 말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참 어리석소이다. 나를 좀 보시오 난 이미 쉬고 있습니다.
난 세계를 정복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지만 지금 아주
편히 쉬고 있소이다. 대왕께서 정말 편히 쉬고 싶다면 지금 당장 왜
그리 못하십니까? 편히 쉬기 전에 먼저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누가
그럽디까? 대왕께 말해두지만 지금 당장 편히 쉬지 못한다면 끝내
그럴 수 없을 것이요.”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게 그 충고를 마음 깊이 간직해 두겠다고
말하며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길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디오게네스와 헤어져 돌아오며 알렉산더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디오게네스였을 것이다.’
결국 알렉산더는 인도원정에서 병이 들어 결국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느님나라는 곧 행복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돈을 중시하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눈이 보이는 물질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마음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즉 마음 안에서 세상의 변화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기쁨과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즐겁게 하는 것은
물질이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영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이들이 행복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얻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번다든가, 유명해진다든가, 권력을 가진다든가, 좋은 대학과
직장에 다닌다는 것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만족시키는 것은
마음의 행복이 아니라 육체적 감정이나 감각의 행복입니다. 마음의
행복은 시간이 지나도 혹은 모든 것을 잃은 거지처럼 되었을지라도
빼앗길 수 없이 끊임없이 솟아나지만, 감정이나 육체적인 감각의 행복은
순간적으로 지속되고 잠시 후에는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조울증과 같이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감정의 기복을 쫓지
말고 바다의 심연 같은 변하지 않는 고요한 마음의 행복을 찾으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나라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쁨과 평화의 상태라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머무시면서 행복을 선사하는 곳이 바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인 ‘마음’인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들보다 낮은 상태에 있는 인간 육체의 감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보다 높은 영적인 차원의 마음의 상태에는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상태가 더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만약 세상 것들에 애정이 가고 끌리게 된다면 그것은 마음이 끌리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감정이 끌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느님나라가
이룩된 사람은 오히려 그 평화를 세상에 전해주게 됩니다.
마치 태양이 떠있는 것만으로 온 세상을 따스하게 덥히듯이 그
존재만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마음은 물질보다 높은 수준이고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간입니다.
지구가 어떻게 태양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알렉산더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디오게네스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정복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리게네스는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행복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멈추어 섰을 때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의 도우심으로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움직이면 그 물을 마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내 자신 안으로 들어가
고요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납시다. 그 분이 곧 내
마음 안에 거하시는 하늘나라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2017년 가해 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 17,20-25
어제 포항 지역에서 지진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저도 진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포항 지역에 사는 분들은 많이 놀라셨을 것입니다.
50여명의 부상자가 있었고, 건물에도 피해가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오늘 치르기로 했던 수학능력 시험을 일주일 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진 피해 지역의 학생들이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안정을 찾아야
하는 시간을 주고, 균열이 간 학교 건물의 안전도 점검하고, 무엇보다
시험을 공정하고, 형평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건 때문에
우리가 힘든 것일 수도 있지만 사건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와 태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상대방의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진흙탕 속에서도 꽃이 피듯이, 재난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약사와
의사는 전문가입니다. 우리의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약은
약사에게 받으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다양해지면서 우리는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에게
의지하면서 살게 됩니다. 소송과 관련된 것들은 변호사에게 의뢰를
합니다. 세금과 관련된 것들은 회계사나 세무사에게 의뢰를 합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또 다른 전문가를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는
궁금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스피커는 간단한
질문들에 답변을 해 주고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가장 빠른 길을
실시간으로 찾아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인공지능과 인터넷이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면 그곳이
‘하느님 나라’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토마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상처를 직접보고 만져 보아야만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니체는
그동안 우리들이 가졌던 신앙과 교리에 대해서 냉철한 비판을 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하느님 나라와 진리는
누군가로부터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와 인공지능이 알려 줄 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으로 갈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볼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를 이야기 합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청원해야 하고, 하느님께
다짐을 해야 하고, 하느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과거의 먼 옛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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