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가소로운 일이겠지만 16세기 말에 그런 공식적인 계획이 몇차례 있었습니다. 귀족과 성직자들이 쌍쌍히 모여앉아 중국을 정복하자고 떠들던 세비야 회의의 대화록을 보면 그 땅을 정복하고 콩키스타도르 귀족의 목양지를 넓힌다던지...연옥과 지옥에 빠진 중국 백성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떠드는 도미니카 수사들 등...
이 작자들은 서양인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워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던 일본에 대해서는 주워들은게 있어서 1580년 무렵이 되면 이미 경외심 비슷한 것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회 동방교구의 감독자인 바리냐노나 프로이스 등이 본국에 보낸 보고를 통하여 일본의 지도자들이 스페인 본국의 필리페 대왕처럼 수만에서 수십만의 정예병력을 동원할 능력을 가졌다는 점. 무와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식으로 인식하였기에 행여 일본을 정복한다는 시도는 꿈도 꾸지 않았죠. 1580년 포르투갈을 합병한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일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590년대에 스페인 선단이 일본에 표류했을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음모죄로 걸어 모두 처형시켜 버렸고 이 소식은 필리핀과 멕시코를 경유하여 스페인 본국에 전해집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항의조차 포기했습니다. 행여 무역관계에 먹구름이 낄까 해서였죠. 1630년대에 일본의 쇼군이던 토쿠가와 이에미쓰가 포루투갈과 스페인에 대한 쇄국을 단행하자 스페인은 포루투갈의 주권국 자격으로 이의 재고를 간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이에 대한 이에미쓰의 회답은 사절단 전원의 처형이었죠. 스페인은 분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일본과의 통상을 포기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스페인은 일본의 쨉이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일본 해적만 하더라도 남중국해에서 포루투갈과 스페인 상선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던 처지에 어찌 일본 본토의 정규군과 상대할 마음을 언감생심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즈텍이나 잉카와는 달리 거기에는 고도의 정밀한 관료-재정-군사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스페인은 의외로 일본에 대해서와는 달리 중국을 상당히 얕잡아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지리적으로 중국이 얼마나 거대한 제국인지를 스페인은 알지 못했습니다. 16세기에 스페인에 의해 작성된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일본이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고, 중국은 일본보다 약간 큰 정도로 묘사됩니다. 이 지리지식은 17세기가 되어야 수정됩니다. 두번째로, 중국의 서양인에 대한 내륙 봉금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자세한 내막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예수회 창립 멤버였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1549년 중국 동남부의 한 섬에 상륙합니다. 이미 성공적인 선교사업을 일본에서 행한 그였기에 미래에의 자신감은 충만했죠. 그러나 중국인들은 특유의 무관심으로 이제나 저제나 본토로 들어갈 생각만 하던 사비에르를 그곳에서 병들어 죽게 했습니다. 그 후 중국의 철저한 방해로 예수회는 16세기의 마지막 십년에 가서야 마테오 리치라는 선교사를 본토로 진입시키는데 성공하죠. 스페인의 중국 지식은 그가 유럽에 보내던 보고문에 이르러서야 충실해 집니다.
마테오 리치의 보고는 어떤 의문점을 스페인 정부에 제시합니다. 마테오 리치에 의하면 중국이라는 나라는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나라로 지목한 <키타이>를 가리킬지도 모른다는 거였죠. 마테오 리치는 북경 근처의 한 페허를 방문하고 그곳이 과거 몽고의 군주들이 살던 도읍지였다는 말을 듣고 동방견문록에 자주 등장하던 쿠빌라이가 키타이에 세운 도읍지 칸발릭(따뚜)을 연상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중국 동남부의 거대 항구들도 마르코폴로가 말한 몽고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망했다는 키타이의 구 도읍지일 가능성이 커 보였습니다.
