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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병 상과 등대
출 25:23-40
23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24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고
25 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26 그것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되
27 턱 곁에 붙이라 이는 상을 멜 채를 꿸 곳이며
28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29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31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34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39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출 25:23-40 / [상] 또 아카시아나무로 상을 만들어라. 길이가 90센티미터, 나비가 45센티미터, 높이가 68센티미터가 되게 하여라. 24) 순금으로 상을 입히고 금테를 둘러라. 25) 상을 둘러 한 손 넓이 되는 가름장을 만들어 붙이고 그 가름장에도 금테를 둘러라. 26) 금고리 네 개를 만들어 그 상의 네 귀퉁이에 붙어 있는 네 다리에 붙이고 27) 상을 들 채를 끼울 수 있도록 고리를 만들어 가름장 곁에 붙여라. 28) 상을 들 채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들고 금을 입혀라. 29) 또한 상에 올려놓을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술병과 잔을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라. 30) 그리고 상 위에는 나에게 바치는 진설병을 차려 두어 그 떡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31) [등잔대]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어라. 순금 한 덩어리를 두드려 늘여서 밑동아리와 줄기와 거기서 뻗어 나가는 곁가지들을 만들어라. 또 가지를 두드려 늘여서 각각 꽃밭침과 꽃잎 모양의 등잔을 만들어라. 32) 곧 줄기 양쪽에서 등잔을 받칠 가지 여섯 개를 만들되 한 쪽에 세 개, 다른 쪽에 세 개가 뻗어 나오게 하여라. 33) 한 쪽 가지에 감복숭아꽃 모양의 꽃받침과 꽃잎 모양의 등잔 세 개, 다른 쪽 가지에서도 감복숭아꽃 모양의 꽃받침과 꽃잎 모양의 등잔 세 개가 뻗어 나오게 하여라. 이렇게 등잔대에서 뻗어 나온 각 등잔의 모양이 똑같게 만들어라. 34) 등잔대 줄기에는 감복숭아꽃 모양의 꽃받침과 꽃잎 모양의 등잔 네 개를 만들어라. 35) 등잔대 줄기에서 뻗어 나온 여섯 가지에 꽃받침을 이어 만들되 줄기에서 뻗어 나온 양쪽 가지가 만나는 곳에 꽃받침 하나씩, 그 위쪽에 뻗어 나온 가지가 만나는 곳에 꽃받침 하나 또 그 위쪽에 뻗어 나온 기자가 만나는 곳에 꽃받침 하나를 만들어라. 36) 그 꽃받침과 가지는 줄기와 이어지게 한 덩어리의 순금으로 두드려서 만들어야 한다. 37) 그리고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 각 등잔대 위에 올려놓아 앞을 환히 비추도록 하여라. 38) 또 등잔 불집게와 불똥 받는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어야 한다. 39) 이렇게 등잔대와 그 밖에 등잔대에 딸려 있는 기구들을 만드는 데 순금 한 달란트를 들여
앞 단락에서는 법궤와 그 뚜껑 속죄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데 이어 본문에서는 진설병 상과 등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진설병 상의 제작 양식을 일러주심(23-30) 매 안식일마다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떡을 올려놓는 진설병 상은 조각목으로 길이가 두 규빗, 폭은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의 크기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조각목으로 만든 상을 순금으로 싸고, 모서리는 올려놓은 떡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바닥 넓이의 턱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간의 부정한 손이 직접 닿지 않도록 법궤와 같이 네 발 모퉁이에 고리를 만들고, 그곳에 막대를 끼워 운반할 수 있도록 채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진설병 상에 딸린 부속 기구인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순금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 부속품은 모두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설병의 본래의 뜻은 얼굴 앞에 놓은 떡입니다. 이는 진설병이 여호와의 앞에 드려지는 떡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마다 6개씩 두 줄로 열두 개의 떡을 진설병 상에 매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교체하여 올려놓았습니다(레 24:5-8). 이 떡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고,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등대 및 그 부속 기구의 제작 양식을 일러주심(31-39) 하나님께서 성막 내부를 밝히는 등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등대는 일곱 가지로 되어 있으며, 밤부터 동틀 때까지 성막을 밝히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등대는 순금을 두드려서 만들되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라고 했습니다. 그 모양은 가운데 등잔대 줄기에서 양쪽으로 세 개씩 나오게 하여 모두 일곱 가지가 나오도록 하고, 살구꽃 모양의 꽃받침으로 된 잔을 만들게 했습니다. 꽃받침이 있는 곁가지들까지 모두 한 덩어리의 순금을 두드려 만들라고 했습니다. 또한 부속기구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까지 합하여 한 달란트(약 34kg)의 순금으로 만들게 했습니다.
보여준 모양대로 만들라고 하심(40)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보여 준 모양 그대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음성으로만 귀에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막의 모든 양식은 인간의 설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용: 성막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졌습니다. 오늘 당신도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결단하고 실천합시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도 기꺼이 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좋든 싫든 의지력을 발휘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매주 꾸준히 드리는 것이지만, 매주 새로운 마음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투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매주 새로운 떡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매주 새로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일에 정성껏 준비한 예배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성소의 떡상
출 25:23-30 / 성소의 떡상
서 론
침례교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책의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이 책은 일반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으로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성경’을 가리킵니다. 즉 침례교인은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유익한 책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이 전부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유익한 책은 성경이 유일무이합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총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일관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죄 용서함을 베풀어주시는 복, 영생을 주시는 복,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복, 영원히 죽지 않는 복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의 관한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5~27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건조물 중 가장 중요한 ‘성막’에 대한 계시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설교를 통해 성막의 모든 기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데는 6일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성막에 관한 계시를 주시는 데는 40일이나 걸렸다.” 성막건설의 중요성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요? 지난주에는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성소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막의 크기는 가로 30규빗, 세로 10규빗입니다. 그 중 성소를 제외한 지성소는 가로 세로 10규빗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성막의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규빗을 45cm로 환산하면 성막의 크기는 가로 13.5m 세로 4.5m이며, 지성소는 가로 세로 4.5m이고, 나머지는 성소입니다. 그런데 이 성소에는 아론의 후손 제사장들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아론의 네 아들 중 맏아들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분향단에서 불이 나와 타 죽었습니다. 그래서 셋째 아들 엘르아살과 넷째 아들 이다말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민수기 3장 32절에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레위인의 족장들의 어른이 되고 또 성소를 맡을 자를 통할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째 아들 엘르아살이 모든 제사장을 통할하는 대표가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순번을 짜서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면 성소의 세 가지 기구를 대면하게 되는데, 오른쪽에 떡상, 가운데 분향단, 왼쪽에 금촛대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소에 있는 기구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제사장들은 떡을 먹어야 하고, 분향단의 향이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기도도 해야 하고, 촛대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Ⅰ. 떡상은 어떤 구조인가?
떡상은 떡을 올려놓는 상이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습니다. 생김새는 일반적인 탁자와 비슷합니다.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정금을 입혔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안에 있는 모든 기가의 재료는 동일합니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하는 것입니다.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금’은 불변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임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떡상의 크기는 가로 90cm(2규빗), 세로 45cm(1규빗), 높이 68cm(1.5규빗)입니다. 그리고 떡상의 윗부분에는 손바닥 크기의 턱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떡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금 고리 네 개를 만들어서 다리의 윗부분에 달고 채를 꿰어 제사장들이 운반하였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에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29절에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떡상 위에 필요한 네 가지 주방기구(Utensil)를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첫째는 ‘대접’입니다. 대접은 떡을 놓거나 진열하고 운반할 때 사용하는 기구입니다. 크기는 떡의 크기와 비슷합니다. 금으로 된 대접은 떡을 구울 때 사용할 수 없었기에 쇠로 된 대접도 있었습니다. 성소 밖에서 떡을 구울 때는 쇠로 된 대접으로, 그것을 운반하거나 진열할 때는 금으로 된 대접을 사용한 것입니다.
둘째, ‘숟가락’입니다. 국을 떠먹는 숟가락처럼 생긴 것이 아니라 길쭉한 컵과 같은 모양을 한 숟가락입니다. 이 숟가락 위에 유향을 올려놓았습니다. 열두 개의 떡을 두 줄로 나누어 여섯 개씩 진열하고 그 떡 윗부분에 유향을 담은 숟가락을 올려놓았습니다.
29절에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나머지 두 개 병과 붓는 잔은 성경의 번역 상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병과 붓는 잔을 만들라”고 되어 있는데, 70인역이나 NIV(새국제역)에는 ‘병과 붓는 잔’(Pitchers and Bowls)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 반면, KJV(흠정역)에는 ‘덮개와 대통’(Covers and Bowls)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옆의 사진을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70인역 성경에 따르면 떡상 위에 병과 잔이 있습니다. 그러나 용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전제를 위한 기구라고 하지만, 전제는 성소 안에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전제는 보통 성막 바깥쪽 번제단 아랫부분에 포도주를 붓는 것으로 이뤄지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제는 성소 안쪽 떡상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KJV(흠정역)성경에 따른 번역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왼쪽 사진의 떡상을 보면 떡과 떡 사이에 금으로 만든 덮개를 둡니다. 덮개는 떡과 떡 사이에 바람을 통하도록 해서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맨 위에 유향을 올려놓았는데, 문제는 떡을 여섯 개나 올려놓다 보면 아래 있는 떡이 찌그러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 대통을 세워서 떡과 떡이 눌리는 일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흠정역에는 ‘병과 붓는 잔’을 ‘덮개와 대통’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 대해 한참동안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결국 떡상 위의 떡이 상하거나 찌그러지거나 떨어지면 안 된다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과 붓는 잔보다는 덮개와 대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번역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떡(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보전되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진단하는데, 이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이 부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변질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복주의화 되고 있고, 세대주의 종말론이나 신비주의, 아르미니우스 신학과 같은 것들로 떡이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런 떡을 계속 먹으면 자연히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삶이 부패해 지면, 결국 불신자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부패한 떡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하게 떡을 유지하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네 가지 기구의 목적은 결국 떡을 제대로 보관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되 바르게 예배하도록, 성도들에게 바른 말씀을 먹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접근하고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구들은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제멋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방식을 따라 예배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Ⅱ. 떡상 위의 ‘떡’은 어떤 것인가?
