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96주기 추도식 및 워크숍
이름도 생소한 가네코 후미코ㅡ그녀는 과연 어떤 여인인가?
박열(朴烈,1902~1974)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는, 1923년부터 1926년 무렵까지, 일본과 조선 전역을 떠들썩 하게 한 뉴스메이커였다고 한다.
2022년 7월 23일,가네코 후미코 추도식을 참여하기 위해, 새벽 5시 천안을 출발하여 양재 시민의 숲으로 달렸다.
양재 시민의 숲 역에 집결한 40여명의 우리 일행은 8시경 출발하여, 목적지 문경(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박열의사 기념공원에 도착한 것은 10시 반경이었다.
추도 행사는 10시 30분에 시작되었기에,도착 즉시 추도행사부터 참예하였다.
행사 진행은 사회자의 개회선언과 국민의례,내빈소개가 있은 다음,추도사와 헌화 분향 및 헌작으로 이어졌으며,추도식이 끝난 다음에는 기념관 잔듸광장에서 오찬회가 열렸다.
오찬회를 마친 국민문화연구소(총괄 담당/바우 손병주)팀은, 공원 주변과 기념관 전시장을 돌아보며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흔적들을 두루 살펴 보았다.
기념공원 안에는 박열 의사의 생가터가 있고, 그 뒷편으론 우뚝솟은 봉우리에 열의정이란 작은 정자가 있어, 운치가 있는 풍광이 돋보였고,시원하게 탁트인 전경도 아주 괜찮은 명소처럼 느껴졌다.
동산의 열의정 좌편으론 가네코 후미코 묘소가 있었고,그 뒷켠으론 박열 의사 추모비와 박열 의사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 전시관안에는, 박열 의사에 관한 여러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얻을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탄생에서 부터 성장과정,그리고 유학과 가네코 후미코와 만남의 인연들이 나오고,열정적 반일 투쟁은 특히 돋보이는 장면들이라 할수 있다.
박열 의사와 가네코후미코 여사가, 보다 세인의 주목을 끌게된 것은, 영화 '박열(감독/이준익)'이 나오고 부터라고 한다.
전시관 관람을 마친 후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연구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워크숍이 열렸는데,약 2시간 반에 걸쳐 진지한 연구 발표와 열띈 토론이 전개되었다.
특히 청중 가운데서도 날카로운 질문도 나와, 워크숍의 뜨거운 분위기를 실감케 했다.
가장 궁금한 내용은, 박열은 왜 아키니스트가 되었는가 하는 점과, 박열이 북으로 간 것이 과연 납북이었나,아니면 혹시 월북이었나 하는 점이라 생각되어졌다.
워크숍을 마치고서 귀로에 올라,문경 종합 온천내에 있는 '문경 진 추어탕'집에 들려 한우 불고기로 저녁까지 먹은 다음, 5시가 넘은 시각에야 귀가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문경에는 문경새재를 위시한 높은 산들이 에워싸인 고장인데,들녘에는 푸른 농작물들이 보기좋게 펼쳐졌고,사과가 탱글탱글 영글어 가는 모습이 무척 탐스럽기만 하였다.
귀로에 약간의 비가 내리는가 싶었지만,집에 도착할 때 까지는 애써 꾹꾹 참아 주었다가, 신기하게도 집에 막 도착하고 나니 억수같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때는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사회자
국민의례
가내코 후미코 여사 약력소개/박열 의사 기념관 운영위원장
추도사/문경 시장
추도사/문경 시의회 의장
추도사/ 문경 지방법원 지청장
헌화 분향 및 헌작
박열 의사 기념관
박 열 의사 추모비
가내코 후미코는 누구인가?
가내코 후미코는 1903년 요코하마시에서 시에키 분이지와 가네코 기쿠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미코가 태어났을때 두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다.
