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년간 감추어진 營州와 平州 위치를 밝히며
원문1] 營平二州地名記 廣都 : 魏書 太平真君八年 併白狼建德望平属焉 有紫金城。(주1)
해석] 영평이주지명기 광도현
위서에 태평진군8년(447년) 백랑 건덕 망평을 아울려 속하게 한다. 자금성이 있다.
원문2] 皇明職方地圖 陜西地圖 平州 (자료2 참조)
원문3] 大明一統志 卷34 凤翔府 古蹟 長安城 : 在府城西北九里 漢惠帝所築在天興縣 金改天興爲鳳翔縣
해석] 대명일통지 권34 봉상부 고적 장안성
부성 서북 9리에 있다. 한 혜제가 성을 쌓았다. 천흥현에 있다. 금나라가 천흥을 바꾸어 봉상현이 되었다.
원문4] 聖朝混一方輿勝覽 安西路 景致 駐蹕山 : 東京之東唐太宗駐蹕之所
해석] 성조혼일방여승람 안서로 경치 주필산
동경의 동쪽(당태종이 주필한 곳)
원문5] 鳳翔縣志 古蹟 古城 : 城西二里相傳亦秦時所策遺址存
해석] 봉상현지 고적 고성
성 서쪽 2리, 전하는 바에 진나라 시절 성을 쌓았고 유지가 존재한다.
원문6] 皇明職方地圖 陜西地圖 卽文王遷豐處
해석] 황명직방지도 섬서지도
주나라 문왕이 풍으로 옮긴 곳이다.
원문7] 六經圖 十五國風地理之圖 東周 :今長安縣昆明池地
해석] 육경도 십오국풍지리지도
동주(낙양) 지금(1165년)의 장안현 곤명지땅이다.
원문8] 欽定大清一統志 燕原 : 在寧州東北六十里襄樂鎮 後魏置燕州于此
甘肅通志 山川 慶陽府 寧州 燕原 : 在州東北六十里襄樂鎮 後燕太子丹為質於此故名 後魏置燕州於此
해석] 흠정대청일통지 연원
영주 동북 60리 양락진에 있다. 후위는 연주를 설치하였고 여기이다.
감숙통지 산천 경양부 영주 연원
영주의 동북 60리 양락진에 있다. 연나라 태자 단이 이 곳에서 인질이 된 연유로 이름이 되었다.
후위는 이 곳에 연주를 설치했다.
원문9] 大明一統志 卷36 慶陽府 古蹟 : 陽周城
在真寧縣北三十五里 秦末陳餘與章邯書曰蒙恬爲秦將北逐匈奴開榆中地數千里 竟斬陽周即此
해석] 대명일통지 권36 경양부 고적 양주성
진령현 북 35리에 있다. 진나라 말 장한이 진여에게 서찰로 말하길 몽염이 진나라 장군이 되어
북으로 흉노를 내쫓고 유중의 수천리를 개척하였다. 끝내 양주 즉 여기에서 죽임을 당했다.
원문10] 漢書地理志 真定國 武帝元鼎四年置 屬冀州
綿曼 斯洨水 首受太白渠 東至鄡入河
해석] 한서지리지 진정국 : 무제가 원정4년(기원전 114년)에 설치했다. 기주에 속한다.
면만현 : 사효수가 먼저 태백거의 물을 받아 동쪽으로 교에 이르러 하로 들어간다.
(주1) 상기 원문1] 내용은 위서지형지 남영주와 영주에 속한 군현명칭이 동일하여 심히 의심스러운 바
營平二州地名記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며 위서에는 금자성으로 되어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사서가 송나라 간행에 원말명초와 가정 만력 등 300여년 동안 수보를 거듭하여
수정을 한 三朝本으로써 어떻게 보간(補刊)을 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 삼조본을 확인한 바
영주 건덕군 광도현은 가정8년(1529년) 補刊本에 금자성이라 쓰여 있고
남영주 건덕군 광도현은 이전판본에 흥화(539년~542년)중에 설치했다(興和中置)고만 쓰여 있다.
이는 위서지형지에 지명이동을 위한 교치수법이 보이므로 지명을 감추려 했다고 보이는 바
이미 당시부터 금자성일 것이며 금나라가 자금성으로 개명을 하지 않았나 추정할 뿐이다.
또한 진군8년(447년)부터 흥화(539년~542년)기간 사이에
백제가 요서를 점유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견]
자료를 종합하면
營州와 平州는 섬서성 포성현과 백수현 일대가 된다.
이는 고구려 존속시대이며 9세기 원화군현지가 나온 이후에는
하북성 보정시쪽으로 지명이 이동되며 통전으로 이를 고착시키었다.
