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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작사 채동선 작곡 고향정지용 시- 고향박화목 시 -망향
이은상 시 -그리워이관옥 - 고향 그리워
이 네 곡이 채동선 곡으로 멜로디가 같아요.가곡 고향 그리워-
채동선 곡에 붙여진 4개의 가사 중 하나
소프라노 이관옥 작사 & 노래고향 그리워
이관옥 작사 채동선 작곡
소프라노 이관옥(1918~1976)
내 정든 고향을 떠나와서
낯설은 타향에 외로운 몸
저 멀리 안개 속에
그리운 얼굴 뵈는 듯
찬바람 불어오는 언덕에 앉아
먼 하늘만 바라 보노라
내 사랑 그리운 고향 땅아
언제 나를 품어 주려는가
아련한 꿈 속에
옛노래 그리워 불러보네
아! 언제 가려나 내 동산에
내 정든 고향을 떠나와서
아득한 하늘 바라 여기 서 있노라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채동선의 곡에 붙여진 가사는
4가지이다.
'고향' '망향' '그리워' 외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소프라노 이관옥씨
(1918~1976, 전 서울대교수)가
정지용의 '고향'을 부를 수 없게 되자
자신이 직접 '고향 그리워'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우리나라 소프라노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관옥 교수의 노래는
30주기가 되는 2006년
따님인 한영혜 교수
(피아니스트, 경원대 음대)의 노력으로
CD앨범에 새롭게 담겨져
각 방송사 등에 보존되어 있다.
(‘이관옥애창곡집’은
이관옥 교수 작고 이듬해인
1977년에 제작한
LP판을 2006년
CD앨범으로 다시 만든 것)
이정식 가곡에세이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2011)에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이곡은 원래 정지용(1902-1950)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고향이었으나,
6.25 때 시인이 납북되자
금지곡이 되어,
박화목의 망향,
이은상의 그리워 등으로
바꿔 부르다가
해금이 되면서 다시
고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가곡 고향 그리고 작곡가 채동선(1901- 1953) 1901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나 1953년,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 53세로 짧은 생을 그는 암울한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결코 굴함이 없이 한민족의 정신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냄으로씨 민족혼을 불사른 우리 시대의 선각자이다. 특히 한국 시단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정지용의 시로 대부분의 가곡을 썼고 그 중에서도 정지용의 시 고향에 부친 가곡 고향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깊은 가곡 고향은 시인 정지용의 납북으로 정지용의 시가 사용금지 되자 채동선의 가곡에서도 정지용의 가사를 바꿀 수밖에 없는 수난을 당했는데 채동선의 가곡 12곡 정지용의 시로 되어 있지만 일제 시대부터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던 가곡 채동선의 선율 자체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고향의 가사 대신 다른 가사로 부르고 다른 제목으로 실리게 되었다. 결국 같은 곡이지만 6.25 동란 직후, 박화목 작사 망향으로 처음 불려 지다가 채동선기념 사업회에서 채동선 가곡집을 펴낸 1964년, 노은 이은상에게 의뢰해 이은상 작사 그리움 그런가하면 한국 소프라노 1 세대로 서울음대 교수를 역임한 고 아관옥 교수는 스스로 가사를 작사 '고향 그리워'라는 제목으로 불렀는데 1988년 해금 조치로 다시 원가사인 고향을 되찾아 같은 곡에 네 개의 제목을 가진 진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채동선(蔡東鮮,1901-1953) 1901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세망동에서 부호 채중현의 장남으로 태어난 채동선은 당시 벌교면에는 학교가 없어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40리길을 머슴과 함께 걷거나 업혀 다녔다. 졸업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당시의 경기고보에 입학한다. 음악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1918년 당시 장안의 손꼽히는 바이올인 연주가였던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하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독일로 옮겨가 베를린 슈테르텐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고 1929년 귀국한다. 귀국후 서울에서 4회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1932년 현악4중주단을 만들어 동료인 최호영,이혜구 등과 실내악운동을 펴기 시작하면서 연희전문학교에서 현제명 등과 바이올린을 지도했던 것이 채동선의 청년기이다. 채동선은 당대 유명한 소프라노였던 누이 채동엽의 소개로 피아니스트 이소란과 결혼하여 서울 성북동에 터를 내리고 가끔 이화여전에 나가 외국어 강의를 하는 것 외에는 작품창작과 바이올린 연습에 열중하였다.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후생단 등 일제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하면서 흰 한복에 두루마기, 검은 고무신을 신고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국악채보에 전념해 민족음악의 수립의 기초를 이 시기에 쌓았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당시 좌경음악가와 극우 세력의 중간에 서서 민족주의적인 음악가들의 단합을 역설하고 곧 고려음악협회를 창설하고 협회장이 되었다. 