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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생애
1809년 2월 12일 : 켄터키주 하젠빌에서 가까운 한 농장의 평범한 통나무집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토머스 링컨, 어머니는 낸시 행크스. 두 살 위의 누나 새라가 있었음.
1815년(6살) : 누나 새라와 함께 몇 주 동안 학교에 다님.
1818년(9살) : 어머니 낸시 사망함.
1819년(10살) : 아버지 토머스는 과부인 옛 친구 새라 부시 조스턴과 결혼.
1820년(11살) : ‘미주리 타협안’이 의회에서 채택되어 북위 36도30분 이북의 지역에는 노 예제도를 금지.
1827년(18살) : 오하이오강의 나룻배 사공이 되어 일함.
1831년 3월(22살) : 덴튼 오퍼트라는 상인을 위하여 뉴올리언스에 가기 위한 상자 모양의 배를 제작하고 이 배가 뉴세일럼 근처에서 둑에 걸려 흘러가지 못하는 것을 링컨의 지혜 로 해결하고 무사히 항해하여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며, 이때 뉴올리언스에서 노예 시장을 보고 충격을 받음. 7월에 덴튼 오퍼트 가게의 점원이 되어 부모를 떠나 뉴세일럼으로 감.
1832년(23살) : 인디언 추장 블랙 호크, 500명의 인디언 전사들을 이끌고 일리노이에 들어 옴. 링컨, 블랙 호크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원 입대하여 7월에 제대함. 일리노이주 하 원 선거에 휘그당원으로 출마함했으나 낙선함. 윌리엄 베리와 동업하여 잡화상을 시작함.
1833년(24살) : 봄에 링컨ㆍ베리 상점 파산함. 베리는 죽고 링컨은 빚을 떠안게 됨. 뉴세일 럼의 우체국장이 됨.
1834년(25살) : 휘그당원으로 일리노이주 주 의원에 당선되어 8년간 일함. 이때 측량기사 의 일도 함께 함.
1836년(27살) : 3월 텍사스,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함. 링컨은 주 의원에 재선됨. 독학 으로 법률 공부를 하여 변호사가 되어 개업을 신청함.
1837년 4월(28살) : 존 스튜어트와 변호사 개업을 함. 스프링필드로 이사를 옴.
1839년(30살) : 가을, 메리 토드와 처음 만남.
1840년(31살) : 일리노이주 의회 의원에 4선.
1841년(32살) : 링컨은 스튜어트와 헤어지고 스티븐 로건과 동업.
1842년(33살) : ‘생가몬 저널’에 민주당 정치인 제임스 실즈를 비판하는 글을 연재함. 실즈 링컨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링컨은 결투장까지 갔으나 중재로 화해를 함. 메리 토드와 결 혼함.
1843년(34살) : 링컨의 첫 아들 로버트 테드가 출생함.
1844년(35살) : 현재 ‘링컨의 집’으로 알려져 있는 스프링필드 잭슨가에 위치한 저택을 구 입하여 5월에 이사. 윌리엄 헌든과 동업을 함.
1846년(37살) : 링컨의 둘째 아들 에드워드 베이커 출생함. 휘그당의 미국 하원 후보로 공 천되어 당선됨.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남.
1847년(38살) : 하원의원직을 끝내고 변호사로 돌아감.
1856년(47살) : 공화당 입당.
1858년(49살) : 일리노이주 선출직 상원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
1860년(51살) : 미합중국 16대 대통령에 당선.
1861년(52살) : 3월에 워싱턴 DC에서 대통령 취임. 4월에 남북전쟁 발발.
1863년(54살) : 1월 1일 노예해방령 선포. 11월에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방문, 전사 자 국립묘지 헌납식 참석.
1864년(55살) : 대통령 재선.
1865년(56살) : 워싱턴DC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중, 존 부스에게 암살당함
켄터키주(州) 호젠빌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전에서 행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인민주권론을 비판하였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과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 쪽에서 노예제 유지의 브리켄리지와 인민주권의 더글러스의 두 명의 후보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당선과 함께 남부 제주(諸州)는 잇달아 합중국을 이탈하여 남부연합국을 결성하였다. 링컨은 이미 노예제를 가지고 있는 남부 제주의 노예를 즉시 무조건 해방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앞으로 만들어질 준주(準州)나 주(州)는 자유주의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나, 4월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 그는 의회에 대하여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요청하고, 독재적 권한을 행사하여 인신보호령장의 정지, 언론집회의 자유의 제한을 강행, 반대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여러 세력을 조정하여, 북부의 강경론자들을 누르면서 노예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하였으나, 1862년 9월 남군이 수세로 몰린 때를 노려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외국의 남부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써, 북부와 해외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전황을 일거에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에서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다. 전쟁 중인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U.S.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1865년 4월 9일 남군사령관 R.E.리가 애포매턱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종막을 고하였다. 전쟁이 종막에 가까워짐에 따라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조기 연방 복귀를 바랐으나, 남군 항복 2일 후인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관람 중 남부인 배우 J.부스에게 피격, 이튿날 아침 사망하였다.
