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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박사모 -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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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비판/건의/안티) 스크랩 조정산 전기
太師公의 後孫 추천 0 조회 304 09.08.30 04: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정산 전기

 

伏告文 

維歲次 道紀八十四年 壬申 三月 己酉朔 初六日 甲寅 太極道 道門小子 都典 宋在賢 伏告于 九天 玉皇 兩位上帝 至神至聖 至靈之下 伏維玉皇上帝 下降于我東邦 趙氏之門 御諱哲濟 尊號鼎山 靈則在天 身則在人 十五之歲  奉戴天命 渡江而西 定眞主之數 丁巳得道 帶洛書之運 奉率東歸 完備三天 繼天立極 開創太極之大道 設施匡救三界之眞法 實是 五十年間 工夫終畢之結晶 億兆生靈 修工尊行之法方 雖然其間 聖蹟訓敎 只錄太極眞經一編未能弘報世間 惟恐惟惶之際 幸蒙加護 僅編出版 ?太極道主 趙鼎山傳記 (資料編)?奉呈于靈前 雖畏不及德化之片鱗 以此布斯界 使萬人 耽讀之後 感服優渥之鴻恩 期達乎 龍華仙境建設萬一之功 道門小子 無上德化 伏願聖靈 下鑑垂察

 

일러두기 

1. 이 책자는 조정산 도주님께서 재세(在世)하셨던 64년간의 성적(聖蹟)과 훈교의 자료를 편년체(編年體)로 편술한 것이다. 따라서 그중에 비록 우리로서는 감히 해득할 수 없는 자료라도 근거가 확실하면 그대로 수록하고 확실하지 않은 것은 제외하였다.

2. 이 책의 내용은 어떠한 창작이나 논술이 아니고 순수한 전기(傳記)이며 그것도 ‘자료편’에 불과하므로 ‘서문’이나 ‘축간사’ 등을 생략하고 책머리에 ‘복고문’과 ‘일러두기’만을 싣기로 하였다.

3. 모든 경칭과 경어는 문체의 간편을 위하여 가급적 생략함을 원칙으로 하되 다만 도주님에 대해서는 도주취임 이전에는 ‘정산’, 이후에는 ‘도주님’으로 봉칭하였다.

4. 연호는 재세시의 전통에 따라 60간지를 사용하고 현재 일반사회에서 통용하는 서기 연호를 편의상 괄호안에 병기하여 참고가 되게 하였으며 월일은 음력, 시간은 1일 12시(자 축 인 묘......술 해시)제도를 사용하였다.

5. 성지·유적지의 사진은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수록함을 원칙으로 하되 과거의 사진은 참고로 수록하고 간단한 설명을 붙였다. 다만 도주님의 진영(眞影)과 영대 내부는 도중의 전통을 존중하여 수록하지 않았다.

6. 도주님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편의를 위하여 권말에 ‘조성산 연보’를 부록으로 추가하고 이 책자의 미흡했던 점을 보완한 전기가 하루 속히 속간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도기 84(1992) 년 임신 옥황절에

                 편저자識

 

 

목   차

자고산의 제좌(紫皐山의 帝座) 11

태극주의 인세현화(太極主의 人世現化) 19

봉천명과 득도(奉天命과 得道) 25

환국과 3천완비(還國과 三天完備) 34

무극대도 창립(无極大道 創立) 49

잠룡·회룡도수(潛龍·廻龍 度數) 68

태극진법의 태동(太極眞法의 胎動) 77

회룡·현룡도수(廻龍·見龍度數) 85

입금산 도수(入金山 度數) 91

도인집단도수(道人集團度數) 98

황극신·대신문도수(皇極神·大神門度數) 107

범질의 도수(范質의 度數) 118

도강이서 도수(渡江而西 度數) 125

보화성역 감천(普化聖域 甘川) 131

도단체제 확립(道團體制 確立) 140

태극의 핵점 새서울(太極의 核點 새서울) 151

3천지반 도수(三千之班 度數) 164

즉차대강의 성전(卽此大降의 聖殿) 174

백의군왕 도수(白衣君王 度數) 187

옥황상제의 자기계현(玉皇上帝의 自己啓現) 196

진법공부 설법(眞法工夫 設法). 203

50년공부의 결정(五十年工夫의 結晶) 216

공부종필과 화천(工夫終畢과 化天) 230

부록(附錄)조정산 연보(趙鼎山 年譜) 243

 

 

 

 

 

 

 

 

紫皐山의 帝座

이 나라 겨레의 조국(肇國)사화 속에 영기(靈氣)를 떨치며 우뚝 솟은 백두(白頭)의 감뫼<神山>가 장백(長白)의 산맥을 이루어 남으로 태평양을 향해 내려오다가 태백(太白)산맥으로 이어지면서 동진(東震)의 나라 한(韓)반도를 일기관통(一氣貫通)하고 있는 곳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다.

태백산맥이 반도의 척주(脊柱)를 이루며 남으로 부산을 향하여 뻗다가 오른쪽으로 한강을 낀 서울을 이루고 다시 소백산맥의 죽령, 추풍령을 넘어 서라벌과 달구벌을 이룬 다음 낙동강(洛東江)을 끼고 내려와서 비자화(比自火) 곧 오늘의 창녕(昌寧)과 서화(西火)로 불리우던 영산(靈山)의 고을들을 펼친다.

이 영산의 낙강(洛江) 건너에, 저 소백산맥이 지리산과 남해안으로 우회하여 함안(咸安 : 우주 삼계(三界)가 모두 평안)에 이르러 여항(艅航), 광려(匡廬)의 산군(山群)으로 이어진 자고산(紫皐山)이 솟았고 그 아래 천계(天界), 무릉(武陵)의 마을을 이웃한 회문리(會文里)가 있으니 여기가 바로 이 전기의 주인공이신 태극도주(太極道主) 조정산(趙鼎山)께서 태극주(太極主)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도화인신(道化人身 : 도가 사람의 몸으로 화함)으로 강세(降世)하신 곳이다.

이 회문(會文)이란 글자 그대로 후천(後天)의 문명(文命 : 상제가 문덕(文德)으로 내린 명령)을 여기에 총회(總會 : 모두 모임)시켰다는 뜻이다.

이 후천문명의 총회처(總會處)가 되는 회문리의 지세(地勢)를 살펴보면, 그 조산(祖山)은 여항산이며 주산(主山)은 자고산이고 안산(案山)은 작대산(爵隊山, 또는 爵大山)이며 좌청룡(左靑龍)은 안국산(安國山), 대곤산(大山)이고 우백호(右白虎)는 광려산(匡廬山), 무학산(舞鶴山), 천주산(天柱山)으로서 모두 이름 그대로의 명산(名山), 영산(靈山)들이 회문리로 모여드는 형상을 이루어 에워싸고 있으며 회문리 자체는 봉소형(鳳巢形 : 봉황새 둥지 형상)을 이루고 있다.

더구나 그 중에서 주산인 자고산은 그 이름만 보아도 이곳이 과연 후천문명을 주재(主宰)하실 상제님의 어좌(御座), 옥좌(玉座)인 천장길방(天藏吉方) 도수(度數)로 점지된 곳임을 넉넉히 알 수 있다.중국의 사서(史書) 위지(魏志 郭后傳注)에 보면 ‘용이 자극(紫極)에 날아 황제와 어울린다<龍飛紫極 作合聖皇>’고 하여 황제의 자리 <皇帝座>를 ‘자극’이라 했고, 진서(晉書 天文志)에는 ‘자미(紫微)’라는 별을 ‘상제의 자리, 상제가 거처하는 곳<天帝之座 天帝之常居也>’이라고 했으며, 예기(禮記)에는 황궁(皇宮)의 가장 높고 커서 으뜸되는 문을 ‘고문(皐門)’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자고’는 결국 황제 또는 상제의 자리 곧 ‘제좌(帝座)’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제좌를 이 동토(東土)에 마련해 놓고 그  참 주인<眞主>의 강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이 자고산 아래의 회문리를 행정구역으로 알아보면, 정산께서 강세하실 당시에는 경상도 칠원현 서면 회문리(漆原縣 西面 會文里)였으나 현재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咸安郡 漆西面 會山里 : 이 회산리는 그 이웃의 신산리(新山里)와 합쳐진 이름으로서 회문리와 같은 뜻을 지님, 즉 人山=仙=白 : 甑山+鼎山=兩山=會山)로 되어있다.

칠원은 신라의 옛고을로 초기에는 칠토현(漆吐縣)이었는데 말기에는 칠제(漆堤)로 고쳐졌으며 고려때 칠원(漆原一漆園)으로 바뀌었고 한말에 군(郡)으로 승격했다가 후에 함안군의 3개 면(面)으로 병합되었다 (이 칠원, 칠서, 칠북 3개 면을 3칠(三漆)이라고 통칭한다).함안군은 원래 6가야(伽倻)의 하나로 아라가야(阿羅伽倻), 또는 아시량(阿尸良)국으로 불리우다가 신라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진 큰 고을이다.

이곳에 통칭 ‘조·리·안(趙李安)’이라고 하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순흥안씨(順興安氏)의 3대성(三大姓)이 있는데 그 가운데도 함안조씨를 첫손으로 꼽고 있다.인격으로는 이 조씨 가문 한 문벌의 종손이지만 신격으로는 옥황상제로 봉대되시는 정산의 탄생은 이러한 지리적, 가계(家)적으로 선택된 당위성(當爲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넉넉히 알 수 있으며, 또한 보국위민(輔國爲民)하던 가통(家統)을 보아서 태극도와 같은 애국적 민족종교인 동시에 세기적(世紀的) 신생종교가 생겨날 수 있었던 필연성(必然性)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주역에서 건괘(乾卦)를 찬양한 ‘수출서물 만국함녕(首出庶物 萬國咸寧)’의 ‘함녕’과 정산의 본관인 이 ‘함안’이 같은 뜻을 지녔다는 것과 이 나라의 국기인 ‘태극기’가 ‘태극도주’가 되실 정산의 강세에 10여년 앞서 그 징조로서 제정 공포되었다는 것이 모두 이것을 증명하는 사실이다.

함안조씨의 시조는 고려때 대장군 조정(趙鼎)인 바 정산께서는 그 28대손이시다.그 선조중에서 충국애민(忠國愛民)의 인물만을 대상으로 가려보면 19대조 열(悅)은 고려의 공조전서(工曹典書)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게 되자 함안으로 낙향하였는데 조선조에서 다시 불렀으나 전조(前朝)에의 충의로 불응하였다. 이때부터 그 자손들이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함안으로 정하였던 것이라 한다.

17대조 여(旅 호는 漁溪)는 조선 단종(端宗)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으로서 숙종 때 정절(貞節)이란 시호(諡號)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기까지 하였으며 그의 손자 연(淵 호는 耐  軒)은 명필로 명성이 후세에 전하고 있다.13대조 방(호는 斗巖)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장군과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이조참판의 추증을 받았으며 11대조 함익(咸益 호는 林溪)은 학문과 덕망이 당대의 사표(師表)가 되었는데 정산께서는 그 종손(宗孫)이셨다.고조부 화식(華植 호는 竹軒)은 그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 : 지금도 회문리에 있음)의 왕명(王命)을 받았으며 조부 영규(瑩奎 호는 聚堂)는 을사보호조약 당시 관직(승정원 주서)에 있으면서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등과 그 조약의 부당성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심화병(心火病)으로 토혈(吐血) 순국(殉國)하였다.

더구나 부친 용모(鏞模 : 호는 復宇, 도호는 道丈)께서는 3형제(중씨 鏞懿의 호는 曙山, 계씨 鏞瑞의 호는 晨山)가 왜적(倭賊)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킬 때 쓰기 위한 화약공장을 차렸다가 발각되어 망명하는 등 항일정신이 강하셨으니 후일 정산께서 일생동안 ‘일본’이란 말조차  꼭 ‘왜’라고만 하신 것도 이런 가통, 가풍에 의한 것이다.천·지·인 3계의 본체인 무극(无極)과 태극(太極), 그 주신(主神)이신 무극주 구천상제는 전라도 정읍(당시는 고부)에, 태극주 옥황상제는 경상도 함안(당시는 칠원)에 인신으로 강세하셨는 바 이 두분의 상제<兩位上帝>를 경전(經典=무극진경·태극진경)을 통하여 ‘이도일체(以道一體)’로 믿는 이들의 종교단체가 있으니 곧 부산 감천(甘川)에 그 본부를 둔 태극도인 것이다.

예로부터 동양사상에서는 무극과 태극의 원리를 우주 근본의 진리로 삼고 있다.무극이 곧 태극인 바 그 태극이 기동(機動)을 해서 음양인 양의(兩儀)가 생기고 거기에서 4상(四象)이 생기며 또 8괘(八卦)가 생겨나서 우주 삼라만상이 생성(生成) 발전하는 것이다.무극은 정(靜·定)하고 태극은 동(動)하는 그 도(道)의 본체인 태극주께서 몸소 지상에의 현화(現化) 또는 권화(權化 : 신불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는 바로 그 권능(權能 : 權限과 能力)의 소치(所致)인 것이다.이것은 혼돈하던 옛세상 곧 선천 말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교체되는 개벽(開闢)시대의 참주인<眞主>인 정신적 영도자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그 진주의 출현에 관하여 먼저 그 출생부터 살펴보면 도력기원(道曆紀元)전 14년 을미(乙未=1895)년 12월 초4일(양력 1896년 1월 19일) 미시(未時)에 경상도 칠원현 서면 회문리(현 경상남도 함안군......)함안 조씨의 후예로 강세(降世)하시니 휘는 철제(哲濟), 자는 정보(定普), 호는 정산(鼎山)이셨다.그에 대한 시각(視角)은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신도들은 그를 신격으로는 옥황상제라 믿고 있으며 인격으로는 대성인인 도주(道主)로 받들고 있다. 일반인의 경우에는 한 민족종교의 개조(開祖)인 영도자 또는 민족정신의 지도자로 볼 것이다.

여하튼 그가 거금(距今) 1세기 전에 이땅에 나셔서 그 당시 왜정하에 신음하던 민중을 정신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어떻게 지도하셨으며 무슨 어떠한 교훈을 하셨기에 그동안에 수백만의 도인들이 그의 교화를 받고 그래서 그를 상제라고 믿고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그의 태극을 원리로 하는 종교가 개창될 것을 조국의 국장(國章)이 미리 징후(徵候), 예고(豫告)하여 주었다는 사실을 그냥 무시하거나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이 원리, 도의(道義=도의 뜻)가 한국, 한국인, 새 세기의 인류에게 어떻게 적응할 사조(思潮)를 주도(主導)하여 구제하고자 하셨는지를 알아봄직도 할 것이다.그런 의의에서도 그의 전기를 통한 행적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우리는 위에서 그의 생년월일과 출생지, 그밖의 인적사항을 간략한 대로 알아보았다.그런데 하나의 종교가 생겨나고 그 종교를 개창한 위인(偉人)이 태어난 배경이 될 가계(家)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나 그의 가계가 뚜렷한 명문대가인 함안 조씨 양반의 후예였다는 사실같은 일에도 의의가 있지만 그 조상들이 대대로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충국애민하는 가풍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에는 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의 생애가 이러한 가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도주님께서 강세하신 성지 ?도주님께서 도기전 14(1895)년 12월 초4일 미시에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신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회문리)의 성지.이곳에서 도강이서하신 15세까지 성장, 수학하시고 망명 후 남의 소유가 된 고기(故基)를 13(1921)년 5월에 복구, 18(1926 : 무극도 당시)년 4월 회룡재 신축과 동시 옛집도 중창.31(1939)년 가을부터 회룡재에서 잠룡, 회룡, 해박도수 등 많은 도수공부를 하시며 막심한 고행. 34(1942)년 봄 회문도장으로 명명. 37(1945)년 7월 태극도 선포. 40(1948)년 3월 부산으로 이어하심.사진 ① 회문리 일대의 전경(봉소형(鳳巢形)이 완연한 모습)이고 멀리 보이는 좌측의 가장 높은 산이 자고산(높이 401m). ② 강세하신 곳.

 

太極主의 人世現化

보통 사람의 출생에도 태몽(胎夢)이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우주의 지고(至高), 지존(至尊)하신 상제로 봉대(奉戴)되실 종교 위인(偉人)의 강세에 어찌 특이한 이적(異蹟)과 경서(慶瑞)스러운 징조(徵兆)가 없을 것인가.을미년 정월, 복우도장께서는 결혼 초가 되어 부인이신 숭덕부인(崇德夫人) 민씨께서 우귀(于歸 : 결혼한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예절. 이 당시 선비 집안에서는 결혼 후 3년만에 우귀하는 것이 통례였다)전이므로 설날 차례(茶禮)를 마치고 바로 밀양군 하남면 파서리(密陽郡 下南面 巴西里) 빙댁(聘宅)에 가서 머무르게 되셨다.초3일 밤에 부인께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참으로 엄청나게 신기한 꿈이었다. 그것은 천지가 갑자기 환해지면서 하늘서 오색구름을 탄 한 선관(仙官)이 좌우에 시종(侍從)을 거느리고 내려오더니 부인께 경배(敬拜)하며, “저는 천제(天帝)님의 명에 따라 진멸지경(殄滅之境)의 삼계군생(三界群生)을 광구(匡救)하기 위하여 이 동녘 조선 땅에 내려오고자 합니다. 어여삐 받아주소서”하고 아뢰며 부인의 품에 안긴 꿈이었다.꿈을 깬 부인께서 너무 신기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부군(夫君)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저하다가 마침내 이 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이때 복우도장께서도 꼭 같은 꿈을 꾸고 잠이 깨어서 생각 중에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여보! 우리 두 사람이 꼭 같은 꿈을 꾸었으니 이것은 예사꿈이 아니라, 천기(天機)에 속하는 대몽(大夢 : 태몽)일 것이오.그러니 이 일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발설하지 말고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합시다”하며 함께 다짐하였다. 두분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방안에는 향기가 밤 새도록 가득하고 창 밖은 서광이 낮과 같이 밝게 하늘에 뻗쳐 있음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으셨다.신이한 몽조(夢兆)는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도장의 부친되는 취당공(聚堂公)은 관직으로 서울에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 지춘추관 기사관(知春秋館 記事官),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등을 역임한 분이었다.그 취당공도 도장 내외분이 태몽을 꾸던 거의 같은 시각에 또 대몽을 꾸었다. 뇌성벽력이 일고 천지가 진동하는데 큰 불기둥이 사방을 휩쓸더니 또 바닷물이 넘쳐 흘러 불기둥을 뒤덮자 천지가 캄캄해졌다. 그러더니 하늘이 갈라지며 찬란한 태양이 솟아올라 천지가 광명해졌는데 그 햇덩어리가 자부 민씨의 품으로 들어가 안기는 것이었다.취당공은 이 꿈이 틀림없는 자부의 태몽이라 생각되어 도장 내외분에게,“우리 가문에 하늘서 내리는 경서가 있을 것이니 정성을 다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는 당부의 서찰을 전편(專便 : 특별히 보내는 인편)으로 내려보냈다.이런 태몽도 경사스럽지만 출산 또한 일반인과는 특이하게 열두달만이었다. 그런데 산모께서 난산(難産)으로 산고(産苦)가 극심해서 사흘동안을 산통(産痛)으로 신음하다가 마침내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혼몽(昏朦)한 상태에 이르렀다.이때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며 공중에서 피리소리가 나더니 약탕기를 든 한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서 부인께 경배하고 아뢰기를, “소녀는 천존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탕제(湯劑 : 탕약)를 가지고 부인을 구완코자 내려 왔습니다. 지금 탄생하시는 옥동자는 삼계를 광구하실 진주(眞主)이오니 부인께서도 옥동자와 함께 옥체를 보중(保重)하소서”하며 입에 탕제를 드리웠다.부인께서 이 순간 정신이 쇄락하고 통증이 멎으면서 순산을 하게 되었으며 이때 산실에는 향기와 서광(瑞光)이 가득하였다. 그 당시 칠원고을 일대에 사흘동안 눈이 내렸는데 정산의 출생과 동시에 멎고 일기가 청명해지며 지붕 위로부터 흰 무지개가 하늘로 뻗어올랐고 다른 곳에는 눈이 쌓였으나 산실 지붕에는 녹아있었다.정산께서는 출생시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기골이 장건하고 기상이 준수하셨으며 성장함에 따라 천중(天中), 천정(天庭)이 넓고 일각(日角), 월각(月角)이 풍부하며 눈빛이 빛나고 얼굴 모습이 뛰어나셨다.그보다도 온 몸에서 후광(後光)이 발산되고 등에는 칠성(七星)의 문양, 붉은 점이 오른쪽 다리에 세개, 왼쪽에 72개, 두 발바닥에 각각  세개씩 있었으며 턱 밑에는 용수(龍鬚), 손톱발톱은 용조(龍爪)가 완연하고 음성은 용성(龍聲)처럼 우렁차셔서 보통 사람과는 다른 표징이 있으셨다.어려서부터 무슨 일이든지 깊이 생각하고 캐어 묻기 때문에 어른들은 대답하기가 힘들었는데 사람들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동(神童)이 출현하였다고 찬탄이 자자했다.7세까지의 유년시절에도 많은 기행(奇行) 이적(異蹟)이 있었지만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인 바, 7세에 한문서숙에 입학하셨는데 그해에 육갑(六甲)과 역서(曆書)의 구성법을 홀로 창안하신 일은 훈장을 비롯한 지방 유림(儒林)의 화제가 되었다.9세 때에 벌써 영적으로 차원높게 통령이 되었던지 잠깐 조는동안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한 선비가 나타나서 4배(四拜)를 드리며 “하느님의 명령을 받들어 진인(眞人)께 알현하옵니다”한 일이 있었으나 천기(天機)라 생각되어 부친께만 아뢰어 발설하지 않으셨는데 그 후에도 몸이 괴로우면 이 선비가 나타나서 위안하고 도와드렸다.

11세 되던 해에는 한일보호조약의 체결 단계에서 조부 취당공이 관직을 사임하고 항일운동에 전념하다가 통분이 차서 토혈(吐血)하며 귀향하여 45세를 일기로 순국(殉國)한 일이 있었다.이때 어린 나이에도 조부의 유언에 따라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이 남달랐으며 그 성취를 위한 ‘남모르는 마음공부’를 시작하여 13세까지 계속하셨다.이로부터 서숙에 나가지 않고 한 방에 경서와 제자백가서를 갖추어 놓고 문을 안으로 잠근 다음 공부에 몰두하셨으니 그것은 바로 학문과 함께 마음 닦는 공부였다.부친이 걱정되어 누누이 물으면 다만, “소자의 공부는 할아버님께서 유언하신 ‘남모르는 공부’이오니 염려하지 마옵소서”하시는 말씀이 너무나 진지하기 때문에 더 묻지 못했다.이 무렵 일본의 침략은 극도에 이르러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대한제국이란 허울좋은 이름뿐 실권은 일본의 군부가 완전히 장악한 형편이었다.

 

도주님 강세의 태몽을 꾸신 성지

도기전 14(1895)년 정월 초 3일 밤 복우도장 내외분께서 도주님 강세의 태몽을 꾸시고 잉태하신 경남 밀양군 하남면 파서리의 도주님 외가. 사진 위는 외가를 중심한 파서리의 전경. 아래는 외가 본당의 모습.

 

 

奉天命과 得道

이 가문의 충국 애민하는 정신은 가통(家統)이 되어 내려왔지만 취당공의 순사 이후에 복우도장 3형제분의 애국충정은 더욱 강한 배일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원래 3형제분 중 도장께서는 천성이 관후인자(寬厚仁慈)한  문사(文士)이셨으나 두 계씨는 성정(性情)이 강하고 굳세며 담력조차 커서 무사(武士)기질이었다. 하루는 도장께서 동생들을 불러 중대한 결의를 하고 그 직접 행동에 관한 수의를 하게 되었다.“우리가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가통, 특히 순국하신 아버님의 한이 맺힌 항일 구국운동에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지금 각처에서 나라를 찾으려는 의병들이 일어나 젊은 피를 쏟고 있는데 우리 3형제가 무사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을 수 있느냐?”하는 도장의 비장(悲壯)한 말씀에 서산공이 의견을 내었다.“형님! 마산에 사는 산본(山本)이란 왜놈을 아시는지요. 그가 광산으로 돈을 벌어 거기에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으로 우리 민족의 고혈(血)을 착취(搾取)하고 있으니 그의 돈을 빌려서 독립운동을 합시다!”“그놈이 순순히 응할까?”“담보를 대고 이자를 배로 준다고 하면 응할 겁니다”이때 막내 계씨 신산공은 그저 두 형님이 하자는대로 신명을 바쳐 뛰겠다고 다짐하며 부채질을 한다.그래서 산본에게 돈을 빌려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한다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결의를 했던 것이다.그것도 산본에게 적은 돈을 꾸어 신용있게 갚은 다음 그가 자진해서 거액을 대부하도록 하였다.“당신들은 지방 유지이고 신용도 있으니 많은 돈을 가져다가 3칠(옛날 칠원 3개 면의 별명)일대의 땅을 모두 사시오. 내 얼마든지 빌려 드리겠소이다”하고 산본이 도리어 달라붙는 것을 처음에는 사양하는 듯 하다가,“그래도 담보는 우리 3형제의 전재산을 당당히 제공하겠으니 우선 5천원을 빌려주시오”해서 5천원을 빌리는데 성공하였다.그런데 이때 산본의 속셈은 토지는 대부금의 배로 잡고 평가는 반으로 해서 3칠일대의 토지 전부를 착취하겠다는 수작이었다.사실 그 5천원은 당시 싯가로 상답(上畓) 수 10만평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으며 거금이었다 (회문리 앞 들이 지금도 ‘산본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이 담보사건으로 그 들 거의가 한 때 산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도장 3형제분은 신용 반 담보 반으로 빌린 돈 5천원을 가지고 우선 칠원(漆原) 도덕골에 화약공장을 설치하는 한편 무기를 수집하다가 왜헌(倭憲)에 밀고되어 피신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이때 정산께서는 14세 어린 나이였지만 어른들에게 항일구국(抗日救國)을 위하여는 국외(國外)로 나가야 함을 진언하셨다. 그래서 1년간의 준비 끝에 중국 연변 곧 만주의 서간도지방으로 망명하게 되었다.기유(己酉)년 (서기 1909년=한일합병 1년전) 4월 28일 미명에 창원역에서 기차로 전가족이 망명길에 올랐다. 태극도에서 이해를 도력기원(道曆紀元)의 원년(元年)으로 정한 것은 다음과 같이 천명(天命)을 받든 기사(奇事)에 연유한다.이날 하오 1시가 지나 기차가 대전부근에 이르렀을 때 정산은 마음공부의 입신(入神) 경지에서 한 신인(神人)을 대하셨는데 그 신인은 정산에게 ‘일광(日光)같은 얼굴에 황금색 용포(龍袍)...... 우뢰같은 음성으로’ 이렇게 명령하셨다.“내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三界)의 진주(眞主)니 그대가 나의 도통(道統)을 이어 무극대운의 대공사(大公事)를 성취하되...... 태극의 진법(眞法)을 용(用)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광구삼계(匡救三界) 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 : 도로써 한 몸)니라”하고(물론 이것은 옆사람도 모르는 심령계의 일이다) 이어서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로라”라고 하셨다.이것이 정산의 대오자각(大悟自覺)이었으니 이때 나타난 신인의 당체(當體)가 구천의 천존상제이신 무극주(无極主)로서 신미(辛未=1871)년 9월 19일 전라도 고부(古阜)에 인신으로 강세하셔서 신축(辛丑=1901)년부터 9년간 광구삼계의 도수를 짜신 끝에 이날 김보경, 이치복 등을 거느리시고 대전역 근처에서 공사하신 강증산(姜甑山) 상제이시다.정산께서는 이 천명을 받들어 태극의 참 주인<眞主>이 되시고 증산과는 솥과 시루의 관계로서 이도일체되는 신계(神界)의 비건(秘鍵)을 체인(體認)하심으로써 증산상제의 도통을 계승하신 것이다.종교의 위인이며 신인(神人)적 존재는 연령이 문제가 아니니 이때 정산의 나이는 15세의 소년이었지만 이때부터 진법(眞法)의 50년 공부가 시작되고 따라서 태극도의 도력(道曆)이 기산(起算)되는 것이다.만주에서는 요령성 유하현 수둔구(水屯溝 : 현재는 지명의 뜻 그대로 수풍댐의 물에 잠겼다 함)라는 곳에 정착하였는데 여기서도 어른들은 농사로 생계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동지를 규합하니 그곳은 그새 한인촌(韓人村)을 이루었다.정산께서는 천계(天啓 : 天尊 곧 상제님의 계시)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농사에 임하시면서 밤에는 마음공부를 계속하다가 그해 추수후에야 부친에게 말씀드리셨다.“소자는 지난 4월 망명할 때 구천상제의 천명과 신교(神敎)를 받들었습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공부만으로써 부족하므로 이제부터는 이곳 노고산(老姑山)에 들어가 천명에 따른 진법공부에만 전념하겠나이다”하고 여쭈어 승낙을 받은 다음 산속 은적한 곳에 공부처를 마련하고 홀로 두문불출, 불철주야 공부에 정진하시는데 여름은 그렇지만 겨울에는 만주의 혹한(酷寒)에 소년의 몸으로 겪으신 고난은 형언할 수 없으셨다.이러한 사이 경술년에 조국이 일본에 병탄(倂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산의 가족들은 3일간 망배통곡(望拜痛哭)하고 항일 투쟁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졌다.

당초에 복우도장께서는 수둔구에서 황무지를 매입, 개간하여 정성으로 경작한 결과 해마다 풍작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을 시기한 만주인 전 지주들이 한국인을 만만히 여기고 땅을 돌려 달라고 시비를 걸어 작당행패하며 소송까지 하는 사건을 일으켰다.이때 한인촌에서는 도장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저들을 격퇴시키고 또 승소하였는데 이로써 한·만인(韓·滿人)들의 신망을 얻은 도장께서는 촌장(村長)으로 추앙을 받으셨다.그 후 이 마을의 단결이 더욱 굳어지고 명성이 전파됨에 따라 망명지사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어 그 연락처가 되고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그 결과 도장께서는 계씨인 서산공을 용정(龍井)에 보내어 독립군을 양성하는 이동녕(李東寧)에게 자금을 전달하고 격려하셨다.            이 당시의 독립지사들에게는 갖가지 재난이 있었으니 도장께서도 보황당(保皇黨 : 중화민국에 대항하여 과거의 황제를 옹립하고 청조의 복구를 도모하려는 당파)과 동류라는 혐의를 받아 원세개(袁世凱) 정부에 구인(拘引)되어 극형을 받게 되는 큰 변고가 생겼다.이때 정산께서 심양(瀋陽=奉天)까지 수행하여 그곳 관헌에게 해명 호소하셨으나 되지 않아 북경으로 가서 직접 원세개 총통에게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오직 항일(抗日) 운동을 할뿐”이라는 요지의 진정서를 내셨더니 원세개가 그 문장과 효성에 감탄하고 즉시 무죄 방면토록 하였다. 그동안 만주에 와서 황량한 풍물만 접하시던 정산께서는 심양에 와서 봉천으로 개명된 사실(이것은 도주님의 봉천명(奉天命)에 연유(緣由)한다)을 알게 되시고 북경에 와서 중국 본토의 웅대한 산천과 화려한 문물에 접하면서 대중화도수(大中華度數)를 공부하기로 결심하셨다.북경서 산동(山東)으로 가서 태산의 공자묘(孔子廟)를 비롯한 명산대천에서 공부를 계속하시고 하남(河南)의 노자묘(老子廟), 등봉(登封)의 소림사(少林寺), 산서의 관왕묘(關王廟) 등 묘우(廟宇), 사찰(寺刹)을 6개월에 걸쳐 두루 편력 수도하셨다.한편 숙부인 서산공이 독립운동의 혐의로 왜헌(倭憲)에게 체포되어 3년 징역을 언도받고 안동(安東)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관재가 있었지만 정산 부자의 교섭과 청원으로 1년만에 출옥하였다. 이때 용정에서 활약하던 이동녕, 이시영 등이 간도지방의 흉년과 왜헌의 횡포가 심하여 상해로 이주하게 되자 도장 형제들은 그 자금을 마련하여 도장과 정산께서 상해로 가서 전달하게 되었다. 이 계제에 정산께서는 지난번에 마치지 못한 대중화도수공부를 계속하셨다.현대의 종교인에게도 신명의 계시(啓示)나 영능(靈能)이 있는이가 있다. 그리고 영계와 교유(交遊) 상통(相通)하는 이가 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고급신과의 영통이 아닌 저급신 또는 잡신인 경우라는 것을 많이 보고 듣는다.정산께서는 그런 의미에서도 최고 신인 구천상제(九天上帝)의 계시를 통한 직접적인 명령과 가르침을 받들면서 정진하신 것을 여러 전기(傳記)를 통하여 넉넉히 알수 있다.정산께서는 정사(丁巳=1917)년 설날 새벽에 초패왕(楚覇王)의 고향인 절강성(浙江省) 회계(會稽)에서 구천상제의 계시로 득도(得道)의 명을 받드셨다.“이제 그대의 대중화 보은공사(報恩公事 : 보은신(報恩神)을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겨와서 소중화(小中華=한국)를 대중화가 되도록 증산상제께서 짜놓으신 도수(무극진경 8 : 168, 169, 212, 9 : 45 참조)를 풀어 맞추시는 공사)가 끝났으니 본가로 돌아가서......도통(道統)의 연맥과 인계의 인연을 다지도록 하라. 이 곧 득도니라.”이때 기도주(祈禱呪)와 태을주(太乙呪)를 직접 계시받으시니 이러하였다.“기도주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태을주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이해 윤2월 10일 노고산 공부처에서 천계(天啓)에 따른 득도치성을 올리신 다음 또 운장주(雲長呪), 칠성주(七星呪)와 그밖에 다섯가지 주문을 받들고 도통(道統) 계승의 득도를 확인받으셨다.

정산께서는 9년전 봉천명(奉天命)때 구천상제의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라고 하신 가르침을 다시금 자각 명심하고 더욱 수도에 정진하셨다.이 무렵 용인(龍仁) 사람으로 만주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던 오석(烏石) 김혁(金赫)이 군자금 관계로 수둔구에 찾아오니 그는 도장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내는 처지였다.그는 왕년에 본국을 순회하다가 증산상제의 성도(聖徒)들로부터 그 행장과 교훈을 듣고 입도한 바 있는데 여기에 와서 정산의 공부방법과 그 주문이 조금도 틀리지 않음을 보고 경탄하였다.“조군, 그 주문을 어디 누구에게서 배웠는가”하는 오석의 물음에,“공부중에 상제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하고 대답했지만 자신이 진법의 진주(眞主)로서 이도일체라는 비의(秘義)는 발설하지 않으셨다.“참 신기한 일이로군. 군의 공부가 이토록 극상위(極上位)에 있는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네. 연령으로는 내가 어른이지만 종교상으로는 군이 나의 스승이로세”하고 오석은 정산을 우러러보았다.이해 4월에 정산께서는 다시 구천상제의 계시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오시게 된다. 이때의 계시내용이, “빨리 환국(還國)하여 나의 본소(本所)를 찾고 3천(三天)인 천서(天書)·천보(天寶)를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는데 남자로 변장시키신 매씨(妹氏)와 종제(從弟)만을 거느리고 출정(出程)하셨다.출발 전날 마지막 떠나는 길이라 노고산에 있는 관왕묘(關王廟)에 참예(參詣)하셨는데 이튿날 새벽에 묘지기가 찾아와서 문전에 부복하고,“대인(大人)께서 어제 관왕묘에 다녀가신 후에 관성제군의 상에 수염이 없어졌습니다. 이로써 소인은 중벌을 면치 못하오니 대인께서 도력(道力)으로 복구시켜 주옵소서”하며 애원했다.정산께서 웃으시며,“그래, 네 소원을 들었으니 돌아가서 다시 살펴보라”고 하셔서 가보니 옛모습 그대로이므로 사례코자 찾아왔으나 정산께서는 이미 떠나신 후였다.