‘떡’은 영어로 ‘Shewbread’라 하고, ‘제단에 올려진 떡’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얼굴들의 떡’(Bread of Faces)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떡에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떡’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떡은 일반적인 떡이 아닙니다. 그래서 ‘임재의 떡’(민 4:7), ‘항상 진설된 떡’(대하 2:4), ‘열을 맞춘 떡’(대상 9:3a), ‘진설병’, ‘진설하는 떡’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떡은 명칭만으로도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떡이며, 항상 떡상 위에 있어야 하고, 진설이 계속 되어야 하는 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상해서도 안 되고, 없어져도 안 되고, 무질서하게 놓여 있어도 안 되는 떡입니다.
레위기 24장 5~7절에 보면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고운 밀가루로 열두 개의 떡을 굽는 것입니다. 에바 십분 이로 하라고 하신 것을 리터로 환산하면 4.4리터가 됩니다. 계란 여든 여섯 개를 깨어 만든 분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대단히 큰 떡입니다. 떡이 이만큼 크기 때문에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부패할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해 떡상 위의 네 기구를 만들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또 떡 위에 유향을 올려놓으라고 하셨는데, 이 ‘유향’(Frankincense)는 액체가 아니라 고체입니다. 생김새가 마치 자일리톨 껌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씹으면 입 냄새도 제거되고 굉장히 향기롭습니다. 이 유향을 떡 위에 올려놓으라는 것은 성도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삶은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레위기 24장 8~9절에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 즉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자손들은 매 안식일마다 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새것으로 갈아 넣고, 묵은 떡은 자기들이 먹습니다. 이 떡은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떡이지만 제사장들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Ⅲ. 떡의 의미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현실적인 의미이고, 둘째는 교회를 향한 예언적인 의미입니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양식을 공급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밥(떡)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쌀은 인간이 연구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양식을 공급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십니다. 레위기 24장 8절에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떡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떡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시내산에 있습니다. 시내산은 농산물이 생산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200만명이 무엇을 먹고 살았겠습니까?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는데, 무엇을 먹고 살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성소에 진설병을 놓도록 하시고 ‘나는 너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증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대로 40년 동안 매일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진설병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첫 번째 현실적인 의미가 이것입니다.
시편 111편 5절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현실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여호와 앞에 진설된 떡을 먹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자녀들이 찾아와서 “아빠 엄마 사랑해요! 감사해요!”라고 하면 설령 그게 빈말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그런데 다 줬는데도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자녀들을 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주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먹을 것을 주시고 가정을 주시고, 자녀를 주시고,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큰 복을 주십니까?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교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말을 듣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 밥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24장 11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부르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일마다 때마다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진설병의 현실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시고, 성도와 교제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먹는 아론의 후손들은 제사장들인데, 이들은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를 예표한다는 것이 예언적인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6절에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고 기록되어 있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도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곳에서 떡을 먹어야 합니다. 이 떡은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씀은 크게 세 가지를 가리킵니다. 첫째는 ‘성육신된 말씀’(Incarnated Word),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기록된 말씀’(Written Word), 즉 ‘성경’입니다. 셋째, ‘선포된 말씀’(Preached Word), 즉 ‘설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떡 자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요한복음 6장 33절에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진시황이 영생을 얻으려고 그렇게 돌아다녔지만 영생을 못 얻지 않았습니까? 이 영생은 오직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생명의 떡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선한 일을 하도록 독려하고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부수적인 일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영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분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진시황이 찾으려 했던 불로초, 불사의 묘약은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빵이나 떡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떡만 먹고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양식, 영적인 떡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적인 떡인 성경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는 영혼의 곤핍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성경퀴즈대회를 마련하였으니, 이번 주간 영적인 떡을 폭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어둠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 안식일마다 제사장이 떡을 먹는 것은 규칙적인 예배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성도가 주일날 예배를 하지 않고 허구한 날 놀러만 다니면 되겠습니까?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육일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떡을 먹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증거된 말씀인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목사도 없고, 설교하는 사람도 없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도 없다면 흑암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처럼 지도자 앞에서 잠깐 졸았다간 화염방사기나 고사포로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무서운 어둠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면 그런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출애굽기 25장 30절에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떡을 갈아 넣고 묵은 떡은 먹고 또 갈아 넣고 하면서 떡이 떡상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고, 통풍을 잘 시켜서 신선한 떡을 항상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떡상의 떡이 사라지고 떡이 부패하는 것은 인간 사회가 어두워지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이슬람교나 불교를 따르는 국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밤하늘에 붉은 십자가가 많다고 그렇게 욕을 하지만 십자가가 없는 사회가 어떤 사회입니까? 설교 한 번 들을 수 없는 국가들이 어떤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의 사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교제하는 제사장이 되고, 부지런히 말씀을 먹음으로 건강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의 떡 예수
출 25:23-30 / 박덕기 목사
성막 문을 통하여 바깥뜰인 외소에 들어서면 번제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외소에서 내소인 성소에 들어서면 금빛이 찬란한 광경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소의 외부는 검은 해달 곧 물개 가죽으로 덮어서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성소의 내정으로 들어서면 등대와 떡상과 향단이 모두 정금으로 되어 있는데다 등대에서 비추는 빛으로 말미암아 휘황찬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성소의 외부가 초라한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있음은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성소의 내부가 모두 찬란한 금으로 되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성소 안에 있는 첫 번째 성구인 순금 등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등대는 금을 쳐서 곧 두들겨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고난 없이 희생 없이는 빛 된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단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성소는 창문 하나 없는 집이어서 칠흑처럼 캄캄한 곳인데, 이 순금 등대에서 비취는 빛으로 말미암아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밝은 곳이 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등대는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참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등대가 어두운 성소 안을 환하게 밝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혀 주신 의의 태양이셨습니다. 이 세상 신인 사단이 믿지 아니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죄와 죽음과 절망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밝은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어두운 죄악 속에서 살며 인생에 대하여 절망과 신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의 인생은 흑암에서 광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렇게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있는 성도라야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죄로 어두운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소 안에 있는 성구 중 떡상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떡상의 모양
떡상의 모양은 가로 100cm, 세로 50cm, 높이 75 cm의 크기입니다. 이 떡상 역시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12덩이의 떡을 6개씩 두 줄로 나란히 놓았습니다. 이 떡은 매 안식일마다 바뀌었습니다. 바뀌어진 떡은 성소 안에서 제사장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떡상의 사면 주위에는 떡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바닥만한 턱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2. 떡상의 의미
떡상은 성소와 그에 따른 모든 것들이 그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특별히 그것이 제사장들의 양식이 되었다는 점에서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곧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절대적인 양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을 옷과 쉴 수 있는 집, 그리고 배부르게 할 양식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찾아오게 될 죽음을 면하게 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지 인간의 불완전한 생명을 잠시 연장시켜 주는 것뿐입니다. 결코 영생을 주는 참 양식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참 양식은 오직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떡상 위의 떡은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말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어떻게 압니까? 만일 성경이 없다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주님을 믿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나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받아야 하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먹어야 할까요? 떡상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혼이 건강할 것인지 그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등대와 진설병상을 서로 마주 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은 등대의 불빛이 항상 떡상을 향하여 비추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을 때에 성령의 밝은 조명과 감화가 없으면 참된 양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밝히 조명해주시고, 설교를 들을 때 성령께서 잘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성령께서 학자처럼 알아듣고 깨닫게 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2)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떡상의 진설병은 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부서지고 깨지고 녹아져서 완전히 소화되도록 진설병을 만들었습니다. 말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곧 로고스와 레마입니다. 성경 전체 66권의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내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는 내게 가루가 되어 소화된 말씀만 레마입니다. 자동차가 많아도 내 자동차만 내 것입니다. 강물에 그토록 많은 물이 흘러도 수도꼭지를 통하여 내 입에 들어온 물만 내 물입니다. 그러므로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수정 예배당을 지을 때 너무나 힘이 들어 포기하려 할 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레마로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승리하였습니다. 방탕했던 어거스틴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 레마가 되어 회개하고 성자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레마가 되어 ‘이신득의’의 진리를 깨닫고 종교 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었습니다. 레마로 먹지 아니한 말씀은 먹으나 마나입니다. 레마로 먹은 말씀만이 내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3)나누어 먹어야 한다.
떡상의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만나 가루를 모아서 떡 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이 같이 나누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에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떡상 위에는 12개의 떡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12 지파를 의미합니다. 만일 지금 하나님께서 성막을 다시 계시하신다면 떡상 위에 24,000개의 떡을 올려놓으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24,000의 종족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들려져야 합니다. 떡상의 진설병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떡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4)순수한 말씀만 사모해야 한다.