이때 교항곡 조국, 한강, 독립축전곡을 작곡했으며 입성가, 3.1절의 노래, 개천절의 노래등을 작곡했다.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붙일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보네 이 노래는 이은상선생이 작사한 가곡 그리워의 가사이다.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였던 것인데 정지용이 월북한 시인으로 낙인되어 제목을그리워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채동선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보성에 돌아오지만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일본인에 의해 짓밟히고 있어 그 원통하고 분함에 가슴이 아파 처절한 곡조로 한숨을 쉬며 이 곡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음악가로서의 활동은 3기로 나누어 볼수 있다. 1기는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바이올리스트와 작곡가로서 활동한 시기이며, 2기는 은둔하면서 작곡가로서 내실을 기하고 국악채보를 통해 민족음악 수립을 한 시기이고, 3기는 해방과 더불어 관현악, 합창, 취주악 활동을 한 시기이다. 채동선은 부산 피난 시절 양담배 등을 친구 김창국에게 얻어 장사를 했는데 고집이 강해 하루 종일 하나도 팔지 못하고 모든 식구들이 쫄딱 굶은 적이 많았다. 1953년 2월 2일 종전을 알리는 포성이 한창일 무렵 부산 생활의 고생으로 병을 얻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영양실조에다 복막염이 겹쳐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그의 사후 부인 이소란 여사가 1963년 6.26때 서울 성북동 집 마당에 묻어둔 악보의 원본을 찾아내면서 사후 10년 뒤 빛을 보았다. 1989년에는 그가 자랑스런 보성사람임을 자각한 보성군 관계가들에 의해 총사업비 1,300만원을 들여 높이 3.6미터, 넓이 3미터 크기의 기념비가 벌교 공원에 세워졌다. 입술이 메마른 어둠의 세월 속에서도 그가 남긴 불멸의 노래, 부활의 가곡을 이 땅에 떨구고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가곡 고향, 추억, 동백꽃, 그 창가에, 또 하나 다른 세계, 동해, 갈매기를 우리들 가슴에 아름답게 새겨져 애창되고 있다. 이러한 가곡을 남긴 민족작곡가의 흔적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이올이스트요 작곡가요 음악사상가로서 식민지 생활에 저항하고 민족정신을 실천한 음악가 채동선이었다.
* 채동선 묘소 찾아가는 길 망우산 허리를 한바퀴 두른 산복도로 산책길의 반환점에 사진과 같은 정자가 있다. 이 정자의 왼쪽 오솔길로 내려서면 길은 위아래로 나뉘는데 이때 아랫길을 잡아 100여 m 내려가면 채동선의 묘가 나타난다. 아차산에서 용마산을 거쳐 망우리까지 종주하는 산행길이라면 용마산과 망우산의 경계가 되는 어름에서 이 정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채동선 [蔡東鮮, 1901.6.11~1953]
전남 보성 출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베를린에 유학, 슈테른센 콘세르바토리움에서 리하르트 하르체에게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운 뒤 1929년 귀국하였다. 그 후 4회의 바이올린독주회를 갖고, 32년 작곡발표회를 가졌으며, 37년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또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발전을 위해 활약하고 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 창작곡발표대음악제에서는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연주로 발표하여 찬사를 받았다. 8 ·15광복 직후 고려음악협회(高麗音樂協會)를 조직, 협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이후 국립국악원 이사,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대표작에 가곡 《고향》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 밖에 현악4중주곡 ·바이올린소나타 ·현악모음곡 등이 있다. <네이버백과>
비석에 새긴 가곡 <그리워>는 사연이 많은 노래이다. 같은 작곡가의 곡인데 노래 제목은 셋이나 된다. 여기 비석을 세운 시기가 1983년이니까 이은상 작사의 <그리워>이지 처음 작곡 당시의 노래는 정지용 작사의 <고향>이었다. 1933년 일제시대 채동선 가곡집에 실려 해방 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정지용 작사로 실렸던 노래는 한국전쟁 후 이념의 굴레 때문에 가사를 바꾸라는 정부 당국의 지시로 박화목 작사의 <망향>으로 교체되었다. 6.25를 거치며 정지용의 작품은 월북시인으로 낙인 찍혀 1988년까지 햇빛을 볼 수 없었다. 그러면 왜 비석에는 이은상 작사의 <그리워>인가. 1964년 채동선 타계 12주기에 맞추어 노래는 유족의 뜻을 받아 다시 이은상 작사의 <그리워>로 변신하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에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이는 경우는 있어도, 하나의 곡에 여러 개의 가사를 붙이는 것은 세계 음악계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채동선의 노래에는 이처럼 한국현대사의 아픔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
김세형(金世炯, 1904.2.18∼1999.6.11)
작곡가
평안남도 평양 출생.