 

   

 

 

 

 

 

還國과 三天完備

귀국길을 안동까지는 마차편으로 와서 압록강철교는 도보(徒步)로 건너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기로 하셨다.국경인 철교 위에는 양쪽에서 검문하는 군인들의 경계가 삼엄했는데 이상하게 정산일행은 그들이 보지 못하므로 그저 통과하였다.철교를 건너면서 정산께서 혼자말을 하시는데 그것이 한국어도 중국어도 아닌 것이어서 매씨가 이상히 여기며 여쭈었다. “오라버님, 지금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응, 서양 신명들이 내게 무엇을 물어오는데 이야기하자니 그리 되었느리라”하셨다.압록강을 건너신 후에 강변의 어선에서 5색이 영롱(玲瓏)한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사셔서 강물에 놓아보내셨다. 이때 그 고기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올라 네 번 절을 하듯 몸을 번득이고 유유히 사라졌다.옆에서 지켜보던 매씨가,“오라버님은 어찌하여 비싼 값으로 고기를 사서 물에 놓아보내시나이까?”하니,“고기나 사람이나 살려고 함은 본능(本能)이 아니냐. 더구나 이제 그 고기는 용왕(龍王)의 명으로 나의 귀국(歸國)을 영접하러 왔다가  나와 상봉(相逢)함이니라”하셨다.신의주에서 철도편으로 서울에 오셔서 며칠을 유하며 관광하는 동시에 백성들의 신고하는 정황을 보고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셨다.다시 철도로 밀양 외가를 찾으시니 외척들이 모두 환대하였고 이튿날 칠원 회문리 고향에 가니 일가 친척 역시 반가이 맞아주었다.그러나 정산께서는 이러한 사정에만 시간을 보낼 수 없고 구천상제께서 명하신 본소(本所)를 찾기 위하여 다시 매씨를 거느리고 호서·호남방향으로 출발하셨다.5·6월 염천의 혹서를 무릅쓰고 걸음을 재촉하여 몇달 몇날에 걸쳐 지친 몸을 이끌고 정읍의 손바래기, 모악산의 금산사, 대원사와 동곡(銅谷)등 증산상제의 성지와 유적지를 답사하고 김형렬, 박공우, 이치복, 김광찬 등 성도(聖徒)들을 찾아 본소를 탐색하기에 노심하셨다.그해 9월 어느날 함열(咸悅)지방을 지나시다가 피로한 몸으로 정자나무 아래 쉬실 때 구천상제의 계시가,“본소는 다음에 찾고 우선 이곳 서해의 제일도에 공부처를 정하고 때를 기다리라”하시므로 태안의 안면도(安眠島)를 찾아드셨다.이곳에서 첫 포덕으로 입도한 이정률(李正律)의 주선으로 정당리 어락골의 공부처를 매입하여 우일재(宇一齋)로 명명하신 다음 이해 겨울에 만주의 도장이하 모든 가족이 합솔하여 함께 입도치성을 올렸다.그 다음해 봄까지 입도자가 30여명이 되었는데 정산께서는 그들을 우일재에서 기도주·태을주를 연송(連誦)하며 공부하게 하셨다.그 공부 7일째 되던 날 진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도인 박봉운(朴奉云)이 공부중에 갑자기 큰소리로, “나는 뵈었다. 옥황상제님을 뵈었다”하고 일어나서  춤을 추며 크게 웃기도 하였다. 다른 도인들이 당황하여 말려도 안되는데 옆방에 공부하시던 정산께서 “봉운아”하고 부르시니 갑자기 멈추며 그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옥황상제님께 절을 올립니다”하며 4배(四拜)를 올렸다. 봉운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모두에게, “내가 천상의 옥황상제를 뵈었는데 바로 이 어른이 그 어른이시니 함께 다시 4배를 올립시다”하므로 일동이 신기하게 여기며 4배를 올렸다.봉운이 그 후에도 몇번 그러하므로,“오직 천기라......이는 허령이니 이를 거두노라”하셔서 중지 시키셨다.무오(戊午=1918)년 8월에 정산께서는 증산상제의 본소(本所)를 찾기 위해 다시 전라도로 가셔서 상제의 옛 성도들을 찾아 수소문하기로 결심하시고 먼저 원평(阮坪)의 김자현(金自賢)을 방문하셨다.그러나 그는 손을 나발 모양으로 오므려 자기 입에서 정산의 귀에 연결하고,“증산선생께서 이렇게 하시며 ‘도통(道通)은 자네에게만 주겠네’하셨다”고 하면서 자랑했지만 본소를 찾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정산께서는 다시 안면도로 돌아와서 공부를 끝마치시고 10월에 전라도 정읍군 감곡면 황새마을로 오셔서 새로운 공부처를 마련하시고 가족들도 합솔하여 포덕에 힘쓰신 결과 수십명이 입도하게 되었다.이처럼 도인이 늘어나고 공부를 계속하시면서도 항상 증산상제의 본소를 찾지 못한 일만이 마음의 숙제가 되어 있으셨다.기미(己未=1919)년 정월 보름날 명절 치성으로 철야하고 공부하시던 중 드디어 구천상제의 본소에 대한 계시가 내렸다.“때가 이르렀으니 이제 본소가 그대 목전(目前)에 다가왔도다......”고 하신 것이다.정산은 이날 눈이 많이 오는 가운데 자신을 찾아오는 박씨라는 여인을 천안(天眼)으로 미리 볼 수 있었다.그는 정산께,“증산상제의 매씨 선돌부인께서 ‘후천진인(後天眞人) 을미생(乙未生)에게 도통(道統)을 전하라’하신 상제의 명령에 따라 10년간 본소를 지키다가.....오늘 아침 천계(天啓)를 받들고 ‘만주봉천서 오신 대인을 모셔오라’고 하셨나이다”하므로 따라가서 증산상제의 유족(遺族)을 비로소 만나시게 된다.선돌부인께서는 이때 39세셨는데 일찍이 20세 전에 고부 입석리 박창국에게 출가하셨으나 10년이 넘도록 소생이 없자 남편이 소실을 두고 소박(疏薄)하므로 증산상제께서 이곳 마동에 집을 사주셔서 살게 하셨다.그리고 화천(化天)하시던 해 정월 보름에는 이 집을 몸소 수리하셔서 도배까지 해 주시고,“이곳이 나의 본소(本所)니라”하시며 위와같은 명령을 내리셨던 것이다 (이때 천서를 비장(秘藏)하신 것으로 추측됨).부인께서 이 본소에 사시는 동안 5년 전에는 황해철이란 수도인이 찾아와서 공부하다 돌아가고 4년 전에는 박모란 수도인이 그 제자 송규를 데려와서 부탁하므로 3년간 공부시켰으나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증산상제의 지엄한 계시에 따라 강제로 내 보낸 일이 있으셨다.그러나 이번에는 상제께서 직접 계시로써 정산의 얼굴까지 보여 주셨으므로 의심의 여지는 없었지만 상제의 유품은 황·송에게 내주고 회수할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처지였던 것이다.그래서 정산을 맞은 권씨 대모(大母 : 강증산상제의 모친)께서는, “내 아들과 같은 진인을 대하니 여한이 없다”하며 감읍하셨으나 선돌부인께서는,“이제야 진인을 만나 소임(所任)을 다하게 되었다”하고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히 여기셨다.그런데 이곳에서 사람의 의표(意表)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역사적 사실이 전개된다. 정산께서는 이때 문득 ‘진시황의 분시서(焚詩書) 갱유생(坑儒生)에도 칠서(漆書)가 공자의 집 벽속에 비전(傳)된 칠서벽경(漆書壁經 : 공자가 그 당시 대쪽으로 된 경서를 옻칠해서 자기집 벽속에 감추었는데 200여년 후에 그 집을 새로 지을 때 벽속에서 썩지 않고 나옴으로써 유교가 후세에 전해진데서 유래된 말)의 고사(故事)’가 상기되시어 마음 속으로 ‘증산상제께서 이 본소를 내게 점지하여 주셨으니 도통(道統)의  증표도 내려주실 것이다’ 생각하시고 선돌부인에게,“구천상제의 진품증표는 절로 진주인 나에게 전수될 것을 확신하오니 심려하지 마시오”하시니 앉은 자리의 바로 뒷벽 천정 아래의 한 곳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느끼셨다.그곳의 도배를 뜯고 벽을 파시니 그 안에 나무상자가 있었으며 그 상자를 여시는 순간 전광(電光)이 뻗치며 집과 벽이 진동하는데 상자속에 천장비서(天臧秘書) 곧 천서인 현무경(玄武經)과 주문서(呪文書)가 들어 있었다.정산께서는 천서를 향하여 4배를 올리고 심고(心告)하신 다음 정중히 내려서 유족들에게 확인시키셨다.대모께서는,“이 방안에 살면서도 이 천서가 있는 줄 몰랐는데 그대가 이렇게 찾아내어 물려받게 되니 참으로 그 상제에 그 진주(眞主)로다”하시고 선돌부인께서는,“이로써 나의 소임 또한 다함이라”하시며 모두 감격해 마지 않았다. 현무경은 4방 9촌의 한지에 증산상제께서 손수 쓰신 것으로서 13장 26면에 문자와 부도(符圖), 주문서는 7장 13면에 11종의 주문이 기록되어 있었다.정산께서는 이 천서를 받들고 본소에서 백일공부로 그 진리를 체득하셨으며 이때부터 증산상제의 유족을 봉양하셨다.이해 3월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정산께서는 이에 관하여, “이 운동은 구천상제께서 미리 짜놓으신 도수에 의한 일이다”하시며 부친 형제분과 전 도인에게 적극 참여할 것을 당부하셨다.그로써 주저하고 있던 도인들까지 전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이 본소와 천서에 관한 소문이 두루 퍼지니 입도인이 날로 늘고 황새마을 공부처는 문전성시(門前盛市)를 이루어 협소하므로 이해 5월 초순부터 그 이웃 청도리 구성산 학선암에서 백일공부를 하시고 윤 7월에는 공부처를 다시 같은 면 통사동(通士洞) 이씨 재실 영모재(永慕齋)로 옮기셨다.9월 18일 정산께서는 통사동 공부처에서 구천상제 강세치성(降世致誠)에 앞서 증산상제의 유족과 상의하신 다음 가족과 도인들에게,“3천(三天) 가운데 2천은 이미 받들었으나 남은 천보(天寶)도 받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천보는 둔궤(遁櫃)였다.둔궤는 원래 증산상제께서 화천 전년(1908) 여름에 동곡 약방을 차릴 때 약장과 함께 만드시고,“이 궤속에 번개가 들어야 한다”, 또 “이는 나의 도지(道旨)와 도통(道統)을 숨겼으므로 숨길 둔자 둔궤니라”하시며 약방에 비치하시고 많은 도수공사를 보신 신성한 유물로서 화천하신 후에 김수부(金首婦  : 김형렬의 따님)가 간직하더니 고수부(차경석의 이종 누님)가 교단을 차릴 때 가져갔는데 고수부가 교단을 떠난 후 이때까지 보천교에서 간수하고 있었다.정산께서는 이날밤 천하장사 김계철, 최승오와 도인 권태로 등 8인을 거느리시고 보천교 도장에 가셔서 마침 이때 치성에 모였던 수백명 교도에게,“천명을 받들어 천보를 모셔가니 순순히 응하라”고 외치셔서 알리게 하신 다음 그 본당에 안치된 둔궤를 모셔오셨다.그리고 통사동 공부처에서 둔궤를 모시고 공부하시다가 다시 경남 함안 대산면 용화산의 반구정(伴鷗亭 : 그 13대조의 재실)에 옮겨 모시고 백일공부를 하셨다. 그런데 이 둔궤의 자물통은 증산상제께서 채워놓으신 그대로였으나 공부를 마치시던 날 열쇠 장인(匠人)을 시켜 새로 열쇠를 만들어 여셔도 안되다가 정산께서 직접 주(籌)대(공부하실 때 쓰시는 산(算)가지)를 자물쇠에 끼우시는 순간 뇌성벽력이 나며 방안이 갑자기 어두었다 밝아지며 스스로 열리는 이적(異蹟)이 일어나니 이날이 경신년 2월 17일(양력 4월 초5일) 청명절이었다.정산께서 둔궤 내부를 살피신 다음,“과시(果是) 천보로다. 수운(水雲)의 거년(去年) 경신(庚申) 4월 초 5일은 음력이로되 나의 금년 경신 4월 초 5일은 양력이니 음양합덕이며 태극도수가 분명하도다”하셨다.둔궤 안에는 양피(羊皮)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들어있고 내부의 정면과 좌우면에 ‘오강록(烏江錄), 설문(舌門), 반구제수(半口齊水), 천문지리(天文地理), 풍운조화(風雲造化), 팔문둔갑(八門遁甲), 지혜용력(智慧勇力)’ 등의 비서(秘書)가 불지짐으로 새겨져 <火刻> 있었으며 주사(朱砂)로 24점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정산께서는 이로부터 반구정 아래 강가 백사장에 단(壇)을 모으고 그 위에서 밤마다 장·중·단검 세자루(밀양 운문산 천황봉 아래에 철공소를 차리고 성기춘 등 기술자를 시켜서 풀무불에 만국지도를 매일 1장씩 50장을 소화하시며 만드신 칼)로 100일간 검무(劍舞) 도수로 공부하셨다.이때 정산께서 낮에는 반구정 공부실에서 수도하시고 밤에는 단 위에 등불을 밝히고 검무도수로 공부하시는데 그때마다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이 구름 같은 안개가 일어 시종들은 공부하시는 내용을 볼 수 없었고 다만 안개 속에서 간간이 칼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공부 후에 통사동으로 돌아오실 때 칼은 가져오시고 둔궤는 반구정에 두고 오셨는데 수종(隋從)하던 조주일(曺周一)이 몰래 가지고 진주지방으로 도망가서 사술(詐術)을 부리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상우가  정산께 찾고자 함을 아뢰니,“둔궤는 이미 도수에 쓰였으니 이제는 한낱 궤짝에 불과하고 둔자는 도망 둔(遁)자이므로 도망자의 물건이 됨은 필연이라. 후일에도 이런 배신 난법자가 있으리라”하시며 찾지 말도록 하셨다. 정산께서는 검무도수 공부를 이해 11월 초부터 100일간 안면도 쇠섬에서 단도수와 아울러 공부하시니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바람막이 하나 없는 섬에서 동상으로 수족이 붓고 손마디가 터져 피가 나는데도 계속하셨다.이 단도수와 검무도수 공부는 다음해 2월 다시 부안 변산반도 우금바위 아래로 옮겨서 100일간 계속하셨는데 일본 순사가 취체하러 나왔다가 눈 앞에 있는 단과 단상의 기를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 일도 있었다.

안면도 우일재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9(1917)년 9월 만주에서 귀국 후 처음 공부처로 마련하신 충남 태안군 안면읍 정당리 어락골의 우일재터.사진은 어락골의 전경. 마을 중앙부분 위쪽 지붕만 조금 보이는 집이 약 50년 전 우일재 터에 지어진 농가.정읍 황새마을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10(1918)년 10월 본소를 찾기 위하여 임시로 마련하신 전북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 황새마을(일명 황새물) 공부처.이곳에서 11(1919)년 정월 15일 상제님 계시를 받들어 본소를 찾으심.사진 위는 그 마을 전경. 아래는 그 공부처 자리에 약 50년전에 지어진 농가.

정읍 마동의 본소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11(1919)년 정월에 찾으신 전북 정읍군 북면 화해리 마동 본소의 터. 이 본소 벽 속에서 그달 20일 천서를 찾으시고 그 방에서 100일 공부로 천서의 진리를 체득하심.사진 위는 마동의 전경(중앙 윗부분 대숲 앞집이 본소 터의 집). 아래는 본소 터에 약 50년 전에 지어진 농가.

구성산 학선암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11(1919)년 5월부터 100일공부를 하신 전북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동곡 뒤 구성산 학선암.

통사동 영모재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11(1919)년 윤7월부터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던 전북 정읍군 감곡면 통석리 통사동 전주이씨의 재실 영모재.이곳에서 둔궤(천보) 도수, 벽조목도수, 무극도선포도수, 원납도수, 삭망도수, 음해도수 등 많은 도수를 보심.19(1927)년 봄에 그 집을 중창해 주시고(현재의 건물), 그해 9월에 주도수로 100일공부.사진 ① 영모재 전경. ② 약 25년 전(1982)년 당시의 모습으로서 아랫채, 문간채, 담장 등이 남아있었음. ③ 현재 도기 98(2006)년 모두 퇴락된 모습.

용화산 반구정 공부처이 반구정은 경남 함안군 대산면 용화산의 낙동강 절벽 위에 있는 도주님 13대조 두암공의 정사였으나 후손들이 그 산소의 재실로 사용하는 건물.도기 11(1919)년 10월부터 둔궤도수와 검무도수(강가 백사장 단 위에서)로 공부하시더니 다음해 2월 17일(양력 4월 5일) 공부를 마치시자 둔궤 문이 스스로 열리는 기적이 일어남. 또 그해 5월에는 장·중·단 3자루의 칼을 가지고 검무도수로 100일간 공부하심.사진 ① 반구정의 전경. ③ 반구정 아래 낙동강 가의 단도수 보시던 터.

안면도 쇠섬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12(1920)년 10월 단도수로 100일공부, 25(1933)년 봄에 조수도수로 100일공부를 하신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동쪽 천수만의 쇠섬(일명 철도).사진 ① 현재 간석지로 안면도와 연결된 쇠섬의 전경. ② 쇠섬 동북쪽의 바닷물이 썰물로 빠져나간 상황(이곳 중간 쯤이 조석간만으로 인한 바닷물의 흐르는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이므로 단을 모으시고 조수도수를 보시던 곳으로 추측됨).

无極大道 創立

 이해(辛酉=1921년) 4월 28일의 봉천명일 대치성을 기하여 참으로 종교사상에도 큰 역사적 사실이 전개되었으니 그것은 정산께서 봉천명이래 13년간 공부해온 도(道)가 바로 무극대도이고 자신이 그 도주임을 천하에 고(誥)하신 일이다.이날 정산께서는 통사동 공부처에서 이렇게 언명하셨다.“내가 13년전 오늘 천명과 신교(神敎)를 받들어 구천상제님께서 물샐 틈 없이 짜놓으신 도수를......성취하였노라......그 원강(原綱)은 오직 무극대도라. 천명, 천서, 천보의 삼천(三天) 대운(大運)에 부합하여......이는 내가 구천상제님의 도통계승자임이 실증됨이라. 이에 나 스스로 무극대도주의 권명(權名)을 천하에 고하노라”이날 치성때에 맑은 하늘에 번개가 치고 뇌성이 진동하였는데 이것을,“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상제께서 하감흠향(下鑑歆饗) 하심이니라” 하셨다. 그리고 도인들로부터 도주 취임의 하례를 받으시고 도의 체제를 갖추어 임원을 임명하셨다.5월에 그동안 남의 소유가 되었던 회문리 옛집을 서산공으로 하여금 복원(復元)하게 하시고 그 가족을 이사시켜 고기(故基)와 선영(先塋)을 수호하게 하셨다.무극대도를 선포하신 후에도 정산 도주님은 다시 백일공부를 시작해서 8월 중순에 마치셨다.이해 9월 초5일은 도의(道義)적으로 의의 깊은 날이다. 그것은 이날 도주님께서 도로서는 도조(道祖)가 되시고 도의로서는 신앙의 대상이신 구천상제로 받드는 증산상제님의 도통(道統)을 계립(繼立)하신 진주이지만 재세시의 인신(人身)으로는 직접 받들지 못하심을 대신하여 그 성체(聖體)를 모셨기 때문인 것이다.도주님께서는 이날 증산상제님의 모친 권씨 대모와 상의하신 다음 혈연(血緣) 유족(매씨 선돌부인, 따님 강순임)과 임원들을 대동하고 김제 청도리 동곡 뒷산의 증산상제님 빈소(殯所)에서 고천의례(告天儀禮)를 올리신 후에 그 성골(聖骨)을 수렴(收殮)하여 통사동 영모재 공부실로 옮겨 봉안하고 대치성을 올리셨다.이로부터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삭망절사(朔望節祀)를 법도대로 몸소 봉행하시니 이것이 삭망도수였으며 이 도수에 따른 백일공부를 하시며 이러한 한시 한수를 읊으셨다.

“時時默誦空山裏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항상 잠잠히 빈 산 속에서 외우니,밤마다 한가로이 잠긴 방 가운데서 듣는다.분명히 조화가 성공하는 날에,요, 순, 우왕이 일체로 같으리라.)이무렵 도주님께서 구천상제의 성령(聖靈)을 봉안하고 도단(道團)의 본부가 될 도장(道場)의 영건(營建)을 임원들에게 명하셨다.이에 도장영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니 그 도유사(都有司)를 서산공으로 하고 각 도·군의 유사가 선정되어 이들의 활동으로 이해 연말에 도장영건 기금(基金)으로 3만원의 성금이 원납(願納)되니 이것이 원납도수였다.도주님께서는 만주 망명시절에 의흥 예씨(芮氏 : 휘 鍾麟, 도호 崇道夫人)와 결혼하셨으나 예씨께서 10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으시므로 이해 11월에 부모님의 주선에 따라 전주 이씨(李氏 : 휘 金漢, 도호 崇政夫人)와 결혼하셔서 비로소 인신으로서의 후사(後嗣)를 두게 되신다.임술(壬戌=1922)년 정월 23일 밤중에 폭도 20여명이 공부실에 침입하여 상좌에 모신 상제님의 성골과 도장기금의 일부를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이날 도주님께서는 모든 임원들을 지방포덕에 보내신 다음 영모재 공부실에서 우수절(雨水節) 절후치성을 입절(入節)시각인 술시에 올리시고 참례원인 도장(道丈) 내외분, 선돌부인, 숭정부인과 도인 몇사람은 폭도들이 몰래 몽혼약(昏藥 : 마취제)을 타넣은 음복을 하고 일찍 잠들었다가 폭도들의 습격을 당한 것이다.폭도들은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와서 참례원들을 사정없이 때리고 마당으로 끌어내어 묶어 놓았으며 도주님께서는 이때 공부실의 중요 물품을 미리 챙겨놓으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시는데도 폭도들이 알아 보지 못해 무사하셨으나 도장께서는 주무시다가 그들의 몽둥이에 맞아 오른손목의 뼈가 부러졌는데 병원에서 치료하셨으나 완쾌되지 않으셨다.도주님께서 폭도들이 돌아간 뒤에 공부실을 살피시니 왼손 성골이 남아있으므로 천지도래일장중(天地都來一掌中)의 뜻을 되새기시며 수습하셨다.그 후에도 폭도들의 도장기금 전부와 증산상제의 왼손 성골을 강탈하려는 행위가 계속되므로 도주님께서는 대전의 빙댁(聘宅)으로 옮기셔서 공부하셨는데 저들이 거기까지 찾아와서 행패하다가 결국 경찰에 넘겨져서 실형을 언도받음으로써 사건이 종결되니 이것이 음해(陰害)도수였다.3월에 도주님께서 통사동 공부처를 폐쇄하시고 서울 도화동에서 백일공부를 하셨는데 이때 서울의 명사급 인사들이 많이 입도하였으며 윤 5월에 다시 돈암동에서 제2차, 9월에는 적선동에서 제3차 백일공부를 단 위에 태극기와 만국기를 세우시고 하시는 동안 포덕에도 힘을 쓰셨다.이로써 3처 3도(三處三度)의 서울도수를 성취하신 것인데 이때 도주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은 60년이 지난 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어서야 도인들은 비로소 ‘도주님께서 과연 진법의 진주이신 동시에 바로 태극주, 옥황상제로서 시행하신 도수공사가 여실히 실현되는 것임’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이는 조선의 서울이 태극의 중심이 되는 도수라. 1갑(一甲 : 60년)이 지나면 천하 만국인이 가슴에 태극을 품고 서울로 와서 세계일가( 世界一家)의 기틀을 다지며 환호하는 날이 있으리니 그 아니 장하랴. 그러나 그대들은 새 서울이 따로 있음을 알지니라”“그 1갑이 지나면 나의 태극진리도 문명(文命)으로 화(化)하여 새 서울에서 큰 소리를 치리니 시유기시(時有其時)며 시호시호(時乎時乎)니라”“계해(癸亥=1923)년 정월에 서울도수 공부를 마치신 도주님 께서는 고향인 칠원 회문리로 오셨다가 밀양 세천(洗川) 김병문(金炳文)의 집, 유천(楡川) 장득원(張得遠)의 집에서 단(壇)도수, 둔(遁)도수, 납폐(納幣)도수 또는 진인보두법(眞人步斗法)으로 백일간씩 공부를 계속하셨는데 세천 공부 때 쓰신 납폐지를 후일 태인도장을 영건하실 때 그  영대 터에서 소화하셨다.도주님께서 이해 6월 24일 상제님 화천일을 당하여 회문리 고기(故基)에서 대치성을 올리시고“대도의 제왕지운(帝旺之運)이 다가오고 있느니라......세운(世運)을 자각하고 포덕 수도에 더욱 힘쓰라”하시며 전도문(傳道文)을 내리시니 세운과 도운(道運)을 밝히신 글로서 지금도 전해오고 있으므로 여기에 수록한다 (다만 이글이 해석하기 어려운 운율(韻律)의 한시(漢詩)이므로 간단히 직역을 붙였다.

傳道文七十九歲爲章二十七章是會當三會爲統三統元循環往復互無疆四六一七前丁巳軒轅立極肇斯元萬象萬事皆有定諸法諸書總此源傳頊勛華禹初統初會世世聖日出萬暉同發明春回品物共華盛初統之中降中季聖不承承但一時禹後有湯湯後文一會一聖應會期中統由來世漸降聖不道行但敎傳釋後有孔孔後耶一會一敎各門筵季統敎亦無肇聖惟有述聖繼啓來佛梁儒宋耶羅馬一敎一昌應會回”(도를 전하는 글7회 윤달의 19세(연)는 1장이 되고,27장(513년)은 1회에 해당한다.3회(1539년)를 통으로 하고 3통(4617)을 원으로 하니,순환하고 왕복하여 서로 끝이 없다.지금으로부터 4617년 전 정사년에,황제 헌원씨가 황극(皇極)을 세움이 원의 시작이다.모든 현상, 모든 일이 모두 정함이 있고,모든 법, 모든 글이 모두 이에 근원한다.황제로부터 효, 욱, 곡, 훈, 화, 우임금까지 전함이, 첫 통의 첫 회(513년)에는 대대로 성인이었다.해가 돋아나면 모든 빛나는 것이 함께 발명되고,봄이 돌아오면 모든 물건이 함께 빛나고 왕성해진다.첫 통의 중간과 마지막 회(1026년)에 내려오며, 성인이 이어지지 않는 다만 한 때였다.우임금 뒤에 탕임금이었고 탕임금 뒤에 문왕이었으니,1회(513년)에 1성인이 회의 기간에 응한다.중간의 통(3078년 전)이래로 세상이 점점 내려가서,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고 다만 교가 전해졌다.서가 뒤에 공자였고 공자 뒤에 야소(예수)였으니,1회(513년)에 1교가 각각 교문의 자리를 이루었다.마지막 통(1539년 전)에는 교도 또한 시작하는 성인이 없고, 오직 성인을 서술(敍述)하여 이어옴이 있을 뿐이었다.불교는 양나라, 유교는 송나라, 야소는 로마에서,한 교가 한번 창성함이 회(514년)에 응하여 돌아온다.)이해 8월에 유천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다시 청도 적천사(蹟川寺) 도솔암(兜率庵)에서 서울에서와 같이 단을 쌓고 그 위에 태극기와 만국기를 세우신 다음 백일공부로써 단도수를 보시며, “단도수의 단(壇)은 단(檀)과 같은 뜻이므로 단군의 명호도 이를 취함이니......해원의 대운이 제래(齊來)하게 되리라”하셨다.이때 대도를 선포하신지 3년, 도세(道勢)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그동안 음해도수 등으로 도장을 영건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임원들이 과거에 구성된 도장영건 추진위원회를 재정비하고 그 후보지를 도주님께 여쭈니,“도장의 기지는 태인(泰仁) 도창현(道昌峴)이 천장길방지지(天藏吉方之地)니라......그러나 그곳에 치마바위가 있어야 한다”하시고 이상우 등에게 찾도록 하셨다.그들이 도주님 뜻에 가합(可合)한 곳을 물색하여 보고하매 몸소 가셔서 확정하시고 5천 5백평의 부지를 매입하게 하시니 댓가는 벼 3백 50석이었다.그런데 기이한 일은 그때의 치마바위란 그 부지의 표면에 솟아난 바윗돌 몇개였으나 명령에 따라 흙을 파서 대지를 정리하니 높이 약 3장(丈)에 길이 약 50칸이나 되는 성채(城砦)모양, 병풍모양의 바위가 신기한 경관을 이루었고 대지 중앙에서는 샘물이 솟아나서 후일 수천명의 용수에 넉넉하였으니(도인들은 이샘을 유천(乳泉)이라 불렀다) 과연 천장길방의 비경(秘境)이었으며 지금도 태인에 가면 누구나 다 치마바위의 뜻을 감지할 수 있다.갑자(甲子=1924)년에 무극도 도장 영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주님께서는 그 설계와 시공의 세부까지 몸소 감검(鑑檢)하시는 한편, 5월에는 밀양 종남산의 영성정(靈聖亭)에서 납폐도수, 8월에는 대구 남산정에서 대구(大救)도수, 9월에는 멀리 중국까지 순행(巡幸)하시며 대중화보은(大中華報恩) 도수를 보시고 회문리에서 과세하신 다음 태인으로 돌아오셔서 도장공사를 독려하셨다.도장 건물은 착공 2년만인 을축(乙丑=1925)년 4월에 영대(靈臺)와 도솔궁(兜率宮)이 완성되고 이듬해에 다른 부수건물들 모두가 준공되었다.영대는 3층에 구천상제의 영위(靈位)를 모시고 1·2층은 집회장인데 총 48칸이고 도솔궁은 총 72칸으로서 4·3·2층에 33천(三十三天), 칠성신명, 육정신 등을 각각 모셨으며 1층은 중궁(中宮)이라 하여 도주님의 공부실로 하셨는데 영대의 외부는 2층이나 내부는 3층이고 도솔궁의 외부는 3층이나 내부는 4층으로 되어 웅대하고 절묘한 건물이었다.그밖에 각종 회관, 사무실, 거실, 주방, 창고, 작업실 등 총 19동, 240여칸의 건물 모두를 청기와로 이<>고 전통 단청을 하여 참으로 장관을 이루었는데 공사기간 33개월, 노력인원 연 12만명, 공사비용 5만원이란 당시로서는 엄청난 공사였다.이달 28일 봉천명일을 기하여 도장영건과 영대 봉안치성을 아울러 올리시며 상제의 영위를,“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至神至聖聖靈之位”로 하여 모시셨다.이 일을 축하해서 3일간의 연회를 베푸셨는데 그보다도 더 큰 일은 이때 무극대도의 ‘취지서’를 포유(布諭)하신 일이다.“夫 道也者는 天所命而 人以行之者也ㅣ라 (대저 도라는 것은 하늘이 명한 바이고 사람이 행해야 하는 것이다)”로 시작되는 취지서를 비롯하여,‘신조(信條) :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寃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과‘4강령(四綱領) : 안심(安心), 안신(安身), 경천(敬天), 수도(修道)’‘3요체(三要諦) : 성(誠), 경(敬), 신(信)’, 그리고 도단(道團)의 기본 규칙인 ‘도규(道規)’도 아울러 공포하셨다.또 치성의례의 절차와 입도치성절차, 갑기일(甲己日)을 주일(主日)로 제정하시고 기도시의 절차와 봉송주문을 제정, 또는 교시(敎示)하셔서 대도의 조직체계와 의례 절차 등을 빠짐 없이 완비하셨다. 뿐만 아니라 20여 정보의 상수답(上水畓)을 매입, 본부의 직영경작으로 도단 경용(經用)을 자급(自給)하게 하시고 치성답 5천여평을 두셔서 치성미(致誠米)를 자족(自足)하게 하셨다.이렇게 대도의 체제가 정립되니 도세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도인의 수가 수10만에 달하였다.이해 9월 상제 강세치성 후에 ‘각도문(覺道文)’을 포유하시고 주문의 일부도 변경하셔서 봉송절차와 횟수 등도 교시하셨다.이해 그믐에 한 임원이,“도주님께서 새해에는 천자위(天子位)에 등극하옵소서”하고 여쭈니, “나의 일은 한 나라의 일에 국한되는 군왕(君王)사업이 아니라......3계 전체를 개벽 광구(匡救)하는 공사니라”하고 훈교하셨다.병인(丙寅 : 1926)년 봄에 회문리 구가(舊家)를 중수하게 하신 다음 그 옆에 회룡재(廻龍齋)란 아담한 정사(精舍)를 짓고 그 앞에 연못을 파게 하시며,“이는 뒷날의 일을 예비하는 도수니라”하셨다 (이 회룡재가 10년 후부터 잠룡(潛龍), 회룡(廻龍), 현룡(見龍)으로 연결될 도수에 관련되는 것임을 20년이 지난 8·15광복 후에야 알게 되었다).무진(戊辰 : 1928)년 설날 도주님께서 ‘포유문(布諭文)’을 내리셨다.”人生處世에 有何所欲고(사람이 나서 세상을 삶에 있어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로 시작하여 “欽吾道友는 勖哉勉哉어다”로 끝마친 글이 뜻도 좋지마는 글도 명문장으로서 도인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처세훈(處世訓)이 되는 글이었다.이해 봄에 청장년(靑壯年) 도인으로써 진업단(進業團)을 조직하시니 이는 도인들의 생활안정과 산업 장려, 빈민구제를 위한 것이며 각처의 수리(水利), 개간, 간척(干拓)등 사업에서 성·경·신을 신조로 하는 근무로써 사업장마다 신임을 얻어 좋은 실적을 올렸는데 이것을 단원(團員) 도수라고 했다.이해 추석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훈교하시기를,“지금 우리 도가.......성화(盛花)의 국격이다. 그러나 개화(開花)에는 낙화의 도수가 따르느니라”하시고 한시를 읊으셔서 난국이 닥쳐올 것을 예시(豫示)하셨다.“戊辰年來開花期............乙丙之間落花期”(무진년부터의 개화 도수가............을해, 병자년에 낙화도수가 온다.)기사(己巳 : 1929)년 9월 도인 15명을 뽑아서 개안(開眼)공부를 시키셨는데 7일만에 그들이 모두 천문지리(天文地理)며 의표(意表)밖의 일에 눈이 밝아졌으나 도주님께서는,“이만하면 넉넉히 경험했을 것이다. 대도의 목적은 도통이라, 개안에 그칠 일이 아니니 이만 거두리라”하시니 일제히 그전의 상태로 돌아갔다.경오(庚午 =1930)년 봄에 진업단을 증원시켜서 1개단 200여명은 북만주 목단강 근처로, 1개단 300여명은 함경도 무산으로 보내어 벌채사업에 종사케 하셨다. 진업단이 2년 후에 돌아올 때까지 왜경에서는 만주지방의 독립군과 합류할까 의심하여 그 해산을 강요하거나 벌채허가를 취소하는 등 여러가지로 방해하고 위협했으나 굴함이 없이 많은 성과를 올렸다.진업단이 돌아오자 도주님께서는 미리 계획하신 안면도(安眠島)와 원산도(元山島)의 간척사업을 착공하게 하시니 안면도는 창기리(倉基里) 앞바다를 막아 80여정보, 원산도는 50여정보의 논과 염전(田)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 공사의 비용 또한 커서 현금 1만여원과 쌀 300석이었다.간척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주님께서 직접 공사장에 임하셔서 단원들을 위로, 격려하시고 다시 그 근처 쇠섬에 단을 모으고 그 위에서 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을 살피시며 백일간 도수를 보셨다.도주님의 산업개발의 의지와 그 생산교단으로서의 정립을 위한 포부는 실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데가 있으셨다.임신(壬申 : 1932)년 여름에 도단의 재정책임자 김병팔(金秉八)에게 명하셔서 전주 이서(伊西)의 사금광(沙金鑛),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無極鑛山)을 위시한 전국의 72개 광구(鑛區)를 출원하고 그 일부의 채광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셨다.뿐만 아니라 개간공사, 하천공사, 수리공사, 도로공사 등 태인을 중심한 무극도 진업단의 비상한 활동업적을 여기에 모두 기록할 수는 없다.그리고 도주님께서는 수10만 도인을 거느리시고 또 막대한 사업을 전개하시면서도 항상 도단의 임원들로 하여금 포덕과 교화에 소홀함이 없도록 독려하실 뿐 아니라 몸소 수도 공부에 정진하시며 겪으신 고초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으셨다.