떡상 위에는 진설병 외에 다른 떡을 올려놓아서는 안됩니다. 진설병 외에 다른 떡을 성소 안에서 먹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진설병,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더해져도, 있는 것이 빠져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오직 만나만 먹었습니다. 그것은 세미한 가루였습니다. 그것으로 떡을 만들면 바로 진설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것을 보태 먹기를 바랐습니다. 고기를 바랐고, 채소를 원했고, 과일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잔인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음식 문제를 제일 먼저 일으킨 이들은 잡족이었습니다. 광야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대 교회도 항상 잡족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령 받은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초신자들이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습니다. 성령도 받지 못하고 초신자도 아닌 이들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이들은 음식문제 때문에 불평하면서 하나님의 주시는 만나 외에 다른 것들을 섞어 먹기를 바랐습니다. 마늘, 부추, 생선, 외, 수박 등은 땅에서 나는 것 즉 인본주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본주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진설병, 오직 만나만 구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메추라기를 구했다가 결국에는 음식이 되지 못하고 고기가 이빨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사람은 오직 진설병 곧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철학이니 사상이니 하는 잡된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순전한 예수님의 말씀만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에 조금도 인본주의가 섞이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5)항상 먹어야 한다.
진설병은 하루 24시간, 1주 7일, 1년 365일, 늘 떡상 위에 차려져 있어야 합니다. 잠시라도 떡상이 비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잠시도 우리에게서 떠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나를 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모두가 꿀 섞은 과자 같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중에 만나가 기름 섞은 과자 같다고 혹평을 하면서 고기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꿀 섞인 과자 맛이 비린내 나는 과자 맛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건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건강을 위해 우리가 하루 세끼씩 꼭꼭 밥을 챙겨먹듯이, 우리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먹어야 합니다. 등화가친의 이 계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많이 읽어서 우리 모두의 영혼이 토실토실하고 건강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주일마다 새 양식을 먹어야 한다.
떡상위의 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놓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일마다 새롭게 주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자동차가 달리다가 휘발유가 떨어지면 주유소에 들어가 기름을 공급받고 달리듯이, 우리는 계속적인 능력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 피어스가 후에 스펄전 목사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제가 시계라면 목사님은 태엽을 감아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주일마다 감아주시는 태엽의 힘으로 나는 일주일을 넉넉하게 능력있게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떡상의 운반
떡상을 운반할 때는 우선 청색보자기로 덮었습니다. 청색은 생명의 색입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청색을 낼 때에는 물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달팽이를 잡아서 그 피를 색소로 썼습니다. 달팽이 피는 청색이라는 것입니다. 그 청색 보자기 위에 떡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떡은 생명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는 의미를 강하게 교훈해 줍니다.
그 다음 떡상을 운반할 때는 청색 보자기 위에 진설병을 놓고 그 위에 홍색 보자기를 덮었습니다. 홍색은 피의 색깔입니다. 이 홍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깊이 상고해 보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설병이 청색 보자기와 홍색 보자기 사이에 놓여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있지 않은 말씀은 생명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싸지 않은 말씀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보혈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보배로운 피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이나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생명의 말씀임을 하나님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소 안에 있는 떡상에 대해서 상고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음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음식은 살려고 먹지만, 먹으면 죽는 음식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여 명에게 저녁을 먹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육적 양식을 공급하심과 아울러 영적 양식을 교훈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이 기적을 체험한 이후 계속하여 썩어질 양식만을 구하여 나아오자,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일하고 자는 것을 생각 없이 반복하며 사는 동안, 교회 밖의 사람들은 먹으면 죽는 음식 한 가지만 알고 그것을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고 살다가 마침내는 영원히 죽고 맙니다.
두 번째 음식은 먹으면 반드시 사는 음식입니다. 모세 시대의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신령한 식물이었지만 먹고 죽은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먹으면 반드시 사는 생명의 떡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이 떡은 먹으면 사는 것입니다. 먹어도 죽는 보통 떡과는 다른 종류입니다. 둘째, 이 떡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입니다. 셋째, 이 떡은 살아있는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면 이 떡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는 하늘로서 내여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밥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밥은 생명과 같습니다. 밥을 먹으면 살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산 자만이 밥을 먹고 죽은 자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 밥을 먹지만, 밥을 먹고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 밥을 먹고 다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섭취하여 영혼이 항상 건강하기를 바라고,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온전히 믿어서 영원히 사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진설병은 성소 곧 하나님 앞에 있는 떡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앞에 있는 떡은 매안식일마다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즉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상에 참예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광스러운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예표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을 자신의 상에서 먹게 하심으로써, 세상 끝날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영광스러운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잔치 자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잔치 자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 자리는 어떤 근심도, 걱정도, 아픔도, 슬픔도, 미움도 없는 완전한 희락의 자리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그 잔치에 참여하여 세세무궁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떡 상
출 25:23-40 / 임덕순 목사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설계도를 주시는 장면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주시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막을 어떤 구조로 만들며 어떤 물건들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디에 배치 할 것인가를 아주 자세히 말씀해 주셨는데, 자재나 치수나 모양이나 색깔 등은 단순히 미적 조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분명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누구신가, 그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것인가를 계시하는 내용입니다.
성막의 가장 안쪽의 방을 지성소라 했고 거기에는 법궤를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바깥 쪽의 방을 성소라 하는데, 제사장들이 순번대로 날마다 들어가서 분향하는 곳이었습니다. 성소에는 세 가지 기물이 있었는데, 입구에서 들어가서 오른쪽에는 떡을 진열해 놓는 진설병 상이 있고, 왼쪽에는 불을 켜는 등대가 있었으며, 한 가운데로 조금 더 나아가면 향을 사르는 향단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떡 상을 살피면서 이 떡 상을 통해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듣도록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종교에서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그 신이 잡수시기를 바라고 차려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향을 피우는 것은 신이 향내를 맡으시라고 피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먹는 음식을 잡수시는 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두우면 움직이지 못해서 불을 켜야만 하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면 왜 성소 안에 떡 상과 등대와 향단을 설치하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내 음식점 앞을 지나가다 보면 진열장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진열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열한 음식은 진짜가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입니다. 진짜를 그렇게 진열하면 부패해 버립니다. 진열장의 음식은 먹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보이기 위한 음식이고 우리 음식점에는 이런 음식을 판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음식입니다.
진설병은 영어로는 ‘show bread’ 라고 합니다. 보여주기 위한 떡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요? 답은 신약성경에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2) 그 성막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떡을 진설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떡 상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 조각목은 지난번에 설명한 대로 쉬띰나무라는 아카시아 과의 사막에서 자라는 못난 나무입니다. 물론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합니다. 크기는 법궤보다 조금 작고, 높이는 똑같았습니다. 장이 2규빗,(90) 광이 1규빗(45) 고가 1규빗반(70)이 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궤보다 조금 작은 직사각형의 떡을 올려놓는 상입니다.
이 상도 정금으로 완전하게 싸고, 위로 돌아가며 금테를 둘러야 했는데, 이것도 역시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졌지만 영원하신 왕권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계시입니다. 그리고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정금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이용하여 상위에 떡을 올려놓되, 그것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떡은 하늘나라 백성이 먹어야 할 양식이 무엇인가를 말씀하는데, 그 떡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임을 가르쳐 줍니다. 떡 상을 통해서 주신 다섯 가지 특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첫째, 상 위에 열 두덩이의 떡을 항상 진설하라.
이 상위에 진열해 놓는 떡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나로 예언된 분이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분이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25)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 하리라.”라고 직접 말씀하신 분입니다.
1) 한 줄에 여섯 덩이씩 열두 덩이를 만들어 진설하라(레24:5-6).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 백성은 열 두 지파인데, 거기 떡을 열 두 덩이를 진설하라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내 것이라는 뜻이고, 하나님의 앞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만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떡은 아무나 먹지 못하고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만 생명의 떡인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무리 많이 팔리고 아무리 쉬운 글자로 인쇄를 해서 싸게 팔아도 택한 백성이 아니라면 읽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사6:10에 보면 하나님은 누구한테는 당신의 진리를 알게 하시지만, 누구에게는 진리에 대하여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고 마음이 둔하게 하셔서,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여 은총을 입게 한 백성이 있고, 그 은총에서 제외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은 반드시 불러내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주어 믿게 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분입니다(롬8:30). 행13:48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2) 떡 한 개의 크기는 에바 십 분지 이가 되게 하라.
그들이 광야에서 매일 거두어 먹고 있던 만나는 하루에 한 오멜씩 거두게 하셨는데, 그것은 1인의 1일 양식이었습니다. 출16:36에 의하면, 오멜은 에바 십분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설하는 떡이 에바의 십분의 2라면 그 떡 한 개가 두 사람의 하루 양식이고, 열 두 개면 24명의 양식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상위에 올려놓는 음식 치고는 대단히 많은 분량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전 세계인이 다 믿어도 그들 모두를 영생 얻게 할 수 있는 넉넉한 떡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한분의 희생으로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떡의 충분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는 세계 모든 백성들 누구라도 믿기만 하면 모두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넉넉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광야에서는 무엇으로 떡을 만들어 올려놓았을까요?
성막을 만들 당시 광야에는 곡식이 없었는데 어떻게 떡을 만들어 진설병 상에 올려놓았을까요?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로 차려 놓았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는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그 만나는 그들이 농사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만나였습니다. 죽을 사람을 영생하게 하는 참된 양식은 무엇일까요? 어디서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참 구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하셨습니다.