명나라는 현 북경시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포성현 주변으로 永平 北昌平 安平 廣陽 高陽 常樂 遼斜 富平 三合 松山 등 고찰할 만한 지명이 보인다.
또한 안시성을 연상하게 하는 토산촌에 무너진 土山이 존재하며 북낙수 하류에 安市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제 역사를 전공하는 전문가들이 우리의 참역사를 밝혀 후손에게 넘겨주길 바랄 뿐이다.
平州와 문왕천풍처(文王遷豐處) 위치는 1636년 황명직방지도의 화질이 안좋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는
다른 본으로 대체하며 내용은 동일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보아라...大明一統志 卷34 鳳翔府 古蹟을...長安城이 나온다....
봉상현은 감추어져 있다가 757년 岐州의 등장 이후 나타난 지역이다.
장안성과 함양성은 지근이기에 봉상현지 고적 古城이 진시황의 함양으로 추정된다.(주1)
이는 史記에 진시황이 여산(酈山,驪山)에 안장되었고 십오국풍지리지도탁편(十五國風地理之圖拓片)에
봉상부 동북에 여산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東周 즉 낙양은 1165년 六經圖의 十五國風地理之圖에 당시 장안현이었던 서안이 낙양이라고 말한다.
또한 중국 전역을 통치한 원나라가 섬서성 안서로 지역에 당태종이 주필한 주필산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1) 옹주(雍州)에 속한 장안성과 함양성은 周 문왕의 풍(豐)지역과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봉상부는 禹貢의 冀州지역이다.(주2)
이런 연유로 감숙성 천수시 또는 예현에 주문왕의 豐지역이 있다고 황명직방지도 섬서지도에 기록되어 있으니
천수시(천흥현)가 秦함양이요 漢장안이 되고 漢혜제 때 천도한 장안이 봉상현이라 판단됩니다.
이는 자치통감강목에 한무제 때 장안 서남쪽 곤명지(昆明池)의 둘레가 40리라고 한 점을 미루어 고찰하면
봉상현 서남쪽 보계시에 있는 왕가애수고(王家崖水库)가 곤명지의 크기와 일치한다는 점이며
낙양은 현 서안시 곤명지(둘레 20리정도) 근처라는 견해입니다.
봉상현의 고성이 함양성이라 한 점은 중국 기록에 근거를 둔 까닭이며 함양성과 장안성의 건치연혁이
천흥현(천수시)에서 봉상현으로 지명이동되지 않았나 하는 의혹으로 연구가치가 있어 기록한 것입니다.
천흥현(천수시)이 장안이 되고 보계시 곤명지 추정지역이 낙양이 될 경우 현 서안시가 공지(空地)가 됩니다.
이것은 서안시의 피라미드와 상투를 틀고 있는 진시황의 병마용갱(兵馬俑坑)과 관련이 되어 있기에
이를 깊이 상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참조] 한번의 장안성 이동은 구당서에 나옵니다.
京師 秦之咸陽 漢之長安也。隋開皇二年,自漢長安故城東南移二十里置新都,今京師是也。
(경사 秦함양이요 漢장안이다.
개황2년(582년) 漢장안 옛 성으로부터 동남으로 20리 옮겨 새로운 도읍을 설치했다. 지금 경사가 이것이다.)
(주2) 禹貢의 冀州는 통상 산서성 서남지역이다.
기주의 치수 순서는 壺口→梁山→岐山→太原→岳陽→覃懷→衡漳→恒水‧衛水→大陸이며
섬서성 봉상현과 기산현 주위에도 동일지명이 존재한다.
호구는 북송시기의 장안지 안서로주현도에 나오며 양산과 기산은 북쪽에 존재한다.
태원은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에 진원현 부근을 太原이라 고증했는데
鎭原縣志에 진원현이 大原이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악양은 기산의 서쪽에 있는 吳山 일명 嶽山의 남쪽으로 자연스러운 이동경로이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담회로 추정되는 수고(水庫)가 존재한다.
또한 담회의 지적(厎績)은 깊고 넓게 파여 물이 모인 형태로써 섬서성 지형의 특징이며
이를 하수로 연결하여 홍수예방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산서성을 대표하는 안읍성과 평요라는 지명이 기산현 주변으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산서성 진중시 수양현 서북에 위치했다는 북제(北齊, 550년 ~ 577년)시 燕州가
감숙성 경양시 湘樂鎭 근처에서 이동된 지명이다.
상락진은 한나라 양락현으로 연나라 태자 丹이 인질로 있던 곳이기에 燕原이라 하여 연주라 하였다.
또한 장안지 경거총도에 표시된 태백거가 있는 지역이 한서지리지가 말하는 진정국 지역이 된다.