밀양 세천리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15(1923)년 정월부터 둔도수와 납폐도수로 100일공부를 하신 경남 밀양군 상남면 세천리 김병문의 집자리.사진 ① 세천리 전경(위쪽에 대밭으로 둘러 싸인 기와집 터가 공부처). ② 그 터에 약 50년 전 지은 농가(마루에서 그당시 집주인 문씨와 공부당시 시봉하던 배문걸씨가 대화하는 모습).

밀양 유천리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15(1923)년 5월부터 단도수와 진인보두법으로 100일공부를 하신 경남 밀양군 상동면 유천리 장득원의 집자리.사진 아랫쪽 오른 편 집이 그 자리에 약 30년 전 지은 농가.

? 화악산 적천사 도솔암 공부처 ?도주님께서 도기 15(1923)년 8월부터 단도수로 100일공부를 하신 경북 청도군 청도읍 화악산 적천사 도솔암 공부처 자리.사진은 약 30년전에 도솔암 자리에 지어진 무념정사 ①와 칠성각 자리에 지어진 삼성각 ②.

무극도 태인도장 터도주님께서 도기 15(1923)년 12월 초 6일 몸소 도장 기지를 정하시고 건물을 영건하셔서 17(1925)년 4월 28일 영대를 봉안하신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도창고개 무극도본부 태인도장의 터.태인도장은 27(1935)년 12월 왜정 총독부의 종교단체 해산령에 따라 무극도 해산과 동시에 도장건물이 경매, 철거되고 해방 후 이 터에 태인사람 정씨가 학교건물을 지었으나 현재는 폐교되어 그 일부만 공장으로 쓰임.사진 ① 도장 대지를 조성할 때 자연히 나타난 치마바위의 모습(길이 약 100m, 높이 6~7m). ② 무극도 당시의 도장건물 모습. ③ 현재 폐교가 되어 방치된 학교건물과 운동장 모습.

종남산 영성정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16(1924)년 5월부터 납폐도수로 100일 공부를 하신 경남 밀양군 상남면 종남산 아래 선산김씨 재실 영성정 터.사진 ① 종남산 상봉의 모습(영성정 터는 우측봉우리 바위 아래 약 150m 거리에 있음) ② 영성정이 있던 터(6·25사변 당시 불타고 빈 터만 남았음)의 모습.

회문도장 회룡재 터도주님께서 도기 18(1926)년 4월 회문리 옛터에 3칸퇴 규모의 회룡재를 영건하시고 그 13년 후부터 부산도장으로 이어하실 때까지 10년간 잠룡, 회룡, 해박도수 등 많은 도수로 공부하시고 37(1945)년 7월 초3일(해방 5일 전) 태극도를 선포하신 곳.42(1950)년 7월 6·25사변 당시 불태워지고 현재는 그 주춧돌만 남아있음.

안면도 창기리 간석지도주님께서 도기 27(1935)년 봄 무극도 진업단의 간척사업으로 바다를 막아 논을 개간하신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약 80정보(24만평)의 간석지.이 간석지는 공사가 완공되자 왜정당국의 강압으로 왜인회사 마생에게 강탈당하심.사진 ① 간석지 제방의 모습. 제방의 좌측이 간석지임.

 

 

 

 

 

 

潛龍 · 廻龍 度數

도기(道紀) 27년 을해(乙亥 : 1935)년부터 도단에 비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우선 완공되어 농토화한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척지에 왜인의 마수가 뻗쳐온 것이다.허가서류가 미비라느니 공사가 불법이라느니 하다가는 결국 불령선인(不逞鮮人 : 불평불만을 품고 복종하지 않는 조선사람) 집단의 반일(反日)운동이라는 트집을 잡아 이 간척지들을 수탈당하는 사건이 생겼다.이로써 안면도 간척지는 왜인 회사인 마생(麻生)의, 원산도 간척지는 보령군(保寧郡)의 소유로 넘어가는 결과가 되었으나 단돈 한 푼의 보상도 없었음은 물론이다.임원들의 울분에 찬 하소연에 도주님께서는,“망국민(亡國民)의 억울함이 어찌 이뿐이랴? 모든 것이 도수니라. 그러나 이로써 조수와 토지를 조화시켜 해원하였으며 또 많은 빈민이 노임을 얻었고 소작이나마 경작지가 생겨서 구제되었으면 족할 뿐, 그 소유가 누구에게 돌아감을 탓하랴. 장차 오늘의 시범(示範)을 알게 되리라”하시고 임원들이 서두는 송사(訟事)를 중지시키셨다.8월 추석치성 때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근엄하게 교시하셨다.“모든 일에는 때의 도수가 있느니라.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이 바로 낙화도수와 잠룡(潛龍) 도수의 시작이니 나의 27년간 헛도수가 또한 지금이라, 나는 다시 입산(入山) 수도할 것이니 그대들도 각자 귀가(歸家)하여 내가 다시 찾을 때를 기다리라” 하셨으나 그래도 임원들은 그 뜻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12월에 조선총독이 전북지사 고원훈(高元勳)을 도주님께 보내어 친서를 전달하고 감언이설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에 동조할 것을 강요했다. 이에 대하여 도주님께서는,“이런 일은 그대가 아니고 일본 왕이 직접 와서 말한다고 해도 안되는 일이니 총독에게 내말 그대로 전하라”하고 단호히 거절하셨다.그러나 지사는 그후에 다시 와서 비상시국(非常時局)을 말하며 당국의 정책에 협조할 것을 재삼 간청했지만,“나는 이미 도단을 해산하고 때를 기다리기로 결심했으니 다시는 도에 대한 일을 거론하지 말라”하고 전일보다 더욱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지사는 결국 공문으로 그들이 말하는 ‘종교단체 해산령’을 전하고 무극도의 해산을 통고했다.이해 그믐날 설치성을 전보다 더욱 성대히 준비하게 하시고 제석(除夕)배례를 올리는 임원들에게,“도의 낙화도수와 나의 잠룡도수가 다달았다. 내가 지난 추석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대들은 각자 귀가하여 생업에 종사하며 부모처자를 봉솔(奉率)하고 내가 찾을 때를 기다리라. 잠룡은 물용(勿用)이나 현룡(見龍)을 기(期)하고 낙화는 비정(非情)이나 결실을 위함이니 결실전에 요동하면 화가 있으리라. 1년이 되거나 10년이 될지라도 나와 도를 믿고 기다리되 만약 지동지서(之東之西)하면 만나지 못하리니 각골 명심하라”하고 엄훈(嚴訓)하셨다.명령을 마치시고 임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굽어살피신 다음 치성을 집례하셨는데 예필(禮畢) 후에 영대의 촛불이 일제히 꺼지므로 다시 켜고 철상(撤床)하게 하셨다.병자(丙子 : 1936)년 설날은 무극도의 임원 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암울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 도주님께 세배를 드리려고 모두 모였으나 끝내 뵈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일동은 누누이 말씀하신 ‘잠룡도수’의 참뜻을 그때서야 체인(體認)하는 듯 하였다. 그래서 장시간 논의한 끝에 얻은 결론은 모두 각자 귀가하기로 한 것이다.도주님께서는 벌써 이날 새벽 치성 직후에 은밀히 시종 몇 사람만 거느리고 전주로 가셔서 공부설석(工夫設席)하고 두문불출하시며 도내외(道內外) 누구에게도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엄명하셨다.지방의 도인들은 무극도가 해산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매일 수백명씩 도장으로 찾아와서 “무극도의 해산은 왜정의 탄압 때문이라”하며 울분을 토하다가 마침내는 그 앞잡이인 태인주재소와 정읍경찰서를 습격하자는 모의까지 하게 되었다.그러나 감시의 눈을 부라리고 있던 경찰에게 탐지되어 무장경관 수십명이 도장에 들이닥쳐 도인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도주님 이하 전체 도인의 정성과 노력으로 이룩된 도장 건물도 몰수, 경매, 철거하는 만행을 왜경은 서슴없이 저질렀다.도주님께서는 전주 대정정, 완산정에서 공부하시다가 3년만인 무인(戊寅 : 1938)년 봄에 마산 교방동(校坊洞)으로 옮기셨는데 공부처에는 누구의 출입도 엄금하시고 가족들의 왕래도 엄히 제한하셨다.증산상제님의 유족(대모 권씨, 사모 정씨, 매씨 선돌부인, 따님 강순임)은 도주님께서 마동 상봉 이래 한 가족과 같이 부양하시더니 태인도장 영건 후에는 태인읍 태성리(도장에서 남쪽으로 약 1000m 거리)에 주택을 사서 살게 하시며 생계를 보조하셨다. 무극도 해산 후에는 혼자 남은 강순임을 전주시 노송동에서 살게 하시며 재정담당 김병팔을 시키셔서 생활비를 전달하게 하셨더니 1년 후에는 김병팔과 함께 경북 의성지방으로 가서 독자의 교단을 창설함으로써 도주님과의 인연을 끊었다.도주님께서 다음해 가을에 회문리 고향집으로 옮기셔서 회룡재에서 두문불출하시며 공부를 계속하셨다.이무렵 왜국의 폭정은 날로 혹독해져서 시국은 각박하고 인심은 흉흉하였다. 징병, 징용, 보국대, 양곡공출로 부터 심지어 가마니, 새끼, 송진, 놋그릇까지 수탈하고 저희 조상신을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강조하는 등 경제적 착취와 정신적 압박을 가하더니 마침내는 조상전래의 성씨까지 저희와 같이 두 자 성으로 갈게하는 발악적 만행을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더구나 도주님 가족은 과거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 항일운동한 사실과 비록 이미 해산은 되었지만 무극도가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종교였다는 사실에 따른 왜경의 요시찰(要視察) 대상인물로 지목되어 감시가 심하고 행동의 제약까지 받았다. 이때문에 숙부 서산공과 신산공은 몸을 피하여 만주 또는 일본으로 가서 장기간 유랑생활을 하기에 막심한 고초를 겪었다.경진(庚辰 : 1940)년 가을 잠룡 5년만에 비로소 회룡도수의 천계(天啓)를 받드시고 무극도 당시의 임원 이용직(李龍稙)을 회문리로 부르셨다.이때 도주님댁의 식솔(食率)은 10여명이었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이는 시종(侍從) 반상문(潘相文) 혼자 뿐이고 약간의 농사를 지었으나 모두 공출로 빼앗기고 오직 대두박(大豆粕)등 잡곡배급으로 생활하며 거기에 왜경의 사상사찰로 행동까지 부자유한 그 궁핍·고난상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이런 속에서도 도주님께서는 회룡재에서 공부를 계속하셨는데 혹한에도 공부실에 불을 때지 못하게 하시고 항상 법좌(法坐)하여 법수(法水)그릇을 두 손에 받쳐들고 밤을 새워 공부하셨다. 법수가 넘쳐서 손에 고드름이 달리고 손가락은 동상으로 터져서 배접한 위에까지 피가 흘러도 동요하지 않으셨다.신사(辛巳 : 1941)년 정초에는 회룡(廻龍)도수와 인덕(人德)도수를 말씀하시며 포덕(布德) 재개를 하명하셨다.12월에 상설(霜雪)도수라고 하시며 15일간을 회룡재 뒷마당에 볏짚을 편 자리에서 철야하여 공부하시는데 매일 밤 서리는 물론 눈이 내려 의관을 덮는 적설(積雪) 속에 묻히다시피 하여도 참고 완공(完工)하셨다.임오(壬午 : 1942)년 봄에 도주님께서, “나도 이제는 머지않아 새옷을 갈아입게 될 것이다”하시며, “이 도장을 ‘회문도장(會文道場)’으로 부르도록 하라”고 명하셨다.계미(癸未 : 1943)년에 이르러서는 새로 찾아드는 도인(道人)이 수 100호로 늘어났다. 왜정의 소위 전시비상체제하(戰時非常制下)에서 그들의 감시를 피하여 숨어서 하는 포덕이라도 이정도였으니 만약 드러낸 포덕이었으면 얼마나 하였으랴 하는 생각이 든다.이 기간에도 도주님께서는 도수에 따라 행동하시며 잠시도 쉬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시는데 그동안 많은 기행(奇行) 이적(異蹟)도 행하셨지만 일일이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갑신(甲申 : 1944)년 어느날 도주님께서,“내 나이 지천명(知天命 : 50)이며 득도한지 27년이고 잠룡도수도 어언 9년인데 앞으로는 인덕(人德)도수의 법공부(法工夫)라야 할 것이다”하시고 포덕에 힘쓰게 하시며 공부를 계속 하셨다.9월  하순에 창원 천주산(天柱山)속에 초막을 치시고 백일공부에 들어가셨는데 이때 말씀하시기를,“이는 창생의 해박(解縛)을 위한 해방도수의 연속이라”고 하시며 무한한 고행을 하셨다. 이때 이용직이 시봉(侍奉)하였는데 날씨가 얼마나 추웠던지 공부석 앞에 모셔 놓은 법수의 얼음이 솟아올라 수염의 고드름과 연결될 정도였으나 그래도 불을 때지 못하게 하시며 움직임 없이 공부에만 정려하셨다.드디어 을유(乙酉 : 1945)년이 되었다. 설날 치성 후에 임원들에게 내리신 말씀을 오늘에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내가 천명을 받든<奉天命>지가 올해로써 36년, 잠룡한지도 10년이다. 이 잠룡·지각(知覺)도수의 고비를 넘겼으므로 나의도에 새 도수기운이 비치어 온다. 태중의 아이도 열 달이면 새 세상으로 나오고 잠(潛)도 회(廻)하면 현(見), 비(飛)하는 도리를 그대들이 알아야 한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보아라. 7석(七夕) 상봉(相逢)이 있으리라”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모두가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씀으로 들렸으나 8·15광복이 되고서야 그 깊은 뜻을 실감하였다.2월 하순에 다시,“내가 지난 3년간 태극의 기동(機動)과 해박, 현룡(見龍)의 대도수로 3·8동방목운(東方木運)을 회선(廻旋)시켜......도운(道運)과 국운의 회룡도수를 성취코자 계속해온 공부의 마지막 백일공부에 들어간다”하시고 6월 초순까지 홀로 고행을 하시며 수도하시고,“이번 도수에는......진묵(震默)과 이마두(Matteo Ricci)등 문명신들도 모두 소환하여 공사(公事)에 협력하게 하리니 그 신명들이 돌아올 때는 천지이변(天地異變)이 일어나리라” 하셨다.이 도수공부에서 3복(三伏) 더위에 얼마나 신고하셨던지 옥체가 수척하여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셨으며  몸을 가누지 못하시고 여러번 쓰러지기까지 하시므로 시종하던 이용직이 너무나 황공하여, “아무리 창생구제를 위하시는 일이라도 옥체를 보전하옵소서”하고 여쭈니,“이 고행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요......내가 이렇게 신고하여도 천하창생을 다 살릴 수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로다”하시며 공부를 계속하셨다.

전주 완산동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28(1936)년 무극도 해산 후 잠어하셔서 2년간 공부하신 전북 전주시 완산동 집.사진은 그 당시의 목조 와즙의 모습 그대로인데 이집은 도중 가족의 주택이었고 공부처는 이집 뒤에 있는 집이었으나 사진에는 나오지 않음.

증산상제 유족이 살던 집도주님께서 도기 17(1925)년 봄에 증산상제님의 유족(대모권씨, 사모 정씨, 매씨 선돌부인, 따님 강순임)이 살도록 사주신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성리(무극도도장 남쪽 약 1㎞거리)의 집.사진은 그집의 30년전 모습으로서 ①은 바깥쪽, ②는 안쪽 모습.(현재는 철거되고 공장부지가 됨).

 

 

 

 

 

 

 

 

 

 

 

 

 

 

 

 

太極眞法의 胎動

정산 도주님께서 이해 6월 24일 구천상제 화천치성을 마친 다음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중대한 일이 있으니 도장에 머무르라. 그대들이 도수하는 말은 들었지만 실지로 보지는 못하였으니 이번에는 직접 참여하여 눈으로 보아야 하리라”하셨다.임원들은 함께 묵으면서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였으며, 또 전임원이 이렇게 여러날 함께 공부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도주님께서는 그동안 잠룡도수 이후 어려운 생활속에서 왜경의 감시를 받으시면서도 구천상제의 강세일, 화천(化天)일은 물론, 봉천명일, 득도일, 명절, 절후 등의 치성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으시고 그때마다 몸소 빚으신 청주로 헌작(獻酌)하시는데 이를 위한 시루, 용수등 기물과 누룩, 술밥등 자료를 항상 예비(豫備)하셨으나 왜경의 취체에는 한번도 발각되지 않으셨다. 임원들은 도주님의 지난 10년간에 걸친 고초를 회상하며 감탄하였다.7월 초3일 저녁에 문후(問候)를 드리는 임원들에게 도주님께서 각별히 자애롭게 말씀하셨다.“내 오늘은 그대들에게 태극의 진리를 도상(圖像)으로 설(說)하리라. 무극이 곧 태극이니 이는 곧 우리 도의 연원(淵源)이며 또 우주 전체의 생성(生成)발전하는 대원리니라.”그리고는 흰 비단으로 너비는 두 폭, 길이는 그 3배로 한 기폭을 만들게 하셔서 친히 붓으로 그 기폭의 중앙에 둥근 청·홍의 태극의 도상(圖像)을 그리시고 그 둘레에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8괘(八卦)를 그리신 다음 이렇게 교시하셨다.“이것이 태극도(太極圖)니 중앙의 원은 무극(无極)이지만 기동(機動)하는 음·양이 태극을 이룬다. 이것이 태극기인데 우리 도의 기가 되고 나라의 국기도 되느리라. 이 기가 곧 주역에서 “태극이 양의(兩儀 : 음양)를 낳고 양의가 4상(四像 : 太陽, 太陰,  少陽, 少陰)을 낳고 4상이 8괘를 낳는다’고 한 그대로를 도형화한 것이니라. 지금까지는 왜가 금기(禁忌)하고 있지마는 이것이 우리 도의 신앙과 사상의 표상(表象)이요 만유군생(萬有群生)의 근원이니라”다음날 아침에 집뒤 대밭에서 한그루 베어온 깃대에 태극기를 매어 달아 회룡재 뜰에 세우게 하시고 그 깃대를 숭도부인(崇道夫人 : 도주님 부인)에게 혼자 붙들게 하신 다음 기를 향하여 법좌(法坐)하시고 태을주를 연송(連誦)하시므로 일동도 따라 하였다. 이때 동쪽에서 부는 바람이 강해서 부인이 아주 힘들어 땀투성이가 되셨는데 얼마후에 도주님께서 손을 올리시니 바람이 멎었다.이렇게 하시기를 3일째 되던 날 오정(午正)에 갑자기 큰 소리로, “태극이 기동하니 만물이 자시자생(資始資生)이로다”하시고 혼자 말씀으로,“인(仁 : 日王仁 을 뜻함)아, 네가 이제 태극 앞에 고개 숙였다. 그러나 네 이름자의 덕으로 명은 유지되리라” 하셨다.이 공사(公事)를 마치시고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이 태극기를 동구 밖에 갖다 세우라”하셨으나 임원들은 시국의 위험을 염려하여 주저하는데 평소에 용기가 있던 김태만(金台萬)에게 시키시니 그가 뛰어가서 동네 앞 정자나무에 기대어 세워놓고 급히 돌아왔다. 이때 임원들은 엄명이기 때문에 시행은 하였으나 겁에 질려 좌불안석(坐不安席)하며 그날 밤을 뚠눈으로 지새웠다.이해 7월 칠석(七夕)의 다음날은 양력 8월 15일이다. 새벽에 도주님께서 새 옷을 갈아입고 계시는데 못보던 소년이 나타나서 도주님께 사뢰기를,“왜왕(倭王)이 간밤에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지므로  임원들이 이상히 생각하여 여쭈니,“그는 신동(神童)이니라”하셨다.아침해가 뜨자 도주님께서 태극기를 다시 회룡재에 옮겨 세우게 하시고 공부를 계속하셨다.이날 오정이 조금 지나 회문리 이장 황천수가 달려와서 도주님께 아뢰기를,“오늘 낮에 일본 왕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조선은 광복된다는 방송이 있었습니다”하였다.도주님께서는,“이것이 바로 해방도수(며칠 전에 임원들에게 보고 가라고 하신 도수)니라. 그러나 태극의 기동이 합덕·조화하여야 할 것인데......”하시고,“너희는 경거망동을 삼가하라”하셨다.이어서 임원들에게 증산상제께서 ‘왜인을 임시<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는> 일꾼으로 내세우리라’, ‘이 나라가 한 때 저들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되지는 않게 하리라’하시고 ‘그들을 수운의 주장 아래 두고 일시 천하통일지기(天下統一之氣)와 일월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주어 역사(役事)를 잘 시키려니와......갈 때에는 품삯도 못받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하게 하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풀어서 훈교하셨다.이때 밖에서는 벌써 해방소식을 들은 동민들이 외치는 ‘독립만세’ ‘해방만세’ 소리로 소란했지만 도주님께서는 침착하게 말씀을 계속하셨다.“나만큼 선대로부터 왜인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한사람도 없으나 만사는 천리(天理)의 도수로써 하여야 하느니라.그동안 무극의 표징(表徵)인 왜기(倭旗 : 그들은 日章旗라 한다)가 이 강토를 덮었으나 이제는 태극도(太極圖)의 국기가 휘날리리니 이 곧 태극의 기동이니라.”“구천상제의 일은 무극대운이요 나의 일은 태극대도이므로 나의 도가 지금까지는 무극대운의 기초동량(基礎棟樑)도수였으나 이제부터는 태극의 기동도수니라. 그러므로 구천상제와 나는 무극과 태극의 관계며 시루와 솥 곧 증정지간(甑鼎之間)이니 도로써 일체(一體)니라”“내가 왜화(倭禍)로 망명하였으나 중도에서 봉천명(奉天命)하였으므로 망명지의 성도(省都) 심양(瀋陽)이 봉천(奉天)으로 개명됨이 어찌 우연이며 인위(人爲)였으랴......나는 이제 잠룡 회룡의 도수를 거쳐 진주(眞主)를 잡아 태극도주가 되었음을 고(誥)하노라. 그러나 우리 도의 도명(道名)이 태극도임을 아직 일반에게 공표하지 말라”“내가......그대들을 체류(滯留)시킨 뜻을 이제 알 터이며 도수의 실지를 목도(目賭)하였으니 지방으로 가서......태극의 도리를 4방 4유(四方四維)에 널리 선양하라”이튿날 아침에 퇴배(退拜)하는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그대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전국 방방곡곡에 중론(衆論)이 백화(百花)처럼 남발하고 사람들의 정신이 들떠 있을 것이나 현혹하여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말고 안심·안신으로 경천(敬天)·수도하여 도인의 본분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하셨다.임원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보니 과연 해방의 기쁨 속에 태극기와 만세의 노도(怒濤)로 열광함이 바로 백화남발의 형상이었으나 도인들은 도주님의 훈교를 받들어 요동하지 않고 본분을 지켰다.이해 추석 치성 후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천하대세는......모두 태극의 원리를 음양이 기동하리니 근역(槿域)강산이 그 중심핵이 된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마(魔)가 많아 단절과 분열의 조짐(兆朕)도 있으니 도인들을 무극무단(無極無端)의 합덕(合德)과 조화(調化)로 잘 교화하여 좋은 날을 보고 살도록 인도하라”하셨다.하루는 이렇게 가르치셨다.“조화(調化)는 신명과 인간 사이의 가장 귀한 요체(要諦)요, 합덕(合德)은 음과 양의 가장 큰 원리니라. 비도(非道)와 사법(邪法)에는 조(調)도 화(化)도 합(合)도 덕(德)도 없으니 오직 정도(正道)와 진법이 우리도 뿐이니라”하시고 또,“해방도수로 창생이 자유, 자활(自活)하게 하였으니 천하에 독립국가로 군립(群立)하고 도와 교(敎)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총생(叢生)하리라......이것이 상제께서 ‘초장봉기지세(楚將蜂起之勢)를 이루리라’하시고 ‘난법(亂法)이 난후에 진법이 나니라’하신 훈교의 응험(應驗)이니라......그대들은 오직 위아(爲我)의 수도와 위타(爲他)의 교화에 힘쓰라. 이 둘은 둘이 아니니 또한 합덕 조화의 원리니라”하셨다.병술(丙戌 : 1946)년 신정 치성 후에 회문도장에서 윷놀이 대회를 여셨는데 거기서 특이한 행마법(行馬法)을 가르치시니 그것은 상대의 말을 잡지 않고 각자가 끗수대로 나아가되 출점(出點)에서는 거기 맞는 도수라야 되게 하시며,“이것이 상생(相生)원리에 맞는 행마법이니 서로 잘 사는 법이며 남 잘되게 하는 법이니라”하셨다.이런 말씀도 하셨다.“장님은 꽃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는 삼현육각(三絃六角)이 울려도 듣지 못하듯 도안(道眼), 도이(道耳)가 열리지 않은 사람은 대도의 진주와 진법의 진경(眞經)이 곁에 있어도 모르느니라. 모를 뿐만 아니라 도리어 비방, 반역하는 수도 있느니라”“도인으로서 대인수행(對人修行)의 근본요체는 언덕(言德)과 해원(解寃)이니 언덕을 잘 가지며 척을 짓지 말라”이해 여름에 참으로 신기하고 흥미로운 일이 많았으나 한 가지만 간단히 소개한다.하루는 임원들에게,“채소 밭에 나가보라”하시므로 가보기 전에 없던 복숭아 나무가 솟아나서 삽시간에 자라나더니 그 가지에 꽃이 피었다 지고 소담스런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렸다. 그대로 아뢰니 따오게 하셔서 나누어 잡수시고,“다시 나가보라”하시므로 가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돌아와서 본대로 아뢰니,“너희는 이상히 생각하지 말라. 풍운조화(風雲造化)도 범인(凡人)의 일은 아니나 수도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기 쉬우니 이런 일에 미혹(迷惑)하지 말라”하셨다.9월 치성 후에 제갈량과 황발부인의 고사(故事)와 홍성문의 회문산 27년간 헛공부에 관하여 설명하여 주신 다음,“이제는 허령(虛靈)·지각(知覺)시대가 지나고 신명(神明)시대가 당도하였느리라”하셨다.또 하교(下敎)하시기를,“한패공(漢沛拱)의 성공은 신모야곡(神母夜哭)에 있고 나의 성공은 오강록(烏江錄)에 있느니라”하시고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강강수을래’ ‘조을시구’ ‘강조기간’ ‘철부지’ 등의 동요, 민요 또는 속담에 관하여 해설하여 주셨다.이해 12월 초4일 도주님 강세일을 당하여 임원들이 축배(祝杯)를 올리니,“그대들이 나에게 잔을 올림은 못난 사람을 잘나도록......병신은 완인(完人)이 되도록 해달라는 축수(祝手)도 되지마는 그보다도 도운융흥(道運隆興)을 기원하는 잔이라야 도미(道味)가 있느니라”하셨다.

廻龍·見龍 度數

 도주님께서 정해(丁亥 : 1947)년 설날 임원들의 세배를 받으시고,“이제는 12윤회(輪廻) 도수를 마쳤으므로 대운대사(大運大事)가 도래하리니 대도의 성취를 빌어야 하리라”하시고 한시 한절을 읊으시니 이러하였다.“一幅宇宙余若何 雨露不二永世定”〔한 폭의 우주를 내가 어찌할꼬?비와 이슬에 둘 (변하지)이 아니게 하여 영세토록 정하리라.〕또  말씀하기를,“전설에 옛날 한패공(漢沛公)은 왼쪽 다리에 72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 초패왕(楚覇王)을 이기고 한나라를 세웠다 하는데 ......나에게도......그러한 증표가 있으니 보아두되......발설하지 말라”하시며 걷어 보이시는데 붉은 점이 오른쪽에 3점, 왼쪽에 72점이 완연하므로 모두 신기하게 여기고 감복하였다.2월 득도일 치성후에,“부도야자(夫道也者)는 천소명이(天所命而) 인이행지자야(人以行之者也) ㅣ며 앙지미고(仰之彌高 :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고)에 찬지미견(鑽之彌堅 : 뚫을수록 더욱 굳다)하고......사람이 도를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법의 도리를 깨달아 믿는 것이니라. 소경이 꽃을 보지는 못하여도 향기를 맡고 알듯 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공부로써 깨닫는 것이므로 심불재도(心不在道 : 마음이 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요 도재심공(道在心工 : 도가 마음공부에 있다)이니라”하고 가르치셨다.또 이렇게도 가르치셨다.“부모를 일찍 여의어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부모가 없다고 못하고 국가민족의 혜택이 없는 것 같아도 버리지 못하듯이 도를 보지는 못하여도 태극의 진리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신앙, 수도의 영험이 당장에 없다고 버릴 수 없음이 어불리수(魚不離水 : 고기는 물을 떠날 수 없다)와 같으니라”“우주의 대도인 태극의 진리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 함께 있으니 업고, 안고, 숨쉬고, 있는 것이 막비도(莫非道)니라”5월 하순에 경북 문경 산북면 공덕산 대승사(大乘寺)를 공부처로 정하시고자 임원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셨다. 이때 날씨가 너무 더워서 시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어려워함을 보시고,“혹서(酷暑)로 그대들의 노고가 자심(滋甚)하도다”하고 한 말씀하시니 갑자기 시원한 바람과 함께 구름이 햇볕을 가리었으며 또 날이 저물고 구름이 끼어 길이 어두울 때는,“그대들의 가는 길이 너무 어둡지 않으냐”하시니 구름이 흩어지고 길이 밝아져서 쉽게 대승사에 당도하였다.대승사에서 임원들에게 며칠동안 공부하실 방을 얻게 하셨으나 주지가 응하지 않으므로  임원들이 분하게 여기니,“나의 공부는 한번만 지나가도 도수를 볼 수 있으니 하룻밤 공부면 넉넉하니라. 다만 이 절의 일이 걱정이나 그대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라”하시고 그 면 운달산 김룡사(金龍寺)로 옮기셨다.얼마 후에 대승사가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용직이 도주님께 아뢰니,“당초에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지 않았더냐”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셨다.도주님께서 문경으로 거동하실 때에 이용직 등 임원 외에도 그곳 면장 황수연(黃壽淵)과 부면장 박순석(朴順錫)등 여러 도인이 시종하였다.그리고 김룡사에서는 그 법당에 설석(設席)하시고 수일간 공부하시다가 그 절 뒤에 있는 화장암(華藏庵)에서 대장부 대장부(大丈夫 大丈婦) 도수와 천지일월음양(天地日月陰陽) 도수로 백일공부를 하셨다.김룡사 공부를 마치시고 20여일간 그곳 약산동 박순석의 집에서 공부하셨는데 수라(水) 시봉은 순석의 처가 담당하였다. 그는 며칠전 꿈에 한 신선이 하강하여 찹쌀 한 말과 좁쌀 서 말을 주며 ‘이  쌀로 하느님의 수라를 지어 올리라’ 한 일이 있었을 뿐 아니라, 매일 도주님께서 뵈러 오는 도인 수십명씩을 대접하는데 걱정하던 찬거리 채소가 조석으로 아무리 뜯어내도 고대 돋아나므로 신기하게 여기고 도주님을 더욱 극진히 받들었다.이때 도주님을 수종하던 이병두(李炳斗)가 존전(尊前)에서 너무나 무엄(無嚴)하고 불손(不遜)하게 처신하므로 박순석의 아들 중하(重夏)가 보다 못해 그를 꾸짖고자 벼르는데 도주님께서 그 의중을 아시고 따로 불러 타이르시길,“그대로 두라. 병두는 도를 믿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주 행세(行世)를 견습하러 왔느니라. 앞으로도 병두 같은 자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리니 탓하여 무엇하겠느냐”하시더니 병두는 몇년 뒤에 관운장의 후신이라 하며 금강교주(金剛敎主)를 자처하다가 객사(客死)하였다.10월 말경에 회문도장으로 돌아오셔서 다시 회룡재에 공부하실 때 매일 수십명씩 찾아오는 도인들의 왕래를 제한하시고 임원들만 왕래하게 하시고 월성금(月誠金) 제도를 정하셔서 매월 23일에 관하 도인으로 부터 수봉(收捧)한 성금을 임원들이 수합(收合)하여 올리도록 하셨다.도주님께서는 이에 앞서 4년전에 장자 준래(俊來)를 칠원 무기의 상주(尙州) 주(周)씨 영석의 따님 복순(福順)과 성혼시키시고 자제분의 도호(道號)를 내리시니 준래는 청봉(靑峰), 차자 승래(升來)는 청암(靑岩), 3자 영래(永來)는 청구(靑丘)였다.청봉이 성혼한 후에는 집안 살림을 모두 청봉에게 맡기시되 공사(公私)의 구분을 엄격히 하시고 사가(私家)의 살림이 아무리 궁색하여도 도중의 공금에 의뢰하지 못하게 하셨다. 청봉이 혹 긴급한 일로 간청하면 금품을 빌려 주시되 기일을 정하여 위약함이 없도록 하시며,“도중의 공금은 나도 함부로 못하거늘 하물며 네가 만약 손금(損金)할 때는 그 죄를 어찌 감당하랴. 내 너희로 하여금 넉넉하게도 못하거니와 죄짓게도 못하느니라”하시고 청암, 청구 등 자제분들도 근로로 고학(苦學)하게 하셨다.도주님께서도 모든 가족과 임원들의 허영과 망동(妄動)을 엄금하시고 항상 도리로 법례(法禮)에 적합하게 처신토록 하셨다.

공덕산 대승사 공부처도주님게서 도기 39(1947)년 5월 공부처로 정하시고자 임어하셔서 하룻밤 도수공부를 마치신 경북 문경군 산북면 전두리 공덕산 대승사 공부처.사진은 그후 불타고 40여년 전에 다시 중창한 현재의 모습.

운달산 김룡사 공부처 도주님께서 도기 39(1947)년 5월부터 100일간 대장부 대장부도수와 천지일월 음양도수로 공부하신 경북 문경군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 김룡사 화장암(일명 中庵) 공부처.사진 ①은 약 40년 전 그 터에 중창한 김룡사와 ②는 화장암의 모습.  

