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덜이’ 신심
이사 58,1-9; 마태 9,14-15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2023.2.24.; 이기우 신부
이사야는 “단식한다면서 다투며 주먹질이나 하는”(이사 58,4) 못된 행태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했습니다. 이렇게 목청껏 소리쳐서 악행과 죄악을 꾸짖는 한편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단식이라는 종교 행위를 예로 들지만 사실은 단식뿐만 아니라 자선과 기도까지를 포함하여 공동선에 기여해야 할 종교인들의 소명과 활동에 대하여 하느님의 뜻을 일깨워줍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며,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 내용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적 애덕’이라 부른 바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 말씀에 따라서 실천하신 복음선포 활동을 달리 일컬은 말입니다. 이미 복음선포 활동을 통해 사회적 애덕을 실천하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굳이 단식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아픈 사람들을 맞이하여 상처를 싸매어 주고, 마귀 들린 사람들을 만나시면 마귀를 쫓아내주며, 이렇게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체험하고는 자유로워진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은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라고 그분을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러한 처신에 담긴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러한 처신과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하셨고, 그분의 처신을 마음 들어 하셨습니다(마태 17,5).
재의 수요일에 우리가 들었던 복음에서는 자선과 단식과 기도 등 믿는 이들이 전통적으로 행해 오던 종교적 관습을 행하되 하느님께서 보시도록 해야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종교란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느님과의 소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관점에서 보거나 예수님의 복음선포적 관점에서 보면, 아프고 마귀들려 고생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소통이야말로 하느님과도 소통하는 지름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종교적 관심의 초점을 선명하게 맞추어서 우리네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주요한 종교적 관습인 단식이 종교의 근거가 하느님이시고 존재이유가 사회적 애덕임을 알려주듯이, 자선과 기도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도 당연합니다. 자선은 가난한 이들을 불쌍해서 돕는 일이기 이전에 사회적 애덕을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며, 기도는 자기 자신의 축복을 하느님께 요구하는 것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후에 설립된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서는 한국적인 나눔의 전통이었던 ‘좀덜이’ 운동을 펴고 있습니다. 이는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쌀을 한 숟가락씩 덜어서 모아놓았다가 사순시기가 되면 배고픈 이웃과 나누었던 교우촌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박해시대에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집집마다 비치해두고 거의 암송하다시피 하며 전교했던 옛날 교우들은 ‘좀덜이’를 생활화했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심산유곡으로 들어가서 교우촌을 이루어 살았으므로, 가난해서 배를 곯는 이들의 심정과 처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았던 덕분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었던 이들이 천주교 교우촌을 찾아 들어가면 굶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함께 나누어 먹으며 살다보면 교리도 배우게 되고 신앙에 관심도 생겨서 입교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좀덜이 전교’였습니다.
이렇게 ‘주교요지’는 박해하는 유림 및 관헌들에게 천주교 교리가 진리임을 증거할 수 있는 메시지를 주는 정신적 방패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진리를 일상에서 사회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도와준 선교적 무기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가 대변하는 히브리적 사유 못지않게 한국인의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심성을 드높였던 고조선 시대의 정신 전통을 되살려 놓은 인물이 정약종이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주교요지’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배경에는 간단치 않은 역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본시 한 왕조의 존속기간으로서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나긴 세월인 2,300여 년 동안이나 만주와 요동과 요서 그리고 한반도 등 동아시아에서 수많은 제후국(거수국渠搜國)들을 거느리고 하느님을 섬기던 고조선의 정신 전통은 내외적으로 철기 문명 때문에 붕괴되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철기로 제작된 농구를 쓰게 되니 생산력이 높아져서 더 이상 귀족들의 통제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 평민들의 결속력이 느슨해진데다가, 국외에서는 철기로 무기를 만들어 조직화시킨 한 왕조가 침략해 들어오는 바람에 고조선 왕조는 붕괴되고 북부여 왕조를 거쳐 고구려 왕조가 들어섰습니다(윤내현).
고유한 정신 전통을 이저버린 채 외래 정신으로라도 왕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제17대 소수림왕이 372년에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들여오니, 덩달아 유교와 도교가 뒤따라 들어와서 지배층과 지식층의 호감을 샀습니다. 그 바람에 고조선 조에서부터 내려오던 최고신 숭배 전통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민간 속에 숨어들어가서 무속화(巫俗化)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정약종에 의해서, 최고신 숭배 전통은 천주교 신앙으로 수용되고 주술(呪術) 및 역술(易術)로 전락한 무속은 미신행사로 배격하는 식별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신앙 토착화 작업의 결과로 ‘좀덜이’ 신심은 오늘날 다양한 기부 및 후원 활동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과 실천으로 우리네 신앙적 정통성과 민족적 정통성도 아울러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주교요지를 두고 암송하던 신앙선조들께서 '좀덜이'를 생활화 하셨듯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도 고유한 실천의 표식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성호를 긋고 묵주반지를 끼고 있는 것도 우리 신앙인들끼리의 표지요 식별부호이겠지만 실천의 표식은 따로 있어야겠습니다. 누군가의 간단한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줄 아는 사람만이 평소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왜 단식하세요" "왜 자선을 베푸세요" "왜 기도하세요"라는 간단한 질문.. 답을 가지고 있어야 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언가 실천적이고 행동족인 깃발이 필요합니다.
밥하기전에 예수님 몫이라고 한수저씩 떠. 따로 모았던 성미 걷으러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이삼십년 전의 정성스러웠던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구교우촌인데 판공 가정방문 일정 잡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상당히 축소되었음에도..
90이 다 된 어르신의 큰 사랑으로 작은집이나마 구역 판공미사 집이 정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데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있느냐고 하시는 말씀이 너무 고마웠답니디.
‘좀덜이’의 전통을 기억하시는군요.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져 갑니다.
시간을 나누는 것도
공간을 나누는 것도
각박해졌습니다.
옛날에 다 했어..
성당에서 하지 귀찮게 왜 하느냐고 합니다.
노력도 안하고 안되는 쪽으로 몰고가는 고위간부들도 그렇구...
그래도 우리 본당 미사 참례율이 30%대로 올랐어요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가로막히는데가 사방에 있네요
신부님들도 참 힘드시겠다는 마음이듭니다.
고조선 시대 이래로 우리 조성들이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중국 고대 문헌의 기록은, 5월과 10월에 모두가 모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잔치를 벌이고 모든 백성이 기쁨과 배려와 음식을 나누었던 더 근본적인 전통의 외양이요 결과였을 뿐입니다. 중국인인들도 바리사이들처럼 본질을 알아보지 못했던 곳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일상적으로 배려와 사랑과 음식을 나누셨던 바를 최후의 심판에서 잣대로 삼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민족과 신앙의 역사에 있어서 뿌리가 된 이 두 전통 즉 민족의 정통성과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두 중요한 전통의 공통 요소가 제사와 나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