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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서정 - 산거북이 까페
 
 
 
카페 게시글
산행기와 사진 스크랩 백두대간 한 토막을 지나며 13
오늘하루 추천 0 조회 61 09.07.09 10:5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거두절미, 몸통만 얘기하고 싶다, 거두절미, 몸통만 듣고 싶다. 누군가 나에게

나로서는 별 관심도 없는 다른 사람들 시시콜콜한 이야기, 다른 나라 먼 먼

이야기들을 반 시간 넘게 늘어 놓았을 때, 그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다 들어준

다음 내 마음 속에 남은 말은, "나 외로워"  혹은  "가만 있으면 어색해"  혹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정도의 한 마디 뿐이다. 물론 귀만 열어

놓고 마음은 열어 놓지 않은 나의 불성실한 태도가 문제이긴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수만 마디 장식들을 늘어 놓는다거나 아무런 할 말도 없으면서

침묵을 참지 못해 쓸 데 없는 말들을 옮긴다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잠자코 있어도,

단 한 마디 말을 해도 내 귀를 번쩍 뜨이게만 해 준다면, 나는 온 마음을 활짝 활짝

열고 눈을 반짝거리면서 정성스럽게 귀기울일 것이다. 몸통 얘기를 하면서 나도

너무 많이 지껄였다. 피곤하다. 이제 그만 산으로 가야겠다.

 

   낮에 한바탕 비가 내렸었는지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마른 먼지가 풀풀

날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질척거리지도 않아 딱 걷기 좋은 상태였다. 초반에

해발 700m부터 1500m 높이에 이르기까지 약 7km 정도를 꾸준히 올라야 했기에

적절히 속도를 조절해야만 했다. 조절했지만 숨이 차고 힘이 들었다. 힘이 들때는

앞서 가는 사람, 뒤에서 오는 사람이 힘이 되어준다. 앞사람이 내 손을 잡아 주거나

뒷사람이 내 등을 밀어 주는 것도 아닌데, 같은 리듬을 타고 함께 움직이는 것

만으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멀리까지 가서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 올 때면 어깨동무를 하고서 힘든 줄 모르고 어느 새 동네에 다 오곤

했던 기억이 났다.

 

   키 큰 풀들과 키 작은 나무들이 촘촘하게 어우러진 사이로 좁다랗게 길이

이어져 있었다. 겨우 한사람이 지날 수 있을만큼 좁은 길을 걸어가다 보니

양 옆에서 풀들과 나무들이 어깨를 툭툭 치며 계속해서 알은 체를 했다. 나도

얼굴을 이쪽 저쪽으로 돌리면서 알은 체를 했다. 풀들과 작은 잎 여린 가지들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마구 만졌다. 기분이 참 좋았다. 애들이 아기였을 때 조그맣고

토실토실한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던 일이 떠올랐다. 고 까맣고 맑은 두 눈,

모든 걸 한방에 날려버리는 천진한 웃음, 그리고 고 쬐끄만 손가락들이 얼굴을

더듬을 때 나던 배냇향도 풍겨왔다. 얼굴을 간지르고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장난을 걸던 수많은 아기들의 도열을 벗어나자, 우뚝 솟은 봉우리에 다다랐다.

밤새 지나온 길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구불구불 먼 산 너머 이어져 있었고,

앞으로는 구름바다가 저 멀리 땅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하얀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멀리로는 하늘과 맞닿아 있고 가깝게는 높다란

산봉우리들에 둘러쌓인 채 하얀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모든 물을 받아 들이고

온갖 생명을 길러내는 바다, 낮은 데로만 낮은 데로만 흘러 가장 거대한 물방울을

이룬 바다. 바다는 발 아래 낮게 엎드려 있었지만,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가장

낮은 곳으로 스스로를 낮춘 자의 위엄이 넘쳐 흘렀다. 도도한 겸손, 이 이상한

단어의 결합을 나는 남덕유 서봉에서 내려다 보는 장엄한 구름바다에 바치고

싶었다.

 

   머리 위로는 태양이 이글거리면서 바닷물을 데우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산길은 온통 뿌연 안개 속에 덮였는데, 데워진 바닷물이 하늘로 오르면서 대기

를 가득 채운 때문이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가장 낮은 곳까지 머물며 생명을

북돋던 물은 이제 제 할 일을 다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귀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가장 거대한 존재였던 물은 깃털보다 가볍게 먼지보다

작게 한없이 비우고 한없이 작아져서는 허공으로 둥실 몸을 띄우고 처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가벼운 몸짓이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여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땅에 남아 한참이나 낮추고 한참이나

비워야 한다고, 그러면 어느 날 어깨죽지를 뚫고 하얀 날개가 돋는거라고,

자기들끼리 하는 얘긴지 나한테 하는 얘긴지 물방울들은 소근소근대며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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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09 11:18

    첫댓글 오늘하루님의 글에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지명이나 산이름 없이 전재되는 산행기를 보노라면 산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모습들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육십령-남덕유 인근인 것이 드러나네요) 아침 운해가 운무가 되어 하늘로 치솟는 광경이 영화장면처럼 떠오릅니다.

  • 09.07.09 11:20

    저는 산에 가지 전보다 산을 내려서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것이 거북합니다. 산에서 내려서서는 정말 오랫동안 아무 말없이 좀 더 경건하게 지냈으면 좋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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