둘째, 곡식을 빻아 고은 가루를 만들고 불에 구워서 만들어라.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양식은 가루로 된 만나였기에 빻아 가루를 만들 필요가 없었지만,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에는 농사한 곡식을 곱게 빻고 불에 구워서 진설병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통보리나 통밀로는 빵을 만들 수 없습니다. 밀이 빻아져서 고은가루가 되어야 빵을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 놓여 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이 극심한 고난에 빻아져서 가루가 되고, 불에 구워지듯 희생을 치러서 커다란 공로를 세우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인데 그것을 무교병이라고 합니다. 빵을 만들 때 누룩을 넣지 않으면 부풀지 않아서 딱딱하고 모양도 없습니다. 이것은 고운 모양도 없었지만 온전히 무죄하셨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꽤 잘 살게 되겠지만 그들의 근본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였던 그들을 구원하여 주었고, 죄악과 사망의 노예로 절망하던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꾸민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진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다가오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성소 안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덩이의 떡이 있었는데, 그것은 색깔이 화려하지도 않고 향이 특별하지도 않고 모양도 그저 그런 떡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떡을 당신 앞에 항상 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꾸미고 위장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 진정한 속 모습을 감추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입니다. 잔뜩 위장하고, 사람이나 신경 쓰고,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위장한 사람은 하나님이 지옥으로 쫓아 보내십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란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누룩이란 거짓된 것, 변질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빵,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여야지 뭔가 가식이 들어가거나 부풀린 것은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자기를 멋지게 보이려고 야단입니다. 회사에서 사원을 뽑을 때 이력서를 보면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채용해서 일을 시켜보면 형편없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자기를 부풀리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지깽이도 못되면서 기둥이 하겠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은 볼품없어서 누가 사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떡을 당신 앞에 늘 진설해 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 같은 볼품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 유명한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볼 때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워서 “나 같은 것이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하면서 좌절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화려한 외모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바치는, 누룩 없는 진실한 사람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진실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십시다.
그런데 아무리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이라고 하더라도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음식입니다. 단지 부패 속도가 느릴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떡을 일주일마다 새것으로 갈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패하는 우리의 본성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썩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기간마다 교체되어야 합니다.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은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한번 회개했다고 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선도를 달아보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한 주일에 한번은 하나님앞에 나와서 마음을 바꾸어야 하고 새 떡을 먹어야 합니다. 매 주일마다 마음을 바꾸고 새 떡을 먹으러 결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모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자기를 부스러뜨리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자기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자기 개성, 고집, 이권추구를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제물도 죽여야만 제물이 되었고, 소제도 빻고 불에 태워야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은 조금도 희생하지 않고 목사와 하나님이 내게 맞추기를 바라십니까?
셋째, 이 떡은 금으로 만든 떡 상 위에 올려놓아라.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떡을 진열하도록 떡 상을 미리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교병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있게 해 주려고 당신 앞에 우리의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 앞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보잘것없는 떡을 위해서 만든 상은 금으로 싼, 아주 값 비싼 상입니다. 볼품없는 떡을 위해서 아주 아름답고 귀한 자리를 만들어 두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도 아주 귀한 자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자리를 하나님 앞에다 예비하여 두셨다는 것입니다(요14:1).
순수한 믿음만 가지고 나아가면 자리는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약속입니다.
올림픽에서 선수가 메달을 따면 곧 시상식을 하게 되는데, 시상식을 할 때 선수가 올라서는 시상대를 보면 자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금메달을 딴 사람은 제일 가운데, 가장 솟은 자리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은메달은 그보다 조금 낮은 자리, 동메달은 더 낮은 자리에 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준비된 금상위에 올라앉는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고, 승리자가 아니고는 결코 올라설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앞에 있는 최후 승자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화려하게 자신을 꾸민 사람이 아니라 소박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요, 항상 자신을 새롭게 하여 부패하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위한 금 자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남에게 뒤질까봐서 몸부림칠 필요가 있나요?
내가 하나님말씀에 관심 갖고, 날마다 새로워지려고 애쓰는 사이에 사람들이 나 대신 모든 것을 다 차지해 버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지 못합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은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면 그만큼 시간이 모자라서 불신학생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주일 예배도 참석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답니다.
불안하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진실하게 살고 자기를 새롭게 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미 승리자의 자리를 준비하여 놓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준비하신 하나님이 세상의 자리 하나 준비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다니엘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포로였지만 당대 세계최강국에서 평생을 총리 했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천국의 자리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인생의 승리를 하였습니다. 느긋하게 살아갑시다.
넷째, 그 떡은 제사장이 만들어 매 안식일마다 새것으로 교체하라.
이 떡은 오늘날 목사가 준비하는 설교와 같습니다. 제사장이 떡을 만들듯, 목사는 말씀의 떡을 장만하는 게 임무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주일날 목사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도들이 살아갈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목사는 한손에 성경을 들고 한손에 신문을 보고 이 시대를 분별하여 이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요리하여 주일마다 여러분의 영적 식탁에 올려놓는 사람입니다. 고민 고민 하면서 기도하면서 만들어 내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주일날 결석하면 매우 중요한 생명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이며, 음식을 먹지 않으면 힘이 없어져서 일은 고사하고 생명도 부지하기 힘들게 되는 것처럼 설교를 듣지 않으면 봉사도 무용한 것이며 무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밥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에는 영혼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요 4:34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고, 요6:27에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과 바른 삶을 위한 참된 양식입니다. 말씀을 사모합시다.
성도는 주일마다 말씀을 먹으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만나러 교회에 와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혼의 양식으로 채워 넣기 위해서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분이고, 그가 무엇을 이루셨으며, 그가 무엇을 기뻐하시고, 그가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통해서 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도 설교를 듣지 않으면 예배드린 것이 아닙니다. 교사가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이나 권사님들이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은 것을 위해서 큰 것을 버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주의 날마다 새것으로 교체되는 새 떡을 먹으러 열심히 모이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떡 상은 성소에 들어가서 맨 앞에 두라.
성소 앞에는 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제물을 태워 바치는 제단이 있고, 그 다음에는 손을 씻고 얼굴을 비춰 보는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떡 상이 있고 왼쪽에 등대가 있으며, 안쪽 중앙에 향단이 있고, 그 앞은 휘장으로 가로막혀 있고, 휘장 안이 바로 두려움의 장소인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배치하라 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성막을 들어가기 전에 놋으로 만든 제단을 거쳐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신앙생활이 시작된다는 것이고, 다음에 물두멍이 있는 것은,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비춰보고 씻어내는 회개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막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떡 상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은 사람은 말씀 양식을 먹고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먹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말씀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말씀 읽지도 않고 설교시간 졸면서 교회일은 자기가 혼자 다 하려는 사람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 있고 아무리 유식하다고 해도, 말씀에 관심이 없고 말씀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께는 아무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남의 가슴을 찢는 사람입니다. 유다서 10절에 “알지도 못하는 일을 비방하고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살다 망할 사람인데, 불의한 삯을 위하여 발람의 길을 따르는 자이고,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요란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교회의 암초가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떡 상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 자기 유익 등 다른 것에 주목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허망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면 결국 구원과도 거리가 멀고 교회의 암초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때문에 교회에 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 주일마다 떡 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놀러 가더라도, 교회에 누구 미운 사람이 있어서 보기 싫더라도, 누가 등을 떠밀어 내쫓으려 할지라도,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내가 어디로 가랴” 하면서 말씀 앞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주일마다 하나님앞으로 모여 생명양식으로 영혼을 배불리고 새 힘을 얻어서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고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국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성소 안의 등대
출 25:31-40 / 피영민 목사
서 론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구성되어 있고, 지성소는 성막의 1/3이고, 나머지 2/3가 성소입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들어 있으며, 성소 안에는 세 가지 기구가 있습니다. 성소의 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떡상, 정면으로 분향단, 왼쪽으로 순금등대가 있습니다. 성소의 문은 동편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북쪽으로 떡상, 서쪽으로 분향단, 남쪽으로 순금등대가 있는 것입니다.
순금등대에 관한 가장 탁월한 연구는 20세기 침례교 목회자였던 아더 핑크(Arthur Pink)라는 목회자가 쓴 『출애굽기의 이삭줍기』(Gleanings in Exodus)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더 핑크는 이 책 이외에도 양서들을 많이 저술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은 아주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하는데,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셨다면 서점에도 비치되어 있으니 꼭 구매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더 핑크는 순금등대에 관한 매우 탁월한 연구를 했습니다. 물론 그가 약 15년 정도 세대주의 종말론에 빠져 있었지만, 뉘우치고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이삭줍기』에도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을 받은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 이를 제하면 순금등대에 관한한 핑크의 아티클은 최고의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이 책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등대’는 바닷가에 서 있는 ‘등대’(Lighthous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내에 불을 켜는 ‘등대’(Lampstand)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어로 ‘메노라’(Menorah)라고 합니다. 어떤 번역에는 이를 ‘촛대’(Candlestick)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옳은 번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소에 있는 등대는 초를 태우는 방식이 아니라, 기름을 태워 빛을 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금등대’가 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촛대로 번역된 성경들이 있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의 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예배나 기도할 때 촛불을 많이 사용합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부활절 새벽에 촛불예배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성경에도 예배나 기도 시에 초를 사용하라는 구절이 전혀 없습니다. 아더 핑크 목사 역시 등대를 촛대로 번역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햇빛, 달빛, 별빛과 같은 외부의 빛이 전혀 들어올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금등대의 빛 이외에는 내부를 밝혀줄 빛이 없습니다. 순금등대의 빛이 성소 내부를 밝게 비춰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성소는 빛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Shekinah)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순금등대의 재료와 구조는 어떠한가?
