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3일 가해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12,13-21)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능력>
영화 ‘더 룸’(2019)은 어느 날 시골의 값싸지만 커다란 집을 산 젊은 부부, 매트와 케이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집에는 폐쇄된 비밀의 방이 있었고, 그 방 안에서는 원하는 것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건이나 예술 작품 같은 것을 만들어내며 그 방의 능력을 즐깁니다.
그러다 케이트는 자신들의 아기를 두 번이나 유산한 슬픔 속에서 그 방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기를 다시 가지고 싶어 합니다. 매트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소원대로 방에서 아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매트는 소원의 방에서 얻은 돈으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돈이 재가 되어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돈을 집 밖으로 뿌렸더니 재가 되어 떨어졌습니다. 아기를 데리고나갔더니 아기는 1초에 1년씩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집 안에서 만들어진 것의 시간과 집 밖의 시간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트는 그래서 괜히 아이에게 상처 주지 말고 아이를 다시 소원의 방에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그러나 케이트는 아이에게 집착합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다시 없애려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가 청년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소원의 방으로 들어가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고 아버지가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 어머니와 남편처럼 살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케이트는 아들을 이겨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매트는 아내가 소원의 방에 갇힌 것을 알고는 벽을 뚫고 그녀를 구하러 갑니다. 결국 아내를 구하고 아이를 집 밖으로 유인하여 재가되게 합니다. 케이트는 자기 아들이 재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물이나 쾌락, 권력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기 때문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는 자기 형더러 자기에게도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사람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영원의 시간을 살고 계십니다. 영원 안에 사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재와 같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재를 나누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며 어떤 부유한 사람의 예를 들어주십니다. 그는 소출을 많이 거두어 곳간을 늘리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불교에서 집착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집착하는 자아를 없애는 것입니다. 결국 나아가는 방법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으면 이 세상은 마치 꿈처럼 의미 없는 세상이 됩니다.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늘 죽는다고 믿어야 합니다. 동물들이 사랑할 능력이 없는 이유는 집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저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첫 기억 때문에 잠을 무서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 때는 잠을 자도 부모님이 지켜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며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고 자기 전에 매번 기도합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사는 사람은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야 나뿐인 사람에서 내어줄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잠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고 그 능력을 발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에 영원히 갇히느냐, 아니면 이 세상을 꿈처럼 즐기며 살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능력도 있고 그 선택대로 믿을 능력도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 삶이겠습니까? 결국 집착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며 즐기다 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죽을 수 있다고 믿읍시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출처: 원글보기; ▶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