 

 

入金山 度數

무자(戊子 : 1948)년 설날 치성 후에 도의 이름<道名>이 ‘태극도’임을 정식으로 공표하게 하시고 주문의 ‘무극도주’를 태극도주’로 고치셨다.그리고 이렇게 하교하셨다.“우리 도의 개화(開化)와 낙화(落花)가 모두 태인(泰仁)땅이 이었으니 이는 ‘큰 씨’가 싹이 트고 자랄 연유이나 꽃이 피었다짐은 결실을 위함이라. 그동안 우리 도가 잠룡도수 10년의 포태기(胞胎期)를 지나 회문도장에서 태극도로 중창하여 현룡(見龍)도수인 장생기(長生期)를 맞은 다음 또 3년이 지났으니......다시 현룡 비룡(飛龍)으로 화(化)하여 관록(冠祿) 제왕기(帝旺期)를 맞으리라. 임원들은 이 천기(天機)를 위념물실(爲念勿失)할지어다”하시며 지난 잠룡(潛龍) 10년간의 고난을 상기(想起)시키셨다.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하문(下問)하시기를,“그대들 중에 누가 부산의 지리를 잘 아느냐”하시므로 이강인(李康仁)이, “저의 처가가 부산이옵고 그곳에 친구도 있어 잘 아옵니다”하고 여쭈니,“네가 가서 내가 공부하기에 적합한 집을 찾되 부산의 산맥이 끝나는 곳이라야 하고 용은 물이 있어야 하니 바다가 보이고 수(水)자가 든 지명(地名)이라야 하며 태인도장처럼 치마바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며 대금 일부도 내려주셨다.이어서 이렇게 하교하셨다.“부산은 이 강산의 동남단에 위치한 도시로서 그 지세(地勢)는 국토의 신산(神山) 백두에서 비롯한 산세가 남으로 뻗어내린 정기가 응결(凝結)되고 영남지방 전체의 물이 모여 흐르는 낙동강과 동해가 굽이치는 산진수회처(山盡水廻處)의 영국(靈局)이니라”“부산은 이 나라 제일의 국제항인 관문......군창지(群倉地) 생문방(生門方)이며 새서울이니......상제께서도......백두우(百頭牛)를 대신한 백우(白牛)를 잡아 공사를 보셨으며......그 자형(字形)이 팔금산(八金山) 또는 입금산(入金山)이라. ‘내가 장차 금산사로 들어가리라’하신 곳......천장길방(天藏吉方) 태극원점(太極原點)의 기지......가마(釜)산이 곧 솥산인 줄도 알라”강인이 부산에 가서 여러날 동안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분부하신 조건과 부합되는 보수산(寶水山)아래 보수동의 한 집을 찾았다.그 집의 위치는 특히 뒤에 태인도장의 치마바위보다 그 길이는 반쯤 되나 높이는 배로 넘었으며 우측으로는 구덕산(九德山), 아미산(峨嵋山)으로 이어진 백호(白虎)와 좌측으로는 복병산(伏兵山), 용두산(龍頭山)으로 이어진 청룡(靑龍)이 뚜렷하고 앞으로는 절영도(絶影島)와 남해가 바라보이는 곳이었다.강인이 가계약을 체결하고 돌아가서 보고한 다음 다시 와서 대금을 완불하고 내부를 수리하였다.도주님께서 3월 15일에 임원들을 거느리고 왕림하셔서,“집은 비록 협소하나 땅이 도수에 맞는 적지로다. 태극의 대운이 이에서 비롯되리라”하시고 그 집을 부산행재소(釜山行在所)로 부르시다가 다음해 설날 부산도장(釜山道場)으로 명명하셨다.〔이 도장은 8년 후인 병신(丙申 : 1956)년 7월 29일에 보수도정(寶水道庭)으로 개칭하신 이래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이해 5월 초에 도문가(道門歌)란 가사를 지어 읊어 주셨는데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우주는 호호(浩浩)하고천지는 탕탕(蕩蕩)하다5만년 길고 긴 용화세계8문을 넓고 높이 달았으니(이하 생략)이달 말경에 승안차(承顔次) 올라온 권동흠(權東欽)에게 하문하시기를,“너의 집안에서는 입도한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하시므로,“아직은 저 혼자뿐이옵니다”하고 아뢰니,“덕불고(德不孤)라 도는 외롭지 않은 법이니 벗이 있게 마련이니라.....”하셨다. 동흠이 명심하고  지방으로 돌아와서 먼저 가화(家和)를 이루고 포덕에 힘쓰니 입도치성을 올리기에 바쁠 정도였다.이무렵  다른 지방에서도 이처럼 입도인이 날로 늘어나서 도세(道勢)가 일가월증(日加月增)하였다.이해 7월 초순 어느날 도주님께서 임원들을 거느리시고 감천동(甘川洞) 해변(당시는 해수욕장이 있었다)에서 소요(逍遙)하시다가 그 근처에 사는 최위출(催渭出)의 집에 들리셨다.이때 위출은 뼈가 심하게 부러져서 오랫동안 기동을 못하는데 의사마다 손을 못 쓰는 것을 보시고,“너와 같은 성심자(誠心者)는 병신이 되지 않으리니 나를 믿고 안심하라”하시며 환부(患部)를 손으로 만져 낫게 하시므로 모두 감복하였다.8월 초에는 동래 금련산(金蓮山) 마하사(摩寺)에 가셔서 그 큰 방에 설석(設席)하시고 백일공부를 하셨다.하루는 공부 여가에 임원들이 거처하는 방에 나오셨다가 모두 담배 피우기에 불편해 함을 보시고 통죽(通竹)하게 하시며,“이것이 평등도수니라”하셨다.11월 어느날 임원들과 사승(寺僧)들에게 물으시기를,“법당의 불상(佛像)에 이상이 없느냐”하시므로 가서 살펴보니 그전에는 반듯하던 불상의 머리가 앞으로 숙여졌으므로 모두 이상히 여기며 소란을 피운 일이 있었다.공부를 마치시던 11월 15일 새벽에는 공부실 앞뜰에 흰 학 한쌍이 날아와서 공부실을 향하여 절을 하듯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였으며 아침에는 공부하실 때 글쓰신 종이를 태워서 그 재를 절 앞 개울 물에 띄우니 개울 위에 무지개가 찬란하게 뻗치는 이적이 일어났다.12월 초에 중산 도인 박중하가 행재소에 올라와 배알하니 도주님께서 구겨진 50전 지폐를 인두로 다려서 펴게 하시므로,“이것이 비록 돈이오나 요사이는 어린이의 용돈으로도 쓸 수 없사온데 다리라 하시나이까”하고 여쭈매,“나는 이것을 돈으로 보지 않고 도인들의 성덩어리로 여기느니라”하셨다.(이때부터 도인들이 성금으로 올리는 지폐는 모두 구김을 펴고 위 아래와 앞 뒤를 바로 하여 올리게 되었다.)기축(己丑 : 1949)년 봉천명일에 지방임원의 임명기준을 정하셨다. 지방별로 포덕호수가 500호 이상은 포감(布監), 150호 이상은 선도사(宣導師), 50호 이상은 선도원으로 하시고 이 기준에 따라 중산(中山)에 이용직(李龍稙), 충주(忠州)에 안상익(安商翼), 김천(金泉)에 김태만(金台萬), 영주(榮州)에 김명구(金命求)를 포감으로 임명하신 다음 선도사는 포감의 추천으로 임명하시고 선도원은 선도사의 추천으로 포감이 임명토록 하시며, “임원은 내가 내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되어 올라오는 것이니라”하셨다.하루는 혼인을 앞둔 한 도인이 배알하니,“태극의 도리가 음양합덕이며 정음정양이고......이것이 곧 혼인과 가정규범의 원리니......합덕 조화로 하여야 함을 명심하라”고 하셨다.또 기도의 대상을 여쭌 한 도인에게는,“기도의 최고 대상은 구천상제 뿐이니 불·보살·산신·칠성신에게도 기도할 수는 있으나 그들은 그 아래 분임(分任)된 신명들이니라”하시고 기도의 영험을 묻는 도인에게는,“기도는 일심의 지성이라야 감천(感天)이니라......마(魔)의 기도가 되어서는 아니 되니 도둑질이 잘 되도록, 도박이 잘 되도록 빌어서야 어찌 복을 받을 수 있으랴. 송주(誦呪)수도가 몸에 배면 절로 악귀 악령이 침범할 수 없고 위액(危厄)을 면하여 만사형통(萬事亨通)하는 영험이 있으리니......전정한 기도는 성·경·신을 다한 수도와 치성이니라”하고 가르치셨다.

부산 보수도정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40년(1948)년 3월 15일 입금산도수로 도장을 마련하시고 8년간 태극도의 기반을 다지신 부산시 중구 보수동 1가 21번지 치마바위 아래의 현 보수도정.처음에는 부산행재소, 다음해 설날 부산도장으로 명명하시고 47(1955)년 4월 28일 그 2층에 영대를 봉안하셨으나 다음해 7월 29일 감천동으로 도장을 옮기시고 보수도정으로 개칭.사진의 우측 바위가 치마바위로서 길이 약 45m, 높이 약 18m, 건물은 목조, 기와지붕의 1층 21평, 2층은 12평을 지붕만 10년 전에 스레트로 고쳐 이고 원형대로 보존된 모습.(지붕 너머로 멀리 보이는 산이 구덕산(높이 568m)이고 그 좌측의 산맥이 감천동 천마산(높이 322m)으로 이어짐.)

동래 금련산 마하사 공부처 도주님께서 도기 40(1948)년 8월부터 100일간 공부하신 부산 동래구 연산동 금련산 마하사.사진은 그해 11월 어느날 까닭없이 고개를 숙인 그절 법단 좌협시불의 모습.

 

 

道人集團 度數

 경인(庚寅 : 1950)년 원조(元朝)에 임원들에게 하명(下命)하시기를,“그동안 그대들의 노고로 도세(道勢)가 확장되었음을 치하하노라.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로 미구에 도내외(道內外)에 몰아닥칠 환난(患難)의 고비를 넘기기가 극난(極難)하리니 그대들은 도명(道命)의 지엄함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하라”하셨다.이튿날 아침에 지방 임원들을 독촉하여 내려보내셨는데 오후에 경찰 형사들이 불시에 들이닥쳐 도주님 이하 도장에 있던 임원들 다수를 중부산 경찰서로 연행하여 용공(容共)단체관계의 혐의로 고문(拷問)하더니 경북도경으로 이송하였다가 다시 예천(醴泉)에 있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대로 넘기는 도난(道難)의 변고가 일어났다.이것은 전에 무극도의 도인이던 배신자 강모, 김모 등이 권력층과 교섭하여 모함한 것으로서 곧 무고로 판명되어 3월 5일 무죄방면되었다.이때 도주님께서는 그 배신자의 괴수 강순임, 김병팔, 엄병윤, 신도균, 정기택 등 5인을 도척, 오적(五賊)으로 규정하셨으나 임원들에게는,“저들에 대하여 원한을 품거나 복수를 생각하지 말라”하셔서 응징을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앞으로 수화상층(水火相沖)의 대도수에는 국운이 비색(否塞)하여 5적뿐 아니라 모든 원척이 발동하여 세상은 늦모 찔 때 묘판(苗板)에 메뚜기 뛰듯 콩볶을 때 가마솥에 콩 튀듯 하리니......이번 도난(道難)을 거울삼아 이 고비를 넘겨야 큰 도수를 성취하리라”하시며 당시에 난립한 주의(主義) 사상과 당파에는 일체 가담을 엄금하시며 다음의 한시 한 수를 하교하셨다.“千山鳥飛絶  萬逕入滅  孤舟蓑笠瓮  獨釣寒江雪이해 5월 초 10일에 6.25의 남침전쟁이 일어나 전 국민이 온갖 고액을 치르다가 3년 후 6월 17일(양력 7월 27일)에야 휴전이 성립된 민족의 비사(悲史)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이 사변이 일어나자 많은 국민들은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었으니 그 가운데 도인들도 보수동 도장 부근에 모여들어 판잣집, 토담집을 짓고 생활하게 되어 그 일대는 자연히 도인들의 집단지가 되었다.이때 도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실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생계를 도와 주시고 직장을 알선하시는 등으로 구휼(救恤)하시니 모두가 단시일내에 생활이 안정되고 더구나 지척에서 도주님을 모시므로써 도심이 굳어지고 도인 상호간의 협동력도 강해졌다.이러한 부산도인들의 소식을 들은 지방도인들은 사변 중에 고초를 겪다가 기회를 보아 보수동 도장 부근으로 모여들어 어려운 가운데도 도단(道團)은 더욱 확대되고 단결되었다.한편 임원들은 사변기간에도 온갖 애로를 무릅쓰고 전국의 도가를 순방하며 지도 교화하며 매월 1회씩 도주님께 배알하고 명교(命敎)를 모시는 일을 어김없이 수행하였다.7월경에 함안까지 침공했다가 후퇴하던 공산군 패잔병의 은신처가 될 것을 염려한 국군이 회문리 일대의 가옥을 불태울 때 회룡재도 소진(燒盡)되고 그곳에 있던 도중가족은 막심한 고난을 당하다가 부산도장으로 돌아왔다.회룡재 소진의 소식을 들으신 도주님께서,“인간이 무도하면......그 극단이 전쟁이요 살인인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겁(否劫)속에 어찌 방화만을 탓하랴. 회룡재가 소진됨은 아까우나 이로써 전화(戰禍)가 감소된다면 불행중 다행이니라......복원(復元)도 있으리라”하셨다.8월 어느날 박순석이 도주님께 여쭈기를,“지금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사오니......전에 분부하신 새서울도수에 적중됨이 아니오니까”하니“내가 말하는 새 서울이 어찌 한 나라의 수도이랴......내가......설법(設法)하는 통일신단(統一神壇), 조화정부(造化政府)에서 삼계를 광구(匡救)할 태극기동의 원점이니라”하셨다.12월 어느날 보수동 도장의 서쪽 동대신동과의 경계 근처에 밀집(密集)된 판잣집 마을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강한 서북풍(西北風)을 타고 도장쪽으로 급히 번져 왔다. 도주님께서 그 보고를 받으시고 도장에서 서북향으로 손을 드시니 서북풍이 갑자기 동남풍으로 바뀌며 절로 진화(鎭火)되었다.신묘(辛卯 : 1951)년에 이르러 부산으로 이사온 도인이 수백호이므로 이를 중부(中部)도인이라 하여 지방도인과 구분하여 부르게 하셨다.3월 하순에 도장이 번잡하여 공부하기에 불편하시므로 도장 뒷산 중턱에 집을 짓게 하셔서 공부설석하시고 산정(山亭)으로 명명하시고 납폐지(納幣紙)를 소화하며 공부하셨는데 납폐지를 처음에는 임원들이 써서 올렸으나 장수가 많아 도장(圖章)으로 찍게 하시다가 등사판으로 등사하게 하시고 소화할 때 그 연기가 너무 많으므로 공부실에 별도의 연통을 내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내가 지금 하는 공부는 복중(腹中) 80년도수에 따른 휴전(休戰) 도수의 공부니라”하시더니 이때부터 시작된 휴전 회담이 계속되어 2년 후에 휴전이 성립되었다.이해 여름에 폭우로 무너진 산정 앞의 축대를 충주도인 박재문(朴在文)이 정성드려 쌓더니 도주님께서 그 노고를 치하하시는 순간 그의 농아(聾啞)가 열러 정상인(正常人)이 되므로 본인은 물론 도중이 모두 경탄하였다.하루는 한 도인이 인간 사후 신명계의 일을 여쭈니,“인간의 생과 사는 정신과 육체의 합치고 흩어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죽으면 육체는 흙이 되고 정신은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생시의 수도 공덕에 따라 귀(鬼), 신(神)의 분등(分等)이 있으나 모두 신명계로 돌아가느니라. 그러나 신명의 주처(住處)는......일정하지 않으니......환생(還生), 전생(轉生)도 있느니라”하시고 간곡히 하교하셨으나 여기서는 이만 줄인다.임진(壬辰 : 1952)년 원조에 단도수와 급(級)도수를 말씀하시고 포덕을 강조하시더니 도인의 수가 급증하였다.3월 15일에 도인들의 납폐도수를 하명하시고 1인당 5만장씩을 기도 송주하며 소화하게 하시며,“5만장이 많은 것 같으나 5만년 후천선경 도수에 비하면 1년에 한 장씩 밖에 해당되지 않느니라”하셨다.하루는 인간의 윤리, 도덕, 법률, 질서의 원리가 모두 태극의 진리로써 이루어짐을 말씀하시고 공자의 인의, 서가의 자비, 예수의 박애가 모두 태극 음양 합덕진리의 부분적 표현임을 가르치셨다.11월 하순에 왕자수금(王者收金) 도수와 남신헌금(南信獻金) 도수를 말씀하시고 월성금을 포감별로 보관하였다가 명년 초에 신화(新貨)로 바꾸어 올리도록 명하시므로 임원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바꾸고자 하여도 미처 다 바꾸지 못하였더니 다음해 정초의 화폐개혁(貨幣改革)으로 인하여 3개월 월성금을 모두 신화로 올리게 되었다.계사(癸巳 : 1953)년 4월 봉천명일 치성 후에 임원들에게 이렇게 훈교하셨다.“내가 천명을 받들어 모신지도 벌써 45년이다.......구천상제의 도호 ‘증산’에 이어 나를 ‘정산’으로 하셨으니 ‘증정지간’이며 무극주께서 재천(在天)하신 체(體)와 태극주로 재인(在人)한 용(用)의 체용일여(體用一如)한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내가 상제의 도수로 무극대도를 개창하였으니 이는 체를 밝힘이고 다시 태극의 도문을 열음은 그 도수를 푸는 용의 기동이니라. 모든 법방(法方)은 무극주의 체를 태극주로서 용함이니라”“그대들이 이 체와 용에 따라 공부함은 각자 개인의 도통완공(道通完工)에도 목적이 있으나 천·지·인 3계공사에 참여함이니 5만년 후천선경을 완성할 성사재인(成事在人)의 큰 뜻을 알라”“천·지·인 3계공사의 도수는 털끝만치의 차착(差錯)도 없느니라. 이제 3천리 동토에 아국 아도(我道)의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으나 금차(今次) 간지(干支)가 끝난 장래에는 세계인의 가슴마다 태극이 박힐 날이 있을 것이며  태극의 원리가 과학문명과 정신문화의 기점(基點)임이 천명되리니 이 곧 선경도수의 일단이니라”어느날 임원들이 “어떻게 하여야 세계가 화평하고 인류가 안락하오리까”하고 여쭈니 이렇게 훈교하셨다.“모든 종교는 국제정치나 국내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나 우리 도는 교정(敎政)을 일체로 하느리라. 태극의 원리는 우주의 대도이므로 모든 정치의 근본사상임을 알라. 지금 미·소 양대국이......대립하여 상극, 상충, 상투, 상해하므로 인류가 진멸지경에 처한 현상은......선천과도역정의 비겁(否劫) 도수니라......이것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소임(所任)이며......구천상제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합덕, 조화, 해원, 상생의 태극진법으로 실현하여 3계에 보화(普化)하는 청화 5만년 선경을 건설하면 인류의 화평은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아직도 양대진영의 정치가 군사가들이......태극원리를 모르고 있으나 음양의 합덕, 조화, 상생으로 기동조화의 묘를 이루어......선경세계가 이룩됨을 자각......전체 인류의 발전을 위한 공동노력을 하게 되리니 이 곧 음양합덕인 태극의 기동이니라.”이해 9월에 미원지방 도인 윤금현(尹金鉉)이 도장에 올라와 승안(承顔)을 모시고 도주님의 수라(水)상이 맥반(麥飯)에 소찬인 것을 보고......크게 깨닫고 평생 근검절약을 신조로 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11월 중순에 7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공부하시다가 하루는 갑자기 숨을 거두시므로 가족과 임원들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잠시 후에 쾌차하셔서 말씀하시기를,“내가 생사판단(生死判斷) 도수를 보아 상제께서 ‘나는 죽고 살기를 마음대로 하노라’하신 도수를 풀었노라’ 하셨다.갑오(甲午 : 1954)년 원조에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금년 도수는 구마이당로(九馬而當路)니라. 이 도수는 도인이 모이고 도명이 세상에 알려지는 큰 도수니만큼 그 목넘기 또한 어려울 것이니 도인들에게 언동을 각별히 조심토록 단속하라”하셨다.이 무렵 각 지방에서는 포덕이 더욱 잘 되고 도인들의 성금헌납도 많아졌으며 중부로 이사하고자 하는 도인도 늘어나므로 임원들은 그 성적을 비교 경쟁하는 양상을 이루었다. 그중에도 충주지방 안상익 포감방면이 더욱 현저하고 그에 따른 말썽도 많이 일어나므로 도주님께서 그 지방 임원들에게,“도인들의 신심과 정성이 지극함은 가상(嘉賞)한 일이나 그것도 과(過)하면 불여불급(不如不及)하여 폐단이 되기 쉬우니......정도(正道)를 지키라”하셨다.정월 중순에 어느 도인의 집에 작은 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도주님께는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는데 먼저 알고 계셨으며 진화(鎭火)도수를 보신다 하시며,“수·화·풍 3재(三災) 가운데 수·풍재는 자연의 객기(客氣)에서 나오지만 화재는 인간의 방심(放心)에서 나오는 인재(人災)니 모든 도인에게 불조심을 각별히 강조시키라”하셨는데 이로부터 도인집단지에서는 화재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보수동 산정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43(1951)년 3월 하순 부산시 중구 보수동 도장 뒤 보수산 중턱에 지으신 집을 산정으로 명명하시고 휴전도수 등 많은 도수로 공부하신 곳.당시에는 주위에 집이 많지 않았으나 현재는 주택이 밀집하고 이곳이 계획도로에 편입되어 철거해야 할 처지임.사진은 목조에 양철로 이었던 지붕을 40년 전에 스레트로 고쳐 이어 보존된 모습.

 

 

 

 

皇極神·大神門 度數

 하루는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폭풍을 만나면 위험하다고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지 말아야 하느니라. 만약 그리하면 항해를 못함은 고사하고 배도 전복시키고 목숨도 따라 잃게 되느니 도를 믿고 닦는 일도 또한 그러하니라”하시고 지난 신유년 2월에 안면도에서 변산반도로 항해하시던 도중 폭풍을 만나셨을 때 당황하는 사공들을 이렇게 지휘하셔서 무사히 항해하게 하신 일을 말씀하셨다.이해 2월 하순에 청주에서 안상익 포감방면 임원들의 일로 형사사건이 일어났다.그것은 지난 몇년동안 그 임원들이 경쟁하듯 관할 도인들의 가산을 정리하여 중부(부산)로 이사시키는 과정에서 사실무근한 유언비어(流言蜚語)가 유포되므로 충청북도 경찰국에서는 이것을 혹세무민(惑世誣民) 또는 용공분자(容共分子)의 행위로 오인하고 내사(內査)하여 그 임원들을 주동자로 지목하고 미행(尾行)하다가 그들의 집회장소를 급습하여 20여명을 검거하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고문 취조하게 된 것이다.이때 검거된 도인들은 혐의가 없으므로 바로 석방되었으나 상급임원 3인은 구속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상급자인 박한경(당시 부포감)은 고문에 못이겨 부득이 혐의사실을 시인하고 도주님 행재(行在)하신 곳까지 자백하기에 이르렀다.이로써 경찰에서는 형사들을 부산도장으로 보내어 며칠동안 중부도인들을 조사한 결과 혐의사실이 없음은 확인하였으나 이미 구속된 박한경, 유철규, 김영하 등의 혐의를 소명하기 위하여는 도주님께서 출석하여야 된다고 하여 임원들을 거느리고 청주까지 거둥하셨다.도주님께서는 그곳 북일여관에 설석하시고 30여일간 공부하시며 간간히 형사들의 수사에 응하셨는데 사건은 결국 박한경 등 3인이 구속 기소되었다.도주님께서는 사건이 장기화함에 따라 3월 27일(양력 4월 29일) 부산도장으로 환행하시는 길에 승용차편으로 청주 화양동(華陽洞)에 거둥하셨다.화양동은 소백산맥의 산협인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의 계곡으로서 사적과 명승(名勝)이 많으므로 예로부터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비슷하다 하여 화양구곡으로 불리는 곳이었다.(현재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음)특히 그 3곡에는 송우암(宋尤庵)이 임진왜란에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의종(毅宗) 황제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세우게 한 만동묘(萬東廟)가 있었다.그러나 그 만동묘는 대원군이 철폐한 것을 그곳 유생들이 중창했는데 왜정 때 다시 철거되어 이때는 그 묘지(廟趾)와 묘비(廟碑)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그리고 그 4곡에는 송우암이 은거하며 학구(學究)와 교도(敎導)에 힘쓰던 암서재(岩棲齋)가 있고 5곡에는 송우암이 명나라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첨성대 아래 바위에 새기고 그 옆에 암벽(岩壁)을 함(函)처럼 파서 석개(石蓋)를 하고 이를 석문(石門)으로 이름하였다 한다.도주님께서 이날 하오에 임원들을 거느리고 먼저 만동묘의 묘지와 묘비를 살피시며,“이곳 청주 화양동은 명(明)·청(淸) 양국이 공존(共存)하는 곳이라.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를 보려 함이니라”하시고 다시 암서재를 살피시는 동안 날이 어두어지므로,“화양구곡을 다 볼 것은 없지만 5곡까지는 가려 하였으나 날이 저물었으니 신도(神道)로써 공사하리라”하시고 회정하셨다.이날 도주님께서는 회로에 미원, 주성을 거쳐 보은(報恩) 남일여관에 당도하시니 자정이 가까웠다. 시종한 정운교(鄭雲敎), 윤금현(尹金鉉) 등이 서둘러서 올리게 한 저녁 수라상을 받으신 도주님께서 수저로 상머리를 한번 치시는 순간, 그 부근 일대를 때려부수듯 하는 뇌성벽력이 진동하며 소나기가 쏟아지는 이적이 일어났다.이때 시종들과 여관 사람들이 모두 놀랬으나 도주님께서는 태연히 수라를 드시고 상을 물리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이제야 신문공사를 마쳤으니 과시(果是) 보은지지(報恩之地)로다”하셨으나 시종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며칠 뒤에 청주 일대에 ‘화양동 5곡의 석문이 열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윤금현도 그 소문의 진부(眞否)를 확인하고자 여러 도인들과 함께 화양동에 가서 전에 만동묘 묘지기를 하던 빈재로(賓在老 : 만동묘 창건 당시부터 중국에서 와서 수 100년간 대대로 묘지기를 하는 후손의 한사람)를 만나 ‘지난 27일 밤 자정에 일어난 천둥 벼락에 첨성대 암벽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 석문이 열렸더라’는 말을 들었다.또 빈재로로 부터 석문은 원래 200여년 전에 송우암이 만들고 그 속에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비전(秘傳)되는 전설로는 ‘석문이 열리면 천지가 개벽되고 진인(眞人)이 세상을 구제하리라’하였으며 왜경은 이 전설을 없애려고 석공을 시켜 그 석문을 정으로 쪼으게 했다가 천청벽력에 놀라서 중단하고 말았다는 설명을 들었다.그리고 직접 석문에 가서 그 아래 떨어져 쪼개진 석개(石蓋)조각을 맞추어서 그 안쪽에 새겨진 ‘옥조빙호(玉藻氷壺)’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글자를 확인한 도인들은 증산상제님께서, “청국공사를 보려하되 길이 너무 멀어......청주 만동묘에 가서 천지대신문을 열고자......청도원에 그 기운을 붙여 그 공사를 보려 하노라”하시고 또 도주님께서 화양동을 떠나시며,“신도로써 공사하리라”하셨을 뿐 아니라 석문이 열린 그 시각에는,“이제 신문공사를 마쳤다”고 하신 뜻을 비로소 깨닫고 크게 감탄하였다.4월 초에 청주지방 포감 임규오(林奎五)가 윤금현이 보고한 화양동 석문의 일을 도주님께 아뢰니,“오직 결자(結者)와 해자(解者)는 동체(同體)니라”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셨다.이달 26일에 청주지방법원에서 박한경 등의 형사사건 공판이 열러 도주님께서도 법정에 거둥하시니 변호사는 최병길(崔秉吉)이었으며 재판장은 지방법원장 문기선(文夔善)이었다.문기선은 주역을 천독(千讀)하여 신구학(新舊學)을 달통했다고 호언장담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신흥(新興) 종교라면 무조건 사교(邪敎)로 보는 선입관(先入觀)이 완고한 사람이었다.그는 개정 벽두(開廷劈頭)부터 도주님의 기백을 꺾으려고 공판절차도 무시하고 심문하기를, “태극도는 혹세무민하는 사교가 아니요?”하므로 도주님께서,“태극도는 천지대도요. 그대가 묻는 사교라는 말이 도대체 어느 법 어느 조문에 있는가? 말해보시오”하고 반문하셨다.그는 흥분하여 “귀도의 도리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이를 빙자하여 신도들의 금품을 수탈(收奪)하고 가산을 탕진하게 하였다 하니 사교가 아니겠소?”하고 힐문(詰問)하므로,“그것은 사실무근한 일로서 수사기록에도 명기(明記)되어 있으니 내가 굳이 답할 필요가 없노라”하셨다.재판장의 공판절차도 무시한 심문은 계속되었다.“피고인은 도통하였다고 하는데 도통한 도사가 어찌 피고인으로서 법정에 출석까지 하였소?”하며 주역을 펴놓고 몇 구절의 해석을 요구하므로 도주님께서 의연이 해석하여주신 다음, “공자는 진채지액(陳蔡之厄)을 당하고 야소(耶蘇 : 예수)도 십자가의 혹형(酷刑)을 당하였다 하는데 성인 군자일 수록 천기(天機)를 거역하지 않는 법이니 범인이 감히 언설(言說)로 논할 수 있으리요. 더구나 그대가 주역까지 논하여 나의 도통 여부를 물었으나 이는 인간의 문자로 운위(云謂)할 일이 아니며 이 법정의 일과는 관계가 없지 않소. 그대가 주역을 안다고 하나 그러면 8괘 생12(八卦生十二)와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아느뇨?”하시니 그는 좌불안석(坐不安席)하다가 차기 공판기일도 정하지 않은 채 폐정(閉廷)하고 말았다.재판진행이 이렇게 무한정 연기될 전망이므로 도주님께서는 다시 북일여관에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며 최변호사로 하여금 박한경 등의 보석(保釋)을 신청하게 하셔서 5월 19일에 그들이 모두 석방되었다.하루는 윤금현이 도주님께 가물치회를 진상하였더니 맛있게 드신 다음,“증산상제님께서 이러한 회를  드시매 하늘에 가물치 형상이 나타났다 하는데 너도 보아라”하시고 문을 여시므로 우러러 보니 과연 가물치 형상이 공중에 떠 있었다.윤금현이 도주님께 여쭈기를 “후천에는 반상(班常)의 구별이 있나이까?”하니,“후천에는 선천의 반상과는 다르나 그 한계는 더욱 명확하되 도통의 우열(優劣)로써 이루어지리라”하셨다.5월 29일에 부산도장으로 환행(還幸)하시며 박한경 등에게 명하시기를,“너희들이 지방사업에 공로가 크고......고초가 많았으나 아무리 공과 고(苦)가 다대하여도 그로써 죄가 없어지는 법이 아니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욱 조심하라. 욕속(欲速)은 부달(不達)이고 과(過)는 불여불급(不如不及)이니라”하셨다.김천방면 도인 이건우(李建雨)가 해삼을 사서 도주님께 진상하니 맛있게 드시므로 다음날도 또 진상하매 드시지 않으시고, “너는 웬 돈이 그리 많아서 이런 값비싼 것을 매일 사오느냐? 돈을 허비하지 말라”하시며 물리셨다.7월 22일에 청주사건의 제2차 공판이 열렸는데 이번에도 도인들의 방청으로 법정은 초만원을 이루었다.재판장 문기선은 전번의 미흡했던 일을 생각하고 더욱 철저히 준비한 듯 사건의 심리는 아니하고 또 주역을 내놓고 도주님께 그 계사전의 귀신설, 변화설로 부터 도덕론, 길흉론 등을 의기양양 집요하게 질문했다.도주님께서,“우주의 진리가 도요 인간의 법이 또한 도인데 그 도주인 나에게 그런 진리와 법을 가지고 시험하려 하느뇨?”하시며 그가 미처 묻지 못한 천지현기(天地玄機)와 인사규범(人事規範)의 모든 도리를 설파(說破)하시고,“그대가 재판장으로서 나에게 위법이 있다면 법에 따라 재판함이 당연한 소임(所任)이거늘 어찌 도를 거론하여 언책(言責)을 취하려 하느뇨?”하셨다.재판장이 그제서야  의용(儀容)을 가다듬고 “그러하시면......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듯 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하므로, “그대가 굳이 도를 알고 싶다면 정식으로 나에게 예를 갖추고 배우도록 하라”하셨다.재판장이 다시 검사와 변호사의 개별심문과 증거제출 등으로 공판을 진행하게 하니 검사가 먼저 도주님께 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피고인은 세계정세를 논함에 있어 특히 남·북한의 관계를 물이 불을 이기는 수극화(水剋火)의 원리에 비유하여 물의 방소인 북한이 불의 방소인 남한을 이긴다는 논리를 주장한다는데 사실이뇨?”하자 재판장이 먼저 나서서,“그러한 이론은 동양철학의 상식이니 논할 것이 못되오”하고 문답을 중지시켰다.이날 변호사의 신청으로 도인 중에는 윤금현, 권오근 등이 증인이 되어 증언했는데 공판은 무기연기된 채 폐정되므로 도주님께서는 다음 날 도장으로 환행하셨다.8월에 문기선이 대전지방 법원장으로 전임됨으로써 태극도 사건은 부장판사 김동수(金東洙)가 담당하게 되었으나 공판은 그대로 연기되었다.문기선은 이임 직후 폐백(幣帛)을 갖추어 부산도장으로 와서 도주님께 전일의 무엄을 사죄하고 집지(執贄)하기를 간청하여 훈교를 받들고 돌아간 후 여러차례 와서 봉교(奉敎)하였다.한 도인이 도주님께 여쭈기를 “저는 우선 생업의 기반을 닦아 놓은 다음 수도공부에 전념하려 하나이다”하니,“인간이......육체를 위하여 먹고 살고 부모 처자를 봉솔(奉率)하는 생업에 충실함은......생(生)의 도리며 직업의 신성성이니라.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탐(貪)이 되느니 명심하라”하시고 또, 육체현실(肉體現實)과 심령이상(心靈理想)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음양의 도리니 육체만 위주하여 심령을 버리거나 이상만 앞세워 현실을 외면함도 음양합덕이 아니니 육체와 심령의 조화가 곧 음양합덕이고......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심적 기도와 아울러 도를 함께 닦아야 함이 합덕이니라”하셨다.10월 15일에 임규오, 박중하 등을 거느리고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임하셔서 그 경내를 순행(巡行)하시고 절 문을 나오실 때 한 개안승(開眼僧)이 보니 그 절의 모든 불, 보살이 도주님을 따라 절을 떠나려 하므로 황급히 도주님 앞에 부복하고 호소하기를 “저희 절에 녹(祿)줄이나 남겨주고 가옵소서”하므로,“나의 과차(過次)에 어찌 녹줄이 끊어지리요?, 안심하라”하셨다.하루는 내수(內修 : 여성 도인)들에게,“만유 군생의 모태(母胎)가 음이며 여성이니라”하시고 청소년 아동들에게는,“때 묻지 않아 백지장과 같은 마음 바탕에 도심(道心)을 기르라”고 가르치셨다.

? 청천 화양구곡 도수의 터 ?도주님께서 도기 45(1954)년 3월 27일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를 푸신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화양구곡의 터.사진  ① 만동묘는 왜정 때 철거되어 그 묘지(廟趾)와 묘비(廟碑)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② 5곡의 첨성대 암벽에 있는 석문과 숭정황제의 어필 비례부동이 새겨진 모습. ③ 최근(2006년) 괴산군에서 만동묘를 복원한 모습.

? 통도사 불·보살이 수종한 문 ?도주님께서 도기 46(1954)년 10월 15일 경남 양산군 하북면 영취산 통도사에 임어하셨다가 환어하실 때 그 절의 모든 불·보살이 도주님을 따라 절을 떠나려고 한 그 절의 문.