31절에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금등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밑판과 줄기와 여섯 가지입니다. 그리고 등대를 만들 때는 다른 성소의 기구처럼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가 사용되지 않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정금을 사용합니다.
39절에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금등대에 사용되는 금의 양은 한 달란트입니다. 한 달란트는 34kg인데, 이것은 금 1kg를 5,000만원으로 환산하면 약 17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등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공비까지 따져보면 수십억의 가치를 갖는 엄청난 기구가 되는 것입니다.
성소의 기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 가운데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순금등대는 나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31절을 다시 보면 아주 중요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등대를 만들 때 “쳐서 만들라”(Hammer out)고 말씀하셨습니다. 금 덩어리를 망치와 같은 도구로 때려서 등대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나사로 조여서 만들거나 금을 녹여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흙으로 조각품을 만들기도 어려운 일인데, 금 덩어리를 때려서 순금등대를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상을 만들 때는 때려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에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금 귀걸이와 각종 귀금속을 거둬 흙으로 만든 주형틀에 부어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우상은 소위 주형틀에 부어 주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금등대는 주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금을 때리고 쳐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가 매를 맞으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만을 예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금등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순금등대의 가운데 줄기 옆에는 세 개씩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옆의 사진을 보면 가지 중간에 장식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부 살구나무 꽃 모양입니다. 꽃받침과 꽃, 그리고 열매 모양의 장식이 있습니다. 가지 한 개 당 이런 장식이 세 개씩 있습니다. 이 장식은 불을 내는 용도가 아니라 순전히 아름다움을 위한 것입니다.
이 장식은 모두 살구나무입니다. ‘살구나무’는 영어로 ‘Almond Tree’라고 합니다. 아몬드는 초콜릿이나 샐러드에 넣어 먹기도 하는데, 자주 먹으면 심장병 예방에도 도움이 되는 몸에 좋은 견과류입니다. 그런데 이 살구나무의 꽃받침과 꽃과 열매 모양으로 한 가지 당 세 개씩 장식이 되어 있으니 총 18개이고, 줄기에는 4개가 있어서 도합 22개가 됩니다. 그리고 줄기와 가지 끝에 일곱 개의 잔이 있습니다. 잔도 역시 꽃받침과 꽃과 열매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금등대에는 살구나무 모양의 장식품이 29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금등대에 왜 이렇게 살구나무 열매와 꽃 모양의 장식물이 많이 있는 것일까요? 민수기 17장을 보면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해 고라, 다단, 아비람, 온의 자손들이 반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12지파의 족장들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와서 성소 안에 넣어두면 택한 지파 족장의 지팡이에 움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론의 지팡이에만 살구나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다. 움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순서였습니다. 순금등대에 있는 29개의 장식물은 모두 움의 모양, 꽃의 모양, 열매의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살구나무는 봄이 되면 처음으로 움이 돋고 꽃이 핍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나중에 모두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을 이 살구나무가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금등대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고, 신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실 것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순금등대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식양 그대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 덩어리를 쳐서 정확한 균형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갖춘 등대로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6장 1절에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지혜와 권능을 부어주셔서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등대를 만들라고 하셨다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특별한 지혜와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Ⅱ. 등대는 언제 어떻게 빛을 발하는가?
순금등대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이 등대는 무슨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순금등대가 빛을 내는 것일까요?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레위기 24장 1~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0장 7~8절의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저녁에는 불을 켜고, 아침에는 불을 꺼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장의 구절들은 레위기 24장의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성소의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등불은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는 밝은 대낮이라고 해도 외부의 빛이 전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창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소에는 낮이라도 등불을 켜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보는 중에 18세기 침례교 위대한 성경주석가 존 길(John Gill)목사님이 1세기 유대 역사가였던 요셉푸스의 기록을 인용해 주석해 놓은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밤이 되면 성소에 들어가서 일곱 개의 등을 다 켠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일곱 개 중 바깥쪽 네 개의 등불은 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양쪽 끝의 네 개의 등불은 사르고, 가운데 세 개의 등불만 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충되는 듯한 두 구절의 내용을 납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는 듯 보입니다.
일곱 등잔에 순수한 올리브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꽂아서 거기에 불을 붙여 빛을 내도록 하였는데, 이 불도 아무 불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번제단에 내려주신 불만 사용해야 합니다. 성냥불이나 라이터와 같은 화기로 불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도 중에 불을 받았다고 요란법석을 떠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말로가 좋지 않은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경우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 사람이 받은 불은 하나님이 주신 불이 아니라 그야말로 귀신 불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겸손해지고 정결해지고 거룩해 지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불 이외의 불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올바른 불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 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일곱 등잔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이 일곱 개나 된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 수 일곱이기에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일곱 등불 켠 것은 성령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일곱 등잔에 채우는 기름 역시 감람나무 열매를 짠 순수한 올리브기름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등잔에서 빛이 발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등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고, 등잔의 불과 기름은 성령의 역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순금등대의 크기와 높이에 대한 계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라고 하셨기 때문에 크기나 높이는 그 한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떡상에 떡을 갈아 넣거나 떡을 먹을 때 밝혀주려면 떡상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등불이 있어야 하고, 또 분향단에서 향을 피울 때도 비춰줘야 하기 때문에 분향단보다도 조금 높아야 할 것입니다.
Ⅲ. 순금등대와 일곱 등잔에서 빛을 비추는 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가?
순금등대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과, 수난을 의미하고 일곱 등잔의 빛은 성령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빛을 비추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보니 많은 설교자들이 이 순금등대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라고 해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더 핑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긴 한데,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는 한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2장 36절에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9절에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자기 죄가 백주에 다 드러나게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빛을 없애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삼일 만에 살아나셨고, 이후 40일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빛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천국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제자들도 빛이 없는 흑암의 세상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0일 만인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성령은 성도들 안에 거하시고 제사장된 성도들에게 밝은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빛 가운데 거하도록 빛을 비춰주시는 사역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혹시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기도해 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빛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일곱 등잔의 빛은 성령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순금등대의 등잔불은 세 가지를 비춥니다. 첫째는 등대 자체를 비춥니다. 등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순금등대는 줄기와 가지의 좌우 대칭이 확실하고 정금 34kg이 소요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기구였을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으십니까? 그 분을 어떻게 믿게 되셨습니까? 일일이 다 계산해 보고 생각해 보니 예수님이 괜찮을 것 같아서 믿으셨습니까? 아니면 가족의 부탁에 끌려 나와서 믿게 되셨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믿는 것은 기적에 속하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이 아니고서 누구라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빛을 비춰주셔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고 천지의 창조자요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내 죄 값을 대신 갚아주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성령의 역사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오늘 기도하실 때, “내 영혼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제사장들이 분향할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향이 올라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장 7절에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8절에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등불을 켜고 끌 때 향을 사르라는 것입니다. 순금등대의 일곱 등잔에 불이 없을 때는 향을 사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향을 올릴 때 등대의 빛이 비췬다는 것의 의미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문학을 전공한 교수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분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불을 받은 분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기도를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성령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제사장들이 떡상의 떡을 갈아 넣고 안식일마다 떡을 먹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성경 읽는 재미를 붙이도록 해 주시며, 이것이 먹을 만한 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법전과 같지 않고, 소설과도 같지 않습니다. 소설은 한 번 읽으면 내용을 다 알기 때문에 또 읽기 싫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볼 때마다 새로운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곤비하고 비참한 상태에 처한 성도님들이 계시거든 집에 가서 시편을 소리 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다가 보면 마음에 빛이 비취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귀신도 떠나가고, 영혼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떡을 먹을 수 있도록 깨닫게 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읽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주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을 때 깨닫게 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성령의 사역은 결국 예수님의 사역이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 론
성령은 순금등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기초가 되어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빛을 비추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1차적인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제자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영적인 생활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캄캄한 세상은 누가 빛을 비춰야 할까요? 마태복음 5장 14~16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5장 8절에도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제 성도가 빛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춰야 할 자들은 바로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순금등대의 궁극적인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빛을 받은 사람인가?” “나는 지금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오도하는 거짓된 빛을 비추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성령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그리고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등잔대와 기구들
출 25:31-40 / 이상호 목사
우리는 성막문에 들어서 번제단을 거쳐 물두멍에서 수족을 닦고 성소에 들어섰습니다. 모두 휘황찬란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정금입니다. 천장은 아름다운 앙장이요, 앞에 휘장은 찬란한 수를 놓았죠, 사면은 모두 금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왼쪽에 금등대입니다. 창문 하나 없는 집이지만 성소 안이 밝은 것은 이 등대빛 때문입니다. 바로 그 등대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1. 등대의 모양
정금 1달란트를 쳐서 만들었습니다. 1달란트는 68kg(혹은 34kg), 1돈(15만원) = 3.75g = 수십억원
가운데 한 줄기가 있고, 양편에 각각 3가지로 7등. 등잔은 살구꽃 형상이며 불집게 불똥그릇도 모두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2. 등대의 특징
등대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빛입니다. 그러면 빛된 생활, 사명의 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등대에는 다음과 같은 법칙이 있습니다. 빛된 생활하려고 하면 이 법칙을 지켜야 합니다.