1927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고,
1928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챔먼(Chapman)대학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였으며,
1934년 웨스턴 음악대학 대학원
작곡과를 졸업하였다.
미국 유학 시절인 1932년
우리나라의 최초의 연가곡인
먼 길을 작곡 및 발표를 하였고,
1932년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시인
오셀로를 작곡하였다.
1933년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회가(흥사단 단가)와
1934년 가곡 뱃노래를 작곡하였으며,
귀국 후 1936년 연가곡집
먼 길을 출간했다.
1938년 일본 동경에서
제1회 작곡발표회를 가진 바 있고,
1939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 창작발표연주회에서
가곡과 환상곡 작품 32를 발표하였다.
1974년 제2가곡집인 옥적과
1975년 화성학을 출간하였다.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1947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대학교음악대학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였고,
1960년 숙명여자대학교 음대학장,
1963년부터 1970년까지
경희대학교 음대학장을
역임하였다.
경희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작곡가 협회 회장과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과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예술원회원과
한국작곡가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동을 하다가
향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외국에 유학하여
작곡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전문작곡가이며,
한국 최초로 연가곡을 발표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끊임없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민족정서와 민족정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여러 대학에
작곡과를 창설하고
한국악단의 발전을 주도하였고
또 한국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을
배출시킨 등
음악교육자와 음악행정가로서
한국 음악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애
김세형은 1904년 2월 18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숭실중학교 3학년 때
취주악대에 가입해서
나팔을 불기 시작했으며
한편 교회의 오르간을
독학으로 공부해서
오르간 반주를 맡기도 했다.
이처럼 중학 시절부터 시작된
음악에의 열정은
숭실전문에 입학하면서
열도를 더해 숭실전문 4년 동안
룻쓰 부인과 쏠토 부인으로부터
음악이론 등 음악 전반에 걸쳐
깊이 있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 때 현제명도 함께
쏠토 부인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이 때의 음악 공부란
작곡법이 아니라
성악을 비롯한 음악 일반에
대한 것이어서
김세형은 따로 일본에서 나온
화성학 교본을 구해
독학으로 작곡 공부를 계속했다.
1927년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고,
1935년 귀국하기까지
7년 동안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이론과 작곡을 전공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는 먼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챕먼대학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했고,
이어서 웨스턴대학원에서는
작곡을 전공했는데
미국 체류 중에
이미 교향곡과
가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작곡했다.
1935년에 귀국한
그는 국내활동을 하려고 했으나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했다는 사실과
흥사단가의 작곡자인 것이
일본경찰에 알려짐으로써
요시찰 인물이 되었고,
결국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우선 집에서 작품을 쓰면서
1936년, 첫 번째 가곡집인
먼 길을 출판했다.
1937년에는 이화여전에서
임용하려고 했으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일본 총독부의 간섭으로 보류되었고
1938년, 감리교 초대 총리사였던
양주삼의 도움으로
이화여전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동안 김세형의 교향곡 작품에 대해서는
특별한 논의가 없었지만
미국에 있는 자녀들이
교향곡의 원본을 찾아냄으로써
한국 최초의 교향곡 작곡가로서
김세형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어나고 있다.