 

 

 

 

范質의 度數

을미(乙未 : 1955)년 원조에 도주님께서 구천상제님의 영대(靈臺)를 봉안(奉安)할 수 있도록 도장 건물의 수리를 명하시므로 임원들이 준비하여 다음달 초에 착공하였다.이에 앞서 보수동의 도인집단지에는 수년간 한건의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여 부산시장의 포상을 받고 이날 그 축하행사로 산정마당에서 농악과 윷놀이로 잔치를 베풀었다.도주님께서 이 윷놀이에서도 상생행마법(相生行馬法)을 쓰도록 하시고 그 말판의 형국은 초한전(楚漢戰)의 최후에 초패왕을 중심으로 늘어선 28장의 격이고 농악에서 영기(令旗)를 중심으로 장사진(長蛇陣) 또는 궁을진(弓乙陣)을 이룬 28명의 격임을 가르친 다음,“오늘의 이 일은 내가 장차 도강이서(渡江而西)할 도수의 조짐(兆朕)이니라”하셨다.도장영선 공사기간 중에 도주님께서는 산정에서 백일공부를 하시며 간간히 공사장에 임하셔서 감검(鑑檢)하셨는데 이때 장마가 들어 비에 젖은 목재를 불에 말려 쓰는 등 애로가 많았으나 정성을 다하여 4월 중순에 완공하였다.이에 앞서 도주님께서는 영대에 봉안할 증산상제님의 진영(眞影)을 구하고자 금산사 미륵불상을 촬영하여 오게 하시고 또 다른데 모셔진 영정을 모셔오게 하셨으나,“모두 옥안(玉顔)과 다르다”하시며 소화하시고 청봉(靑峰)으로 하여금 마산에서 데려오신 화공 이희백(李熙伯)에게 진영을 그리도록 명하셨다.그는 본래 농아(聾啞)였는데 산정 공부실 옆 방에서 매일 목욕재계, 분향하고 타인의 출입과 외출, 술, 담배를 금한 가운데 도주님의 지시에 따라 일심 정성으로 15일만에 칠성대제의 영정(影幀)과 함께 완성하였다.산정 공부실 옆 방에서 상비원(常備員)과 함께 시종하던 박중하가 4월 하순 어느날 밤 꿈에 도주님께서 면관용포(冕冠龍袍)로 옥경대(玉京臺) 용상(龍床)에 임어(臨御)하셨는데 좌우에는 선관선녀가 시립(侍立)하였고 용안(龍顔)이 일월처럼 빛나셨다.중하가 무의식중에 4배를 올리고 부복하니 꾸중도 같고 호령도 같이 말씀하셨으나 그 뜻을 모르고 꿈을 깨었다.그런데 똑같은 꿈이 연3일 거듭되므로 하도 신이(神異)하여 이용직 포감에게 상의하니 이포감이 “과거 태인도장 영건 전에는 도주님을 정산님으로 봉칭(奉稱)하다가 영건 후부터 비로소 도주님으로 봉칭하였으니 이번에는 그 이상의 큰 도수가 될 몽조라”하였다.중하가 다시 “구천상제님께서도 ‘평천하(平天下)는 내가 할터이니 치천하(治天下)는 너희가 하라. 치천하 50년 공부니라’ 하셨으니 우리가 도주님을 지존(至尊)의 위(位)에 봉대(奉戴)함이......당연한 도리인듯 하오이다”하니 이포감도 동의하므로 임원들을 소집하여 이를 공의에 붙인 결과 전원이 찬동하였다.이에 따라 4월 27일 임원들이 큰 의자를 사서 용상으로 하고 새 도포를 마련하여 용포로 한 다음 존전(尊前)에 올라가 아뢰기를 “도주님께옵서 지존위에 등극하옵소서”하였으나 도주님께서 비답(批答)하지 않으시므로 연3회 사뢰니,“그만하면 알았으니 내려가라”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셨다.임원들은 이로써 도주님께서 지존위에 임어하셨음을 전 도인에게 선포하니 모두 환호하였으며 이로부터 도주님을 ‘지존(至尊)’으로 봉칭하였다. 도주님께서 28일 봉천명일을 기하여 도장영건과 영대봉안의 치성을 아울러 봉행하시며 영건 공사에 공이 많은 도인들을 모두 참례하게 하셨다.치성에 앞서 도주님께서 영대를 설위(設位)하시니 영대 정면 중앙에 구천상제님의 진영을 모시고 그 우측에 옥황상제님의 위패, 그 다음에 관성제군의 영위(影位), 진영의 좌측에 서가여래의 영위, 그 다음에 칠성대제의 영위를 모셨다.그리고 배례의 순서와 회수도 정하시니 먼저 구천상제님께 법배(法拜) 4배, 우진(右進) 1보하여 옥황상제님께 평배(平拜) 4배, 좌진(左進) 2보하여 서가여래께 평배 3배, 우진 3보하여 관성제군께 평배 2배, 좌진 4보하여 칠성대제께 평배 2배한 다음 우진 2보하여 원위치로 돌아오게 하셨다.이해 5월 초3일에 도단의 임원체제를 과거의 단원제(單院制)에서 양원제(兩院制)로 개편하시니 하나는 포덕을 전담하는 포덕원(布德阮)으로서 종래의 포감, 선도사, 선도원을 임명하시고 하나는 교화를 전담하는 교화원(敎化院)으로서 새로 순찰(巡察), 순찰보, 순무(巡務), 순무보를 임명하셨다. 이를 또 중부와 지방으로 구분하시니 그중 상급임원은 다음과 같았다.지방임원중산방면 포감 李龍稙충주방면 포감 朴漢慶괴산방면 포감 柳喆珪청주방면 포감 林奎五영주방면 포감 金命求김천방면 포감 金容和연풍방면 포감 金思學중부임원충주방면 선도사 李京洙  순찰     李允燮괴산방면 선도사 吳治國  순찰보  申祥澈중산방면 선도사 朴德九  순찰보  朴重夏(연립 겸임)청주방면 선도사 尹東春영주방면 선도사 洪壽岩김천방면 선도사 李建雨연풍방면 선도사 鄭鍾草이에 앞서 도주님께서 공부에 너무 욕심내는 도인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첫술에 배부를 생각은 말라. 도의 공부 수도도 그러하니 도심이라야 도통을 이루는 것이지 욕심에는 욕통(慾通)이니라”하시고 술에 대해서는,“절주(節酒)는 군자의 마음이요 폭주(暴酒)는 소인의 마음이라 밥도 과식하면 병이 되듯 도를 닦음도 이와 같으리라”하셨다.임원을 임명하신 다음날 ‘유시문(諭示文)’을 내리시니 그(순한문이므로 직역(直譯))뜻은 대략 이러하다.“너희 도인들은 공경해서 이 직책을 받아 엄히 정성을 가지라.양양(洋洋)하신 상제님께서 위에 계시고 명명(明明)한 대도가 진행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태만할 수 있으랴. 날마다 진행하는 공부와 업무로 청화(淸和)한 5만년의 용화선경을 건설하는 공을 달성하기에 공경하고 명심하라”유시를 모신 임원들이 도주님께,“저희 도문소자들이 외람히 중직(重職)을 받들었사오니 진실로 황공하여 두렵고 조심스럽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넓고 두텁고 크신 은혜를 입어 기어코 청화 5만년의 용화선경을 건설하는 공을 달성하기로 이 마음에 새겼나이다”하는 ‘복고문’(伏告文 : 순한문의 축문식 글이므로 직역한 것)을 올렸다.복고문을 받으신 도주님께서,“그대들이 요사이 연원(淵源)이니 연운(淵運)이니 하여 내 도인 네 도인, 또는 내 방면 네 방면으로 구별을 짓고 사당(私黨)을 만들어 도랑을 치는 폐단이 적지 않으며 도인을 사도인화(私道人化)하는데 연원도 방면도 모두 도주(나)에게서 나오느니 사당은 사당(死黨)이고 사도인은 사도인(死道人)임을 명심하라. 그러기 위하여는 임원들 각자가 혁신(革新)하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야 하므로 내 이제 혁신도수를 보리니 혁신 서문(誓文)을 지어 올리라”하시므로 모든 임원이 다음과 같이 지어올리고 이 사실을 전체 도인에게 공포하여 봉행(奉行)을 독려하였다.“혁신서문저희들은 성·경·신을 근본으로 하며 지존의 덕화를 봉승(奉承)하여 왔사오나 저희들의 무지몰각(無知沒覺)한 소위로 존의(尊意)를 올바로 받들지 못하고 도와 진리를 곡해(曲解)하와 사회단체에 불과한 파별적인 행동을 범하였음은 황공무지(惶恐無地)이오며 불급지탄(不及之嘆)을 억제할 수 없나이다. 금반 혁신도수를 기하여 과거의 일체 행위를 반성회개하옵고 성경신을 근본으로 하여 3망(三忘) 5기(五忌)를 봉행하며 지존의 덕화를 받들어 참다운 도인이 되기를 맹서하나이다.”혁신서문을 받으시고 하교하시기를,“주역에 ‘정(井)의 도는 혁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井道不可不革>, 사물(事物)을 혁신하는 데는 정(鼎)만 한 것이 없다 <革物者莫若鼎>’하고 또 ‘혁(革)은 옛것을 버리고 정(鼎)은 새것을 취하는 것이라<革去故也 鼎取新>’한 것은 나의 일임을 너희는 깨달아야 하느니라”하셨다.이날 밤에 평일과 같이 철야(徹夜)공부하시다가 11시경에 시위(侍衛) 당번 반장 오득표와 반원들에게 명하시기를,“내가 잠시 쉬려 하니 1시 5분전에 깨우라.”하셨다.1시가 되었을 때 오득표는 자고 반원들은 도담(道談)에 골몰하고 있으므로 박중하가 존전에 시간이 되었음을 사뢰니,“어찌 이제서야 깨우느냐. 벌써 1시가 아니냐. 비록 1분 1초간이라도 천개어자(天開於子)가 지벽어축(地闢於丑)이 되는 차이거늘 천지는 분초간도 쉬지 않음을 명심하라”하고 엄히 꾸중하시며 오득표에게 대기명령을 내리셨다.어느날 충주지방 내수 오명순이 승안을 모시고 내려가려 하니, “도장에서 점심을 먹고 가라”하였으나 황감한 생각에 먹지 않고 이웃의 친지집으로 내려갔다. 도주님께서 아시고,“내 밥을 먹어야 내 일을 할수 있는 법이어늘 하물며......위명(違名)할 수 있느냐”하시며 박중하로 하여금 불러다가 부복시키고 엄책하게 하셨다.이달 초9일 조회(朝會)후에 말씀하시기를,“나의 일은 범질(范質)의 도수로 되느니라”하시고 통감(通鑑) 제15권을 가져오게 하셔서 임규오에게 임원들과 함께 영대에 배례를 올리게 하신 다음 그중의 ‘후주 공제 선우송(後周 恭帝 禪于宋)’의 항목을 큰 소리로 정중히 읽게 하셨다.규오가 읽기를 마치자 하교하시기를,“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光胤)을 황제위(皇帝位)에 등극(登極)하게 한 사람은 범질이니라. 당시의 비결에 ‘점검가외(點檢可畏)’라고 전하여 왔는데......송태조의 등극전 직위가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이었으므로 비결과 일치하였느니라. 이때 범질이 재상으로서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공제에게 예궐(詣闕)하여 재가를 내리게 하고 송태조를 부액(扶腋)하여 전상(殿上) 용상에 오르게 하니 이로써 송나라가 세워졌는 바 이 곧 범질의 도수니라. 너희들이 오늘 좋은 글을 배웠으니 내게 예(禮)하라”하시므로 4배를 올렸다.

 

 

 

 

 

 

 

 

 

 

 

 

渡江而西 度數

이해 5월 중순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그대들이 지난 번에 나를 지존위에 오르라 함이 도수를 알고 한 일은 아니나 이 또한 천기니라. 이로써 도수를 마쳤으니 이제 천장길방인 길지(吉地)를 찾아 도강이서(渡江而西)하여 정주(定住)할 대이동(大移動)도수와......대학도수가 돌아오느니라. 운수는 좋으나 고난이 많으리니 그대들이 감내(堪耐)할지 걱정이로다”하셨다.다음날 도주님께서 임원 몇 사람을 거느리고 감천(甘川) 용담 해수욕장에 임하셔서 한 나절을 소요하시며 산천지세(山川地勢)를 두루 살피셨다. 이를 전후하여 여러 번 박중하와 박봉상 등을 감천에 보내셔서 토지의 시세를 알아오도록 하시므로 그들이 그곳에 사는 최위출과 함께 ‘토지는 사서 무엇 하시려는지’ 궁금하게 여기며 알아본 결과 1평에 4~5백원임을 보고하였다.감천은 원래 그 반월령(半月嶺)에 도장(道丈)의 산소를 모신 곳이므로 도주님께서 자주 거둥하신 곳이었으나 중하 등이 알아본 곳은 그 산소 부근이 아니고 하감천 해변지대였다.7월 7일에 당시의 국회 부의장 조경규(趙瓊奎)가 부산도장으로 도주님을 찾아 뵈었다. 그는 도주님과 사적(私的)인 친분도 있지만 이날은 도인들의 판잣집 철거문제를 상의하러 온 것이었다.그는 도주님께,“부산은 본래 우리나라 제1의 국제항으로서 외국인의 출입이 잦고 따라서 미관(美觀), 화재문제 등 도시정비상 제반사정으로 판잣집은 철거해야 함이 정부의 방침인데 직접  책임은 아니나 제가 사전에 진달(進達)함이 도리인 줄 알고 왔사오니 하념(下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며 철거와 이주(移住)방법은 도중임원과 관계당국이 협의하여 시행하도록 여쭈었다.이때 도주님께서는 도인들의 대이동을 이미 도수로서 심정(心定)하시고 임원들에게는 하시(下示)하신 바이나 현실여건(現實與件)이 염려되셔서 공포하지 않으셨는데 조부의장의 상고(上告)를 접하셔서 자동적으로 시행하게 된 구천상제님의 도수에 새삼 감열(感悅)하시고 쾌히 응낙하셨다.이날 밤에 중부임원들을 긴급히 명소(命召)하셔서 하명하시기를,“내가 도인들의 대이동도수를 몇달 전에 심정하였으나......아직 명령을 내리지 못하였더니 오늘 조부의장과 협의한 결과 도인들의 판옥(板屋)을 철거, 이주하기로 하였느니라. 이를 좋게 받아들여......만반으로 준비하되 이것이 구천의 도수임을 명심하고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태세를 확립하도록 하라”하시고 박중하와 박봉상으로 하여금 이에 따른 당국과의 협의를 추진하되 도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유의 노력하게 하셨다.박중하 등이 당국과 협의하면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이주할 땅인데 1000여호가 당장 이주함에는 최소한 몇 만평의 부지는 당국이 주선해 주어야 할 것임에도 이것조차 불응하였다.그리고 당국이 이주지로 예정한 영도 청학동은 택지조성(宅地造成)조차 할 수 없는 경사지(傾斜地)이고 그 토지가 거의 사유지(私有地)이므로 자담매입(自擔買入)해야 할 난감한 사정이었다.박중하 등이 이러한 사정을 복명하니,“지난 번에 너희에게 감천의 토지시세를 알아보라 했으나 건성으로 하여 다급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러나 영도는......불가(不可)하고 이주할 곳은 오직 감천이라야 하느니 그곳이 천장길방(天藏吉方)이니라. 감천을 감내라 하니 ‘지성이면 감천’이고 ‘고진(苦盡)이면 감래(甘來)’가 바로 이곳이며 새 서울이 이곳이니라. 감천에서도 해변이 아닌......반월령으로부터 천마산(天馬山)과 옥녀봉(玉女峯)의 두 산록(山麓)이 서로 맞닿은 동구까지의 천마옥녀 음양합덕지궁(陰陽合德之宮)이라야 도수의 땅이 되느니라. 너희는 이를 명심하고 당국과 협의하되 이 또한 천기니 누설하지 말라”하셨다.도주님의 명령에 따라 박중하 등이 당국과 협의한 결과 이주지는 감천동으로 정하고 철거 개시일은 7월 19일로 하되 당국에서는 철거기간 동안 임시 거주할 천막 50장을 지원하고 철거자재와 가재도구를 무상(無償)으로 수송해 주기로 하였다.이에 이주업무를 담당할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에 박중하, 위원에 신상철, 윤금현, 김중태를 임명하셔서 반월령에 사무실을 두고 각 방면 임원과 이주업무를 협력 추진토록 하셨다.먼저 금품을 내려주셔서 이주할 예정지의 사유지는 매입하고 경작자가 있는 국유지는 권리금을 주고 양수(讓受)하도록 하여 감천 전지역을 9개구역으로 구분하되 반월령에서 옥녀봉 방향은 1감, 2감, 3감, 4감으로 하고 중앙지대를 5감, 다시 그 남단에서 천마산 산록을 따라 북향은 6감, 7감, 8감, 9감으로 명명하셔서 9궁(九宮), 9곡(九曲)의 형상을 이루게 하셨다.그리고 1감은 충주방면, 2감은 김천, 3감은 청안, 4감은 괴산, 5감은 중산, 영주, 6감은 괴산, 7감은 청주, 8감은 충주, 9감은 연풍 등 각 방면별로 집단지역이 되도록 정하신 다음 한편에서는 보수동 판옥을 철거하고 한편에서는 택지를 조성하여 다시 판옥을 짓도록 하셨다.중부도인들은 원래 6·25사변 때 남하하여 난민생활(難民生活)을 하면서도 오직 신앙때문에 수복(收復)후에도 귀향하지 않고 보수동 근처에 정착(定着)하였으나 이무렵에도 안정된 직업을 가진 도인은 얼마 안되고 대부분이 날품팔이 또는 행상(行商)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는데 판옥일망정 철거하고 이주함에  있어 당국의 지원은 겨우 자재 수송에 그치고 토목, 건축 등 모든 경비는 자체부담이었다.더구나 일기조차 불순하여 작업이 부진하고 근근히 완성되어 가던 택지와 건축이 폭풍과 장마비에 파괴되는 일이 허다함으로써 도인들의 참상(慘狀)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도주님의 훈교와 도심으로 이주업무를 계획대로 추진하였다.도주님께서는 매일 비바람을 무릅쓰시며 보수동과 감천동의 현장에 임하셔서 7년 대한, 8년 풍진(風塵), 9년 홍수의 도수를 말씀하시며 도인들을 위로 격려하시고 금품과 자재를 하사하셔서 이해 10월 말경에 800호 가량이 입주 정착하니,“이 오강록(烏江錄)도수며 도강이서 도수니라”하셨다.이주사업이 진행되던 8월에 도주님께서 대책위원회 사무실 옆에 싸전을 내어 위원회 직영(直營)으로 도매상에서 양곡을 받아 도인들의 실정에 맞도록 공급(供給)하게 하셨다. 이 결과 도인들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오므로 10월에는 5감지역에도 더 내게 하시고 그 책임자에 김용화 포감, 보조원에 권형진, 김중태, 김동윤 등을 임명하셨는데 그 규모가 커지자 이듬 해 봄에는 시내 충무로 속칭 자갈치시장의 양곡위탁판매업체(糧穀委託販賣業體)인 협동상회(協同商會)와 감만동의 도정(搗精)업체인 대원산업(大原産業) 주식회사를 인수하여 경영하게 하셨다.8월 중순에 국회 부의장 조경규가 사람을 보내어 왜정 때 만주에서 활약하신 독립운동에 대한 서훈(敍勳)신청과 안면도와 원산도에 간척하신 농지에 대한 환수책(還收策)을 여쭈니 단호히 거절하시고 다시는 거론조차 못하게 하셨다.감천동 5감지역의 지번(地番)이 산 105번지였으므로 원주민 모두가 주소를 감천동 105번지로 사용함에 따라 도인들도 105번지를 주소로 하였는데 도주님께서,“선천에는 천상(天上)이 108천이었으나 후천에는 105천이므로......후천도수에 상응(相應)함이니라”하셨다.

도인 집단이주 당시의 감천동도주님께서 도기 47(1955)년 7월, 지난 6·25사변에 부산으로 남하하여 보수동 도장 근처에서 판잣집을 짓고 난민생활을 하던 도인들에게 정부의 시책인 판잣집철거령에 따라 부산시 서구(지금은 사하구)감천동으로 집단이주토록 하셔서 그해 10월말까지 800호가량이 다시 판잣집을 짓고 이주 정착한 모습.사진 ① 우상으로부터 1감, 2감, ② 우상으로부터 3감, 4감, 5감, ③ 우하로부터 6감, 7감, 8감, 9감의 모습이고 그 중 아랫쪽의 초가는 원주민의 집이며 좌측 중간의 숲이 있는 곳이 지금의 시영 아파트 위치.

 

 

 

 

 

 

 

 

 

 

 

 

 

 

 

 

普化聖域 甘川

이주사업이 완성되자 도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주회암(朱晦庵)의 무이(武夷) 9곡과 송우암(宋尤庵)의 화양(華陽) 9곡이 아무리 좋다 한들 어찌 나의 감천 9곡만 하랴. 내가 초패왕 강동자제(江東子弟) 8천인의 해원(解寃)도수로 이제 8백호의 천장길방(天藏吉方)을 여는 공사를 마쳤으니 구천상제께서 짜놓으신 오강록(烏江錄)도수에 맞느니라. 상제께서 일찍히 허령부(虛靈符)로써 태인도장, 지각부(知覺符)로써 회문도장을 점지하신 허령도수와 잠룡, 지각도수를 마쳤으니 이제는 그대들이 현무경(玄武經) 신명부(神明符)를 보라. ‘무이9곡’을 좌서(左書)하신 이 길방(吉方), 명당(明堂), 보화성역(普化聖域), 청학동(靑學洞)에 너희들이 살게 되었으니 다시 천은(天恩)에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려야 할지니라”하셨다.또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이 지금은 이렇게 고생하나 도통은 고사하고 광제(廣濟)에 참예하여 도인이라는 칭호만 들어도 만승천자(萬乘天子)가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일 날이 있으리라”하셨다.도주님께서 도인들이 각 방면 집단별로 회의, 교화, 기도, 수련에 소용될 회의실을 짓도록 하시니 각 방면에서는 25호 기준으로 10여평 내지 40평의 규모로 총 24개소의 회의실을 지었다.그리고 주일기도는 반드시 회의실에 모여서 합동으로 모시게 하시고 또 5감지역에 종을 달아 기도시간에 맞추어 치게 하시다가 정유(丁酉 : 1957)년에 대강전(大降殿)이 영건되자 그 옆으로 옮기게 하셨다.(이 종을 화천 후에 유명에 따라 더욱 크게 주조하여 종각(鐘閣)을 짓고 큰 북과 함께 설치하였다.)이해 10월에 도주님께서 주회암의 ‘무이구곡시’, ‘서전 서문’을 내려주시고, 또 ‘정심경(定心經)’을 내려주시며 많이 읽도록 하시므로 각 방면 도인들이 회의실에 모여 외는 소리가 감천 전역에 울려퍼졌다.이달 하순에 도주님께서 대책위원들에게 명하시기를,“도인들이 모두  감천으로 이주하고 나만 보수동에 남아 있는 것이 도수에 맞지 않으니 5감에 방 한 칸을 마련하라”하시므로 적합한 집을 거둥시의 임시 행재소(行在所)로 정하여 드리니,“이곳에서 장차 대학도수를 보게 되리라”하시며 ‘왈유정(曰有亭) 관아재(觀我齋)’로 명명하셨다.하루는 임원들이 4감에 있는 천덕사(天德寺)를 사서 도인들의 주택으로 사용하고자 도주님께 여쭈니,“천덕사가 있음은 감천이 천덕곡(天德谷)의 증거니 그대로 두도록 하라”하시므로 사지 않았다.이어 하교하시기를,“너희는 이곳의 험난한 지형과  빈번한 풍우(風雨)를 탓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어찌 공동(空洞 :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동네)으로서 천장길방한 도수의 땅이 되었으리요”하셨다.또 하루는,“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하느냐. 땅이 꺼질까 두려워 하느냐. 오직 네 마음과 몸이 무너지고 꺼짐을 겁내고 두려워 하라. 이것이 안심(安心), 안신(安身)의 요체(要諦)니라”하시고, “도인들은 오직 앞을 내다보고 일심수도하여 진경지인(眞境之人)이 되도록 하라”하셨다.11월 말경 도주님의 회갑일을 몇일 앞두고 가족과 임원들이 수연(壽宴)을 준비하려 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으시므로 여러번 간원하니,“수연이란 선천에서 속인(俗人)들이 환갑(還甲)이니 회갑(回甲)이니 하며 장수(長壽)를 축하함이나 도에서는......후천 5만년 선경세계가 있으니 해원(解寃)하고 싶거든 더 말하지 말라”하시며 끝내 불윤(不允)하셨다.12월 초4일 아침에 수연상(壽宴床)을 올리니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상을 수연상이 아니라 보통 아침상으로 알고 받노라. 다만 그대들의 정성을 보아 잔이나 받겠노라”하시며 가족과 상급임원들이 차례로 올리는 잔을 받으셔서 한 모금씩 고루 드시더니 15잔이 되자,“이제 낙서(洛書)의 구궁수(九宮數)니 그만 그치라”하셨다.초5일 납향치성(臘享致誠)에 즈음하여 하교하시기를, “이 치성은 옛날 제후(諸侯)가 천자를 위하여 드리는 제향이므로 각 포감방면별로 올려야 하나 금년에는 내가 시범을 보임이니라”하셨다.(이 하교에 따라 다음해부터는 포감방면별로, 현재는 각 지부별로 올리고 있다)이무렵 임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우리 도는 정도(正道)니라. 비유해서 말하면 비뚤어진 천지도 정음(正陰) 정양(正陽)으로 바르게 하고 북극성도 중앙으로 환원시키며 사람도 5장 6부를 뜯어 고쳐 바르게 하는 도니라.”“지금까지 세상에 나와 있는 물체는 당초에 사용하지 못할 것은 없는 법이니 바르게 쓰지 않아 인류에게 해를 끼쳤으나 이제 부터는 효용(效用)되게 하리라”“물 한 방울, 풀 한 포기의 고마움과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는  눈 어두운 도인이니라”“학문이 도와 합덕이 되어야만 생학(生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사학(死學)이 되느니라”“농부나 초부, 심지어는 주초상(酒草商)도 필요하며 백정도 소중하고 어부도 유공하니 오직 성·경·신으로 하는자가 바른 인간이니라”“인간의 모든 일을 유가(儒家)에서는 운명이라 하고 불가에서는 전생숙업(前生宿業), 서교에서는 천주섭리(天主攝理)라 하나 모두 일리(一理)는 있되......과부족(過不足)이니라......태극의 체와 용(用)의 도수가 합덕, 조화, 상생하여야 옳은 운도(運度)니라”“혹시(或是)는 시(是)가 아니고 요행수(僥倖數)는 수가 아니니 요행수를 바라지 말라”“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못할 때가 있으리니 평상시에 도를 잘 닦아야 하느니라”병신(丙申 : 1956)년 설날 임원들의 세배를 받으신 다음 월출 여의산(月出如意山)이란 시 한 구를 불러 주시며,“명(明)자를 운(韻)으로 해서 댓구를 지으라”하시므로 임원들이 천지일시명(天地一時明), 만호대개명(萬戶大開明), 우주일시명(宇宙一時明)등을 지어올리니 도주님께서 조득천심명(照得天心明)이라고 하시며,“그대들이 평하여 보라”하셨다.임원들이 존전(尊前)에서는 감히 평을 못하고 물러나와 의견을 종합하니 ‘월출여의산’은 도주님께서 도통하신 경지(境地)를 표현하심이고 ‘조득천심명’은 구천상제님의 공사도수를 모두 성취하심을 표현하신 것으로서 이는 필시 우리들에게 도의 오의(奧義)를 암시(暗示)하심이라고 하며 감열(感悅)하였다.정월 초2일에 도주님께서 중부도인들에게 지난 해 이주정착사업의 노고를 위무(慰撫)하시고 금품을 하사(下賜)하셔서 농악과 윷놀이로 함께 즐기게 하셨다. 이때 농악을 앞세운 남사당과 꼭두각시 놀음에 감천 전체의 남녀노소 도인들이 춤과 노래로 합류하여 명절의 흥취가 넘쳤으며 윷놀이에서는 상생행마법(相生行馬法)을 쓰도록 하시니 이로부터 도가(道家)에서는 모두 이 행마법으로 윷놀이를 하게 되었다.도주님께서 과거 기묘(己卯 : 1939)년에 화선(化仙)하신 도중고모(道中姑母) 선덕부인(宣德夫人)의 봉사(奉祀)를 차자 청암(靑岩)에게 명하셨는데 이해부터는 그 기제(忌祭 : 6월 3일)와 절사(節祀 :설·추석)에 상급임원 중에서 2~3명씩 지명하셔서 참사(參祀)시키시고 이해 3월에는 그 산소를 창원군 내서면 감천리(甘泉里) 무학산(舞鶴山) 서쪽 기슭에 면례하게 하신 다음 10월 초6일에 시향일(侍享日)로 정하시고 그 이웃에 사는 백기한(白基漢)으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셨다.정월 대보름에 임원들과 미리 선발된 노래, 춤, 희극의 장기자(長技者)들이 보수동 도장에 모여 유쾌히 놀 때 도주님께서 관람하시며 이종한(李鍾漢)의 장기와 김금돌(金今乭)의 노래를 치하하시고 김금돌로 하여금 영대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신 다음,“신명들도 잘 부르는 노래와 잘 읽는 주문을 좋아하느니라”하시며 음복(飮福)을 하사하셨는데 파할 때 ‘만세’를 제창하고 제3창에서 ‘5만세’를 제창하니 미소하시며,“너희들은 5만세면 다냐? 무량수(無量壽)니라”하셨다.27일에 도주님께서,“내가 저번에 말한 대로 나의 거처를 감천 관아재로 옮겨야 하겠노라”하시므로 임원과 가족들이 모두 “관아재는 너무 옹색(壅塞)하오니 새 집을 지어 모실 때까지 기다리옵소서”하였으나, “내 어찌 집이 크고 작음에 개의(介意)하리오”하시며 이어(移御)하셔서 공부설석(工夫設席)하시고 ‘구덕정사(九德精舍)’로 개칭하셨다.이에 앞선 6년전 현직 경찰관이던 박봉상(朴奉祥)이 예천사건(禮泉事件)에 연루(連累)되어 무고(無辜)히 파면된 이래 직업을 얻지 못해 생계가 곤란하더니 도주님께서 상업자금을 빌려 주시며,“성실히 장사하여 생활하되 반드시 갚아라”하셨다.그후에 봉상은 장사에 실패하여 갚아드리지 못하고 몇 해가 지나자 잊었더니 뜻밖에 신경통이 생겨서 몹시 고생하고 있는데 도주님께서 부르셔서 부복시키고,“네가 네 죄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하고 꾸중하셨으나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아느냐. 만수도인의 성이니라”하셨다.봉상이 그제서야 깨닫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니,“내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하노라”하시자 신경통이 고대 나았으며 봉상은 그 은혜에 감복하고 도주님께서 화천하신 후 수년간 자진해서 시릉(侍陵)하였다.도주님께서 구덕정사에 공부설석하신 후에도 보수동 부산도장과 산정에 자주 거둥하시므로 임원들이 상의하여 승용차를 사서 운전수 이강한(李康澣)으로 하여금 모시게 하였다.이무렵 감천에서 보수동으로 가는 찻길은 충무동, 또는 괴정동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고 반월령으로 넘어가는 길은 가깝기는 하나 좁고 험해서 차가 다닐 수 없으므로 도인들이 찻길로 확장보수 하였다.하루는 윤금현이 도주님께 여쭈기를 “비결에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는 구덕산하남오리(九德山下南五里)요 대치지남우삼리(大峙之南又三里)라”하였사온데 이곳 감천이 틀림없나이다”하니,“너희는 그 비결이 아니면 이곳이 길지(吉地)임을 못믿겠느냐. 비결은 비결이고 진리는 진리니라”하셨다.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지금 도인들이 2차의 피난을 겪느라 조반석죽(朝飯夕粥)도 제대로 못하고 밀기울죽으로 연명하는 생활고가 막심하여 원한이 맺혔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도다. 그러나......수도자에게는 고행이 따르느니 너희도 고행 수도 하여야 해원을 성취하리라”하셨다.도인들이 감천에서 시내로 왕래하는 길은 반월령을 넘어 아미동을 경유해야 하는데 아미동은 본래 불량폭력배의 소굴로 이름난 곳이었다. 폭력배는 도인들을 욕설과 폭력으로 괴롭히고 금품까지 강탈하는 등 행패가 심했다.이때 대책위원회에서 순찰반을 조직하여 도인들을 보호하려하다가 순찰반조차 피해를 보게 되자 경찰이 극력 단속해서 근절(根絶)시켰다.

 

유명에 따라 영건된 종각 도주님께서 도기 47(1955)년 10월 하명하심에 따라 화천하시던 해 5월 큰종과 큰북을 설치하기 위하여 건립한 종각.

 

 

 

 

 

 

 

 

 

 

 

 

 

 

