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종처럼
엡6:5-9 190711 새벽기도
새 찬송 310, 311
우리는 앞에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본문은 상전과 종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이런 종의 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종의 수가 대단히 많았었습니다. 바클레이의 기록에 보면, 그 당시 로마 제국 에는 6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의 몇 배가 되는 숫자였습니다. 많은 빚을 지고 갚지 못할 때 또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면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숫자는 날로 더해 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교훈은 종(servant)들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 복종하고, 종은 육신의 상전(master)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심 한 주의를 기울여 한편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부모도, 상전도 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서 이처럼 균형을 유지하는 다른 교훈은 없습니다.
종들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이 말은 사실 노예 (slave)를 의미합니다. 이것 은 삯을 받고 고용된 일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제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종들은 노예들을 의미합니다. 노예 제도는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에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초대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 숫자의 성도들이 문자 그대로 노예들이었습니다. 이 노예제도는 큰 문제였습니다. 1860년대에 미국의 남북전쟁이 원인이 바로 이 문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노예제도를 찬성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의 시대에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였고, 정치적이거나 그 밖의 사건을 다루는 것은 교회의 임무였습니다. 이제 신약시대의 교회는 언제나 교회,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의 순례자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것에 대해서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5절을 보세요.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2장 3절에서 사용한 표현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했는데, 바울이 왜 두려워했습니까? 무엇이 그를 떨게 만들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서워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두려움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다가 잘못 전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그것을 범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떨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복음을 설교하는 일을 아주 심각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로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면 그는 결코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완성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노예의 조건까지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줍니다. 천한 일을 하는 불쌍한 노예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사도가 복음을 설교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바른 눈으로 해야 한다는 말 입니다. 한 눈 팔지 말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이 보거나 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맡은 일을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맡은 일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고용한 사람이 누구든지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시간은 자기의 시간이 아니고 주인의 시간입니다. 그가 맡은 돈은 자기의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입니다. 그의 일과 관련된 모 든 것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일을 해야 하는 시간에 그 일을 하지 않고 딴전을 부리고 있다면 그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명령에 불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6절 하반 절에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라고 했습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다른 말로 하면 목숨을 다하여 (from the soul) 하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주님께서 어느 계명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냐? 고 묻는 질문에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다시 말하면 전인(全人)격적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전인격이 그 일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는 말은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라는 뜻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그 일을 안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해도 안 될 것입니다. 일을 하되 얼굴을 찌푸리고 합니다. 기분이 나빠서 뾰루퉁해서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무슨 일을 맡아서 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 지니라 했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고, 심령을 기울여 정성껏 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7절에 단 마음으로 섬기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심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맡을 때 어리둥절한 가운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이 없을 때 단 마음으로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 사명으로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지 단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였지만 이교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일하든지 총애를 받게 되었고 승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그가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디, 어떤 환경과 조건에 있든지 언제나 거기에서 총애를 받았습니다. 경건하게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한 자는 큰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일에도 불의하다고 하신 말씀에 그런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훌륭한 전도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도의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나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나타냅시다. 우리가 있는 그곳을 복음화 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