공적
김세형은 숭실중학 때부터
취주악대에 가입해서
나팔을 불고
교회의 오르간을 독학으로 공부해서
오르간 반주를 맡기도 하였으며
숭실전문에 입학하여서는
일본에서 발간된 화성악 책을 구해
독학으로 작곡공부를 하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다.
1928년에는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미국유학을 결행해
1935년 귀국하기까지
챕먼대학과 웨스턴 대학원에서
이론과 작곡을 전공했다.
귀국해서는
유학시절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한 것이 문제가 돼
한동안 개인적으로
작곡활동만 하다가
1938년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이후 서울대학교,
숙명여대,
경희대에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류작곡가인
김순애가 바로 그의 제자이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작품세계는
품격 있는 낭만성에 기본을 둔
토속적 내음의 표출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음악가로서도
교향곡과 고향시곡,
바이올린 협주곡, 가곡 등을
작곡한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훌륭한 인품과
동료, 후배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한 음악계의
최고신사로 불리고 있다. (예술원 홈)
학력
1927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32 챕먼대학 졸업(음악이론 전공)
1934 웨스턴 대학원 졸업(작곡 전공)
1969 경희대학교 명예문학박사
경력
1938 이화여전 교수(~44)
1947 서울대학교 음악대 교수(~60)
1955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최고심의위원
1955 한국작곡가협회 위원장
1960 숙명여대 음대 학장
1962 국립극장 운영위원
1962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1963 경희대 음대 학장(~1970)
1964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위원장
1966 예술원 회원
1966 예륜 상임위원
1969 예술문화윤리위원회 부회장
1970 경희대 명예교수
1971 서울시 문화위원
1975 경희대 대학원 명예교수
1977 한국작곡가협회 회장
1978 한국작곡가협회 명예회장
상훈
1962 대한민국예술원상
1970 국민훈장 동백장
1974 음악공로표창
1982 숭실대학교 공로표창
1983 MBC 가곡공로상
1989 음악공로상
예술 활동
1932 미국 LA 등 작곡발표회(~1934)
1938 작곡 발표회(동경)
1955 동남아지역 음악회의 참가
1955 미국 음악교육자 50주년 대회 초청
(세인트 루이스)
1956 세계인종음악회의 참석
(미국 필라델피아)
1957 한국작곡가의 밤(서울시향주최)
1958 세계민속학회의 참석(벨지움)
1963 유네스코 국제음악회의 참석
1965 유네스코 국제음악회의 참석
1973 UNESCO 국제음악회의 참석
(제네바)
1975 유네스코 국제음악회의 참석
기악곡
교향곡, 교향시곡,
바이올린 합주곡
환상곡 작품 32(1939)
교성곡
오셀로(1932)
성악곡
야상(1925), 추억(1929), 먼 길(1932).
뱃노래(1934), 옥적(1948),
염주(1975), 찢어진 피리(1978),
우물길(1978), 밤(1986),
그대에게 매인 나의 마음,
모든 행복이 내 것이라도,
잘 자오, 오 복된 잠이여,
물 긷는 처녀, 이별
작곡집
먼 길(한성도서주식회사, 1936)
옥적(玉笛)(세광출판사, 1974)
평론
한국에서 서양음악의 예술화 발전과
마우리 박사(예술원보 11.1967.12)
음악이 우리 생활에 주는 영향
(예술원보 17.1973.12)
저서
화성학(和聲學, 정음사, 1975)
원로 작곡가 김세형씨 별세
연합뉴스(1999. 6. 11)
원로 작곡가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김세형(金世炯)씨가
11일 오전 7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김씨는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
챌먼대학과 웨스턴대학원에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전공한 뒤
서울대 음대 교수와
경희대 음대 학장,
한국음악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음악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작곡가.
뱃노래를 비롯한 가곡과
환상곡 작품 32, 교성곡 오델로 등의
작품을 작곡하고
가곡집 먼 길과 옥적,
저서 음악사와 화성학 등을 낸 바 있으며
국민훈장 동백장과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장례는 한국음악협회의
음악인장으로 치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