1) 믿음의 법칙
등대는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은 믿음입니다. 빛된 생활을 하려면 믿음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금은 빛이 납니다. 믿음은 밤하늘의 샛별처럼, 죄악시대 노아의 믿음처럼, 우상의 도시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빛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2) 고난의 법칙
등대는 금을 녹여 부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쳐서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채찍에 맞아 고난당하신 분이십니다. 빛된 생활을 하려면 고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고난의 이야기가 감동이 있고 예수님 이야기는 고난의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이야기가 구원의 등대입니다.
* 모세가 등대 만들다가 79번 실패했는데 80번 째 불속에 넣어서 완성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인간의 최선 + 하나님의 은총이 하께 하여 작품이 됩니다.
3) 사명의 법칙
성막에는 의자가 없어 서서 일해야 했고 창이 하나도 없습니다. 천정은 빛이 들어올 수 없게 4개의 덮개로 덮여져 있습니다. 캄캄합니다. 단 하나의 빛 등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등대의 역할은 아주 큽니다. 그 작은 불꽃 하나가 금벽에 부딪쳐 유난히 빛나게 됩니다. 반사가 또 반사되고, 또 그 반사가 반사되어 놀라운 빛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밝혀 준 빛의 등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사명을 지니고 일하는 사람은 등대같이 빛나게 됩니다.
4) 성령의 법칙
등대는 아침저녁으로 감람유를 공급해주어야 빛을 내게 됩니다. 감람유 없이 절대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감람유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등대는 자기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기름 때문에 빛을 냅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고 그래야 빛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등대는 곧 성령의 도움으로 빛을 내게 됩니다.
5) 연결의 법칙
등대는 가운데 줄기에 6개의 가지가 붙어있습니다. 가운데 줄기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6가지는 우리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붙어있어야만 빛을 내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요 15:4-5)
가지도 줄기가 필요하고, 줄기도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절대로 필요합니다만 예수님도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등대의 가지는 등대의 줄기에 붙어 있어야 빛을 내게 됩니다. 연결이 단절되면 등대는 이미 등대가 아닙니다.
6) 연속의 법칙
등대와 불은 밤낮 계속 켜져 있어야 합니다. 밤에는 물론, 낮에도 성막안은 둥대가 없으면 빛 한점 없이 캄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속적으로 등대는 빛을 발해야 합니다.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출 27:20-21)
사무엘도 성막안에서 등대의 불이 켜져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영적체험을 하였습니다. 이같이 등대의 불은 연속으로 빛나고 있어야 합니다. 늘, 언제나 우리의 심령안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있어야 합니다.
7) 닮음의 법칙
등대는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살구꽃은 꽃중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입니다. 따라서 열매도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는 첫 열매입니다.(고전 15:20)
등대는 살구꽃 형상입니다. 빛된 생활을 하려면 살구꽃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습니다.
등대는 살구꽃 형상으로 되어 있고, 살구꽃 형상은 그리스도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빛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8) 완전의 법칙
등대는 가운데 줄기 하나에 가지 6개가 붙어 7개의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은 하나님의 숫자이고 6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6일때 되는 날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6은 하나가 보태져야 완전수 7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하나님 안에서만 참 안식이 있습니다."라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자동차는 휘발유와 함께 할 때 발동이 걸립니다. 고기는 물과 함께 할 때만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존재가치가 잇습니다.그래서 등대는 10개의 불이 아니고 7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다윗과 골리앗 : 하나님과 함께하는 다윗은 어리지만 하나님께 종속선언한 7의 인간, 완전한 사람입니다. 골리앗이 용감한 사람 - 하나님도 없이 덤볐으니까....?
베드로가 예수 만나기 전에는 어부였으나 예수님가 함께 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혼자 있을 때는 양치는 미디안의 목자였으나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등대도 줄기 하나에 가지 6개가 붙은 완전한 숫자 7이 되었습니다.
9) 점검의 법칙
등대의 불은 꺼지지 않도록 점검해야 합니다.(출 27:20-21)
빛된 생활을 하려면 늘 내 안에 불이 켜져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내 속에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았나?
버리지 못한 죄는 없을까?
헌신의 불이 희미해지지 않았는가?
구령의 열이 식어지지 않았나?
알고도 이끌려가는 죄가 없는가?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아니하였는가?
서머나교회처럼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가?
이같이 우리의 믿음의 불을 늘 점검해야만 빛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10) 연합의 법칙
빛은 내되 한 개만 내서는 안됩니다. 7개가 같이 빛을 내야 합니다. 연합된 힘으로 빛을 내야 합니다. 교회란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모세도 아론과 같이 일했습니다. 바울도 바나바와 같이 나갔습니다. 베드로도 요한과 같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무디도 생키가 그림자처럼 따랐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같이 일했습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너와 나와의 연합된 합창입니다. 도만 있는 피아노는 피아노가 아닙니다. 한 줄만 있는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등대는 연합되어 빛을 냈습니다. 4명이 같이 지붕을 뜯고 예수 앞에 중풍병자를 내려놓았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연합된 힘은 기적의 힘입니다. 등대는 7개의 불이 연합되어 성막안을 환히 밝혀주었습니다.
11) 무용의 법칙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등대는 버림받았습니다.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리자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빛을 내지 못하는 등대는 이미 등대가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빛을 내지 못하는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빛을 발하지 못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등대는 성도의 빛된 생활을 의미합니다. 빛된 생활을 하기 위하여 12가지 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 고난, 사명, 성령, 연결, 연속, 닮음, 완전, 점검, 연합, 무용의 법칙이 그것입니다.
순금 등대
출 25:31-40 / 임덕순 목사
우리는 출애굽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배우는 중입니다.
그중 성소와 그 기구들에 나타난 계시가 그리스도의 어떤 면을 보여주는지 관찰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를 듣고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만민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떡 상이 있다는 것을 지난 주일에 설명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맞은편에 있는 등대에 관해 살펴보면서 이 등대를 통하여 어떻게 그리스도를 계시 하시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이 등대는 법궤나 떡 상처럼 바탕은 조각목으로 짜고, 겉만 금으로 싸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금으로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금은 한 달란트인데, 순금 3.4킬로그램쯤 됩니다. 중심에 줄기가 하나 있고, 거기서 양 옆으로 가지가 셋씩 나와서 일곱 가닥이 되는데, 한 가지에 잔 하나와 등잔 받침인 꽃받침과 살구꽃이 하나씩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잔은 등에 불을 켜는 기름을 담는 곳이고, 꽃받침은 등 받침이고, 꽃 위에 등잔을 두어 불을 밝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부집게와 불똥그릇도 정금으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세하게 계시한 다음에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내가 보여준 도형 그대로 만들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이미 아시는 대로 이 기구들의 모양과 규격과 재료와 배치는 모두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왜 등대와 등잔을 순금으로 만들게 하셨을까요? 오직 순금으로만 만들라고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유일한 빛이 되시는 사실은 과거나 현재나 영원한 미래에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계시입니다. 세상의 빛과 진리는 시대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럼 왜 등잔을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게 하셨을까요? 살구꽃은 히브리말로 ‘샤케드’ 라고 하는데, 살구꽃은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어서 유대인들은 그 꽃을 깨어있는 꽃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성막과 기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주인공 그리스도는 속히 오신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죄와 절망으로 어두워진 세상은 빛 되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대신 죽으시고 대속해 주셔야만 인간에게 희망의 빛이 생기게 되어있고,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야 어두운 인간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찬란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일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성도의 최대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이 순금등대의 특징들을 몇 가지 더 살펴봅시다.
첫째, 성막 안에는 오직 이 등불만이 비취게 하라.
성막 안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고, 다른 빛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 등불 하나 뿐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성막을 설계해 주시면서 외부로부터는 빛이 한 가닥도 들어오지 못하게 설계를 해 주셨을까요? 하나님의 설계 실수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실수할 수 없는 분이고,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계시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빛, 사람들을 밝게 할 진리의 빛은 이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계시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빛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옛 성현들의 말씀이라든지, 인간이 만든 종교라든지, 과학이라는 빛을 통해서도 참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때는 진화론이 과학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된 것이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사람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가설이 진리인 것처럼 보이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사실을 알지 못하고 헤맸고, 인간의 근본과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죽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이성의 빛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인생이 제 길을 갈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과학이라는 잣대로 재고 자르고 분석해서, 성경을 하나의 고대의 문서들의 합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어디서 따온 것 같고, 이 구절은 무슨 문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이 부분은 어떤 문서에서 따온 것이라면서 구약을 다 난도질했습니다. 신약도 복음서외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고 복음서 중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대목이 좀 믿을 만하고, 그것도 예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수가 없고 하는 식으로 성경을 난도질 하고는 결국 성경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따라갈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결론을 그들 나름대로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니 더 이상 믿고 따라갈 진리가 없어지고 말았고, 그 결과 사람들은 각자 자기에게 유익한 대로 살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사람과 사람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국제사회는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빛을 인정하지 않고 이성이라는 희미한 빛을 신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을 행복과 확신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인간이성에서 나온 법과 제도와 문화화 풍습은 점점 더 인간세상을 어둡게 하고 절망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근본과 가야할 길과 구원의 길을 밝혀주는 참 빛이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나와함께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대천의 한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는 토요일 교회에 가는 것이 죽으러 가는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성경을 분석하고 비판하다가, 주일날 가서는 그 말씀이 진리라고 증거 해야만 하니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에 와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과 그 진리를 확신하고 참 목회가 무엇인지를 배우니, 교회로 내려가는 길이 힘이 납니다.” 그 목사님이 지금은 지방교회에서 목회를 아주 잘 한다고, 그 이웃교회 친구에게서 듣고 있습니다. 목회고 인간 삶이고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절대 진리요 세상의 빛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바르고 행복한 미래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감정이라는 것을 인간이 나아갈 빛을 삼고자 하는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자기 느낌에 끌리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은 선하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으며, 속되고 음란하고 온갖 허망한 욕심에 오염된 감정일 뿐입니다.
