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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2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마태오 6,7-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옛날 조선시대에 어떤 임금님이 한양을 떠나 개성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병든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니 죽기 전 임금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지만 어렵지 않겠느냐?”
효심이 많은 아들은 그날에 어머니를 업고 잘 보이는 장소를 찾아가 기다렸다가 지나가는 임금님 행차를 보여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효자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님이 대궐로 불러서 자초지종을 듣고 “과연 효자로다!” 하고 금 냥과 쌀 한 섬을 내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알게 된 고약한 불효자가 상금이 탐나서 원하지도 않는 어머니를 업고 나가서 똑 같이 행동하고 금냥을 받았습니다.
신하들이 조사한 불효자의 잘못을 고해바치며 상 대신 큰 벌을 주라고 고했지만 임금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효도는 흉내만 내어도 좋은 것이니라!”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마치 위의 예화의 임금님이 백성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필요하다고 해서 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받기에 합당해야 주지, 아기에게 칼을 줄 수 없고
어른에게 장난감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은총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하느님은 언제든 은총을 내려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은총을 받기에 합당함을 증명해 내야지 무엇을 원하는지 수없이 반복해서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물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흉내’라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아버지께 무엇이든 청해도 받을 수 있는 유일하게 합당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죄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천사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기도를 함께 바치자고 하시는 것은 자녀로서 흉내만 내더라도 하느님은 그 흉내만 내는 것으로도 당신 자녀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가 군사 기지의 물자 배급소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습니다.
그의 쇼핑 목록은 커피와 빵 한 덩어리가 전부였습니다.
그의 뒤로 손수레에 물건을 잔뜩 실은 여자가 이어 섰습니다.
여자의 바구니에는 식료품과 옷가지 등이 넘치게 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차례가 되자 점원은 그에게 어항에서 제비를 뽑으라고 권했습니다.
“만일 표시된 제비를 뽑으시면 사신 물건은 모두 무료입니다.”
어항은 꽉 차 있어서 뽑힐 확률은 매우 낮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행운의 제비를 뽑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자신이 고작 커피와 빵만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재빨리 돌아서서 산더미 같은 물건을 계산하려고 하는 여자에게 외쳤습니다.
“여보, 우리 당첨됐다고! 일 센트도 안 내도 된대.”
그녀는 어리둥절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가 찡긋 눈짓을 해왔습니다.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는 곁에 서서 팔짱을 끼고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들은 행운의 제비뽑기로 결혼한 부부가 되어 나란히 섰습니다.
주차장에서 둘은 작별인사를 하고 친구들에게 들려줄 멋진 이야기를 간직한 채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자녀 됨의 영광을 우리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만 해도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고, 자녀로서 받을 수 있는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인디언들에게 주님의 기도만 가르쳐주고 떠났는데 나중에 그들이 물 위를 걷는 믿음까지 성장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어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반복했더니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임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 귀한 것이 하나 있다면 말썽부리는 자녀에게 주고 싶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잘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주고 싶으시겠습니까?
말썽을 부려도 자녀는 자녀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으로써 빈말만 되풀이하는 이방인들의 기도보다 훨씬 강력한 은총을 얻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였습니까?
설령 우리가 기도로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엄청난 은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2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마태오 6,7-15
한없이 겸손하고 진솔하며 인간미 넘치는 사람!
결정적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되었는지를 본인이 저술한 여러 서한들을 통해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심 이전의 그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향한 열정과 집념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산 헤드린을 비롯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제 세상을 향한 그의 열정은 하느님과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으로 뒤바뀌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코린토 2 11,2)
평생에 걸친 바오로 사도의 삶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삶의 키워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열정이었습니다.
회심 이전 그는 율법을 공부하고 유다인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있어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반하는 삶을 산다고 여긴 그리스도교인들을 체포하는데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 자신에게 맡겨진 이방계 양떼를 사랑하는 열정, 복음을 향한 열정, 선교를 향한 열정으로 철철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한때 그토록 기고만장하고 자신감 뿜뿜 풍기던 그였는데, 이제는 하느님을 향해서나, 이웃을 향해서나, 자기 자신을 향해서나 한없이 겸손하고 진솔하며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부디 참아 주십시오.”
“나는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교황 교서나 주교님들 사목 서한을 읽어보았지만,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표현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강렬한 예수 그리스도 체험은 완고하고 뻣뻣하던 바오로를 세상 부드럽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잘 난 체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는데도 애써 거창하고 유려한 표현을 쓰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체 하려고 어깨에 힘도 주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그대로의 나,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가감 없이 표현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목자, 요즘으로 치면 베드로 사도와 더불어 교황님 역할을 수행했던 바오로 사도였지만, 그는 교우들에게 조금도 신세 지지 않고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이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향해 지니고 있는 열정은 어느 정도인지?
오늘 나는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하며,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부담주지 않는 청빈한 삶을 살고 있는지?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2023. 6. 22. 목)(마태 6,7-15)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다른 민족 사람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빈말’은, 마음에도 없는 말, 거짓말, 헛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말’로 바치는 기도는 아무리 많이 바쳐도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과 우상숭배자들의 기도는 ‘빈말’입니다.
듣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헛된 빈말이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빈말이고, 자신이 얻기를 바라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빌기 때문에 빈말입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라는 말씀을, “그들은 무엇인가를 많이 바쳐야만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면 바칠수록 복을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거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많이 바친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그냥 사랑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이 말씀에 대해서 “그러면 지금 내가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도와달라는 기도도 하지 말란 말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힘든 상황을 만나서 죽을 지경일 때,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면서 주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에는 주님께서 어떻게든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 ‘어떻게든’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때, 내가 바라는 방식 그대로 도와주실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또 내가 바라는 그 시점에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한참 뒤에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방법과 도와주시는 때는 전적으로 주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고, 청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바로 앞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를 ‘주님의 약속’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일, 아버지의 나라가 오는 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은,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뜻대로 될 일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일들에 대해서 기도를 바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도 동참하고 협력하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후반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과 악에서 벗어나는 일은,
청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일들에 대해서 기도를 바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응답하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나라’(하느님 나라)는 용서와 화해와 일치가 완성되는 나라인데, 그 완성에 참여하려면 우리 쪽에서도 은총을 잘 받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이웃과 나누는 일, 이웃을 용서하는 일, 유혹을 물리치려고 노력하는 일, 악에 맞서서 싸우는 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응답하는 방법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쪽에서 그렇게 응답하겠다고, 또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입으로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굶주리는 이웃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또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또 적극적으로 유혹을 물리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또 악에 맞서서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의 기도’는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기도이고,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또 말로 바치는 것으로 그쳐도 되는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