道團體制 確立

2월 20일에 도주님을 시봉(侍奉)하는 책임을 총괄(總括)할 도전직(都典職)과 그 부전직(副典職)을 신설하시고 도전에 이윤섭(李允燮), 부전에 이인호(李仁浩)를 임명하셨다.이달 하순에 임규오, 김사학 등 임원과 배문회(裴文會), 배문걸(裴文傑) 등에게 도의 취지(趣旨), 도통(道統), 기원(起源), 신조(信條)의 강령(綱領), 요체(要諦)와 도인의 수칙(守則)등을 문서로 초안하게 하시므로 각자 지어 올리니,“모두 미흡(未洽)하다”하셨다.3월 초1일에 도주님께서 친히 지으신 글을 박중하로 하여금 정서하게 하신 다음,“이를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으로 하여 상재(上梓), 공포하라. 미흡하나 쓸 것이니라”하시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다만 그 원문은 별책으로 출판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수록을 생략한다)그 가운데 태극도 창설의 취지를 밝히신 ‘취지서’의 문단(文段)별 대의(大意)를 간추려 기술하면 대략 이러하다.제1문단(우주지~소자출야) : 태극의 어의(語意)와 의의(意義).제2문단(천지일월~증산상제야) : 태극이 기동작용(機動作用)하는 묘(妙)에 따른 성인의 내세(來世)와 상제의 강세(降世).제3문단(유아상제~지의성의) : 구천상제의 권능(權能), 공사(公事), 화천.제4문단(유아봉교~소유설야) : 태극도 도단을 창설한 이유.제5문단(유아도~역재자의) : 도인의 수행요령과 그 목적인 도통의 과정.제6문단(범아유심~선사운이) : 중생의 보화성역(普化聖域)에 함께 참예 선언.‘도통과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도명 : 태극도.도주 : 조정산.도의 원천(源泉) : 태극의 진리신앙의 대상 :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상제.신앙의 목적 : 진리의 도통수도의 요강 : 1. 안심·안신·경천·수도.              2. 성·경·신.              3. 무자기(無自欺).‘기원’은 도의 근원이 무극, 태극의 진리에 있고 구천상제께서 이를 관령 주재 하심을 밝히신 글이다.‘신조’는 태극의 진리를 밝히고 그에 따른 도의 4강령인 안심·안신·경천·수도와 3요체인 성·경·신의 뜻과 수행의 요령을 밝히신 글이다.‘도인의 수칙’은 도인으로서 일상생활에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을 5개 항목으로 제정하신 글이다.도주님께서 통감을 공포하신 다음 그 내용을 일일이 열거하여 임원들에게 하교하셨다.그 가운데도 특히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寃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이 태극의 진리임을 강조하셨는 바 대략 이러하였다.“도란 무극의 정(定)과 태극의 동(動)에서 양의(兩儀 : 음양)가 생(生)하고 양의에서 4상(四象), 8괘(八卦)가 생하는 우주 생성발전(生成發展)의 본체(本體)니라.......무극이 곧 태극이고 태극이 곧 음양이며 4상, 5행(五行), 8괘니 이것이 태극의 진리니라”“이 진리는 천·지·인 3계 어디에나 편재(遍在)하고 과거, 현재, 미래 언제나 항존(恒存)하는 근본 원리니 우주간 모든 사물(事物)과 기동(機動)이 이 진리에서 이탈할 수 없느니라. 이를 이(理)로 보면 천리(天理), 지리(地理), 인리(人理)가 되며 법(法)으로 보면 천법, 지법, 인법이 되고 도로 보면 천도, 지도, 인도가 되며 이는 또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보화적(普化的) 진리니라. 이 진리를 체득(體得)하기 위하여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무수한 성철(聖哲)들이 노심(勞心)하였으나 유한(有限)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상제께서 친히 강세(降世)하시게 되었느니라”“도의 본체인 무극 곧 태극을 과학자는 우주자연이라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하느님 또한 한울님이라 하며 서교(西敎)에서는 여호와라 하고 불가에서는 비로자나불이라 하나 그 명호(名號)야 무엇이든 우주 생성발전의 본체는 무극 곧 태극이니라.무극과 태극은 체(體)와 용(用)이니......구천상제께서 무극주로서 진멸지경(殄滅之境)의 인세(人世)에 하강(下降)하셔서 삼계공사(三界公事)로 도수를 짜놓으신 사실......나는 이제 태극주로서 무극주 상제의 도수를 풀어 설법(設法)함이니......체용일여(體用一如)의 원리를 너희들이 알라. 그러므로 내가 베푸는 법방(法方)만이 만인간에게 안심, 안신을 주어 광구(匡救)하리니 경천, 수도를 게을리 말지니라”“음양합덕은 태극원리니 음양은 태극이라 동체(同體)원리로 말하면 손바닥은 음, 손등은 양......이체(異體)원리로는 남자는 양, 여자는 음임과 같으니라. 이러한 음과 양이 서로의 덕성(德性)을 화합시키는 것이 음양합덕이니 가장 가까운 일로는 부부(夫婦)의 도가 그것이고 가장 큰 것은 천지며 우주니라”“신인조화는 우리 인간의 일거일동(一擧一動)에 신명의 작용이 붙지 않음이 없으므로 신명과 인간이 조화(調化)하여야 어천만사(於千萬事)에 형통자재(亨通自在)함이니라.너희는 음양이 합덕하지 않고 신인이 조화하지 않으면 하루의 목숨도 지탱할 수 없음을 알라”“해원상생은 오도(吾道)의 실천윤리(實踐倫理)의 대강령이라.해원은 신·인간이나 인간 상호간의 원척을 푸는 공사니 이는......천지만물이 오직 서로 생(生)하기만 하는 후천세계의 상생(相生)은 이미 열렸느니라. 수생목(水生木)만 하지 않고 수생화(水生火)도 하며......상생상합의 무극대운의 후천선경의 도수니라”“도통진경은 오도의 목적이니 이는 개인의 이상인 동시에 우주 전체의 진경(眞境)이니라. 도통은......신통력도 있되......오직태극의 진리를 각지(覺知) 체득(體得)하여 삼계를 자재임운(自在任運)하는 것이 진(眞)도통이니라. 이러한 요체로 활연관통(豁然貫通)함이 5만년 후천선경 우주 전체의 대도통이니라.”이날 중순에 도주님께서 청주에 거둥하시니 이는 청주사건을 종결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때 섭외총책으로 윤금현을 명하시고 박한경, 유철규, 김영하 등 사건 관련인과 임규오, 김사학, 정운교, 박종순 등 임원이 시종하였다.26일에 태극도 사건의 재판장 김동수는 이 사건이 미결상태로 3년이나 계류(繫留)되었던 사실을 감안하여 상오에 구형, 변론을 거쳐 결심(結審)하고 하오에 판결하여 도주님 이하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사건이 종결되었다.도주님께서 부산도장으로 환행하시던 도중 보은 속리산 법주사에 임하셔서 대웅전 큰 방에서 철야(徹夜) 공부하시더니 새벽에 임원들로 하여금 미륵불 앞에 불공을 드리게 하셨다.다음날 환행하시는 차중에서,“내가 이번에 3년간에 걸친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를 완전히 마쳤으니 이로써 나의 일이 거의 성취되었고 앞으로 몇 가지 큰 도수만 남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다.수일 후에 감천 구덕정사로 환행하셔서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내가 1년전에 혁신도수를 명하였으나 아직도 혁신이 되지 않았으므로 다시 명하노라. 너희들은 각자 자신의 과오를 낱낱이 글자로 적고 앞으로는 반드시 반성 개과할 것을 맹서문으로 올리라.......”하시므로 임원들이 그날 밤 명령에 따른 반성문과 맹서문을 올렸다.반성문과 맹서문을 받으시고 하교하시기를,“이번 혁신도수로서 지금까지 지은 죄과는 사(赦)하되 앞으로 짓는 죄는 자유에 맡기고 내가 관여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너희들이 나의 그늘을 벗어나면 죽으리라”하셨다.이날 반성문에 모두 과거의 잘못을 기록하여 올렸으나 박모, 유모 등 몇 임원은 기록하지 않음을 보시고,“이제라도 좋으니 죄과가 있으면 고하라”하셨으나 끝내 고하지 않자,“너희가......너희 위에 내가 있음을 생각해 보았느냐......어찌 도인이라 하랴. 조고(趙高 : 중국 진나라 때의 환관(宦官)으로서 진시황이 죽은 뒤 후계를 세울 때, 조서를 거짓 꾸며 시황제의 장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우둔한 호해(胡亥)를 제2세 황제로 즉위시킨 다음 자신이 정승이 되어 온갖 횡포를 다함으로써 진나라를 망하게 함)보다 그 죄가 더하도다”하시고 금주령(禁酒令)을 내리셨다.금주령을 내리신 후에 임원들로 하여금 엄히 감독하게 하시고 동내에서는 술을 팔지도 못하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은 술이 수도인에게는 사약(死藥)임을 알아야 하느니 단주(斷酒)는 있되 절주(節酒)는 없는 법이니라”하시고 음복주도 수저로 떠먹게 하셨다.4월 초5일에 도의 조직체제를 개편하셨다. 과거 양원의 명칭이 포덕원은 포정원(布正院), 교화원은 호정원(護正院)으로 개정되어 포정원에는 포장(布丈), 포정(布正), 포령(布令), 호정원에는 호장(護丈), 호정(護正), 호령(護令), 부령(副令)을 두되 과거 포덕원의 포감, 선도사, 선도원과 교화원의 순찰, 순찰보, 순무, 순무보가 위계대로 보임(補任)되니 그 가운데 포장, 호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포장이용직, 박한경, 유철규, 임규오, 김명구, 김용화, 김사학, 오치국호장박중하, 이윤섭, 신상철, 김영하본부에 새로 시봉원(侍奉院), 보정원(補正院), 전학원(典學院), 편찬위원회(編簒委員會),청년부(靑年部)를 두셔서 종래의 내무(內務), 외무(外務), 재무(財務)와 함께 도단 운영업무를 담당하게 하셨다.이날 임원개편에 있어 종래의 내무책임자 박중하, 외무책임자 신상철, 재무책임자 김용화는 그대로 유임되고 새로 설치된 시봉원에는 종래의 도전 이윤섭을 그 책임자로 하고 그 관하에 부전 이인호, 상비원(常備員) 박덕구(朴德九), 신경희(申景熙) 등과 시봉(侍奉) 몇 명이 임명되어 도주님 시봉과 도장 수호(守護)를 담당하였다.보정원은 과거 도중업무에 공로가 많았던 도인 중에서 조호선(趙浩善), 김경기(金敬基) 등이 보정(補正)으로 임명되었는데 보정은 예우(禮遇) 임원으로서 보직(補職)이 없었다.전학원은 도역자(道役者) 교육기관이었으나 당시 피난생활 속에서 학교에 다니지 못한 도인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할 기구로서 천덕공민학교(天德公民學校)를 설립하여 교장격인 학정(學正)에 조영래(호는 청구), 교감격인 교전(敎典)에 박재승(朴在勝), 서무격인 교무에 김규현(金奎賢), 교사격인 학무(學務)에 허경오, 유대형, 윤대한, 강석진, 지원하 등이 임명되었다.편찬위원회는 도전(道典 : 도의 경전), 도사(道史 : 도의 역사)의 편찬(編纂), 간행(刊行)을 담당할 기구로서 위원장에 조영래, 위원에 박중하, 윤금현, 김경기, 노대형 등이 임명되었다.청년부는 청년도인을 지도, 교화할 부서로서 중부의 충주, 괴산, 연립 3개 방면별로 청년포정에 이화섭, 김해구, 김각 등이 임명되었다.이달 초8일에 도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임원들의 조직 체계를 태극 8괘에 응기(應氣)하여 개편하였으니 내 이제 고천(告天)하리라”하시고 치성을 올리시며 복고문(축문)을 임규오로 하여금 읽게 하시니 그 뜻은 대략 이러하다.(이 복고문은 순한문으로 원문은 생략하고 직역문을 수록한 것이다.)“복고문엎드려 이 좋은 날 좋은 때에 삼가 백번 절하며 구천상제님 영전에 고하나이다.저 태극도주 조정산은 도사업을 닦은지 40여년간 항상 부족함을 두려워함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음이 항상 지금과 같았습니다.지금 세상이 흐리고 인심이 각박하여 사람의 도가 모두 멸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도중 간부의 직명(職名)과 일반의 각 이름을 8괘에 의하여 개정함이 이름을 고함과 같사오니 굽어 살피옵소서”치성 후에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지금부터 도중사업의 운영 전반을 하의상달(下意上達)로 일반도인의 의견이라도 수렴하여 너희들이 협의 의결하고 처리할 협의회(協議會)와 의사회(議事會)를 설치하노라.협의회는 포장, 호장을 의원으로 하고 의사회는 포정, 호령을 의원으로 하여 구성하되 호정과 지방포장의 대리 포정은 협의회에 참여토록 하라. 또 협의회는 도중 최고 의결기관, 의사회는 그 보좌기관으로 하고 각 의회에 의장 부의장 1인씩을 자체에서 호선(互選)하여 의사(議事)를 관장하게 하라. 각 의원은 도사업이 발전할 수 있는 의안(議案)을 제출하고 심의, 의결할 권한과 의무를 성·경·신으로써 수행하라. 모든 의결사항은 내 재가(裁可)를 받아 시행하되 각 집행부는 그 시행의 책임을 완수하여야 하느니라”하시고 회의 운영방법 등을 자세히 가르치셔서 예행연습까지 시키시니 협의회 의장에 박중하, 의사회 의장에 윤금현이 선임되었다.도주님께서 협의회와 의사회를 구성시키신 다음 두 회의 합동회의 기구로서 연합회(聯合會)를 구성토록 하시고 그 의장은 협의회 의장이 맡도록 하셨다.이어 하교하시기를,“이 세상에서 제일 큰 회는 용화회 뿐이고 그 회장은 오직 나뿐이니 도중에서는 무슨 회든지 회장이란 직명(職名)을 쓰지 못하느니라”하셨으므로 도단에서는 지금까지 준행하고 있다.이날 밤에 포정, 호령과 상비원, 학무급 이상의 임원들을 정사 내정(內庭)에 시립시키시고 도령장(道令狀 : 임명장)을 친히 수여하셨다. 이때 달이 이미 진 뒤임에도 그 일대가 대낮 같이 밝았으나 수여하셨던 도령장을 회수하셔서 불사르시니 다시 어두워지므로 모두 신이하게 여기고 감복하였다.도주님께서 도령장 수여가 끝난 후에 말씀하시기를,“명령이란 명자는 목숨 명(命)자이고 책임이란 책자는 꾸짖을 책(責)자며 포령이란 영자는 전령(傳令)이란 영자니 임원들은 명심하라”하시고 도문연(到門宴 :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 베풀던 잔치)의 고사(故事)를 말씀하셨다.새로 설립된 천덕공민학교는 급격히 확장되어 한 달도 못되는 사이 주간, 야간 학생이 1200여명에 달하였으며 이들은 임시교사(臨時校舍)인 각 방면 회의실에서 분산 수용하고 학력수준에 따라 초급반은 국민학교 교과목부터 교육하였다.그 초창기에는 경험이 없는 전학원 임원들이 교재와 설비도 불충분하여 애로가 많았으나 열성과 노력에 의하여 점차 발전하였다.도주님께서 학무를 자주 불러 격려하시며 학생들을 귀여워하시고 수시로 금품을 하사하시며 지육(知育), 체육(體育)에 앞서 덕육(德育)에 힘쓸 것을 강조하셨다.이달 하순에 상급임원들을 거느리고 부산극장에서 단종애사(端宗哀史)라는 영화를 관람하신 다음 말씀하시기를,“세조가 만약 조금만 일찍 깨달았으면 오죽 좋았으랴...늦게라도 원각사를 짓고 참회(懺悔)함은 다행한 일이니라”하셨다.한 도인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해를 입고 악한 사람이 이로움은 무슨 이치오리까”하고 여쭈니,“이는 선천 상극시대의 잘못된 비운(否運)으로서...어쭙잖게 득보는 일도 있으나 악인의 영화를 부러워 말라. 그 당대가 아니면 자손의 대에라도...더 큰 화가 따르리라. 그리고 사후(死後) 신명계의 벌은 또 어찌 면하랴”하셨다.

? 보은 속리산 법주사 공부처 ?도주님께서 도기 48(1956)년 3월 26일 하룻밤 공부하신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속리산 법주사 대웅전 ①과 임원들에게 불공을 드리게 하신 미륵불상 ②.

 

 

 

 

 

 

 

 

 

 

 

太極의 核點 새서울

5월 초 어느날 도주님께서 정사 내정에서 소요(逍遙)하시다가 천마산과 옥녀봉을 가리키시며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은......감천이 왜 천장길방인지 아느냐.......예로부터 산봉(山峯)이 쌍태(雙胎)만 되어도 대지(大地)라 하는데 감천 국내(局內)에는......4쌍태가 있어 8괘형국을 이루고 있으니...너희들도 이 지세를 보면 이곳이 과연 천장길방의 5만년 대지임을 알리라”하셨다.또 하루는 임원들에게,‘감천의 지세를 보고 배부르다’는 뜻으로 한시 한 구를 지어보라”하시므로 김사학, 박중하 등이 시를 지어올리니,“잘 지었구나. 나도 한 구 부르리니 기억하여 두라”하시며 다음의 글을 외어주셨다.“山盡水廻處 始覺有大道”(산이 다하고 물이 도는 곳에,비로소 대도가 있음을 깨달았다.)도주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동학가사(東學歌詞)에 ‘용담수류(龍潭水流) 사해춘(四海春)은 부자도덕(夫子道德) 장(壯)할시구’라고 한 용담을 후인(後人)들은 경주(慶州)용담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그곳은 내륙(內陸)에 있어 사해와 상통할 수 없으니 어찌 사해원이 되겠느냐. 이곳 감천의 용담수(龍潭水)가 사해와 상통한 사해 용왕(龍王)의 본부가 되어 그 근원이 됨을 이름이라. 장차 두고 보라. 이 용담에 세계 각국의 사람과 물화(物貨)를 교역(交易)하는 윤선(輪船)이 즐비(櫛比)하고 사해 용왕들이 각종 공물(物)을 진상할 때가 있으리니 그 때가 되어야 내가 말한 뜻을 알게 되리라”하셨다.이어 말씀하시기를,“감천 곧 감내가 참으로 영지(靈地)요 신천(神川)이니 태극의 운도(運度)가 여기에 있어 나의 도가 대기동(大機動)으로 발전하리라. 감이란 고어(古語)의 뜻은 신(神)이므로 왜인(倭人)도 이 말을 받아 신을 ‘가미’라고 하느니 이곳이 상제님을 모신 도장이 되어 삼계의 대도수가 여기에서 비롯하고 흥성하리니 실로 천기(天機)요 지운(地運)이니라. 1, 6감천이 흘러내리는 이 영장(靈場)은 태극진리 만고장류(萬古長流)의 통원(通院)이 되며 세계의 지운을 통일할 핵점(核點)인 새 서울이 되리라”하시며 다음의 글을 외어주셨다.“甘川本是坎川兮 一六坎水太極動 甘川卽是神川兮 上帝奉乎上帝位”(감(甘)천은 본래 이것이 감(坎)천임이여!1, 6감수의 태극이 기동하도다.감천은 곧 이것이 신(神)천임이여!상제(도주님)가 상제님 영위를 받들었도다.)또 이렇게 말씀하셨다.“이 감냇물을 임진왜란 때 경상(慶尙) 우수영(右水營) 병선(兵船)과 진중(陣中)의 용수(用水)로 하였음을 옛노인들이 전하는데 이 물은 1년을 담아두어도 상하지 않는 생수중(生水中)의 장생수(長生水)인 연고니라. 또 천마산 속에 수정광(水晶鑛)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수정은 수정(水精 : 물의 정기)이라. 감수(坎水)의 정정(精晶)을 통하고 옥녀봉의 젖줄을 거쳐 나오니 어찌 영지(靈地)의 신천(神川)이 아니랴. 또한 국토의 북단(北端) 감뫼 곧 신산(神山) 백두(白頭)에서 뻗은 맥통(脈統)이 금강(金剛)을 거쳐 그 최남단 천마(天馬)에 이르러 ‘감내’의 젖줄이 된지라. 남북관통(貫通)의 신산, 신수가 가히 자오일기(子午一氣)의 신지영국(神地靈局)을 점쳤으니 지구상 만국 유일한 태극의 핵점(核點) 종지(宗基)가 이곳이니라”이달 초4일 밤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긴급히 하명하시기를, “천개어자(天開於子)니라. 이 말을 오늘밤 자정을 기하여 중부 전체 도인에게 빠짐없이 하달하라”하시므로 그대로 봉행하였다.이튿날 새벽에 임원 10여인을 2진으로 나누어 1진은 마산을 다녀서 하오에 자갈치로 돌아오게 하시고 1진은 거느리고 동래에 행행하셨다가 마산에 다녀온 1진과 자갈치에 합류하여 송도까지 도선(渡船)으로 항해하실 때 중도에 파도가 높게 일어 위험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나 무사히 송도에서 하선하시며,“오늘 풍세(風勢)는 약하였으나 파도가 위험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도수에 맞았느니라. 이 도수는 수륙병진(水陸幷進)이며 동래독성제(東來獨聖帝)도수니라”하시고 이튿날 다른 임원들도 그 행로를 그대로 왕복하게 하셨다.이달 28일에 도주님께서 임원 몇 사람을 거느리고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에 행행하시니 그 경내(境內)에는 고려 3은(三隱 : 포은, 목은, 야은)을 합사(合祀)한 삼은각(三隱閣)과 사육신(死六臣 :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생육신(生六臣 : 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을 합사한 숙모전(肅慕殿)이 있었다.이날도 평소와 같이 이강한이 승용차로 모시고 운전하다가 차가 유성(儒城)을 지날 때 도주님께서 급히 정차시키고 정비(整備)를 명하셨다. 강한이 내려서 살펴보니 지금까지 이상이 없던 뒷바퀴 나사가 거의 빠져 있으므로 당황하여 식은 땀을 흘리며 정비하여 무사히 모셨다. 도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불의의 사고를 예시(豫示)하시는 일이 종종 있으시므로 강한은 항상 감복하였다.숙모전은 평소에 그 문을 잠그고 매월 1차씩 그 관리인인 박팽년의 후손 영동(永東)이 나와서 성찰(省察)하였다. 이날은 정한 날도 아닌데 영동이 자신도 모르게 불려나온 듯이 나와서 문을 열므로써 도주님께서 두루 살필 수 있으셨다. 이 일은 사육신의 후손인 영동이 생육신의 후손이신 도주님의 참배를 알고 한 일은 아니나 그 도수가 여합부절(如合符節)함에 영동과 임원들이 함께 신기하게 여기며 도주님을 우러러 모셨다.도주님께서 이날 부터 7일간 그곳 염화실에서 공부하시고 시종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번 공부는 만고충신신명(萬古忠臣神明)의 해원도수를 봄이니라”하시고,“이곳 계룡산에......정씨도읍 800년의 땅이란 비결이 있고 조선 개국초에 이태조가 궁궐 터를 닦아 정초(定礎)까지 하였으나 신명의 저해(沮害)로 중단하고 한양(漢陽)으로 옮겼는데 이로 인하여 조선 500년간 신하로서 2심을 가진 자가 많았으므로 구천상제께서 그에 관한 공사를 보셨느니라. 이곳을 ‘신도안이라’함은 실로 ‘신도가 아니라’는 말이고 신도(新都)는 신도(神都) 곧 신명의 도읍지라는 뜻도 되느니라”하셨다.6월 21일 상오에 도주님께서 오치국 등 임원 몇 사람을 거느리고 감천용담에서 선유(船遊)하신 다음 임원들과 수영(水泳)하실 때는 그 민첩하심을 누구도 따를 수 없었으며 더구나 10여분간씩 잠수(潛水)하실 때는 모두 경탄(驚歎)하였다. 하오에 홀로 배를 타시고 사공 김응팔(金應八)로 하여금 10여리 밖의 바다위에 정선(停船)시키시고 몇 시간 도수를 보신 다음 돌아오셔서,“오늘로서 용담수 도수를 마쳤노라”하셨다.용담수는 원래 수심(水深)이 깊기로 유명한 바다였으며 도주님께서 이날 도수를 보신 곳은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다. 도주님께서 처음에는 배위의 법좌 하시고 도수를 보시다가 얼마후에는 배에서 내리려 하시므로 응팔이 그 위험함을 여쭈며 만류하였으나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그대로 내리시는데 그곳 반길 깊이의 물 밑에 생각지도 못하던 바위가 있었다.도주님께서는 그 위에 서셔서 4방을 둘러보시며 한 식경이나 도수를 보시고 다시 배위로 올라오셔서 회선(回船)을 명하셨다.김응팔은 당시 이곳에서 수 10년간 배를 부림으로써 용담수의 내용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공이었으나 그때까지 이곳에 그러한 바위가 있다는 사실은 본 일도 들은 일도 없었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그 후에 혼자서 그 바위를 찾으려고 여러번 조사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한다.이달 하순에 중부도인들의 생활이 곤난함을 걱정하셔서 전학원 임원들로 하여금 그 실상을 조사하게 하신 다음 극빈자(極貧者)와 병약자(病弱者)에게 호당(戶當) 백미(白米) 5말 가격의 구휼금(救恤金)을 하사(下賜)하시고 7월 19일에도 하사하셔서 각 방면별로 나누어 주셨다.7월 15일에 도주님께서 임원 몇사람을 용담수에서 범선(帆船)에 태우고 가덕도(加德島) 주위를 순행하셨다. 중도 낙동강 하구(河口) 아래 큰 배도 항해하기 어려운 울돌목에 이르러 배가 엎어지려 할 때 도주님께서 창황망조(蒼黃罔措)하는 사공과 임원들을 진정시키시고 손을 드셔서 부산과 마산 쪽을 가리키시며,“이곳이 부자(父子) 상봉지지(相逢之地)도 되고 형제 상봉지지도 되느니라”하시니 풍랑이 고대 멎어 무사히 돌아오셨다.24일에 도주님께서 여러 임원들을 거느리고 합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행행하셔서 그 경내의 장경판고(藏經板庫) 뒤에 있는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3일간 공부하시며 도수를 보셨다.27일 하오에 이윤섭을 거느리고 그곳 홍제암(弘濟庵)에 임하셔서 그 법당에서 공부하시는데 해가 진 뒤에 갑자기 공부실 문밖에 몸은 절구통만하고 머리는 용도 같고 범도 같으며 입은 단번에 몇 사람을 삼킬 듯하고 눈은 전광(電光)같은 괴물(怪物)이 나타나 도주님 뒤에 시립(侍立)하였다. 이때 윤섭 등은 모두 기급하였으나 그래도 도주님께서 공부 중이시므로 고함도 치지 못하고 당황하는데 도주님께서는 태연히 공부를 마치셨으며 하산(下山)하실 때는 그 괴물이 험로(險路)를 밝힘으로써 무사히 하산하셔서 경내에 당도하시니 괴물은 홀연히 사라졌다.이날 밤에 해인사 주지가 도주님께 배알(拜謁)하고 여쭈기를,“비결에 가야산이 장차 조씨가 도읍할 곳이 된다고 하는데 첩첩 산중이 어떻게 도읍지가 될수 있사오리까?”하니,“그러한 비결은 이미 맞지 않게 되었느니라. 그러나 기어이 도읍지를 만들고자 하면 이산 깎아 이골 메우고 저산 깎아 저골 메우면 되지 않겠느뇨”하신 다음 비결의 부당성을 상세히 설명하셨다.주지가 감복하고 돌아가더니 다음날은 자신이 간직하던 해인도(海印圖)를 올리며 가르침을 청하므로 해석해 주시고 그 해인도는 임원들에게 간수토록 하셨다.이튿날 환행하시는 차중에서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금년에는 가야산도수까지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큰 도수는 거의 다 보았노라”하셨다.구덕정사로 돌아오셔서 하교하시기를,“구천상제님께서 해인이나 의통(醫統)을 말씀하셨다 하여 이것을 어떤 물체로 아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니라.......해인은 해인(解印)이며 태극의 원리로서 모두 자기 심중(心中)에 있음을 알지니라. 우리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와 기운의 근원이 물에 있고 물은 바다에 연원하므로 해인이니 해도진인(海島眞人)이니 하는 말이 연유되느니라....... 그 물은 전부 전기로 되어 있으므로 수지성(水之性)은 윤하(潤下)로되 물이 도리어 상승(上昇)하여 비도 되고 이슬도 되어 우로지택(雨露之澤)이 생기고 모든 생물은 그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生長)하게 되느니라.......‘바닷물의 출입하는 이치만 알아도 천지의 이치를 추리할 수 있다’ 함도 이러한 연고니라”하시며 조수의 출입과 조(潮), 석(汐), 조금, 사리 등을 다시 상교(詳敎)하셨다.또 하교하시기를,“수운가사에 ‘산상(山上)에 유수혜(有水兮)여 기하연(其何然) 기하연가’하였음은 산 위에 물이 있는 이치를 모름이니라.물이 어찌 산 위에만 있으리요 그 위에도 또 있으니 이는 물이 전기(電氣)임이니라. 구천상제께서 이 전기와 뇌전(雷電)의 조화를 주재(主宰)하시므로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이시니라”하셨다.이달 29일에 보수동의 부산도장을 보수도정(寶水道庭)으로 개칭하시고 감천동 구덕정사의 정침(正寢)은 회룡재(廻龍齋), 공부실은 산회당(山會堂), 그 경내를 부산도장(釜山道場)으로 명명하시며 “이곳에 장차 대학(大學)도수, 청학공부(靑學工夫)를 열 것이며 영대(靈臺), 계대(繼臺)가 있게 되리라”하셨다.

감천 국내 산세의 4쌍태 도주님께서 도기 48(1956)년 5월 초에 하교하신 감천 국내(局內) 산세(山勢)의 4쌍태.사진 ① 6감 윗쪽의 천마산 쌍태. ② 9감 윗쪽의 천마산 쌍태. ③ 4감 윗쪽의 옥녀봉 쌍태. ④ 5감 건너쪽의 옥녀봉 쌍태의 모습.

사해용왕의 본부 감천 용담수 도주님께서 도기 48(1956)년 5월 초에 하교하신대로 현재 사해용왕의 본부라는 사실이 드러난 감천 용담수.사진은 천마산 위에서 본 용담수(현재는 감천항)의 모습. 외항선과 원양어선의 즐비함이 보임.

신지(神地)·영국(靈局)인 감천동 도주님께서 감천이 천장길방하신 성지임은 누누히 하교하셨으나 특히 도기 47(1956)년 5월에 하교하신 내용(태극진경 7 : 67, 68, 69참조)의 실상.사진 ①  천마산과 옥녀봉의 음양합덕지궁인 감천동의 형국. ② 천마산에서 본 감천동의 9궁 9곡을 이룬 모습.

공주 계룡산 동학사 공부처 도주님께서 도기 48(1956)년 5월 28일 참예하시고 7일간 만고충신신명의 해원도수로 공부하신 충남 공주군 반포면 계룡산 동학사의 숙모전 ①과 염화실 ②의 모습.

합천 가야산 해인사 공부처 도주님께서 도기 48(1956)년 7월 24일부터 3일간 해인도수로 공부하신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①과 다로경권 ②의 모습.

회룡재, 산회당의 구덕정사 도주님께서 도기 47(1955)년 10월 도인들의 집단이주가 완료되자 그 5감의 임시행재소를 관아재로 명명, 다음해 정월 27일 공부설석하시고 구덕정사로 개칭 7월 29일 그 정침을 회룡재, 공부실을 산회당, 그 경내를 부산도장으로 명명하심.49년 그 앞에 대강전을 영건하시고 50년 산회당에서 화천, 이 건물은 지붕과  벽만 수리하여 화천 당시 그대로 보전하고 있음.

 

 

 

 

 

 

 

 

 

 

 

 

 

 

 

 

 

 

 

三千之班 度數

 

하루는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이렇게 하교하셨다.“다섯 화공(畵工)이 용 한 마리를 각기 한 부분씩 맡아 그린 그림의 잘되고 못됨은 다 그린 후에 아울러 맞추어 보아야 알게 되리라. 도의 일이나 세상의 일도 공동으로 하는 일이 더 힘드느니 너희는 합덕하라”“구천상제께서는 단주해원(丹朱解寃)을 위수(爲首)로 하셨으나 나는 초패왕(楚覇王)해원을 위수로 하느니라”“여말(麗末)의 나옹(懶翁)은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에 있으면서 합천 해인사의 화재를 소나기로 진화(鎭火)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선천 사승(寺僧)의 술법(術法)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후천진법의 도력(道力)이야 어떠하겠느냐”8월 초에 도전 이윤섭에게 하명하시기를“네가 원래는 충주지방 호장이나 오랫동안 임지(任地)를 비워두었으니 한 번 순찰하도록 하라”하시므로 당일로 청주 포덕연락소에 가서 살피니 그 방면 포감인 박한경, 유철규 등은 도인의 신분에 맞지 않게 포덕소에 소실을 두고 호사스런 살림을 하고 있었다.더구나 그들은 도인들이 도주님께 진상하는 성품(誠品)을 임의로 탕진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진천(鎭川)지방 도인 오종학(吳鍾學)의 모친이 몸소 정성드려 짜서 올린 명주로 소실들을 시켜 저희들의 의복을 만들고 있음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윤섭은 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날로 상정(上廷)하여 그 사실을 상고하니,“내가 아직 상벌(賞罰)을 쓰지 않고 있으니 이 일은 우선 네가 맡아서 처리하라”하셨다.윤섭이 하명에 따라 그달 정기(定期)상정시에 그들을 4감 회의실로 불러 꿇어 않히고 엄히 책망하니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였다.이달 15일에 다시 전학원 임원들에게 하명하셔서 중부도인들의 생활고를 조사하게 하신 다음 그 결과보고에 따라 구휼금(救恤金)을 하사하시고,“내 이제 도인들을 비롯한 천하창생의 기재양복(棄災養福)을 위하여 치성을 올리리라”하시고 즉일(卽日)로 치성준비를 명하셨다.치성 때에 몸소 지으신 축문을 배문걸에게 봉서(奉書)하고 임규오에게 봉독(奉讀)하게 하시니 그 축문(순 한문)을 직역하면 대략 이러하였다.“기재양복치성 축문유세차......19일......태극도주 조정산은 엎드려 구천상제 영전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오면 태극도주 조정산은 산하(山河)의 종령(鍾靈)을 품수(稟受)하고 남선(南鮮)의 운항하는 도수에 응하여 여항(艅航)의 기운을 잡고 동토(東土)에 정출(挺出)한 천종(天縱)의 성인입니다.성령(聖靈)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비록 직접 바로 가르치는 명령을 받들 수 없었사오나 천지의 지령(至靈)한 기운에 응하여 15세에 강을 건너 서쪽으로 하여 진주(眞主)의 도수를 정했사오며 정사년에 도를 받고 봉솔(奉率)하여 동으로 돌아오니 낙서(洛書)의 운을 띠었습니다.아아! 태극의 강령이 이미 이루어지고 기초가 정해졌나이다. 이와 같은 운수는 권권복응(卷卷服膺)하고 홀로 수도하는 고행으로서 3경에도 홀로 계시를 모시며 불철주야하는 산과 같고 바다와 같이 함이 이미 40여년이며 60여세의 학발(鶴髮)이옵나이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령께서는 크고 작음을 모두 굽어 살피옵소서”치성 후에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내가 허령도수 때 안면도에 개간한 땅만 가져도 중부도인 전체가 먹고 살기에 흡족(洽足)하리라. 그러나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가 그렇지 않으므로 못하느니 당분간만 고생을 참아내면 머지 않아 큰 고생은 면하게 하여주리라”하시더니 이 후로는 신이하리만큼 수·화·풍 등 각종 재해가 줄어지고 생활도 점차 향상(向上)되니 도인들은 도주님의 위신력(威神力)에 더욱 감복하였다.도주님께서는 평소에도 항상 검소, 절약을 수범(垂範)하셨는데 그 중의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담뱃불을 붙이실 때 성냥 한 개비도 헛되이 아니하시고 때로는 촛물 묻힌 지승(紙繩)을 쓰시는 일도 있으셨다.따라서 비록 치성 전수(奠需)라도 큰 도수치성 이외에도 알맞게 제한하시고 치성금이 남을 때는 그 두미(頭尾)를 사용하도록 하시며 남비남용(濫費濫用)을 엄금하셨다.하루는 이건우가 정사(精舍)의 창호를 바르려고 풀을 쑤었는데 다 바른 후에도 많이 남았음을 보시고 엄하게 책망하시기를,“도중의 물건은 전부 상제님께서 하감(下鑑)하시는 도인의 성금으로 이루어지거늘 어찌 그 소중함을 모르고 함부로 하느냐. 더구나 나는 성금을 도인의 피와 땀으로 아느니라”하셨다.9월에 구천상제 강세일 치성물복(致誠物目)을 결재하시며,“왜 이렇게 많이 준비하느냐”하시므로 박한경이 여쭈기를,“이번 치성에는 지방도인이 많이 참례한다 하므로 그렇게 하였나이다”하니,“너희는 치성 전수를 먹기 위하여 준비하느냐”하시며 엄책(嚴責)하셨다.12월 초4일 도주님 강세일에 임원들의 하례를 받으시고 한시 한 수를 읊어주시며 “잘 기억하라”하시니 이러하였다.“高忠一代無雙士 獻納三更獨啓人 洛中天理遲遲德 湖上晩春歌”(숭고하신 충성스런 한 세대의 둘도 없는 선비요,3경을 바쳐서 홀로 계시를 모시는 사람이로다.낙서(洛書)속의 천리(天理)는 더디고 더딘 도덕이요,호수 위의 늦은 봄에 시원하고 분명한 노래로다.)도주님께서 임원들의 처신(處身)에 관하여 이렇게 하교하셨다.“천하사를 도모(圖謀)하는 자는 모름지기 하우씨(夏禹氏)를 본받을지니라. 구천상제께서도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家事)니라’하시고 제갈량의 성공하지 못한 고사(古事)를 말씀하셨거니와 하우씨는 9년치수(治水)하는 사이 삼과기문(三過其門 : 세번이나 그<자기집> 문앞을 지나감)하되 불입기문(不入其門 : 그 문에 들어가지 않음)하였으므로 왕천하(王天下)할 수 있었느니라. 하우씨인들 9년동안에 어찌 처자가 그립지 않았으랴”“도통은 위한 수도는 3망(三忘)이라야 성공하리니 3망은 망기친(忘其親), 망기신(忘其身), 망기가(忘其家)니라”“수도인은 5기(五忌)를 경계하여야 성공하느니 5기는 불신(不信), 욕속(欲速), 설독(洩瀆), 다욕(多慾), 환희(歡喜)니라”“내가 먼저 성·경·신을 다하여 안심, 안신한 후라야 남에게 말할 수 있느니라”어느날 한 도인이 다른 종교의 교인과 논쟁하였더니 도주님께서는 이렇게 효유하셨다.“나의 도는 삼계의 대도라. 세계 어느 종교든지 모두 무극과 태극의 본원에서 흘러나온 지류(支流)니 유교, 불교, 서교, 또는 다른 지류의 교인들을 탓할 것은 없느니라. 그들이 어느 지방신(地方神)이나 문명신(文明神)을 믿는 것도 아주 틀린 일은 아니나 지방 방백(方伯)에게 하는 충성보다 군주(君主)에게 하는 충성이 더 상승(上乘 : 최고)임을 모름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태극의 진주와 함께 도의 본원을 믿고 있으니 가히 진복자(眞福者)니라”하루는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어떤 도인은 나보다도 제 소속 임원만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데 도인은 도의 진리를 보고 믿어야 하고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되느니라. 도주인 나만 보고 믿어서는 아니 되거늘 하물며 임원만을 믿는다면 종내 신명(身命)을 그르치리라. 너희는 그런 도인을 만들지 말라”하셨다.또 술수에 관하여는 이렇게 하교하셨다.“좌견천리(坐見千里)하고 입견만리(立見萬里)하거나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차력축지(借力縮地)하며 월산도해(越山渡海)함이 비록 호기심의 대상이나 이는...남용하면 오히려 난법(亂法)이 되고 도통하면 그런 술수는 하술에 불과하니라. 도인도 도심이 약하면 이런 술수에 현혹되기 쉬우니 임원들은 관하 도인들을 철저히 단속하라”이어 이런 하교도 하셨다.“도인들은 진묵(震默)의 고사(故事)를 생각하여 화장(火葬)하지 않아야 하겠으나 후천의 예법은 새로 내리라”“선천의 천존, 지존시대는 신봉어천(神封於天), 신봉어지(地)였으나 후천의 인존(人尊)시대는 신봉어인(人)이므로 신인조화 하느니라”“선천은 춘하절(春夏節)이고 후천은 추동절(秋冬節)이므로 지금은 가을(歌乙)이니 일야상설(一夜霜雪)에 청송녹죽(靑松綠竹)을 알아볼 수 있느니라.”“이곳 감천의 토질(土質)은 종토(縱土)의 대지(大地)니라. 종토는 물을 부으면 잘 스며들고 흙을 팠다 메우면 남느니라.”12월 15일에 도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아직도 감천에 간혹 풍마(風魔)가 있어서 도인들이 고생하니 풍신제(風神祭)를 지내어 다시는 도인들에게 재난이 심하지 않도록 하리라”하시므로 임원들이 도인들의 치성금으로 봉행하려하니,“풍신제는 나의 언령(言靈)으로 마쳤으니 치성금은 없어도 되느니라”하셨다.정유(丁酉 : 1957)년 원조 도주님께서 임원들의 세배를 받으시고,“내가 글 한 절을 외리니 잘 기억하라”하시니 이러하였다.“去年四月何四月 運來靑龍是四月”(지난 해의 4월은 어떤 4월이냐?운수가 오는 청룡(靑龍)의 이 4월이니라.)초3일 조회시에 임원들이 도주님께 사뢰기를 ‘중도도인들이 모두 세배를 드리려 하오니 윤허하옵소서’하니 도주님께서,“오늘 저녁 7시에 한 자리에서 받겠으니 대기시키라”하셨다.임원들이 이 명령을 하달하니 도인들이 환호하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초저녁부터 각 회의실에 대기했다가 7시에 정사 앞 광장에 모였다.이때 갑자기 바람이 불며 때아닌 비가 많이 내렸으나 도인들은 동요하지 않고 정숙하게 대기하였다.도주님께서 우산도 물리시고 비를 맞으시며 단상에서 일동이 숙연히 시립했다가 국궁(鞠躬)하여 올리는 세배를 받으신 다음,“동성상응(同聲相應)하고 동기상구(同氣相求)하야......운종룡(雲從龍)하고 풍종호(風縱虎)ㅣ라. 성인이 작이(作而)만물이 도(睹)하나니......각종기류야(各從其類也)ㅣ라......동청룡(東靑龍)......기동도수로 진시삼천지반(盡是三千之班)이니 대운대사(大運大事) 소원성취가 불원(不遠)임을 고(誥)하노라”하는 요지의 유시(諭示)를 내리셨다.유시를 마치시자 이내 비바람이 멎으며 기온이 온화해져서 비맞은 옷도 차지 않았으며 밤인데도 여명(黎明)처럼 밝아져서 도인들이 질서정연하게 해산하여 각 방면 회의실에서 담소(談笑)와 가무(歌舞)로 밤새도록 즐겼다.도주님께서 못내 기뻐하시다가 이튿날 조회에서 말씀하시기를,“지난 밤 도인들이 찬 비를 맞으며 고생이 많았으나 청룡이 동하매 풍우가 대작(大作)함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수운가사에 ‘개문납객(開門納客)하니 기수기연(其數其然)이라. 사연설석(肆筵設席)하니 기미여하(其味如何)오 의관정제(衣冠整齊)하니 진시삼천지반이라’하였는데 이번 일이 바로 양오십년(兩五十年)만에 비로소 성취되는 삼천지반 도수의 시작이니라”하셨는데 이날 각 방면별로 참례인원을 조사, 집계하니 신기하게도 총원이 3천여명이었다.초5일 낮에 도인들의 농악놀이를 친히 관람하시고,“이것이 장차 선악(仙樂)이 되리라”하셨다.초8일에는 전학원 공민학교 학생들이 정사 앞 가설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관람하시고 칭찬하시며 격려금을 하사하시니 학동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졌다.이달 말일에 최경구, 노해성 등 영선부(營繕部) 임원들을 거느리고 동래 금정산 범어사(梵魚寺)에 거둥하셔서 가람(伽藍)의 구조와 설비 등을 일일이 지적하며 가르치시니 그들이 감복하였다.이무렵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하명하셔서 유명한 사찰과 궁궐 등의 건축에 관한 설계도와 문헌(文獻)을 구해 오게 하셔서 영선부 임원들에게 보이시며 가르치셨다.2월 초3일에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그대들 뒤에는 언제나 보호신(保護神)이 따라다니니 걱정이 무엇이랴. 그러나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많고 파란곡절이 있는 법이니 좋은 운수를 받으려면 먼저 그만한 시련이 있음을 명심하라”하시고 또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시(古詩)에 ‘노류폭포어이주(怒流瀑布魚已走)’라 한 것은 폭포수가 성내서 내리치나 고기는 이미 달아났다는 뜻도 되고 고기는 그런 곳이 좋아 꼬리를 치며 노는 형상인 ‘어희주(魚喜躊)’도 되느니라”“잉어는 매일 크는 것이 아니라 홍수가 나서 마음 놓고 뛰놀 때 한 물씩 큰다 하며 낙동강 황어(黃魚)는 황지(黃地) 용소(龍沼)에 가야 옥관자(玉貫子)를 단다 하느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도주님께서는 이에 앞서 정월 15일 축시(丑時) 기도시간을 기하여 봉축주와 진법주의 ‘무극신’을 통(通)극신’으로 고치게 하시고 납폐지(이때부터 기도주, 도통주, 운장주 각 3장씩 총 9장을 소화)의 ‘무’자도 ‘통’자로 고치게 하셨다가 100일이 되는 4월 26일에 환원토록 하셨으며 다만 납폐지의 산회당(山會堂) 또는 구덕정사(九德精舍)는 그대로 두게 하셨다.