참조] 영주와 평주를 고증함에 秦長城 동단은 매우 중요하며 陽周의 위치는 이를 밝히는 중요한 지명이다.
몽염이 죽은 陽周는 감숙성 경양시 유림자진(榆林子鎭) 부근이고 동남쪽에 부소태자의 묘유지가 있다.
(부소태자는 영주(寧州) 서쪽 15리에서 자결을 했으며 비가 있다.)
燕州와 陽周를 이동시킨만큼 모든 지명은 함께 이동했다
당부의 글]
최근 다양한 연구결과를 보며 이제는 힘을 한 곳으로 모아 우리 역사를 밝혀야 한다고 본다.
이에 그동안 조사했던 자료를 공개하여 조금이나마 많은 이들이 우리 역사 복원을 앞당길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 위해 글을 쓴 것이며 이를 계기로 올바른 역사 정립이 되길 기원하는 바이다.
자료1] 섬서성 포성현지(1993년) 포성현 성관진에 자금성이 있다.
자료2] 평주와 豐 위치 ( 1636년 皇明職方地圖 陜西地圖 )
자료3] 장안성 위치 (1461년 大明一統志 卷34 鳳翔府 古蹟 )
자료4] 주필산 위치( 元代 聖朝混一方輿勝覽 명나라 간행본)
자료5] 함양 추정지(1766년 鳳翔縣志)
자료6] 진시황무덤 추정지 驪山( 元代 十五國風地理之圖拓片)
자료7] 동주 낙양(1165년 六經圖 十五國風地理之圖)
자료8] 연주 위치(1736년 甘肅通志 山川 慶陽府 寧州 燕原 )
자료9] 양주 위치(1461년 大明一統志 卷36 慶陽府 古蹟 陽周城 )
자료10] 우공 치수 壺口 위치(北宋 長安志 安西路州縣圖 )
자료11] 진정국 위치 太白渠( 北宋 長安志 涇渠總圖 )
첫댓글 안녕하세요. "탐구자"님!
우선 좋은 글과 좋은 자료를 남겨 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조선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시는 것을 보면, 그게 기쁨입니다.
우선 '중국지방지' 간자체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이건 근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주의 위치 ( 1663년 皇明職方地圖 陜西地圖 )" 역시, 그것이 정말 1663년도에 제작되었던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군요.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주" 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대명일통지를 보실까요.
1) 봉상부편을 보면, 장안성은 부성 서북 9리에 있는 성으로 한 혜제때에 축조되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在府城西北九里漢惠帝所築在天興縣金改天興為鳳翔縣〉
2) 또 하나는 오늘날의 신강성 구자에도 당시에 장안성과 똑같은 성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3) 또 대명일통지 봉상부 내의 중요한 것은[물론 개인적으로 관심이 다르겠지만] "郁夷城〈在隴州西五十里大寧關側近汧水源漢為縣東漢省晉於此置隴關縣〉"이 중요한 자료라고 봅니다. 즉 郁夷는 구이(九夷)의 하나로, 고대 동이조선을 이루고 있던 핵심 9세력중의 하나입니다.
3) 또 하나는 "롱주"입니다. "롱주"는 중앙아세아에도 존재합니다.
영주와 평주에서,
"영주는 호(胡)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호(胡)"가 조선을 뜻하는 것인지, 안록산도 영주 호(胡) 또는 유성 호(胡)라고 합니다.
胡는 되놈을 말한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합니다만......
봉상현조의 "고성"부분을 표시하셨는데......"고성이 성 서쪽 2리에 있는데 상전(相傳)해 오기로 진(秦)때에 소축된 것이 상존한다" 하였는데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장안성'을 뜻하는 것인지.......
안서로의 당 태종 주필산은,
'주필산'에서 : '주필(駐蹕)'이란, 황제나 왕이 순회(순행)할 때 머무르고 있던 곳을 말하는 바, 여기 저기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東京之東唐太宗駐蹕之所]
이렇게 고전원문을 보면서 연구를 하시는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결과를 얻으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지금 상황은 고구려와 백제 멸망후 일어난 일들이며
장안성이 이동하였다는 것을 말함입니다.
현재 나타난 자료로는 감숙성 천수시 근처이며 문무님이 말씀하시는 곳에서 이동할 수도 있다는 전제입니다.
자료를 종합하면 현 서안시가 공지가 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이는 이 곳이 우리의 왕험성일 확률이 있다는 점입니다.
서안시의 피라미드와 진시황릉도 우리의 유적일 확률이 높게죠...
모든 근원적 문제의 해결은 진장성이 말해 줄 것 입니다.
어제 급하게 쓰다보니 오타가 있어 정정했습니다.
