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수치스러운 것이다. 전하려는 느낌을 훼손하지 않고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말이란 전달하고 싶은 걸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려는 것이 훼손됨을 알고 감행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 말을 통해서 나의 진심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 다 전달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전달될 때 그 진심이 전달되는 것이다.
훼손과 결여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는 수치스러운 것이다. 나아가 언어는 존재를 훼손하고 파괴한다. 언어는 폭력이다. 보수 개신교를 중심으로 ‘성평등’ 대신 ‘양성평등’이란 말을 사용하려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양성평등은 존재하는 사물을 남자와 여자, 딱 둘만 남기고 나머지 다른 존재(동성애자 등)는 노골적으로 지우고 치워버리는 말이다. 이런 언어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아름답고 장엄하다는 화엄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언어의 수치를 대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좋은 건 말이 수치스러운 것임을 알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말할 때 불가피하게 내가 해할 수 있음을 의식하며 신중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의 언어만이 아니라 내 언어가 ‘부러진 언어’(Broken Language)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부러져 있다’(Broken)는 것은 감춰야 할 수치가 아니라, 서로 도움과 의존관계에 있다. 모든 존재가 부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연민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길을 택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신 언어의 수치와 폭력을 감추려 한다. 한편에선 언어의 이 취약함에 실망한 나머지 언어를 포기하고 언어 너머의 소통으로 강력하게 결속하려 한다. 언어에 대한 전면적 불신에서 밀교적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취약함을 존재의 근본으로, 장엄함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부정한다. 대신 이들은 진리는 말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술을 반복해 그 주술을 공유한 폐쇄된 공동체를 만든다.
다른 한편에선 언어의 수치와 폭력에 뻔뻔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 말을 확신한다. 자기 말이야말로 확실하고 진리라고 확신한다. 이들에게 자기 말을 제외한 다른 말은 모두 부러진 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다른 이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말은 일방적인 것이다. 자기 말은 확실해서 ‘맞고’ 다른 존재의 말은 훼손돼서 ‘틀린’ 것이기에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말이란 소통이나 토론이 아니라 명령이다. 이들은 상대의 말을 먹어치운다.
말에 대한 태도는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이 둘이 도착하는 공통 지점은 부족주의적 공동체다. 부족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에서 말한 것처럼 더없이 행복한 전능함의 가능성을 약속한다. 지금 ‘정치적 효능감’이라 부르는 것이 아마 이 ‘행복한 전능함’의 정치적 버전일 것이다. 다만 차이는 그 효능감(전능감)을 주는 것이 말이냐 주술이냐 일 뿐이다.
이런 부족주의적 주술이 지배하는 곳은 국가나 정치만은 아니다. 도처의 공간이 자기 말(주술)을 확신하는 뻔뻔한 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말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정한 자로, 충성심이 부족한 자로 치부돼 밀려난다. 당연히 공동체 내부에 위계가 생긴다. 서로의 취약함을 지지하는 화엄의 세계가 아니라 털끝 같은 차이를 훼손 정도로 측정해 위계화 한다.
더구나 언어의 불확실성을 어려워하는 존재일수록 공동체의 단결과 유대를 해치고 오염시키는 존재로 치부돼 위험시된다. 이런 위험한 존재는 본보기로 구성원 앞에서 공개 처형돼야 한다. 곳곳에서 분서갱유와 인민재판이 횡행하는 이유다. 부족주의 정치에선 무엇보다 본보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지금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됐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충성서약이 아닌 한, 말하면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입을 다무는 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부족은 입을 다문 자를 위험시한다. 부족은 끊임없이 소통을 요구하며 소통 능력으로 또 위계를 만든다. 공동체는 잘 소통할 것을 강요하는 곳이며 이것이 사회가 젊은 세대에게 요구하는 많은 일 중 하나이다. 그러면 젊은 세대는 잘 수행하기 위해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익히거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익혀갈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무례할 정도로 친절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례하거나.
결국 우리가 열망한 것은 무해이지만 무해는 우리의 선택이 되지 못한다. 단지 ‘무례한 친절’과 ‘아예 무례’ 사이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 무례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저 뻔뻔한 자들에 맞서 언어는 수치스럽고 존재는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 존엄의 근거이자 그 자체로 장엄한 것인 이 취약함을 향해 용기를 내야 한다. 이 용기를 낼 수 있을 때 취약한 자들이 부러진 언어로 서로에게 배움과 가르침을 의지하며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화엄의 세계를 볼 수 있다.(엄기호 사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