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삯을 받고 나서 그들이 그 집주인에게 불평하여
말하기를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는데, 당신은 종일 볕에서 짐을 진 우리와 그들을 동등하게 대우하였나이다.'라고 하니
주인이 그 중 하나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친구여, 내가 너에게 부당하게 한 것이 없노라.
네 몫을 받아서 가라. 나는 마지막에 온 이 자들에게도 너에게 주었던 대로 주리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잘못이냐? 나의 선함이 네 눈에는 악하게 보이느냐?" 고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0장 11절 ~ 15절
포도원 일꾼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저는 일꾼의 불평이 이해가 되고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유는 사람의 인지상정과 하나님의 공의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나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오라." 고 하시니라.
요한복음 21장 21절 22절
위의 말씀을 이어보면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의 구원받음과 전혀 상관이 없고, 저와 당신은 하나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로지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위 말씀으로 세상을 불평하는 저와 당신에게 다른 사람은 상관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단을 본질로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교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단적인 교단의 이론은 다른 사람의 구원 방식에 대한 주장이 되므로 위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이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곧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상관을 만들려함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단의 논리와 주장은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오직 각자의 구원에 대한 권세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일대 일의 관계이며,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에 관여하려는 마음은 포도원 주인의 권한에 참여하려는 저 일꾼과 같으며, 포도원 주인은 그에게 부당하게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구원은 모두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드러남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구원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만들어진 결과를 우리는 매일 매일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덴에서는 필요없었던 노동을 하여야 살고, 출산의 고통이 유독 사람에게만 심하게 주어졌습니다. 아담의 범죄함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정죄받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부활이 동시에 적용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것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구원을 포기할 상태에 이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절망은 그가 사탄의 메시지에 속은 것입니다. 그러니 죄앞에서 절망함이란 속임수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인이 받는 구원입니다. 한국교회나 많은 성도들이 어떤 훌륭한 상태를 지향하고 그 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도달하지 못하고 도달한다고해도 유지될 수 없는 환상입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죄인인 상태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와의 타협을 당연시 여기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양심은 우리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마음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양심에 순종하는 것을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매일 요구되는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양심의 요구는 매일 매일의 삶에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음이 저와 당신에게 평안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줄것입니다.
왜냐면 세계적으로 가난한 나라의 특징은 사람들이 양심을 지키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양심을 지키지 않음은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하주차장이 철근 100만원어치를 빼돌림으로 무너져 수천억의 아파트를 다시지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는 일입니다. 후진국등에서 구리를 얻기 위해 전선을 잘라 팔아먹음으로 모두가 힘들어지고 가난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전선의 구리를 잘라낸 사람도 모두가 가난해지는데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죄와의 타협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평안과 번영을 제거하는 지를 알려주는 모습입니다.
먼저 매일 주어지는 양심의 요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순종뿐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양심에 순종을 하던지 하지 않던지 그것은 당신과 상관이 없고, 오로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이르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