성선설을 말하는 철학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경험해본 결과, 인간의 마음속에는 악한 것들로 꽉 차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보니 내세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련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은 우주를 며칠 날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하늘을 날면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자외선도 맨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데, 하나님을 맨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과학적인 말입니까? 자신의 무지를 증거 한 말일 뿐입니다.
피조물의 한 조각에 불과한 인간의 두뇌와 이성으로는 이 넓은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 자신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다 알지 못하거니와, 영적 일은 더욱 달라서 영적으로라야 분별하는 것입니다. 고전2:14에 “육에 속한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이 준비하신 우리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계시의 빛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빛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성경의 약속을 실현하려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요, 우리 인생의 영원하고 유일한 빛이 되십니다.
요1:9 이하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단언합니다. 요9:5에서는 “나는 세상에 빛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흑암에 싸여 살아가는 소경을 눈뜨게 하셨고, 죄와 어둠의 권세에 매인 자들을 풀어주셨으며, 무지와 불행과 억눌림의 어두움에서도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참 빛이십니다. 그는 인간의 가장 큰 절망인 사망을 극복하시고 부활의 약속으로 참된 소망의 빛을 주신 참 빛이십니다.
성막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바깥에 아무리 해가 밝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직 촛대를 통해서 밝혀지는 그 빛으로만 사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 영생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세상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이성의 빛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것이 과학적이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내게 필요한가도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에 찬 말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 암은 유전이 아니라고 하더니, 다음에는 유전이라고 하다가, 요즘에는 유전이 아니라고 합니다. 언제는 된장이 암을 유발한다더니, 요즈음에는 된장엔 항암제가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진짜 과학적 답변입니까?
과학이란 결코 진리가 아니며, 지금까지의 지식에 근거한 가설에 불과하고, 인생이 그것에 의지하여 자기 미래를 열어 갈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연과학은 그렇다 치고, 사회과학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분배가 최고의 미덕이고, 분배만 잘 되면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말하는데, 그럴까요? 유럽의 분배 잘하던 나라들은 분배를 앞세우다 보니 나라 경제가 바닥나서 이젠 분배를 포기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신 그 말씀, 즉 계시만이 우리를 밝히는 빛이며, 그분 자신만이 인류의 소망의 빛이십니다. 이 빛 가운데에서 살아가면 시대가 아무리 험하고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온다 해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빛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445장). 여러분은 오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서 해결하려 하십니까? 누구의 말입니까? 그 때의 감정이나 기분입니까?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둘째, 등대에는 정한 감람유를 공급하라.(행10:38)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를 임직할 때에 기름을 부어서 임직식을 했습니다. 오늘도 교회에서 성직인 목사와 장로를 세울 때에도 안수하면서 기름을 부은 다고 말하는데, 구약에서 임직할 때 기름을 부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출27:20, 21에 보면, 그 등대에는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결한 올리브기름이 일곱 가닥으로 된 등대의 잔에 공급되어 끊임없이 그 등대가 불을 밝히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등대에 순결한 기름을 공급하라 하신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를 것을 예고한 것이고, 그가 기름부음으로 세워지는 세 가지의 직분을 감당하러 오실 것을 예고하는 계시입니다. 기름을 부어 세우는 직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그에게 부어지는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드려서 인생의 죄를 속죄하는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그는 인생들에게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주는 참 선지자가 되셨고, 그는 자신을 믿어 영접한 사람들을 영원히 의로 통치하실 영원한 왕이 되신다는 계시입니다. 그리스도가 왕 중의 왕이며, 참되고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진리를 밝히 가르치고 우리의 때를 알려줄 참된 선지자로 일하실 것을 계시하는 모양이 이 순금 등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실 것을 계시하기도 합니다. 요16장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셋째, 한 줄기에서 일곱 가닥이 나오게 하여 일곱 개의 등불을 켜라.
이 등대는 중심에는 본체가 있고, 옆구리에서 양쪽으로 세 가지씩이 나와서 일곱 가지가 되도록 만들게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님은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사이에 다니시는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세상의 등대라는 계시입니다.
이 등의 일곱 가지는 본체의 옆구리에서 나왔습니다. 세상의 등대인 교회는 그리스도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결과로 생겨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나와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고, 그분의 진리를 전파하는 역할을 그리스도 대신에 하는 기구가 세상의 빛인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계시입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고, 그의 몸인 교회도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금등대의 원 줄기는 하나이고, 가지는 여섯이어서 합이 일곱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신성과 주권을 의미하는 숫자이고(창1:1, 신6:4, 요1:3). 여섯은 인간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일곱은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여섯인 인간은, 하나이신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만 완전해 질 수 있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당신만 빛이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5:14) 라고 하셨고, 마5:16에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속한 성도들이 세상의 빛이 되려면 그에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요15:5에 보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에게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라는 포도나무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파하여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지금 세상은 어둡기 한이 없습니다. 온갖 범죄와 두려운 소식들이 뉴스의 대부분입니다. 엊그제는 대낮에 서울의 쇼핑센터에서 여중생들이 다른 친구를 담뱃불로 얼굴을 지지고 파이프로 구타하는 데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회가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한국에만 그런 현상이 있습니까? 전 세계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어디에 있나요?
여러분은 금년 말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계십니까? 정말 훌륭한 지도자가 대통령으로 뽑힐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분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많이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십니까? 최선을 다해서 훌륭한 사람을 뽑아야 하겠지만 결과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금물입니다.
어떤 신문에서 대선은 정치인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거는 도박판이라고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자기가 민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평생 건달로 살아온 세월을 청산하고 한몫 잡을 수 있고, 자기가 민 사람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면 또 쪽박 차는 신세가 되기 때문에, 자기 당이 정권을 잡아서 정치를 바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올인 한 후보가 당선되어야 대박 터진다는 생각뿐이어서 이명박, 박근혜 둘 중 하나에 줄서기 도박만 열중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저에게 정치현실에 관한 눈을 뜨게 해준 글이었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법도 사람들의 마음을 바른길로 인도할 만한 빛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훌륭하니 나를 따르라고 할 빛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발견한 진리가 사람들을 살려내고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으니 나를 따르라고 할 사람이 있고 그런 진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빛이요 세상을 인도하는 빛입니다. 이 빛으로 나아오게 전도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세상에 전해줄 유일한 빛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산 값비싼 물건을 자랑하고, 자기가 사는 집을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부러워할까요? 천만에요. 비 호감, 밥맛이라고 칩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자랑은 어린 손자손녀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아침에 우리 손자가 그 고사리 손으로 내 뺨을 만져 주어서 너무 좋아서 기절할 뻔 했다.”고 자랑하는 할머니는 너무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많이 자주하면 들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자 자랑하려면 돈 만원을 내고 자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랑이 무엇일까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진지하고 가장 선하고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치는 자랑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빛이요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나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다고 하였고,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무슨 자랑거리가 있겠습니까? 저 잘난 맛에 살던 습관과 생각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사람이 됩시다. 빌 3:3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빛이 되는 길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민에게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려면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지원받아서 바르게 살아서 빛을 발하되, 빛이신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 세상의 과학도, 정치도, 인간 이성도 빛이 될 수 없고 된 적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빛이십니다. 이 사실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주변에 전하는 전도를 생활화해야 하고, 이 사실을 저 먼 나라에도 효과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잘 감당하고 계십니까? 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열심히 감당하십니까? 선교사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셨습니까? 한 달 후에 태신자를 작정할 텐데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이 일도 내 힘으로는 잘 못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지혜와 열정과 능력을 부어주셔야만 육신의 욕심을 따라서 내게 유익한 것만을 하려는 행동을 자제할 수 있고,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증거 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 할 수 있습니다.
등불을 켜는 이유는 빛을 비추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삶으로 이웃에게 빛을 보여주고, 입술로 이 진리를 전파해서 세상에 빛을 전하여 순금등대의 역할을 감당하는 한가람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빛으로 살라
출 25:31-40 / 박덕기 목사
구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이듯이, 성막 또한 모두 예수님에 대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이 오직 하나인 것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 천국으로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은 예수님 한분 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림 NO. 3) 성막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맨 먼저 번제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림 NO. 8) 이 번제단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희생동물이 불태워 죽음을 당했던 곳으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조각목은 아카시아 나무의 일종으로 이는 버림받고 쓸모없는 인생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악으로 쓸모없는 아카시아 같은 인생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싸여진 인생은 결코 지옥 불에 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번제단 위에는 네 개의 뿔이 있었는데, 어떤 죄인이라도 성소에 들어가서 이 번제단의 뿔을 붙잡기만 하면 살고 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제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의 손으로 붙잡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라 했습니다.
