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 대길이
고은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 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가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
(시집 『만인보』, 1986)
[어휘풀이]
-멱따는 : 멱따다. 칼 따위로 짐승의 멱을 찌르거나 자르다. ‘멱’은 ‘목’의 앞쪽.
[작품해설]
이 시는 시인이 어린 시절 만난 ‘머슴 대길이’의 행적을 통해 민중의 삶의 건강성과,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가 실려 있는 시집 『만인보(萬人譜)』는 제목 그대로 만인(萬人)의 행적을 그린 시집으로, 1986년 이후 2001년까지 15권이 간행되었으며, 총 30권을 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시집은 세계 최초로 사람만을 노래한 연작시로, 그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크게 세 층위로 나눌 수 있다. 살아오면서 시인이 개인적으로 만났던 실존적 인물층, 민족의 역사 속에서 만난 사회적 역사적 인물층, 그리고 불교적 체험 속에서 만난 초월적 인물층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의 주인공인 ‘머슴 대길이’는 실존적 인물층에 해당한다.
시로 쓴 인물 사전이라 할 만큼 많은 인물을 실명(實名)으로 다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시인에게 올바른 삶의 지향점을 감동적으로 일깨워 준 사람들에 관한 몇 편의 ‘성장시’이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꾼과 모험의 이미지로 각각 대표되는 시인 자신의 아바지와 외삼촌이며, 세상에 대한 충격적인 개안(開眼)을 가져다 준 ‘머슴 대길이’이다.
‘머슴 대길이’는 우리 사회의 소외되고 박해받는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고통스런 삶을 극복하려는 민중적 삶의 원초적 모습으로서의 전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신분은 비록 하층민이자만, 곧고 바른 인격의 소유자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부지런한 생활 태도를 지녔으며, 생각이 깊고 진지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화자에게 한글을 깨우쳐주고 남과 더불어 사는 세상 이치를 가르쳐준 사람이었기에, 화자는 그를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저서 밤새우는 불빛’으로 여길 만큼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라는 그의 말을 통해, 현대인들의 이기적이고 오만한 삶을 비판함으로써 시인은 인간과 인간,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다함께 추구해야 할 참다운 삶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이 시는 ‘대길이’라는 인물을 통해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드러낸다.
[작가소개]
고은(高銀)
본명 : 고은태(高銀泰)
법명 : 일초(一超)
1933년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52년 출가(出家)
1956년 『불교신문』 창간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전은사운」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2년 환속(還俗)
1975년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9년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1989년 장시집 『만인보』 발간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
1998년 제1회 만해시문학상 수상
시집 : 『피안감성(彼岸感性)』(1960), 『해변의 운문집』(1963), 『신언어의 마을』(1967), 『세노야』(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부활』(1975), 『제주도』(1976), 『입산』(1977), 『새벽길』(1978), 『고은시선집』(1983), 『조국의 별』(1984), 『지상의 너와 나』(1985), 『시여 날아가라』(1987), 『가야할 사람』(1987), 『전원시편』(1987), 『너와 나의 황토』(1987), 『백두산』(1987), 『네눈동자』(1988), 『대륙』(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1988), 『그날의 대행진』(1988), 『만인보』(1989), 『아직 가지 않은 길』(1993), 『독도』(1995), 『속삭임』(1998), 『머나먼 길』(199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