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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열한 번째 소극적 표지: 자신의 구원확신
어떤 감정이 생긴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체험이 신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적으로 건전한 상태에 있다고 크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감정이 바른 것인지 또는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지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가 좋은 상태라고 확신하는 듯하며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으면 그들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망을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경우는 순교 때 같은 어떤 매우 비상한 상황이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생각은 교황주의자들을 반박하는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주장해 온 개혁교회의 교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에도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성도들 또는 성경에서 특별하게 취급되는 성도들에게 확신이 있었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니엘 그릭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특별한 은혜를 계신하신다고 증거하셨다. 욥은 자신이 신실함과 정직함을 최고로 확신하고 그것을 자신 있게 말했으며 종종 하나님이 그 사실에 대한 증인이라고 진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말한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5-27). 다윗은 시편 전체에 걸쳐 주저 없이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분깃이요 유업이며 반석이요 확신이며 방패요 구원이며 높은 망대와 같으신 분으로 묘사한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였음을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느냐고 호소한다(왕하 20:3).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4-16장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자신이 죽으시기 전에 11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강화에서(이 강화는 자신의 제자들과 전 교회에 주신 유언과 같다) 종종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용어로 그들을 향한 자신의 특별하고 영원한 사랑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확실한 방식으로 그들이 장차 자신과 함께 자신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약속하신다. 동시에 주님은 그들의 기쁨을 충만케 하기 위해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그리고 그의 전체 강화의 마지막 부분인 16장 33절을 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기를 꺼려하지 않으셨다. 그는 당신의 제자들이 최소한의 긴장과 불안 속에 있는 것조차 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강화를 제자들 앞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마치고 있는데 그 기도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11명의 제자들이 주님을 구워나로 알았으며 주님을 믿었으며 주님의 말씀을 받고 지켰다고 하나님 아버지께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주님을 거룩하게 했으며, 주님의 뜻은 그들이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이 이 모든 것을 기도하신 이유는 주님의 기쁨이 그들 안에서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아버지께 말씀하신다(요15:11). 이런 내용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충분하고 풍성하게 공급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이 미래에 누릴 영광을 완전히 확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획과 일치하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서 세우시는 질서와 배치에 합치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의 주님이시자 왕이시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와 자신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언제나 학실하게 말하고, 자신이 장차 받을 보상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자신 있게 말한다. 열거할 수 있는 모든 곳을 지적하는 것은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너 곳을 더 언급하고자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 4:7-8).
우리는 은혜 언약의 본질과 그 언약에 관련된 것들을 정하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은 하나님이 이 땅에 사는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공급하셔서 그들이 영생을 확실하게 소망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에 된다.
그 은혜의 언약으로 만사가 준비되고 구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모든 것은 확실하다. 그 언약은 모든 면에서 규모 있게 준비되었고 확실하게 인 쳐졌다. 그 은혜 언약으로 맺은 약속들은 자주 반복되었으며 가장 완전하고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그 약속들에는 많은 증거와 보증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들을 맹세로써 분명히 하셨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은 약속의 상속자들이 의심없이 소망하고 온전히 기뻐하면서 그들이 장차 누릴 영광을 확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하지만 만일 성도들이 그런 약속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크게 위로하면서 장차 얻을 영광을 소망하는 그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아무리 확실하다 하더라도 성도 개인이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자신ㅇ게 해 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그는 큰 소망과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죄책에서부터 자유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다면, 신자들의 양심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히 9:9)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도 헛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 확신은 어떤 비상한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권면을 받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듣게 딘다(벧후 1:5-8). 그리고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그들이 비난받을 이유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의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위해 준배하신 상급을 확신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크게 책망받아야 할 만큼 나태하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암시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고전 9:26)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 주는 은혜가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이(단지 사도들이나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이것을 알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전 2:12). 그리고 요한 일서 2장 3절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씀하며, 5절은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며, 3장 14절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라고 말씀하고, 19절은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며, 24절은 "우리에게 수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씀한다. 4장 13절과 5장 2절 그리고 19절도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감정이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는 이유로 그사람들이 위선자이며, 그들의 감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