 

卽此大降의 聖殿

(靈臺·造化政府)

2월 초9일에 도주님께서 정사 앞의 판옥(板屋)들을 가리키시며,“저 판옥을 옮기고 임원들이 쓸 회관을 지을 만한 터를 닦도록 하라”하셨다.임원들이 그 가옥의 주인 이종팔(李鍾八), 금복연(琴福淵)과 합의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주고 터를 고르기 시작하니 도주님께서 그 경역(境域)을 지정하여 주셨다.그런데 그 안에는 원주민(原住民)인 오수일(吳秀一)의 논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임원들이 사실을 말하니 기꺼이 기증(寄贈)하므로 명령대로 터를 넓힐 수 있었다.터를 넓힘에 있어 그곳이 원래 경사가 심한 언덕이므로 낮은 곳에 석축(石築)을 하고 높은 곳의 흙을 파서 메웠는데 이때 김천방면 도인 원갑선(元甲善)은 본래 농아(聾啞)로서 석수(石手)도 아니면서 자진하여 다른 석수들과 함께 지성으로 석축공사를  하므로 도주님께서 그의 노고를 치하하시며 농아를 연민(憐憫)하시더니 그 공사가 끝날 무렵 뜻밖에 그의 말문과 귀가 열려 정상인이 되므로 모두 신기하게 여기고 덕화에 감복하였다.이 석축에는 옥녀봉의 바윗돌을 굴려 내려 썼는데 하루는 옥녀봉 아래 냇가에서 수10명의 부녀자가 빨래를 하고 있었으나 이건우 등은 이를 살피지 않고 그 위에서 바윗돌을 굴려내리니 부녀자들의 위험이 촉급하였다.이 순간에 도주님께서 보시고 진노(震怒)하시며 손을 들어 굴러내리는 바윗돌을 직지(直指)하시자 신기하게도 그 돌이 갑자기 산 중턱에서 잠시 멎었다가 신경희(申景熙) 등 임원들이 고함을 쳐서 부녀자들을 대피시킨 후에야 내려앉아 모두 무사하였다.(이때 내려앉은 바윗돌 중의 하나는 그 후에 대강전 앞 영소(靈沼)를 공사하면서도 옮기지 않아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정지공사가 완료되자 도주님께서 영건비(營建費)를 내려주셔서 당일로 착공하게 하시니 임원들은 처음에 일반 회의실처럼 가건물로 신축하실 줄 알았으나 친히 현장에 임하셔서 기초작업부터 지휘하시는데 다른 회의실 건물과 달리 그 범위도 넓고 기초도 견고하게 하실 뿐더러 목재와 기와 등 자재를 다르게 준비시키시고 더구나 목재는 모두 강송(江松 : 강원도 소나무)으로 하되 특히 2층 바닥에 쓰일 목재는 침목(沈木 : 바다 밑 진흙 속 에 묻었던 나무)을 구하도록 하셨으나 구할 수 없으므로 염수(水)에 절였다가 불에 말려서 쓰도록 하시며,“이렇게 해도 족히 30년은 견디리라”하셨다.임원들이 건물을 신축할 바에는 임원들의 회관보다도 정사를 먼저 지어드림이 도리이며 급무(急務)라 생각하고 상신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임원들이 다시 2층으로 지어서 하층은 임원회관으로 쓰더라도 상층은 도주님께서 쓰시도록 할 것을 재삼 상신하니 3일만에 윤허하시고 27일 오시에 정초(定礎), 28일 묘시에 입주(入柱), 3월 1일 인시에 상량(上樑)하도록 명하셨다.도주님께서 5년전 보수도정에서 친히 모종하여 분재(盆栽)하셨던 은행묘목(銀杏苗木) 몇 그루를 이해 2월 말경에 이건우로 하여금 도장내로 이식(移植)하게 하시며,“후일 큰 정자나무가 되어도 좋을 곳을 가려서 심고 잘 가꾸라”하시므로 건우가 마음 속으로 ‘이 나무 커서 정자나무가 될 때까지 도성덕립(道成德立)을 어떻게 기다릴까’하고 생각하는데“너희는 때를 기다리기가 어려움이 아니라 마음 닦기가 어려움을 알라”하셨다.(이 나무가 지금 완전한 정자나무로 자라서 남문 안에 서있는 은행나무다.)3월 초하루 인시에 신축건물의 2층에서 도주님 집례로 상량치성을 올리셨다. 이때 갑자기 바람이 크게 일어 제단이 심히 요동하므로 진설(陳設)조차 곤란하였으나 도주님께서는,“천지대신명들이 운집(雲集)하는데 어찌 바람이 없으리요”하셨다.(치성 후에 임원들은 그 축문의 내용과 도주님께서 친히 집례하심으로 미루어 이 건물이 단순한 임원 회의실이 아님은 짐작되었으나 대강전(大降殿)임은 깨닫지 못하였다.)상량축문은 며칠 전부터 임규오에게 발설하지 말고 짓도록 하셨으나 짓지 못하므로 치성 전야(前夜)에 몸소 지으셔서 규오에게 정서하게 하신 글인데 그 뜻은 대략 이러하다.(원문은 순한문이므로 생략하고 직역(直譯)하여 수록함)“상량축문모년 모월 모일에......태극도주 조정산은 엎드려 구천상제님 영전에 고하나이다. 하늘이 감추고 땅이 비밀스러이 하여 천년 옛적부터 굳게 신비로운 영경(靈境)을 점지하셨고 큰 바닷물이 동남으로 모이니 만세에 청명하고 조화스런 큰 규범을 창립하였나이다. 풍화(風化)와 명성을 천지에 세웠고 관찰함과 우러름을 금신(襟神 : 가슴 속 마음)에서 솟아 오르게 하였습니다. 그윽히 생각하건데 태고적부터 남기신 자취이고 진실로 이것이 후학(後學)의 자랑스런 법식이옵니다. 대개 공경하고 사모하는 자가 깊이 이 지경에 들어와서 이 당에 오르면 누구인들 감복하고 흠탄(欽歎)하지 않겠나이까!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의탁함은 이것이 인간과 신명의 떳떳한 도리이고 위에서 펴고 아래서 이룸은 이것이 동천(洞天 : 신선이 사는 곳)의 진경(眞境 : 도통진경)이옵니다.포량동(抛粱東 : 포량은 상량할 때 대들보를 동서남북상하로 흔들어 굴린다는 뜻의 용어로서 여기서는 동쪽에 해당한다)하니 천마산이 하늘을 찌를 듯이 푸른 공중에 꽂혔는데 큰 뜻은 어느 때 날아서 이에 도달하겠으며 바쁘게 끓어 오르는 세상 파도는 날려서 장차 형평(衡平)을 이루리이까?포량서(西)하니 용담의 산 물은 긴 하늘과 더불어 때에 따라 유통(流通)해서 4해의 봄이니 이 가운데 잠겨서 쓸데 없다고 마소서.포량북(北)하니 구덕산이 거듭거듭 푸른 아지랑이처럼 둘렀으니 바라보는 속의 무리지은 봉우리가 그림처럼 벌려 있어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이 가운데의 바다이옵니다.포량남(南)하니 안산 봉우리가 높이 나옴은 몇 때를 기다렸던고? 미인(美人 : 여기서는 상제님)을 하늘의 한 방소에 바라보니 옥경대 집 높은 곳에 공경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포량상(上)하니 흰 해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은 옥추(玉樞 : 옥으로 돌쩌귀를 한 옥경대를 뜻함)와 구천(九天 : 구천상제님 계신 곳)과 또 선경은 만명 천명 아이, 손자가 복된 수명을 바칩니다.포량하(下)하니 산이 다하고 물이 돌아 음양이 교제하여 다함이 없고 가이없는 창창한 연원은 4해 용왕이 서로 상대하였나이다.엎드려 바라옵건데 상량한 후에 양은 순하고 음은 거슬러서 5행이 서로 생하고 조화의 도가 이룩되어 진법주 안의 15위차 신성의 위, 칠성주 안의 제위선관, 천하영웅 관운장 소솔제장, 28수·24절 제대신장,  개벽주 안의 15신문 제대신장은 곧 이에 대강하옵소서.”이달 중순 어느날 정사 내정에서 임원들에게 1, 2감쪽을 가리키시며,“저쪽은 테 밖이고 난간과 같아서 벗어나기 쉬우니 내려앉아야 하리라”히시고 다시 6감 아랫지역을 가리키시며,“너무 내려가면 떨어지기 쉬우니라” 또 옥녀봉 동쪽 기슭을 가리키시며,“저쪽은 생문방(生門方)이므로 인가를 지으면 좋지 않고 그 안골은 천옥(天獄)이니라”하시므로 도인들은 안골에 집을 짓지 않았다.4월 초4일 아침에 임원들을 정사로 부르셔서 수라를 함께 드신 다음,“우리 도의 중대사는 모두 4월에 이루어지므로 음력이든 양력이든 4월은 내가 잊지 못할 달이니라. 봉천명과 득도가 그러하고 천보와 황극도수, 태인·회문·부산 3도장의 개시가 모두 그러하지마는 이는 이미 지난 도수이고 그보다 더 큰 도수는 돌아오는 4월이니라”하시더니,“거년 4월 하 4월고?, 운래청룡 시 4월이라”하고 읊으셨다.또 이러한 하교도 하셨다.“구천상제께서 허도수를 짜놓으셨으므로 내가 50평생을 허도수의 허공부에 시달렸으나 갑신년에 시지49년지비(始知四十九年之非)도수로서 인덕(人德)도수의 실(實)공부로 전환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제 13년이니라. 이 역시 상제께서 짜놓으신 이윤(伊尹)의 도수였으며 또 공부 종필(終畢)의 도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대들은 명심할지어다”“일불(一不 : 한 가지 잘못)이 살육통(殺六通 : 여섯 가지 잘한 것을 죽인다는 뜻으로서 옛날 과거 강경과(講經科)에서 7서(4서 3경 즉 주역, 서전, 시전,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중에서 6서를 모두 잘하고도 1서만 잘못하면 급제가 안되는 데서 나온 말)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나는 일불이 살백통(殺百通)의 도수를 쓰리니 일호(一毫)의 차착(差錯)도 없어야 하리라”하시므로 김용화가 그 뜻을 여쭈니,“사다리를 오를 때는 한 칸씩 오르되 떨어질 때는 단번에 떨어진다는 뜻이니라”하셨다.하루는 임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용마(龍馬 : 복희씨 때 황하에서 나온 말로서 그 등에 하도(河圖)가 그려졌다 한다)와 신귀(神龜 : 하우씨 때 낙수에서 나온 거북으로서 그 등에 낙서(洛書)가 그려졌다 한다)는 모두 물에서 나왔고 또 하우씨의 9년 치수(治水)는 낙서에 유래함이나 나의 5만년 후천대운은 오강록(烏江錄 : 상제님께서 둔궤에 쓰신 글로서 초패왕의 해원을 뜻함)에 유래함이니라. 낙수와 오강은 강하(江河)의 중류(中流)이나 이곳 감천 용담은 황화와 낙수로 통하는 낙동강(황지(黃地)에서 발원)과 동해의 수회처(水廻處)니라”“제 한 몸이 곧 소우주(小宇宙)며 도와 일체임을 자각하여야만 대도 진법의 진도인(眞道人)이니라”“도란 천·지·인 3계에 관영(貫盈)하니 너희들 도인은 이미 3계의 역군(役軍)이 되어 있으나 그로써 족하지 않고 후천 3계 개벽의 역군이 되어야 하느니라”도주님께서 영건공사의 모든 부분을 한 가지라도 소홀함이 없게 하시고 설계상의 구조와 자재를 몸소 살피심은 물론, 목재는 모두 굽거나 찌게 하시되 수미(首尾)를 가려서 쓰게 하셨다. 심지어 외엮는 일까지 손수 시범하시며,“나무는 종횡(縱橫) 십자(十字) 또는 정자(井字)로 대어서 음양이 되고 새끼는 궁을형(弓乙形)으로 엮어 태극을 이루며 흙도 맞벽을 쳐서 합덕(合德)을 이루니 여기에도 진리가 있지 않느냐. 이처럼 만사를 모두 태극의 원리로 이루어야 하리라”하셨다.신축건물의 영건공사는 영선부(營繕部)에서 담당하였는데 그 총책임자는 박해성(朴海成), 대목책임자는 최경구(崔敬求), 조동은(趙東殷), 소목책임자는 송인화(宋仁化), 박위서(朴渭緖), 철공책임자는 김봉준(金鳳俊)이었다.공사기간 동안 도주님께서는 몸소 현장에 임하셔서 공사의 세부 내용 특히 창호의 문살, 문고리, 돌쩌귀 하나까지도 그 재료와 제작방법을 자상히 명교(命敎)하시므로 영선부 임원들은 물론, 모든 공인(工人)들이 온갖 기능과 정성을 다하였다.또한 일반도인들도 앞을 다투어 공사에 참여하여 흙 한 삽, 기와  한 장 나르는 일도 진심으로 자진하여 취역(就役)함으로써 공사가 불일성지(不日成之)로 추진되었다.하루는 박해성 등이 상주(上奏)하기를,“이러한 자재로서는 판옥(板屋)을 겨우 면할 정도이오니 너무 초라하지 않나이까”하니,“이만하면 임시 쓸 것이니라”하셨다. 또 최경구가,“하층은 공굴(콘크리트)이나 벽돌로 짓고 상층은 한식으로 지어 단청도 했으면 좋겠사옵니다”하니,“후일에는 금을 올릴지언정 지금은 도인들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어찌 그리할 수 있으랴. 현실에 맞게 하느니라”하셨다.이달 하순에 건물이 완공되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그대들이 건물의 용도와 명칭도 모르면서 오직 내 지시대로 하여 완공한 노고를 치하하노라. 이 전각은 내가 장차 50년공부를 종필할 곳이며 그대들이 심령신대(心靈神臺)를 봉안하고 진법을 봉행하여 대강을 봉대(奉戴)할 오도(吾道) 유일의 지중한 성전이니 그런 뜻으로 명칭을 지어보라”하셨다.임원들이 이 명령에 따라 ‘태을궁(太乙宮)’ ‘통천궁(統天宮)’ ‘봉강전(奉降殿)’ ‘요운전(曜雲殿)’ ‘봉령전(奉靈殿)’등의 명칭을 지어올리니,“모두 부적(不適)하다”하시고,“내 이 성전을 대강전(大降殿)으로 명명하노라”하시므로 일동이 황공복지(惶恐伏地)하며 감복하였다.이어서 이렇게 하교하셨다.“유가(儒家)에서는 공자를 모신 전우(殿宇)를 선성지도(先聖之道)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뜻에서 대성전(大成殿)이라 하고 불가에서는 부처의 덕호(德號)를 따라 대웅전(大雄殿)이라 하는데 오도에서는 원위대강(願爲大降)의 대강전으로 명명하느니 이로써 수운(水雲)이 기도주를 봉명(奉命)한지 양50년(兩五十年)만에 비로소 대강의 계대(繼臺)가 마련됨이니라. 건물은 비록 협소하나 우선 쓰는데는 족할지니 내가 50년공부로써 찾은 곳이 감천이요 그대들이 기도하는 소원이 오직 대강이므로 이 바로 천기요 도수며 5만년에 유일하고 우주간에 무이(無二)한 진리의 성전이며 이곳을 새 서울이라 함도 바로 성전이 있는 연유니라”도주님께서 대강전 내부의 명칭과 용도를 하명하시니 상층은 중궁(中宮), 중궁의 영위 봉안실(奉安室)은 영대(靈臺), 몸소 도수를 보실 공부실은 법단(法壇), 중궁의 동문(정문)은 대동문(大同門), 남문은 영불문(迎佛門), 8각 창문은 정갑문(丁甲門)이라 하시고 중궁의 서북측에 전수실(奠需室), 동남측의 서편에 봉심실(奉審室), 동편에 공부실(후일 시법실로 명명)을 두셨다.그리고 대강전 하층의 명칭은 회관(會館), 그 북문은 승정문(承政門), 남문은 용화문(龍華門)이라 하시고 그 동북과 서남측에 상하층을 통하는 계단, 그 옆에는 남북으로 공부실 2개(후일 태을방(太乙房), 일관방(一貫房)으로 명명)를 두셨다.또 영선부원에게 명하셔서 영대의 봉안상(奉安床), 진영액(眞影額), 독(), 제기(祭器) 등을 원위(元位)로부터 4위까지 각각 만들게 하시며,“내 일을 내가 하다니......”하시고 일일이 그 장광척촌(長廣尺寸)과 옻칠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지시 감검(鑑檢)하셨다.이달 26일에 봉축주와 진법주의 ‘통극신’을 ‘무극신’으로 환원토록 하명하시고 납폐지에도 그와 같이 하게 하시며,“내 이제 무극과 태극을 통한 황극(皇極)을 세웠노라”하셨다. 27일에 도주님께서 구천상제의 진영(眞影)과 서가여래, 관성제군의 영위(影位)는 미리 준비하시고 옥황상제를 비롯한 다른 위지(位紙)는 채우식(蔡雨植)으로 하여금 법단 안에서 하명에 따라 봉서(奉書)하게 하셔서 몸소 진영액과 독에 붙이신 다음 이윤섭(전임 도전)과 오치국(지난 1월 25일에 임명된 도전)으로 하여금 순차대로 영대 봉안상 위에 옮겨 모시게 하셨다.이에 앞서 봉안상 등의 제작에 있어 행자목판(杏子木板)으로 짜고 옻칠을 하게 하시며 옻을 타는 사람의 접근을 금하셨는데 이때 박중하는 옻을 심히 타는 체질임에도 두려움 없이 중궁에 올라가 윤섭, 치국과 함께 위패를 모셔 옮겼으나 옻이 오르지 않음을 보시고,“모든 병은 마음에 있느니라”하셨다.28일에 봉천명일 치성을 겸하여 대강전 영건과 영대 봉안의 치성을 봉행하기로 정하시고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셨다.이러한 설비가 완료된 다음에야 임원들은 이 건물이 태극도의 핵심적 성전이라는 사실과 그야말로 원위대강의 신전(神殿)이라는 사실을 비로서 깨달을 수 있었다.그러나 이 성전에서 장차 태극진법의 공부법방이 시행되고 도주님께서 50년공부를 종필하셔서 옥황상제의 신격위에 임어(臨御)하시는 화천(化天)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함으로써 후일 대도운영의 큰 혼란을 야기시켰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직 이 성전을 떠나서도 도주님의 덕화를 받들어 원위대강을 모실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자가 있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 도주님 영으로 심은 은행나무 ?도주님께서 도기 42(1953)년 봄에 손수 모종하셔서 분재로 5년간 기르신 다음 47년 대강전 영건 당시 감천동 부산도장에 옮겨 심게 하신 은행나무.사진은 그 나무가 정자나무로 자란 모습.

? 영건 당시와 현재의 대강전 ?도주님께서 도기 49(1957)년 4월 하순 몸소 지휘하셔서 영건하신 당시의 감천동 부산도장 대강전(윗사진)과 도기 87(1995)년 12월 4일 중창한 현재의 대강전(아랫사진). 

 

 

 

 

 

 

 

 

白衣君王 度數

치성 후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옛날 주문왕(周文王)이 영대와 영소(靈沼)를 경지영지(經之營之) 할 때 서민(庶民)이 자래(子來)하여 불일성지(不日成之)함에 종고이낙지(鐘而樂之)라 하더니 나의 일도 그와 같아 영대 앞에 영소도 불일성지하리라”하시며 대강전 축대 아래 작은 샘을 파서 금붕어를 기르게 하시더니 다음 해 도장을 정비할 때 그곳에 영소가 이루어졌다.대강전이 영건된 후 도주님께서 법단에 공부설석하시고 도수를 보시며 하명하시기를, “자금이후(自今以後) 도법(道法)이 출어법단(出於法壇 : 법단에서 나온다)이니 내 말이 곧 도법이니라”하시고 도중사의 재결(裁決), 하명과 도인들의 승안(承顔) 등 공사를 법단에서 하셨다. 시봉들은 정사 옆방에 항상 대기하게 하시고 도중가족은 보수도정 내당(內堂)에 거주하게 하셨다.5월 삭일(朔日 : 초하루)에 중궁의 모든 문을 열어놓게 하시고 중부 전체 도인의 영대 봉심(奉審)을 명하셔서 방면별로 임원 인솔하에 회관 동북측 계단을 통하여 중궁에 올라가 영대 앞에 정렬하고 배례, 거수(擧首) 알현(謁見)한 다음 서남측 계단으로 퇴전(退殿)하게 하셨다.이날 봉심행사에 참례한 인원을 조사, 집계한 결과 3,000명임을 보고하니,“지난 정초의 세배인원이 3천명임은 3천지반 도수의 시작이었으나 오늘 행사는 그 도수의 연결이니라.”하셨다.그 전날 도주님께서 도인들의 봉심을 명하신 직후부터 옻으로 옥체가 붉어지셨으므로 임원들이 송구하여 약을 진상하며,“지존께서는 옻을 타지 않으신 줄 아옵는데 오늘은 어찌 옻이 오르셨나이까”하니,“만수도인이 봉심행사에서 옻에 신고할 것이므로 내가 미리 대속(代贖)함이니라”하시고 약을 물리셨다. 임원들은 옥체의 환후를 염려하였으나 혼정시(昏定時)에는 쾌차하셨으며 다음 날 수천 도인이 칠냄새가 가득한 중궁에 오르내렸음에도 옻이 오른 사람이 없음은 모두 덕화라 생각하며 기뻐하였다.이달 초순 며칠 동안의 장마로 용화문 밖 광장이 질고 물이 괴었으므로 임원들에게 정지(整地)하도록 명하셨는데 이때 임원들이 그 진흙 밟기를 꺼려하며 불성실하게 하므로,“너희는 여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곳이 대강전의 일층과 같으니라”하시며 엄하게 꾸중하셨다.어느 날은 임원들에게, “앞으로 조심할 일은 산화(山火)니 산화로 산이 헐벗는 일도 중대하나 신명계에서는 더욱 중히 여기느니라. 지계(地界)가 천계(天界)에 응(應)함이 지기(地氣)로 하늘에 붉은 노을이 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느니라”하시고 한시 한 절을 읊으시니 이러하였다.“香初老弗細細音 鐘後靑山默默天”(향불의 처음은 늙은 부처의 가느다란 소리요,종소리 뒤의 청산은 잠잠한 하늘이로다.)또 어느 날은 허령, 지각, 신명의 3단계 도수를 하교하시고,“이제는 완전한 신명시대니라. 허령도수와 지각도수를 마친지가 이미 오래니 신명도수가 분명하지 않으냐”하셨다.이어,“그대들이 지금 태을주를 외고 있으나 그 뜻을 알고 하느냐. 만사무기(萬事無忌) 태을주, 포덕천하(布德天下) 태을주, 소원성취(所願成就) 태을주니라. 그러므로 1자 1음에도 성·경·신을 붙여 마음 다져 외어야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의 감응을 받으리라”하셨다.도주님께서 분부(吩咐)를 내리실 때는 항상 2인이상이 함께 받들도록 하시고 한 임원에게 과오가 있을 때는 그 직속(直屬) 책임자에게 선도(善導)의 잘못을 엄책(嚴責)하셨다.하루는 초패왕과 의제(義帝)의 고사(故事)를 말씀하시고,“초패왕이 의제를 저버림이 아니라 의제가 초패왕을 저버림이니라”하셨다.또 말씀하시기를,“기도행사는…사가(私家)에서 열 번보다 회의실에서 한 번이낫고 회의실에서 열 번 보다 도장(대강전)에서 한번이 나으리라”하셨다.5월 망일(望日 : 보름날)에 조영래가 개인사업을 위하여 전학원 학정직(學正職)을 사임하므로 수리하신 다음 후임에 괴산지방 호장 김영하(金永河)를 임명하시고 교전에 박영희, 교무에 이영호, 학무에 김수봉, 유진권, 이종희, 이문행 등을 보궐 임명하셨다.이날 전학원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그대들은 성·경·신을 다하여 이세(二世) 도인들을 교육시켜 참다운 인재를 양성하라. 앞으로는 임원들과 성년(成年)도인들도 모두 배워야 하느니라. 청학동(靑學洞)에서는 청학을 하여야 하느니 이 또한 청학도수의 개시니라”하셨다.이무렵 도주님께서는 후일의 용도(用途)에 대비한다 하시며 금, 은괴(金銀塊)를 수집하시다가 박한경에게 거금(巨金)을 주셔서 금괴를 사오도록 하명하셨는데 한경은 이 돈을 증식(增殖)시키려고 음성 무극광산의 금광 덕대(德大) 김광현에게 투자하였다가 사기당하여 금괴를 진상할 수 없게 되자 송구(悚懼)하여 도를 못믿게 되었다 하며 2개월간 월례상정일(月例上廷日)에도 상정하지 않았다.이 사실을 알게 된 김용화가 그 유용 손실분(損失分)을 협동상회 자금으로 충당하여 수습한 다음 함께 상정하여 도주님께 배알하니,“너의 죄를 논하자면 만사무석(萬死無惜)이나 개과천선하고 도업(道業)에 더욱 진력하되 과욕(過慾)을 회참(悔懺)하라”하셨다.7월 어느날 이렇게 말씀하셨다.“공자가 이구산(丘山)에 사람을 모음은 72현(賢)을 내는 공부였고 서가가 영취산(靈鷲山)에 모음은 5백 나한(羅漢)을 내는 공부였으나 나는 천장길방하신 부산 감천 용화도장(龍華道場)에서 1만 2천 도통군자를 일시에 출현시키는 공부니라. 그러나 나는 자리 없어 한하는 자는 없게 하리라”“그대들이 기다리는 때는 오직 호시절(好時節)을 말함이나 그때라는 것은 여기이지(如期而至)하고 여한이정(如限而定)하는 것이니라. 분초(分秒)를 두고 기다릴 것이로되 꼭 어느 날 어느시라고 단언(斷言)하지는 못하고 설사 알아도 누설하지는 못하는 법이니 만일 그러하면 신명이 가장 싫어하는 천기누설(天機漏洩)이 됨이니라. 그러므로 알고 말하면 누설죄에 걸리고 모르고 말하면 기만죄(欺瞞罪)에 걸리느니 정히 답답하거든 세상사(世上事)를 살펴보라”도주님께서는 항상 대강전을 상비원(常備員)으로 하여금 엄히 수직하게 하시며 일체의 부정(不淨)을 금하시고 중궁에는 상급임원도 출입을 제한하셨다.7월 말일에는 수직하던 정복현(鄭福鉉)이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한 경찰관이 우연히 중궁에 올라가 구경함을 박중하가 발견하고 황급히 추방하였는데 도주님께서 이 보고를 받으시고 크게 진노하셔서 정복현을 대동문 밖에 석고대죄(席藁待罪)시키시고 상급임원 전원도 중궁에 부복 대죄시키며 영대문 앞에서 한시간이나 부복 사죄하신 다음 전체 임원을 엄히 책망하셔서 궁단속(宮團束)을 더욱 강조하셨다.윤8월 초8일에 도주님께서 임원 몇 사람을 거느리고 지리산 쌍계사(雙溪寺)에 행행하셨는데 출발에 앞서 대강전 앞마당에 차를 대기시키시고 도장에 남을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이번에 백의군왕(白衣君王), 백의장상(白衣將相) 도수가 들어오는데 내가 없어도 너희들이 감당하겠느냐 궁단속(宮團束)을 잘하라”하셔서 다짐을 받으신 다음.“이 도수를 마치면 도명(道名)이 세상에 드러나고 도장에도 전기(電氣)가 들어오게 되며 나 또한 이 지상에서 볼 도수는 거의 마치게 되느니라”하셨다.이날 하오 쌍계사에 임하신 도주님께서는 청학루(靑鶴樓) 뒤의 영주각(瀛洲閣)에 설석하시고 초9일 자시부터 공부를 시작하셨는데 밤에 지리산 일대에 폭풍이 일며 때 아닌 우박이 쏟아졌다.이때 시종들이 우박을 피하여 청학루에서 쉬었는데 공부실 쪽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크게 나므로 급히 올라가니 도주님께서 크게 꾸중하시기를,“너희는 제자리를 비워두고 어디서 무엇을 하였느냐. 저 문과 문고리를 보라”하셨다.시종들이 황공하여 부복하고 살펴보니 문고리는 뻐드러져 뽑혀있고 문종이는 모두 찢어져 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이런 일에 너희가 있은들 어찌하랴. 신명들이 한  일이어늘… 지리산 신령은 여신령(女神靈)이니라”하셨다.잠시 후에 도주님께서 한시 한 절을 외어주시니 이러하였다.“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조정산이 오니 지리산이 응하고, 한 베옷(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옷이라는 뜻으로 백의(白衣)와 같은 뜻)으로 오니 흰 해가 차도다.)12일에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구천상제께서 ‘정북창(鄭北窓)같은 재조로도 입산삼일(入山三日)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하심이 진실로 옳은 말씀이니 너희들도 공부 않고 성공할 생각은 말라”하셨다.한편 이날 여러 일간신문에 ‘태극도 간부가 폭력으로 도인의 재산을 갈취(喝取)’라는 제목의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이는 7감에 살던 김현우가 입도는 하였으나 임원들의 지도에 불응할 뿐 아니라 재력(財力)이 있음을 기화(奇貨)로 빈한한 도인들을 업신여기므로 그 방면 호장 이윤섭이 과격하게 질책(叱責)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배도(背道)하여 사실무근한 허위날조(虛僞捏造)의 진정서를 언론기관과 수사당국에 제출함으로써 발단된 일이었다.이로써 각 신문에서는 이를 확대 보도하고 더욱 심층취재(深層取材)한다 하며 매일 수10명의 기자가 도장에 찾아와서 며칠동안 소란을 일으켰으며 수사당국에서도 사실을 조사하니 도장에 남아있던 임원들은 이 사건을 도주님 환궁(還宮)전에 마무리 지으려고 고초를 겪었으나 조사결과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16일에 도주님께서 하산하셨는데 이때 지리산에 화재가 일어나 몇만정보에 번지므로 인근 주민 수만명이 동원되어도 진화하지 못하였으나 25일에 도주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산이 다 타서야 되겠느냐”하시더니 이날 폭우가 쏟아져 자연히 진화(鎭火) 되었다.이때 임원들은 지난 5월에 산화를 분부하신 뜻을 비로소 깨닫고 이번 공부에서 지리산 산신이 복응(伏應)한 사실과 아울러 감복하였다.

대강전 앞의 영소도주님께서 도기 49(1957)년 4월 28일 대강전 영건치성 후에 하교하신 말씀대로 다음해 도장을 정비할 때 자연히 이루어진 영소의 모습. 그 중앙의 축대 위에는 용소 조성 당시 옥녀봉에서 굴러내린 바위가 그 위치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

지리산 쌍계사 영주각 공부처도주님께서 도기 49(1957)년 윤8월 초 9일부터 3일간 백의군왕, 백의장상도수로 공부하신 경남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 쌍계사의 영주각. 사진은 그터에 새로 지은 건물.