링컨의 명언
•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결심한 사람일수록 언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법이다. 그 러한 성질의 악화나 자제력의 감퇴 결과를 훌륭한 사람일수록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이 쪽에 반쯤의 타당성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크게 양보하고, 자신이 만만한 일일지라도 조금은 양보해라.
• 국가는 거기에 거주하는 국민의 것이다. 국민이 현정부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 그들은 언 제든지 그것을 개선할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거나 분할 내지 전복시킬 수 있는 혁 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
•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또한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 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랜트 장군의 위대한 점은 침착하면서도 목표에 집요하게 매달린다는 점이다. 그는 쉽게 흥분하지 않으면서도 불독같이 용맹스럽고 끈질기다. 그의 이빨에 한 번 물리면 그 누구 도 끄집어낼 수가 없다.
• 나는 계속 배우면서 나는 갖추어 간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의 것, 내가 아는 한의 최선의 것을 실행하고 또한 언제 나 그러한 상태를 지속시키려고 한다.
•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
• 나는 어릴 때, 가난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온갖 고생을 참으며 살았다. 겨울이 되어도 팔 굽이 노출되는 헌 옷을 입었고, 발가락이 나오는 헌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소년시절의 고생은 용기와 희망과 근면을 배우는 하늘의 은총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웅과 위인은 모두 가난 속에 태어났다. 성실 근면하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정신만 있으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반드시 큰 꿈을 이룰 수 있다. 헛되이 빈고(貧苦)를 슬퍼하고 역경을 맞아 울기만 하지 말고, 미래의 밝은 빛을 향해 분투 노력하며 성공을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찬스가 올 것에 대비하여 배우고, 언제나 닥칠 일에 착수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추고 있다.
•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뒤로는 가지 않는다.
• 나에게 밤낮으로 무서운 긴장이 생겼기 때문에, 만일 내가 웃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죽은 지가 오래 되었을 것이다.
• 나이가 40을 넘은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나의 어머니가 준 성경때문이었다.
•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이 더 좋아졌다는 것을 보는 일이 다.
• 내가 성공을 했다면, 오직 천사와 같은 어머니의 덕이다. -링컨
• 노동을 소중히 여기자. 노동의 빛은 아름다운 것이다. 노동은 온갖 덕의 원천이기 때문이 다.
• 만나는 사람마다 교육의 기회로 삼는다.
• 많은 자유국가가 자유를 상실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날이 올지 모릅니다. 만일 그 렇게 된다면 이 나라가 나의 자랑스러운 훈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도망을 쳐서가 아니라, 결코 도망을 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스프링필드의 연 설 중에서)
•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 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 미국의 국민에 대하여, 그리스도교의 세계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더욱이 '나'라고 하는 일개 인간의 궁극적 인격을 가지고 하느님께 대하여, 나는 책임을지지 않으면 안 된다.
• 변호사가 되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면 그것만으로 목적은 절반이나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 다.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항상 명심하라.
• 뿔뿔이 흩어진 집안은 살아갈 수 없다. 저는 연방이 해체되거나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게 될 것인지는 자기의 결심에 달려 있다.
• 시비를 가리느라고 개에게 물리느니보다는 개에게 차라리 길을 양보하는 것이 현명하다. 개를 죽여 본들 상처는 치유될 수 없는 법이다.
•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길이 열리게 마련이다.
• 일이란 기다리는 사람에게 갈 수도 있으나,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자만이 획득한다.
• 자기가 살아가는 목적은 자신의 이름을 우리시대의 사건과 연결짓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는 삶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름과 어떤 유익한 일과를 연결짓는 일이다.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먹기만 하고 일을 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 인간은 아마도 입만 있고 손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부류로 일만 하고 먹지는 못하게 되어 있는 인간을 만드셨다면, 아마도 그 인간은 손만 있고 입은 없었을 것이다. 입과 손을 동시에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하면서 먹고, 먹으면서 일하자. 어느 한 쪽에만 치중하는 불구자가 되지 말자.
• 절반은 노예, 그 절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이 관계가 영속할 수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 타인의 자유를 부인하는 자는 그 자신도 자유를 누릴 가치가 없다.
•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셨기 때문에 자기는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을 비참한 사람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