皇明職方地圖는 1636년이며 섬서성에 평주라는 지명은 쓸 수 없습니다.
역대 어느 왕조에도 정사에는 없습니다. 이는 명나라 말기라 몰래 쓴 것이라 보여집니다.
원본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고화질로 받으면 32개정도 나누어야 하기에 대체한 것입니다.
또한 역대 포성현지에는 자금성 기록이 없습니다.
금나라 유적이라면 기록되어야 하는데 이는 근대에 모르고 올렸다고 보시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여기가 자금성이 맞다는 이유는 주변 지명이 한자씩 다르며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공의 치수와 진장성의 위치를 아시면 평주와 영주가 섬서성 동북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탐구자 음산과 양산은 섬서성 경양시에 존재합니다..
몽염장군이 죽은 양주 역시 현조님이 쓰셨던 나천 위에 榆林子镇이며 좌우에 두 산이 있습니다.
양산 동북쪽에 저수가 있으며 저양성도 이 근처이겠죠.
진장성 유지를 종합하면 섬서 부현에서 낙수를 따라 진장성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부현 이상 안올라 갑니다....이 밑이 의군 동관 백수 포성현입니다....
너무도 유명한 맹강녀의 고향이 동관이며 의군현 근처가 맹강녀고사의 실제지역입니다.
그리고 우공의 기주에 해당하는
호구 양산 기산 태원(즉 대원) 악양 이 모든 것이 봉상현과 기산현 주위에 있습니다.
담회는 이 곳 지형을 아시면 이해가 되실 것이며...나머지는 추후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또한 이곳에 안읍성과 평요라는 지명이 존재합니다.
우연이 많으면 필연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정보와
좋은 글 내용, 감사를 드립니다.
"음산 또는 양산"이라는 산의 이름은 분명 존재합니다만 실제 그곳에 옛 역사서에서 말하는 그대로의 산(山)이 실재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실제 "음산은 역사서에 많이 등장하지만 실제 음산이라는 산이 그곳에 있는가? 양산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양산은 오늘날의 양산산맥(지도에 따라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음) 가운데 어딘가에 있을 것 같고(대청산이라고 표기한 지도가 있음), 음산은 황하 북안에 있다고 하지만 실제 고사와 연결되는 산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이곳에 정말 산맥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도마다 그 이름이 다르게 표기되고 있습니다.
지형도를 보면 대청산(토묵특 북쪽 : 2327m), 그 서쪽에 오랍산(2322m)등이 있고, 그 외 이름도 불분명한 산들이 표기되어 있지만 어디에도 '음산'이나 '양산'이라는 산의 이름은 없습니다. 간혹 어떤 지도에는 "양산"이 황하 동북방 내몽고 땅에 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실제 이곳에 "음산 또는 양산"등과 관계되는 옛 고사는 없었으며, 또한 이들 산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 그 유명한 "진(秦)의 만리장성"이 오늘날 관광명소로 이름 높은 "만리장성인가?" 하는 것에는 회의적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소위 만리장성은 '조선의 만리장성이다'라고 봅니다.
진(秦)나라는 중원대륙 땅에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유명한 '도용갱'은 '조선의 것'을 '차용한 것 뿐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출토된 수많은 도용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가 조선족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시황제의 무덤!
이게 발견되어 확실한 근거를 찾는다면........? 그러나 이건 꿈과 같은 이야기로, 대륙의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통제되는 사회란 것을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깁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공개적으로 유물유적을 발굴하는 예가 없습니다. 모두가 "극비"취급을 받는 바, 이건 "조선"의 모든 것들을 숨기기 위한 방책이라고 봅니다.
또 대륙에서의 조선족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셨는데,
19세기 말,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하유역과 강이북 지역의 곳곳에 조선족들이 실재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감숙성 동부, 섬서성, 산서성, 호북 북방지대,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 안휘성 등지에 집중적으로 있었으나 신해혁명이후 모든 것은 한족이라는 실체도 없는 종족의 이름으로 바뀌기 시작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전해집니다.
예를 들면, 백제에 대해서,
백제는 택국(澤國)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나라 땅안에 호수와 늪지대가 펼쳐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반도 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형지세입니다. 양서에서도 백제는 강좌(江左)에 걸터앉아 있었다고 하니, 당연히 택국이라고 할만하며, 남국(南國)이라고 할만합니다.
이러한 예를 보듯이 반도 땅에서 "조선"의 연관성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 것입니다.
조선사가 광법위한 만큼, 많은 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하시는 것은 정말 좋은 현상이다라고 봅니다.
"탐구자"님께서 연구하시는 분야에서도 근거나 논거, 증거,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발견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많은 기대를 갖고 싶습니다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