다른 한 편으로 사람들에게 있는 감정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영적으로 좋은 상태에 있으며 자신들의 감정은 신령한 것이라고 넘치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들이 성도이며 그들의 감정은 은혜로운 것이라고 판단 내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는 확신이 아무리 크고 강하더라도 그 확신만을 기초해서는 어떤 확실한 주장도 내세울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담대하게 부르며 가장 담대하고 친숙하며 적절한 언어로 기도하면서 '나의 아버지, 나의 사랑하는 구속주, 나의 달콤한 구세주, 나의 사랑하는 분' 등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자.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영적인 상태에 대해 가장 확신 있는 표현들, 즉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확실하게 압니다. 나는 하늘에 한 분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하게 알며,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을 알며 마치 지금 그 곳에 있는 것처럼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영혼에 자신을 나타내고 계시며 나를 향하여 웃고 계시는 것을 압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하자, 그리고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절대 검토하거나 시험하려고 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괜찮은지 어떤지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시사하는 모든 것을 정죄하는 듯하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그가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고자세로 과도하고 격렬하게 확신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아주 화려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확신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보여 준 태도를 더 풍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도라는 사실, 그것도 가장 탁월한 성도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갔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들의 눈을 높이 올려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해 주신 것을 감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소경이며, 은총을 입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암시했을 때, 그런 암시를 경멸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ㅆ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 만일 그들이 세리의 심령과 비슷하게 확신했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버리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신회하며 소망하는 사람이 확신하는 것과 더 닮았을 것이다. 세리는 자신이 엄청나게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고 멀리 서서, 하늘을 향해 눈을 들지도 못하고, 그의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통곡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심령이 어떠한지를 염두에 둔다면, 그들이 어떤 법 아래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무지와 속임수가, 아떤 자기 아첨과 자기 영화와 자신감이 그들을 통치하고 있는지를 고려한다면, 거짓되고 고조된 감정으로 그들의 양심이 무디어지고 죄를 깨닫지 못하며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단이 앞에서 살핀 죄의 원리로 어떤 기분 좋은 상상을 주입해서 그에 자극되고 거짓된 기쁨과 위로를 받을 때, 스스로를 높이 생각하고 그들의 행복한 상황을 자신하는 마음이 태산처럼 높아지고 강해지며 폭충우처럼 격렬해지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다.
위선자가 거짓 소망을 확고하게 품을 때 그 위선자에게는 그 소망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없다. 참된 성도들이 자주 자신의 소망에 대해 점검해 보게 하는 것들이다.
첫째로, 그는 마음이 신중해야 하고 기초가 확실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며 자신이 속고 있다는 두려움이 없다.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위로는 각정하는 마음과 주의 깊은 마음을 더 강하게 해 주고 무한하게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심판자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거짓된 위로는 이런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며 두려울 정도로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둘째로, 위선자는 참된 성도에게 있는 자기 자신의 소경 됨에 대한 지식과 자기 마음의 거짓됨에 대한 지식이 없고 자신의 지식이 천박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짓된 깨달음과 감정으로 기만당하는 사람들은 더욱 쉽게 자신들에게 있는 빛과 지식을 크게 자만한다.
셋째로, 마귀는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소망은 공격하지만 위선자들에게 있는 소망은 공격하지 않는다. 마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대적하는 큰 적이고 원수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 큰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거룩하고 본질적으로 하늘에 속하며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를 크게 증진시키고 그 심령 깊이 은혜를 더 품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더 엄격하고 부지런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귀는 위선자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는 원수가 아니다. 위선자의 소망은 무엇보다도 위선자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위선자는 마귀가 자신의 소망을 흔들거나 흔들려고 시도하지 않는 한 평생 동안 아무런 제재없이 자신의 소망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마귀가 그의 소망을 공격한다. 사단은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를 공격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공격했다. 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하며, 제자는 선생보다 크지 못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제자가 자신의 선생과 같다면 족한 것이다.
넷째로,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것 같은 시각이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보다도 열 배 정도는 많이 자신이 마음을 살피며, 그 부패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 행위로 짓는 죄악들이 그에게는 너무도 부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 죄악들은 두려움을 자아내며 은혜가 그런 부패함과 관계할 수 있다는 것 또는 그렇게 부패한 심령에 은혜가 내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신비로운 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거짓된 소망은 부패함을 숨기며, 부패함을 덮어 버리고 위선자는 자신의 눈에 자신이 정결하고 밝게 보이게 된다.
위선자들은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그들 자신 밖으로 드러나는 도덕성과 외형적인 신앙에 기만당하는 부류다. 이 부류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의 교리에 있어서 고백적인 알마니안주의자들이다. 다른 부류는 거짓된 깨달음과 고상함에 기만당하는 부류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종종 행위와 이난 자신의 의를 폄하하며, 대가 없는 은혜를 많이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깨달음과 겸비함을 의로움으로 삼고, 자신들을 하늘에까지 높인다. 세퍼드 목사는 자신의 작품 <열 처녀의 비유>에서 이 두 부류의 위선자들을 율법적인 윗ㄴ자와 복음적인 위선자라는 이름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종종 후자가 더 나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