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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사랑방
 
 
 
카페 게시글
―‥‥남은 이야기 스크랩 손님들로부터 받은 와인 선물 - 물랭 아방을 열다
권종상 추천 0 조회 76 09.01.20 03:22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아마 2008년은 제가 제 우편물을 받는 손님들로부터 와인을 가장 많이 받은 해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거기서 일한 것이 이제 4년, 햇수로 5년째라 과연 어떤 일이 이번에 또 일어나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내 손님들에게서 받은 와인들은 아무래도 좀 특별했습니다. 물론 아예 와인샵의 상품권을 선물로 받기도 했지만, 손님들에게 선물받은, 우체통에 짧은 편지와 함께 누워있던 와인들도 참 특별했습니다.

우체부로 일하는 것이 즐거운 까닭 중의 하나가, 매일 매일 하는 일 속에서 친구들을 만든다는 것인데, 우체부와 수취인의 인연으로 만난 벗들 역시 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하고, 한국에 대해 궁금해하고 하면서 점점 제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러다보면 또 제 취미,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공감하고 함께 이야기와 정보를 나누게 되고... 이런 것들은 제 삶에 있어서 아름다운 순간들이 되어주고, 또 제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 주기도 함을 새삼 느끼곤 합니다.

 

아무튼... 어떤 일 열심히 하고 마친 날,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녁에 또 폭찹인데 상관없어요?" 허허... 뭐 그런 좋은 소식을 그렇게 미안하다는듯 말하시는가... 당연히 그런 거 먹으면, 또 와인이 안 따라줄 수 없지요. 폭찹. 거의 '심심하면 먹는 수준의' 음식이 되어 버렸고, 코스트코 가면 꼭 폭찹용의 고기가 있는지(이 고기가 항상 있는 게 아니라서) 살펴보고, 있으면 한두팩씩 꼭 사오고... 아내는 아예 이 고기를 마늘과 올리브기름, 소금을 섞은 그녀의 특제 소스에 재 놓은 후에 김치냉장고에 이걸 넣어 보관해 둡니다. 폭찹은 바로 해먹어도 맛있지만, 이렇게 며칠동안 소스에 재어 놓고 먹으면 훨씬 맛있습니다. 간이 충분히 배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머릿속은 또 무슨 와인을 맞추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물랭 아방 생각이 났습니다. 한번도 안 마셔본 와인인지라, 잘은 모르지만 이것은 '크뤼 보졸레'라 들었습니다.  루이 자도의 샤토 데 자끄 물랭 아방... 솔직히 무거운 쪽의 와인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폭찹에도 카버네 소비뇽이나 멀로, 혹은 시라나 진판델을 맞추는 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 갖지 않았을 터입니다. 아니면 샤도네나 리즐링이라도 좋았겠지요 - 그러고 보니 우리집에서 나올 수 있는 와인은 거의 다 나온 듯 하네요.-  그러나, 물랭 아방이라. 괜찮을 듯 했습니다. 어차피 프랑스에서 생산량이나 소비량으로 볼 때 이만큼 대중적인 와인도 드물고(아, 물론 '보졸레'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특정 상표가 아니라) 그중에서 '크뤼'의 이름을 달고 있는 와인이라면 뭔가 색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긴 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하는 동안에 폭찹 내음은 은은하게 제 후각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셀라(로 쓰고 있는 붙박이 옷장이 있는)방에 가서 이 와인을 꺼내 왔습니다. 루이 자도의 이름을 갖고 있으되, 샤토 데 자크라는 이름도 함께 붙어 있는 이 와인... 솔직히 저는 보졸레를 돈 주고 살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보졸레를 그렇게 많이 마셔본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브루일리나 그냥 보졸레 와인들도 몇번 접해본터라, 그냥 산뜻한 과일의 맛과 특히 딸기의 느낌이 뛰어날 거란 선입관 같은 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와인을 연 순간...

 

'이거, 피노잖아?'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맛이나 느낌에서 잘 만들어진 피노느와를 연상시키게 하는... 물론 과일향이 앞서는 가벼운 와인... 이라는 평가를 듣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있는 '가벼운' 와인류들의 가벼움은 절대 아닙니다. 그 가벼움 속에 묻어 있는 이 기운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더냐...  세월의 무게더냐?  아무튼, 와인은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와인이 보여준 돼지고기와의 궁합은 꽤나 괜찮았습니다. 아마 그것은 역사의 무게겠지요. 폭찹이 그 지역의 대중적인 요리와 맞물리는 점이 있듯, 그 지역의 와인은 그 '비슷한' 요리를 감싸주는 포텐셜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겠지요.

 

아직도, 제겐 손님들로부터 받은 몇 병인가의 좀 특이한 와인들이 개봉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뜻들이 참 깊은 와인이라고 느껴집니다. 적어도, 그것은 제 노동에 대해 사람들이 인정하고 감사하며 제게 건네어 준 선물입니다. 제 일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런 좋은 추억들을 가슴에도 남기지만, 그것을 입으로도 즐기는군요. 하하.. 늘 제가 하는 일에 대해 고마워해주는 이들에게 저도 새삼스런 고마움을 가지게 되는, 그런 날입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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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1.20 17:29

    첫댓글 ㅎㅎㅎ...그림의 떡,아니...그림속의 무릉도원이로군요...ㅋㅋㅋ

  • 작성자 09.01.21 10:06

    맛있게 잘 먹었답니다. 하하.

  • 09.01.21 13:58

    야성을 잠들게 하는 마녀 - 와인의 매력에 푸ㅡㄱ 빠져 봅니다.

  • 09.01.22 04:59

    마음의 선물인데 마음으로 우아하게 즐겨 드셔야지요. 그래야 주신(박카스)에 대한 예의 아니겠습니까.... 하하 말 됩니까? 술맛을 참 섬세하고도 자상하게 하시니 눈감고 흉내 내보다 결국 이것 저것 마시게 되네요? ^^ 보줄레 끄뤼... 이거 우리 첫 막걸리 같은 건가 보지요? 기본이 쌀이 아니라 포도이니까 더 맛이 우아하겠지요. 우리 어려서도 술도가에서 술 빗어 첫 막걸레 나오면 동네 어른들 드시라고 돌렸었지요. 술 못하시는 우리 아버님은 별종인 나에게 내려서 먹어보라하시고... 뭐랄까 좀 카랑카랑 하면서도 힘이 빡세게 밀고 올나오는 느낌이었다고 (나도 권종삼님 흉내ㅎㅎ)

  • 09.03.02 10:55

    푸하하~ 단풍 형님의 댓글은 늘 멋집니다요... ^.^

  • 09.03.02 10:58

    폭찹은 외항선의 고정 메뉴지요. 그 맛에 십여 년 길들어져 향수의 음식인데 다른 곳에선 그 맛을 느끼기가 쉽지 않군요. 전 그냥 소금 뿌려가며 구워먹는 걸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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