성막 안에 있는 두 번째 성구는 물두멍이라고 했습니다. (그림 NO. 16) 이 물두멍은 아론과 그 자손인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고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일종의 커다란 세수 대야라고 했습니다. 만일에 손과 발을 이 물두멍에 씻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물두멍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데,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항상 힘써야 할 일은, 말씀의 거울을 데려다 보고 자신의 심령을 늘 깨끗이 씻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면 사탄에게 가깝고, 성경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께 가깝다”는 말이 있고, “성경책이 더러울수록 그의 마음이 깨끗하고, 성경책이 깨끗할수록 그의 마음이 더럽다”는 말도 있습니다. 번제단을 통하여 근본적인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도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야 했듯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저 하늘 지성소에 들어갈 때까지 영혼의 거울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데려다보고 자신의 심령을 씻어 정결케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막 안에 세 번째 성구인 등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막 문으로 들어와서 번제단을 거처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고 성소에 들어섰습니다. (그림 NO. 1) 그런데 성소에 들어서면 우리는 성소 내부의 휘황찬란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모두가 정금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외부는 해달 곧 검은 물개 가죽으로 덮었지만, 성소의 내부는 금빛 찬란한 곳이었는데 이러한 성소의 모습 역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줍니다. 성막의 외부를 보잘것없는 해달의 가죽으로 덮은 것은, 초라한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미하고, 성소의 내정으로 들어서면 모든 것이 정금으로 되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영광스러운 신성을 상징해 줍니다. 골 2:10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나” 그 속에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빛나리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섰을 때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왼쪽의 순금 등대입니다. (그림 NO. 18) 창문하나 없는 집이지만 성소 안이 밝은 것은 이 등대에서 비취는 빛 때문이었습니다. 이 등대에 대하여 좀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등대의 형태
이 등대는 정금으로 쳐서 만들었습니다. 등대는 가운데 줄기 하나에 가지 6개가 붙어 7개의 등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등대는 수직으로 되어진 가운데 줄기와 그 좌우에 각각 세 개의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서 늘어서 있습니다. 가운데 줄기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좌우의 가지는 그의 백성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계시며 성도의 모든 일에 깊이 관여 하고 계십니다. 양쪽의 세 가지가 다 줄기에 붙어 있으며 줄기에서 나온 것과 같이 성도들은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만 빛을 내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동차는 휘발유와 함께 할 때 발동이 걸립니다. 고기는 물과 함께 할 때만 활동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과 함께 할 때만이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부였으나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혼자 있을 때는 미디안의 한낱 양치는 목자에 불과하였으나,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2. 등대를 만드는 방법
등대는 금을 녹여 부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등대는 금을 쳐서 만들었습니다. 등대는 온전한 모형이 나올 때까지 쳐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혜 문학인 ‘미드라쉬’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성막을 만들면서 등대 때문에 가장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물들은 다 만들었는데 등대만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식양대로 성물을 만들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였습니다. 도무지 등대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만 모세는 등대 만드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만들었던 등대를 불속에 넣어라” 모세가 만들던 등대를 불속에 넣었다가 꺼내서 한 번 쳤더니 등대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후일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등대에 대해서도 ‘미드라쉬’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는 등대를 10개 만들어야 했습니다. 솔로몬이 금 1천 달란트를 용광로에 넣고 계속 불을 피웠습니다. 아침에 보니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이 금으로 등대를 만드는데 만들고 나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보다 1디나가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작품이 나오기까지 80번을 불 속에 넣었다고 합니다. 등대는 수많은 고난을 통과하고서야 만들어진 것입니다. 등대는 쳐서 만들어야 하기에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 없이 빛 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아 고난당하신 분이십니다. 빛 된 생활을 하려면 고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고난의 이야기가 감동의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아도 되실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려 죽으신 사건은 가장 빛나는 등대와도 같은 것입니다.
3. 등대의 사명
등대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등대는 성소에 안치되어 어두운 성소 안을 밝히는 기능을 했습니다. 성막 안에는 창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천정은 햇빛 빛 하나 들어올 수 없이 4개의 덮개로 덮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캄캄합니다. 단 하나의 빛 등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등대의 역할은 너무도 컸습니다. 등대의 빛이 없으면 성소 안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작은 불꽃 하나가 유난히도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등대는 죄악의 어두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 모든 인류는 죄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절망과 좌절 가운데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즉 온 인류는 죄의 지배 아래서 멸망으로 내달려가고 있었었으며, 소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그 어둠과 절망을 깨고 인류에게 참된 소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빛으로 찾아오신 분이 있었으니 곧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등대가 어두운 성막 안을 환하게 밝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밝혀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위해 자기 생명을 드리심으로 이 세상을 억압하고 있던 죄악의 어두음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구원의 참된 소망의 빛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흑암의 세력도 그 빛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빛은 지금도 죄로 어두워져 있는 모든 인류를 향해 찬란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이 빛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 빛은 그 안에 찾아 들어가서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고 소망 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죄의 어둠 속에 거하며 인생에 대한 절망과 신음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은 흑암에서 광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4. 등대의 기름
등대는 아침저녁으로 감람유를 공급해 주어야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감람유 없이는 절대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기름이 없는 등대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등대가 성소 안을 밝히기 위해 기름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교회와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한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목격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조그마한 계집 아이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나머지 모든 제자들도 각기 자기들의 갈 길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수없이 말씀하셨던 것들이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계집 아이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산천초목도 떤다는 공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은 그들 모두를 변화시켰고 그들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되게 하였습니다. 사실 로마를 복음화 시켰을 뿐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한 것은 모두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이 시대에 빛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가 자력으로 아무리 복음의 빛을 비추려고 노력해도 성령의 능력으로 아니 하고는 결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말과 전도가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였으며, 또한 베드로 사도는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도움을 힘입을 때만 우리가 세상의 빛 된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촬스 피니는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6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1)위선적인 생활 2)경박한 생활 3)교만 4)탐욕 5)회개가 없는 생활 6)의무를 소홀히 하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요소들을 제거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 빛 된 생활을 하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등대의 관리
출 27:20-21에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 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고 했습니다. 등대의 불은 밤낮 계속 켜져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밤이니까 물론이지만 낮에도 성막 안은 등대가 없으면 빛 한 점 없이 캄캄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등대는 계속해서 빛을 발해야만 했습니다.
등대의 불이 늘 꺼지지 않도록 간검해야 했듯이, 빛된 생활을 하려면 늘 내 안에 불이 꺼져 있지 아니한가? 간검해야 합니다. 내 속에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았는가? 버리지 못한 죄는 없는가? 헌신의 불이 희미해지지 않았는가? 구령의 열정이 식어지지 않았는가? 알고도 이끌려 가는 죄는 없는가? 에베소 교회처럼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버가모 교회처럼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에 따르고 있지는 아니한가? 서머나 교회처럼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가? 두아디라 교회처럼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고도 회개에 무뎌지지는 않았는가? 사데 교회처럼 죽은 믿음을 그대로 두고 있지는 않는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이같이 우리의 믿음의 불을 늘 간검해야만 빛 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6. 등대의 상징
성소 안의 등대는 또한 성도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심은 세상의 어두움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둡다니요? 전기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밤이면 도회지의 거리는 네온싸인으로 휘황찬란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둡다니요? 지식이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어둡습니다. 왜 세상이 이처럼 어둡습니까? 고후 4:4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신 곧 마귀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 때문에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주님은 그 자신이 빛이셨습니다. 요 1:9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빛이 누구입니까? 요 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빛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영광스러운 반사체가 되는 것입니다.
엡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 여러분에게 이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있습니까? 아프리카에 간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거룩한 선교의 사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그 선교사님의 비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이 곳에 올 때에는 어두움이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한 자루의 촛불이 방안의 어두움을 밝히듯, 한 사람의 참된 신자가 복음의 빛을 발할 때 어두운 미신이 물러가고, 어두운 풍속, 어두운 사상, 어두운 습관, 어두운 생활이 점점 더 밝아집니다.
시골에서 예수 믿는 처녀가 버스 통학을 하다가 안 믿는 총각과 눈이 맞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뜻 맞추고 살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에 간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교회도 못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좋아서 결혼했지만 남편 된 사람도 부인을 구박하고, 술 먹고 오면 때리고, 시어머니는 남들 다 잘 낳는 아들도 못 낳고 딸만 낳는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제가 떠나야겠습니다. 이렇게 구박받느니 떠나야겠는데 친정으로는 못 가겠고 서울로 가야겠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떠난다는 것입니까?” “아이들은 할머니가 기르겠죠.” “서울에 가서 뭘 하시려고요.”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신학교를 다녀서 전도사를 하렵니다.” “여기에서도 못 사는 사람을 누가 전도사로 오라고 한답니까? 당신이 여기에서 소금처럼 녹아지시오. 완전히 녹아져서 이 가문에 맛을 내고 그때 나에게 와서 서울로 간다고 하면 내가 장학금을 주겠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고 했으니, 여기에서 완전히 죽었다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오. 그리고 나를 만나러 오시오.” 그 말을 듣고 그 여성도는 새벽마다 나와 기도하면서 자기 존재를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때리면 맞고, 시어머니가 뭐라고 구박하면 “어머니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하고 울면서 웃으면서 자기는 죽었다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1년 동안 그렇게 사니까 시어머니가 그리스도에게 갈증을 느껴서 교회에 나왔고, 나중에는 시아버지와 남편까지도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어두움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과 찬송이 돌려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세상의 빛이시고 참빛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