<설마 중국이 마르코폴로가 방문했던 위대한 대칸의 나라 키타이란 말인가? 10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와 100만의 군대를 보유한 나라라니...도저히 믿을 수 없다> 스페인에 만연하던 중국 멸시가 이런 회의를 더욱 부추깁니다. 중국은 한동안 아즈텍이나 잉카처럼 스페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정복 가능한 땅으로 간주되던 못난이들의 나라로 치부되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예수회는 고에즈라는 청년 수사를 인도로 파견하죠. 비밀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말이죠. 무굴제국의 황제 악바르의 환대를 받은 고에즈는 아랍인으로 변신한 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서투르키스탄으로 나아갑니다. 그 곳에서는 해마다 <지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나라인 키타이>로 떠나는 대상들의 행렬이 있었고 고에즈는 거기에 합류하죠. 고에즈는 온갖 고초를 다 겪습니다. 사기꾼 대상들에게 도둑맞고, 살해당할 뻔 했으며, 산적들에게 물건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이슬람 신자들의 눈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그의 에너지를 차츰 앗아갑니다.
1602년 무렵 고에즈는 드디어 동투르키스탄을 거쳐 지금의 가욕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중국 명나라의 서쪽 변경이었죠. 그곳에 도착한 고에즈는 자기의 사명이 끝났음을 알게 됩니다. 아랍 대상들이 키타이로 부른 그 땅은 바로 마테오 리치가 거주하는 나라 중국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마테오 리치에 전해야 했지만 1년에 걸친 사막여행과 이슬람 신자들과의 알력이 이미 그를 반죽음으로 만들었기에 내지 여행은 불가능했죠. 너무나 쇠약해져 보행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그는 혼신의 힘으로 북경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마테오 리치에 편지를 보냅니다. 마테오 리치의 중국명인 리마두(利馬竇)라는 이름도 알지 못했고, 마테오 리치가 거처하는 주소도 알지 못한 채 보내진 편지였기에 수신자에게 전달될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마테오 리치는 이 편지를 반년만에 받습니다. 놀란 리치는 동료 수사를 가욕관으로 급히 파견하죠.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고에즈는 절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수사님. 저는 확인했습니다. 키타이는 바로 중국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최후의 의지로 생명을 이어가던 고에즈의 몸에 영혼이 머무를 이유는 더이상 없어졌습니다. 온 몸이 해골처럼 변한 채 반년 이상을 버텨오던 고에즈는 북경에서 파견된 수사와 만난 며칠 후에 숨을 거둡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한 채 말입니다. 이 놀라운 뉴스가 스페인에 전해졌을 때 유럽 전체가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중국이 바로 세계 최강의 제국인 키타이였다> 유럽의 중국관은 크게 바뀌어 갔고 유럽인들은 중국으로 속속 상인과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합니다. <중국문명의 유럽 침투>라 불리운 현상이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을 풍미합니다. 이런 사실과 더불어 이미 유럽에서조차 쇠퇴하기 시작한 스페인은 두번 다시 중국 정복과 같은 시도는 하지 못하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중국사정에 아직 무지했던 16세기의 스페인이 동방 원정군을 소집하여 중국에 원정갔다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펠리페 2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세계 최강국인 스페인과 일본이 전 세계를 나눠먹자고 제안했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냈다는데..(일본 극우파들이 만든 교과서에 들어있는 내용) 안 그래도 도요토미가 중국을 정복하려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니 그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스페인군하고도 싸울뻔 했습니다.
첫댓글 '그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누구죠 'ㅁ'? 'ㅁ';; 도쿠가와 이에야스 뒤에 인물인가요?
이거 근현대사게시판아님 질문과 토론게시판에 올려야되는거아닌가 글구 말도안대는 얘기 좀 집어치워요
세계사님 조용히 합시다 ^^
좀 정벌할려고 해보지, -_-;; 꼴 박살나게시리... 제가 알기에는 포르투갈도 한번 명을 가소롭게 보고 덤비다가 두들겨 맞고 마카오에서 장사권만 받았다죠 -_-;;
세계사씨 쓸데없는 분란 일으키지 맙시다~!
제 생각으론 그 때 스페인의 군사력이 뛰어나지만 16세기의 기술과 국력의 한계로 명과 전쟁해서 이길 정도의 원정군을 조직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15세기라면 명 조정의 정쟁에서 사대부들이 집권하지 않고 환관들이 계속 집권했으면 정화의 원정대가 유럽까지 정벌을 했을 겁니다.
전체적인 국력과 잠재 성장력은 중국이 우세했을겁니다...서양이 동아시아를 추월한건 산업혁명시절부터라고 생각합니다...그전에는 장기전으로 나가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발판삼아 중국의 압도적인 승리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16c에 스페인이 명을 침략했다면 변방을 어지럽힌 해적집단정도로 역사에 기록됬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