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3·1운동 막전막후 2·8 주도 김도연 선생의 손자, 김민희 건국대 의대 교수
/장련성 객원기자
"할아버지께서는 감옥이 굉장히 추웠다고 하셨어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피부병이 생겨 고생하셨죠. 음식도 아주 조금 주고…. '밥을 먹어도 모래 씹는 것 같았다'고 하셨지요."
김민희(64·사진) 건국대 의대 교수는 조부인 상산 김도연(1894~1967)으로부터 2·8 독립선언 얘기를 듣고 자랐다. 광복 후 초대 재무부 장관이었으며 야당 지도자였던 김도연은 게이오(慶應)대에 다니던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 공동대표를 맡으며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도쿄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노년의 조부를 빼닮은 김 교수는 김도연의 차남인 김병국씨의 장남이다.
중학생일 때 할아버지가 별세했다. 김 교수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일찍 투신한 이유가 궁금했다. 1965년 라디오 인터뷰 녹음 등 조부 관련 자료를 모으고, 2·8 기념 행사와 학술회의에 참석하면서 나름 결론을 얻었다. 나라를 되찾으려면 신학문을 배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 적국(敵國) 수도인 도쿄라는 '호랑이 굴'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나도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김 교수는 2·8 독립운동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2·8 당시 유학생들은 적지(敵地) 한복판에서 목숨을 내놓는 각오로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강제병합 이후 이렇게 공개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