때문에 후미코는 아버지의 호적에 오르지도 못했고,어머니는 아버지의 폭행과 바람기를 견디지 못하여 후미코를 데리고 가출해 여러 남자와 동거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여덟살때 어머니가 재가하여 당시 충북 청주에 살던 고모 내외의 양녀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외할아버지 가네코 도미타로가 호적을 만들어 양녀로 보내야 한다며 자신의 다섯째 딸로 입적시켜 가네코라는 성을 얻게 되었다.
조선에서의 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다.
그녀는 가족이 아닌 하녀로 취급받는 학대를 당했다.
급기야 1819년 파양되어 일본으로 돌려 보내졌다.
조선에서 보낸 7여년 간은 지옥같았으나, 그녀가 천황제를 부정하고 제국주의 타도에 기치를 드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조선인 머슴을 학대하는 고모와 할머니에게 증오심을 불태웠고,일본순사에게 매를 맞는 조선인을 자신과 동일시 했다.
특히 일본으로 귀국하기전 일어난 3.1운동을 목도하며 조선인의 의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때 자살 시도까지 하면서도 언젠가는 유명한 여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며 버텨냈다고 한다.
일본으로 돌아온 가네코는 여전히 정붙일 곳이 없었으며,어머니는 여전히 재혼을 반복하고 있었고,아버지는 외가의 돈을 노리고 가네코를 작은 외삼촌 모토이에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가네코는 모토이에의 집에서 신부수업을 받으며 여자 기술학교 재봉과에서 공부했으나 얼마후 세가와 히로시라는 청년과의 연애사건으로 파혼을 당했다.
부모와 일가 친척에게 휘둘리기만 하던 그녀는 언젠가 여자의전에 진학하여 소외당한 자신의 처지를 보상받겠다결심했다.
그리하여 도쿄로 올라와 신문가게에서 기숙하며 신문팔이를 하면서 세이소쿠 영어학교와 연수학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녀는 노점상,가정부,인쇄소 직공등으로 일하며 고학을 계속했다.
당시 도쿄에는 조선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다.
1920년 12월 일본 사회주의동맹이 결성되었디.
여기에는 조선 유학생도 상당수 가입되어 있었다.얼마후 박열과 원종린,정우영등의 주도로 조선인 사회주의 동맹 흑도회가 결성되었는데,길거리에서 신문행상을 하던 가네코는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학대받는 민중을 위해 사회변혁을 추구한다는 사회주의에 깊히 심취하게 된다.
가네코는 원종린을 소개받으면서 조선인 사회주의자 학생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1922년 후미코는 <청년조선>의 교정인쇄를 받아 보았는데,여기에 실린 박열의 <개세끼>라는 시를 보고 매료되었다.
가네코 후미코, 그 녀는 어떻게 박열을 만나게 되었는가?
기이하게도 후미코를 반하게 했던건, "개세끼"라는 청년 박열의 시였다고 한다.
개 세끼/박열
나는 개세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 없는 나는
개세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세끼로소이다
1923년 9월1일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다.
일제는 이 일이 조선인과 사회주의에 의한 소행이라며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이들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일본 사회주의 대부 오스기 사카에 부부가 총살되고 조선인 6000여명이 학살당했다.
이과정에서 가네코와 박열은 보호검속이라는 명목으로 구류되었다가 폭발물 단속법위반으로 천황 암살을 모의한 대역죄를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네코는 일본인 여성이기에 재판에서 전향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잣ㅣㄴ은 천황을 부정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그에 따라 행동했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박열은 재판당시 가네코와 불령사회원들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했으나,이 역시 가네코가 가담사실을 진술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재판정에서 가네코는 박열 혼자 사형을 받게 할수는 없다며 자신도 함께 죽게 해달라고 말했다.
가네코는 박열의 사형을 염두에 두고 시신을 합법적으로 인수받기 위해 혼인신고를 했다.그리고 옥중에서 자신의 짧은 생을 반추하며 옥중수기를 썼다.
1926년 3월 25일 박열과 가네코는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얼마후 감형되었다.
박열이 사형을 받으리라 생각한 가네코는 은사를 거부하고 1826년 7월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을 매 자결하여 스물셋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