 

 

 

 

 

 

 

 

 

 

 

 

 

 

 

 

 

 

玉皇上帝의 自己啓現

도주님께서 환궁하셔서 임원들에게 백의장상도수의 노고를 치하하시고 지리산과 최고운(崔孤雲)에 관한 전설과 조선 태조 개국시(開國時)에 8도(道)명산의 응기(應氣)를 받았으나 유독(唯獨) 이 산 만이 불복(不服)하므로 본래의 산명 지리산(智理山)을 지이산(智異山)으로 고쳐서 경상도로부터 전라도로 유배(流配)시켰다는 전설 등을 하교하셨다.23일에는 도주님께서 대전으로 행행하셔서 이튿날 은진 관촉사(灌燭寺)의 석조(石造) 미륵불상과 연산 개태사(開泰寺)의 철확(鐵)을 관감(觀鑑)하셨다.환궁하신 후에 임원들에게 은진 미륵은 석재(石材)가 너무 커서 세울 때에 신동(神童)의 암시(暗示)를 받아 흙을 쌓고 세우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전설과 연산 철확은 왜정 때 철재(鐵材)로 사용하려고 파괴하다가 뇌전벽력(雷電霹靂)이 일어나고 인부가 급사하므로 포기했다는 전설 등을 하교하셨다.26일 축시경에 도주님께서 법단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정사에 임하셔서 옆방에 있던 임원들을 부르셔서,“너희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우선 너희들이 무슨 이야기라도 하여 보라”하시므로 윤금현이,“서교 성경 묵시록에서 말하는……‘어린양’은 바로 ‘을(乙)인 양(羊)’이고 ‘양은 미(未)’이므로 지존께서 을미생(乙未生)으로 오심을 예언함이오며 또 여호와가 ‘2천년 후에 불로 심판한다’함은 지존께서 지금 사오화(巳午火) 남방(南方)에 오셔서 창생을 구제하실 일을 예언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역 정괘(鼎卦) 단전(彖傳)에 ‘이목손화(以木巽火 : 나무로써 불을 때다)ㅣ팽임야(享也 : <희생(犧牲)을> 삶고 익히다>ㅣ니 성인이 팽(享: 삶아 익히다)하야 이향상제(以享上帝 : 상제님께 제사드리다)하고 이대팽(以大享 : 크게 삶아 익힘으로써)하야 이양성현(以養聖賢 : 천하의 어진 사람을 기르다)이니라’고 <정(鼎)을 설명>한 것도 지존께서 정산(鼎山)으로서 천명(天命)을 봉대(奉戴)하심을 단정(斷定)함이옵니다”하고 장황하게 아뢰었다.도주님께서 미소하시며 듣기만 하시다가 봉천명(奉天命)하신 일로부터 중국에서 공부하신 일, 득도(得道)·환국(還國)하신 일, 안면도·황새마을·통사동에서 공부하신 일, 천서·천보를 모신 일 등 경과사를 말씀하셨다. (윤금현 호장(당시는 호령)은 이때 현임 편찬위원으로서 이날 새벽에 받든 분부를 명심했다가 필생(畢生)의 사명으로 자임(自任)하던 태극진경 원고 초안의 기본으로 하였으며 그 자필(自筆) 원고는 지금도 편찬원에 보관되고 있다)하루는 말씀하시기를,“진주는 내가 잡고 이제 뽑기까지 하였으니 까기만 하면 되는데 까기는 여반장(如反掌 : 손바닥을 뒤집기와 같이 쉬운 일)이니 너희들이 하라”하시고 진주는 낙서(洛書)의 법임을 가르쳐 주셨다.9월 중순에 도주님께서 임원들로 하여금 중부도인 전원에게 구궁(九宮), 팔괘(八卦), 생기법(生氣法), 12운법(十二運法)을 가르쳐 외도록 하시고 다음과 같은 한시를 외어주셨다.“先須掌中配九宮 縱橫十五在其中 次將八卦分八節 一氣統三爲正宗”(먼저 모름지기 손바닥 가운데 9궁을 배열(配列)하면, 가로 세로 15(진주)가 그 가운데 있도다.다음에 8괘를 가져다 8절을 나누면, 한 기운(태극)이 셋(천·지·인)을 거느려 바른 근본이 되도다.)도주님께서는 본래부터,“내 앞에서는 서자(書字)가 필요하지 않으니라”하시며 일체의 문서는 불태우셔서 남기지 않으시고 진영(眞影 : 사진 또는 초상화)도 기념촬영조차 엄금하셨다.(이 분부를 잘못 이해한 일부 임원들이 화천하신 후에도 상당기간 도단행정의 문서화조차 기피함으로써 덕화선양(德化宣揚)에 지장을 초래한 사실도 있었다.)9월13일 아침에 청구가 사진기를 가지고 정사에 올라가 상고(上告)도 없이 회룡재 정침에서 책을 보시는 도주님 사진을 촬영하였는데 이는 청구 자신도 무의식 중에 한 일로서 촬영 후에야 무엄하게 저지른 일임을 깨닫고 당황하였으나 도주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법단으로 거둥하셨다.이날 낮에 도주님께서 박중하에게 하명하시기를,“오늘 아침에 영래가 한 일은 저도 모르고 한 일이나 도수에는 맞았느니라. 사진사를 불러 내 사진을 정식으로 촬영하여 확대하되 4장을 마련하라”하시며 그 장광척촌(長廣尺寸)을 가르쳐 주셨다.18일 하오에 상급임원들을 중궁에 시립시키시고 몸소 영대의 옥황상제 위패의 위지를 떼어 불사르신 다음 그 위(位)에 미리 준비하셨던 진영을 봉인하셨으나 당시 임원들은 존의(尊意)를 헤아릴 수 없어 감히 아무말씀도 여쭈지 못하였다. (이 사실은 참으로 종교신앙상 중대한 의의를 갖는 일이다. 종교학에서의 규정은 모든 신(또는 부처)은 스스로 자기를 계현(啓現 : 계시하여 나타내다)함으로써 그때부터 비로소 신으로서의 위격(位格)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도주님께서 인덕(人德) 도수인 삼천지반도수를 비롯한 예장(禮章)도수, 범질도수, 백의군왕도수 등 수많은 도수를 마치신 다음 몸소 옥황상제이심을 계현하는 무언(無言)의 선언이셨던 것이다.)이날 포장, 호장 등 상급임원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누구의 제안이나 상의도 없이 범질(范質) 도수와 예장도수를 생각하고 지난 을미년에 보수도정(당시는 부산도장)에서 도주님의 ‘지존위(至尊位) 등극(登極)’을 주청(奏請)하던 전례가 상기(想起)되었다.이에 일동이 다시 그렇게 주청하여 명확한 윤허(允許)를 받들기로 결의한 다음 하오 9시경에 포정, 호령 이상 중급(中級)임원들을 대강전 회관에 시립시켜놓고 상급임원 전원이 정사에 올라가 존전(尊前)에 부복하고 주청하기를,“지존께옵서 상제위(上帝位)에 등극하옵소서”하였으나 비답(批答)하지 않으시므로 자정(子正)이 지나 치성시간이 되도록 재삼재사(再三再四) 반복 상주하니,“치성이 늦겠으니 그만하라”하시고 중궁으로 거둥하셔서 치성진설(陳設)을 명하시므로 끝내 윤허의 말씀은 받들지 못했다.임원들이 진설을 봉행하다가 진반(進飯 : 메를 올림) 순서가 도주님 진영 앞에 이르자 진설원(陳設員) 이윤섭이 마음 속으로 ‘과거 옥황상제 위패와는 달리 생존하신 도주님 진영 앞에는 메를 올릴 수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나서 주저(躊躇)하다가 마지 못해 도주님께 여쭈기를,“지존 진영 위전(位前)에도 메를 올려야 하나이까”하니,“너희들이 그렇게 미련하냐. 답답하도다. 뜻대로 하라” 하시므로 진반하고 치성을 봉행하였다.(이 일은 증산상제께서 짜 놓으신 ‘산 제사’의 도수(무극경 7 : 102참조)임을 당시 임원들이 깨닫지 못한 것임)치성 음복이 끝난 후에 임원들을 영대 앞에 원형(圓形)으로 부복시키시고 현무경(玄武經)의 한 장을 가리키시며,“내가 이 현무경의 모든 도수를 마치고 이제 이 한장의 도수만 남았느니라. 이는 내가 닫고 온 옥추문(玉樞門)을 열러 가는 도수니라”하셨으나 이때 임원들은 부복하였으므로 어느 장인지를 확인하지 못하고 말씀하신 뜻도 확실히 깨닫지 못했다.20일에 도주님께서 박중하 등을 거느리고 대강전 법단에 옥체진영을 구천상제 진영과 함께 봉안하신 다음 보수도정에 행행하셔서 그 영대의 옥황상제 위지를 떼어 불사르시고 그 자리에 진영을 봉안하시며,“그대들이 일전에 나의 제위 등극을 주청한 일이 도수를 알고또는 모르고 한 일인지는 모르나 그대들의 인덕(人德)으로 내가 도수를 잘 보았느니라”하셨다.(임원들은 이때부터 도주님께 4배를 올렸으나 진의(眞意)를 깨닫지 못하더니 화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도주님께서 옥황상제이심을 깨달았으며 이때 법단에 남겨두신 진영 한 장은 화천하신 후에 미리 지정하신 봉심실(奉審室)에 봉안하고 도인들이 승안(承顔) 봉심토록 하였다.)

은진 관촉사 미륵불상도주님께서 도기 49년(1957)년 윤8월 23일 관감하시고 도수를 보신 충남 논산군 은진면 반야산 관촉사 석조 미륵불상.

연산 천호산 개태사 철확 도주님께서 도기 49(1957)년 윤8월 23일 관감하시고 도수를 보신 충남 논산군 연산면 천호산 개타사의 철확.

 

 

 

 

 

 

 

 

 

 

眞法工夫 設法

11월 삭일(朔日) 조회시에 도주님께서 현세의 시국이 너무 무도(無道)함을 개탄하시며,“강륜(綱倫)이 소지(掃地)에 패천(悖天) 만신(神)하니 혼잡이 기극의(其極矣)라(3강 5륜이 땅을 쓸어낸듯 하여 하늘을 거스르고 신명을 속이니 혼잡이 그야말로 지극하도다)”하시고 시한 수를 읊으시니 이러했다.“願問生方從何地 鐘聲起處太乙宮 兩白之運在何處 四鐘聲振太乙宮”(원하여 묻노니 살 방소는 어느 땅으로 부터냐?종소리 일어나는 곳이 태을궁이로다.양백(양위상제)의 운수는 어느 곳에 있느냐?네 번 종소리가 울리는 태을궁이로다.)이튿날 오시에 동지치성을 마치시고 도주님께서 상급임원 전원을 부르셔서 하명하시기를,“내가 이제 50년 공부를 종필할 도수니라.……앞으로 남은 일은 도인들의 수심연성(修心鍊性)과 천지음양 이기(理氣)에 대응상속(對應相續)하여 대강과 도통의 전제(前提)가 되는 진법(眞法)공부 한 가지 뿐 이니라 내가 50년 공부로써 이룬 광구천하(匡救天下)의 공부법방이니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법이요 진법(陣法)이며 천지대학이요 청학(靑學)이니라. 이는 36궁도수(三十六宮度數)니……우선 각 방면 책임자는 관하 도인 중에서 신심(信心)과 정성이 공부할만한 자를 엄선하여 그 명단을 1주일내로 제출하라”하셨다.이 명령에 따라 제출된 명단은 약 8천명이었다. 도주님께서 먼저 수도사무원(修道事務員)으로 책임자에 박중하, 부책임자에 윤금현, 최해창을 임명하셔서 공부반 편성과 그 관리업무를 맡기셨다.또 각 공부반(工夫班)의 책임자가 될 시학원(侍學員), 종래의 상비원 업무를 계승할 정급(正級), 정급을 보좌할 진급(進級)등 수도공부반 임원을 선임하셨다.그리고 임원 이외에 수도할 도인을 수본(修本), 여자수본을 내수(內修), 남자수본을 외수로 명명하시고 내·외수 중에 신심이 더욱 두텁고 공로가 많았던 자를 회원(會員)으로 선발하시며 시학원, 정급, 진급, 회원 등의 사명(使命)을 특별히 강조하셨다.도주님께서 수도사무원들에게 공부방법을 상세히 하교하시고 또 주문의 봉송격식을 봉축주, 기도주, 진법주, 도통주, 신성주는 축문식(祝文式 : 축원하는 격식), 태을주, 칠성주, 28수주, 24절주는 경문식(經文式 : 경문을 외는 격식), 운장주, 개벽주, 해마주는 호령식(護令式 : 호령하는 격식)으로 하되 개벽주의 ‘감아’이하는 축문식으로 정하신 다음 전체 도인의 송주(誦呪)방법과 배례방법 등도 다시 연습시키게 하셨다.초8일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종운(鐘韻 : 종소리에 화합하도록 운자(韻字) 또는 글자수를 맞추어 지은 글)을 짓도록 명하셨으나 모두 미흡하므로 13일에 몸소 지어 내려주시며 정급이상임원은 외우게 하셨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종운종성명혜(鐘聲鳴兮)여 우주경응(宇宙警應)이로다.제1명혜(第一鳴兮)여 천기하강(天氣下降)하고 제2명혜(第二鳴兮)여 지기상승(地氣上升)하고 제3명혜(第三鳴兮)여 인도중정(人道中正)하고 제4명혜여 조화시정(造化始定)하니 만유구비(萬有具備)로다.종성이 기하(幾何) 오 15상속(十五相續)이라 기리여하(其理如何)오 8괘상탕(八卦相)하고 9궁성수(九宮成數)로다. 종횡운용(縱橫運用)하여 15성진(成眞)이라. 진법여시(眞法如是)하니 시왈진리(是曰眞理)로다.제1명혜여 각성(角星)이 위시(爲始)하고……2행지1(二行之一)……3행지1……41지수……시종야(是鐘也)는 동지위시(冬至爲始)……북현무(北玄武)……재지성형(在地成形)하니 화피초목(化被草木)에 뇌급만방(賴及萬方)이로다”이어 정급이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며 종운을 외는 방법도 하명하시니 이러하였다.어느 기도시간이라도 종을 칠 때는 먼저 “종성명혜”로 부터“천기하강하고”까지를 외면서 한 번, 제2, 제3, 제4의 부분을 외면서 각 한 번씩 총 4번을 친다.그 다음 자, 축시에는 “제1명혜여 각성이 위시하고”를 외면서 한 번, 각 성수를 욀 때마다 한 번씩 28번을 친다.(먼저 친 4번제외)오, 미시에는 24절후명을 하나씩 외면서 한 번씩 24번을 친다.묘, 유, 진, 술시에는 “종성이”로 부터 “진리로다”를 왼 다음 더 외지않고 15번을 친다.수도공부의 명칭을 “시학(侍學)”과 “시법(侍法)”으로 구분하여 명명하신 다음 시법공부는 그 시행을 후일로 미루셨으나 시학공부는 이달 18일부터 시행하기로 정하셨다.그리고 그 공부실도 정하시니 이러하였다. 대강전 중궁 동남측 공부실은 시법실로서 시법공부반이 쓰고 회관 용화문 옆방은 태을방(太乙房)으로서 시학공부반의 시학원, 정급, 진급, 회원이 쓰며 승정문 옆방은 일관방(一貫房)으로서 내·외수가 쓰고 대강전 앞 김중태의 집자리에 수축(修築) 한 방 둘은 내수공부실, 외수공부실로서 내외수가 각각 쓰게 되었다.15일에 도주님께서 수도사무원으로 하여금 18일에 공부할 시학공부 제1호 제1반의 편성표를 작성하게 하시니 그 책임자에 이용직(다만 몸이 불편하므로 박중하가 대리함), 부책임자에 박중하, 조호선, 정급에 박덕구, 최종하, 진급에 이종근 외 2인, 회원에 최해창 외 15인, 외수에 김교천 외 11인, 내수에 정상희 외 11인으로서 총원이 48인이었다.(이 인원편성방법을 다음해 정월 20일에 변경시키셔서 부책임자 2인을 1인으로 하고 내·외수회원 16인을 5인으로 하여 총원을 36인으로 하셨다가 2월 초5일에 부책임자를 없이 하는 대신 회원 1인을 증가 시키셨는데 이 편성방법은 지금까지 준수되고 있다)그리고 이 편성표는 매일 공부 3일전에 게시(揭示)하고 각 방면 포정이 해당되는 관하 도인에게 통지하여 참례여부를 확인받아 수도사무원에게 보고하고 수도사무원은 참례가 확정된 공부반 명단을 공부당일 하오 7시까지 녹명지(錄名紙)로 정서하여 법단에 올리도록 하셨다.이때 시학 제1호 제1반부터 제10반까지의 각반 책임자 1인, 부책임자 2인씩이 임명되고 매일 공부반을 감독할 시학관(視學官)으로 임규오, 그 보좌로 윤금현이 임명되었다가 며칠 후에 포장 호장 중에서 몇 사람이 추가로 임명되어 당번제로 근무하였다.17일 하오에 도주님께서 각 공부실을 설비하셨는데 공부실마다 영대방향의 벽 정면에 백지를 붙여서 위지(位紙)로 하시고 위지 아래 바닥에 향, 향로, 성냥, 재떨이 등을 설치하신 다음 잠시 위지와 대좌(對坐)하셔서 시종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말씀을 하셨다.이날 밤 9시에 다음날 공부할 반원 48인을 회관으로 모이게 하셔서 책임자 박중하로 하여금 공부반 편성표에 의하여 호명(呼名), 점검하되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하게 하셨다.호명된 반원은 편성표의 순서대로 제1렬에는 책임자, 부책임자, 정급, 진급, 회원 등 12인, 제2열에는 회원 12인, 제3렬에는 외수 12인, 제4열에는 내수 12인이 정렬하여 향전배례(向殿拜禮)를 올린 다음 법좌하고 책임자로부터 공부방법과 유의사항을 듣는다.유의사항 시달이 끝나면 일동은 좌배를 올리고 해산함으로써 점호행사를 마친다.시학반의 공부방법은 대략 이러하다.1. 전일(前日)반과 후일(後日)반의 교체시간은 하오 11시로 한다.2. 후일 반은 하오9시에 회관에 모여서 점호행사, 10시에 중궁에 올라가 봉심(奉審)행사를 봉행한다.3. 각 공부실에서 봉송할 지정주문은 다음과 같다.

4. 각 반원은 지정시각, 지정공부실에 들어가 전(前)반원이 비켜주는 자리에 부복, 궤좌(坐), 분향한 다음 법좌하여 좌배하고 전반원의 송주가 끝남과 동시에 지정된 주문을 한 시간 연송한다.5. 지정주문을 연송하기 전에 봉축주 1회, 기도주, 태을주 각 4회를 봉송하되 일진이 갑병무경임(甲丙戊庚壬)의 양일(陽日)에는 태을위시(太乙爲始 : 태을주부터 시작)로, 을정기신계(乙丁己辛癸)의 음일에는 기도위시(祈禱爲始 : 기도주부터 시작)로 하여 일진의 음양에 맞춘다.6. 소정시간이 끝나면 들어오는 반원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법좌, 송주를 계속하다가 그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송주를 마치고 좌배, 심고한 다음 퇴실(退室)한다.7. 평일의 진술축미(辰戌丑未)시 4회와 주일의 자오묘유(子午卯酉)시 4회를 더한 8회의 기도는 전 반원이 합동으로 1시간을 모시되 주문을 평상시처럼 봉송한 다음 기도주와 태을주를 일진 음양에 맞추어 호선(互先)으로 반시간씩 연송한다. 다만 그 시간에 공부한 반원은 다음 시간에 보충기도를 모시되 평상시처럼 전체 주문 봉송 후 기도주 태을주 각 24회 봉송하는 편법으로 한다.8. 공부를 마친 반은 하오 11시에 합동으로 중궁에 올라가 봉심행사를 봉행한다. 이 공부방법에 따른 유의사항은,1. 책임자와 시학당번의 지시사항 준수,2. 목욕재계,3. 부정 금기(禁忌),4. 시간엄수,5. 대기근무,6. 외출금지,7. 와석(臥席)금지,8. 장내 청결 등으로 요약된다.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11월 18일 자시를 기하여 시학공부를 개시하게 하시고 도주님께서는 법단에서 백일공부를 시작하셨다.(이 백일공부는 다음해 2월 28일 곧 화천 8일전에 마치신다.)25일에 하명하시기를,“재명일(再明日)로서 시학 제10반까지 공부하게 되나 이는 연습을 한 것이며 이만하면 법방수행에 충분하니 오는 28일 갑오(甲午)를 기하여 제1반부터 정식공부를 봉행토록 하라”하셔서 이때부터 정식으로 시학공부가 시작되었다.도주님께서 지난 9월 옥체 진영(眞影)을 영대에 봉안하실때는 그 좌대(座臺)를 구천상제의 진영보다 5푼이 낮게 하셨는데 그 후에 보관하시던 금, 은괴 각 10여관씩으로 양위(兩位)를 금상(金像)으로 조상(彫像)하시고자 여러 차례 기능공을 부르셔서 방법을 하문(下問)하시더니 12월 초3일에는 양위진영의 좌대를 동일한 크기로 만드셔서 다음날 상제 강세치성 직전에 새로 봉안하셨다.이날 기해(己亥) 주일을 기하여 수도사무원들에게 초강식(初降式), 합강식(合降式), 봉강식(奉降式)의 절차를 상세히 가르치시고 하오 6시에 그동안 시학공부를 마친 5개반 240인 전원을 대강전 바깥 마당에 모이게 하셔서 사무원의 주관으로 초강식을 봉행하게 하시니 그 절차는 이러하였다.먼저 사무원이 5개반의 녹명지를 법단 앞 탁자 위에 올린 다음 시간이 되면 창홀(唱笏) 임규오, 고수(手) 김용화, 시독원(侍讀員) 이종락, 김대성과 그밖에 포장, 호장 전원이 중궁에 올라가 각 위치에 시립(侍立)하고 당일 공부반의 정급 1인은 내정 대문 옆에, 1인은 중궁 복도 대동문 안에, 진급 1인은 대동문 밖에 자리를 펴놓고 그 옆에 시립한다.시립이 끝나자 창홀이 영대와 법단에 명촉(明燭), 분향하니 이때 도주님께서 법단에 임어하셨다.이에 앞서 대강전 대문 바깥 마당에 4열종대로 정렬 대기하던 제1반이 책임자의 “1렬 앞으로 나솨”하는 구령에 따라 제1렬로부터 중궁을 향하여 전진하다가 정급과 진급의 “국궁(鞠躬)”하는 구령에 따라 국궁자세로 중궁에 올라가 영대문 앞에 횡대로 정렬하고 제2, 제3, 제4열도 차례로 올라가서 제1렬 뒤에 4열 횡대로 정렬한다.정렬이 끝나자 창홀은 일동을 구령으로 정렬, 취석, 배례, 법좌, 면수(首)시킨 다음 “평심정기(平心正氣)하여 지성으로 발원(發願)하라”하는 계훈(戒訓)을 호창(呼唱)한다.시독원은 영대 두 문 앞에 법좌하여 반부복(半俯伏)하고 대기하다가 창홀에 따라 봉축주 1회와 기도주, 태을주 각 4회, 칠성주, 운장주, 28수주, 24절주, 각 1회를 순차 교대로 봉송하되 일진의 음양에 맞추고 일동도 역시 일진음양에 맞추어 봉축주 1회와 기도주, 태을주 각 4회를 봉송하고 고수는 봉축주 봉송 때마다 북을 “대강 대강 해원신”의 7박으로 4회씩 친다.송주가 끝나면 일동이 좌배하고 일어나서 국궁, 예필한 다음 8렬로 우향(右向)하여 법단을 향한 법배와 평배를 각 4배하고 부복한다.이때 창홀은 제1반의 녹명지를 소화(燒火 : 다만 제1호 각반의 초강식 때는 도주님께서 몸소 시행하시고 제2호 초강식 때부터 창홀이 대신 봉행함)하고 일동은 일어나서 거수(擧首), 알현(謁見)한 다음 다시 4열로 좌향(左向)하여 국궁하고 일진음양에 맞추어 양일에는 앞줄, 음일에는 뒷줄로부터 퇴전(退殿)함으로써 제1반의 초강식을 마친다.이와 같은 절차로 다른 4개반의 초강식을 순차로 봉행하였는데 제1반 강식 도중 일동이 법단을 향하여 부복하였을 때 도주님께서 그 앞에 임어하셔서 훈고(訓誥)하시기를,“이 강식은 건극개강식(建極開降式)이며 우주행진(宇宙行進)이라. 3재기성(三才旣成)에 8문(八門)이 성운(成運)하고 9궁(九宮)이 성도(成道)로다. 왈이군공(曰爾群工)은 경수내직(敬受乃職)하야 엄이존성(嚴爾存誠)하라”하셨다.또 초강식 후에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이 공부를 잘하면 나와 서로 문답(問答)할 날이 있으리라. 그리고 이 방은 선방(仙房)이니 너희들은 구천상제께서 말씀하신 신선을 보게 될 것이며 너희들이 곧 신선이 되리라”하시고 한시 한 절을 읊어주시니 이러하였다.“聲滿宇宙萬物心  淨吾脫劫所願成”(소리가 우주에 가득함은 만물의 마음이요,나를 정결하게 하고 겁을 벗어 소원이 이루어지도다.)초8일 갑진(甲辰)주일에 다시 시학 제6반으로부터 제10반까지의 초강식을 올리니 그 절차는 초3일의 초강식 때와 같았다. 이때 임원들이 중부 각 방면의 기호(記號) 표시를 상신하여 재가를 받드니 다음과 같았다. 기호 방면명 포정성명 ㄱ 음성 경석규(慶錫奎) ㄴ 진천 임창섭(林昌燮) ㄷ 주덕 김명흠(金明欽) ㄹ 충주 장동섭(張東燮) ㅁ 증평 김이현(金利鉉) ㅂ 괴산 유한규(柳漢珪) ㅅ 청천 이유학(李有學) ㅇ 미원 김기태(金基泰) ㅈ 김천 이건우(李建雨) ㅊ 중산 박덕구(朴德九) ㅋ 영주 신경희(申景熙) ㅌ 청주 윤동춘(尹東春) ㅎ 연풍 최해창(崔海昌)11일에 도주님께서 시학 제2호 제1반의 편성표를 재가하시며 각 호의 제1반 책임자를 그 호의 책임자로 명하시니 제5호까지의 호책은 다음과 같았다. 제1호 호책 박중하(朴重夏) 제2호 호책 임규오(林奎五) 제3호 호책 박한경(朴漢慶) 제4호 호책 신상철(申祥澈) 제5호 호책 유철규(柳喆珪)13일 기유(己酉) 주일을 기하여 도주님의 명에 따라 시학 제11반부터 제15반까지의 초강식을 봉행한 후에 제1호 15개반의 합강식(合降式)을 봉행하니 먼저 그 합강반의 편성방법은 내수 180인과 외수 180인 총 360인을 한 반에 72인(내수 36인, 외수 36인)씩 5개반, 시학책임자, 부책임자, 정급, 진급의 정원 120인 중에서 72인으로 제6반, 회원 정원 240인 중에서 72인씩 제7, 8반을 편성하여 그 총원은 8개반 576인이었는데 초강식을 마치지 못한자리는 마친 반원으로 충당하였다.합강식의 절차는 초강식의 절차와 같되 시독원의 주송에서 개벽주가 추가되고 고수의 타고(打)도 개벽주의 “24절 제대신장”까지가 추가되었으며 녹명지는 한번에 3장씩 소화(제 6, 7, 8반은 제외)하고 수본행사 때에 그 호의 시학원은 전수실, 정급은 영불문 안, 진급은 중궁 복도에 각각 시립함이 초강식의 절차와 달랐다.합강식 제1반이 알현할 때에 도주님께서 법단 앞에서 훈고(訓誥)하시기를,“이 강식은 성둔(成遁) 도수니라. 천근월굴(天根月窟)이 한래왕(閑來往)하니 36궁(三十六宮)이 도시춘(都是春)이라. 삼계혼원세계(三界混元世界), 삼계해원세계(三界解?世界), 욱일대사(郁日大師) 태을성천(太乙成天) 여율령 사바아” 하셨다.이어 하교하시기를,“강식의 자리가 좁아도 좁다고 하지 말라. 엉성하면 김이 새는 법이니라. 허공을 보라. 텅 빈듯 하지만 천지는 면면밀밀(綿綿密密)하여 바늘 끝하나 들어갈 틈도 없고 또 그러할 겨를도 없으며 1보(步) 밖이 생사(生死)의 갈림 길이고 진법(眞法)은 진법(陣法)이니 항오(行伍)를 잃은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호책의 영에 따르고 호책의 얼굴을 알아두라”하셨다.

? 시학 제1호 제1반 편성표 ?도주님께서 도기 49(1957)년 11월 1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신 시학공부반 제1호 제1반 편성표. 

 

 

 

 

 

 

 

 

 

 

 

 

 

 

 

 

 

 

 

五十年工夫의 結晶

12월 14일 조회시에 하교하시기를,“어젯밤에 제1회 합강식을 무사히 마침으로써 오도 진법의 수도법방이 당진(當進)함을 경하하노라……오도의 궁극 목적은 도통이나 수도없는 도통이 없고 진법없는 법방이 없으며 법방없는 수도도 없으니 이제 이 법방의 당진은 도통의 첩경이요 기초동량(基礎棟樑)이니라. 내가 이 법방을 ‘50년공부의 결정(結精)’이라 하고 또 ‘삼계광구(三界匡救)의 유일한 진법’이라 함이 모두 이에 있느니라”하셨다.이어,“세간에 수도인도 많고 공부군도 많으나 진법의 법방이 아닌데 수도하면 무엇하고 공부하면 어찌하리오……너희는 이 법방의 수도인이 되었음을 무상(無上)의 영광으로 알고 긍지를 가지라”하셨다.이달 16일에 수도사무원들이 용무가 있어 각자 외출하였다가 녹명지를 제시간에 올리지 않았는데 하오 9시경 도주님께서 도장내에 있던 임원들을 긴급히 명소(命召)하셔서 내정에 꿇어 앉히고 크게 진노하셔서 꾸중하시기를,“너희들은 내 50년공부를 망치려 드느냐. 너희는 금년이냐 명년이냐 하고 때를 기다리지마는 나는 푼각(分刻)을 두고 다투느니라. 왜 녹명지를 <지정시간에> 올리지 않았느냐. 내가 50년공부로써 만고에 없는 이 법방을 짰는데 만약 도수를 어기면 내가 50년공부를 다시 하여야 하리니 그 책임은 누가 지며 그 죄는 무엇으로 속(贖)할 것이냐”하셨다.이때 임원들은 당황망조(唐惶罔措)하였는데 박중하가 복고(伏告)하기를 “공부반 점검은 이상없이 마쳤사옵고 녹명지만 못 올렸사온데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사오니 지만(遲晩) 하옵소서”하니,“너희들이 하마터면 큰 일을 저지를뻔 하였으나 다행히 공부반 점검은 끝났다 하니……앞으로는 더욱 명심하여 호리(毫釐), 분초(分秒)의 차착도 없이 하라”하시므로 임원들은 고두사죄(頭謝罪)하고 물러나와 이로부터 공부반 일에 더욱 용심(用心) 진력(盡力)하였다.이무렵 도인들 가운데는 자신의 운수만을 소원하며 수련에 몰입하여 가정과 생업도 잊어버리는 자가 있었다. 도주님께서 타이르시기를,“도를 위하여 불고처자(不顧妻子) 불고가사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나 나의 도는 그것만을 원치는 않느니라.……가정과 생업에도 충실하라. 더구나 수도공부에는 나만 먼저 성취하려는 사욕(私慾)이 제일 금물이니 무아(無我)……무욕(無慾)……으로 하여야 하되 이 법방은 수련정진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자통(自通)이 없음을 명심하라”하셨다.25일 조회석상에서 임원들에게 호(號)에 대하여 말씀하신 다음,“각자 자기 호를 지어보라. 내 그 기국(器局)을 보리라”하시므로 이튿날 박한경은 충광(忠光), 임규오는 요산(樂山), 박중하는 태헌(太), 유철규는 풍산(豊山), 신상철은 초표(楚豹), 김영하는 춘담(春潭), 오영식은 백일(白日), 오치국은 청파(靑波), 권동흠은 덕포(德飽)라고 지어 올렸다.도주님께서 감(鑑)하신 다음,“모두 부적(不適)하니 내가 사호(賜號) 하리라”하시며 박한경은 우당(牛堂), 신상철은 오미당(午未堂), 유철규는 청음(靑吟)으로 사호하셨다.다음날 임규오는 건월당(建月堂), 윤금현은 출재(出齋), 최해창은 출암(出庵)으로 사호하시고 며칠 후에 다시 박중하는 청농(靑農), 이윤섭은 청룡(靑龍), 김용화는 청헌(靑軒), 오치국은 청당(靑堂), 이용직은 청인(靑仁), 김영하는 청원자(靑源子), 이갑성은 토헌(土軒), 조호선은 청음(靑陰)으로 사호하시며,“그대들이 아직은 호를 쓸 때가 아니니 간직하고 있으면 후일 도호(道號)로 쓰이게 되리라”하셨다.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이렇게 하교하셨다.“오도의 수도법방은 곧 태극의 용(用)임을 각지(覺知)하라. 이는 개인의 도통성취만을 위함이 아니요 도단 곧 전체 도인을 위하고 나아가 군생광구(群生匡救)를 위한 법방이니라.……개인이 곧 전체며 전체가 곧 개인임을 깨닫고 합덕공부로 임하되 ‘나만’ 또는 ‘나부터’하는 생각은 버려야 하느니라”“그대들은 도통진경이 한 개인의 소원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영대는 소국(小局)이니 대도는 항상 전체 도인과 국가전체, 나아가서는 삼계 우주 전체를 광구하려는 대이상에 입각하여야 하느니라”“내가 설법한 공부법방은 전만고(前萬古) 후만고(後萬古)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일무이한 진법이므로 다른 날 누가 아무리 모방한다 하여도 그것은 가법(假法)일 뿐이니라”(이 하교 속에는 장차 어느 배신자들이 진법을 가장하여 다른 곳에서 시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경계하신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또 한 도인이 산에 들어가 수도에만 전념하려고 여쭈니,“도를 대강전을 떠나 진법 밖에서 구하려 하지 말라. 통에는 자통(自通)이 없느니 대강(大降)으로 일시에 열어주리라”하셨다.이해 연말에 임원들에게 장래의 도장 정비(整備)를 하교하시며,“적어도 1군단(軍團) 1,6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하며 그곳에서 비를 맞지 않고 대강전에 출입할 수 있는 지하도라도 내도록 하라”하셨다.도주님께서 매년 정월 망일(보름) 치성은 보수동 도정 영대에서 봉행하도록 하명하셨다.도주님께서는 항상 의관을 정제(整齊)하시고 용모를 단정, 공근(恭懃)하게 하시되, 공·사석을 불고하셨다. 홀로 앉으셨을 때도 누구와 대좌(對坐)하시듯 법좌하셨으며 어음(語音)은 용성(龍聲)처럼 우렁차시나 항상 평온하게 하셨다.한 번 보신 글이나 들으신 말은 망각하지 않으셨으며 더구나 한 번 배례를 받으신 도인은 비록 수 10년 후라도 기억하실 뿐 아니라 그 성명, 거소 등은 물론 그에게 내리신 훈교까지도 상기(想起)하셨다.무술(戊戌 : 1958)년 원조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의 세배를 받으신 다음 하교하시기를,“내가 비결(秘訣)이란 비자 한 자로 종내(終乃) 백발이 되었고 더욱이 금년으로 꼭 50년이니 감회가 깊도다. 이제 비자는 모두 체득(體得)하였으니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구천상제의 전서(典書)는 나의 비결이고 내 공부의 전서는 그대들의 비결이니라.……구천상제께서도 ‘문명(文命)은 후일 진경(眞經)으로 나오리라’하셨느니라”하셨다.또 이렇게 하교하셨다.“도를 나타냄에는 문자, 전서 밖에는 없지마는 나라마다 다르고 또 한정된 문자로 어찌 도의 본의(本義)를 다 표현하랴. 그리고 도를 전하고 가르침에는 언설(言說) 이외에 무엇이 있으랴마는 이 또한 진리의 외양(外樣) 뿐이니 문자와 언설의 이면(裡面)에 내재(內在)한 진리 즉 무극 시(是) 태극의 체용(體用)은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심법이라야 지각(知覺)하느니라”“숫자나 일자 맞추기에 손가락을 꼽지 말라. 인위조작(人爲造作)이 되어 혹세(惑世)의 근본이 되기 쉬우니라.……다만 천기(天機)에도 성사(成事)는 재인(在人)임을 알아야 하느니라”“그대들 가운데 누가 나를 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방자(放恣)한 소리니라. 용은 여의주(如意珠)를 입에 물었고 금산사 장륙금신(丈六金身)은 손에 들었으며 구천상제께서는 입술 속에 감추셨고 나도 여기 있느니라”하시며 혀를 들어 보이시니 혀 밑에 단주(丹珠)가 영롱(玲瓏)하였다.도주님께서 대강전 회관의 동쪽 구석과 수도사무실 옆 방에 공부석을 마련하시고 초8일 자시부터 당일 시학반의 회원 중에서 한 시간에 한 사람씩 교대로 들어가서 24절주와 28수주를 번갈아 연송(連誦)하며 공부하게 하시더니 5일 후에 거두셨다.지난 번 시학공부를 시작하실 때 말씀하신 시법공부를 이달 18일 갑신(甲申) 주일을 기하여 시행하게 하시니 그 반편성은 시학 제1반을 기준으로 책임자(박중하), 정급 2인, 진급 3인, 내수 12인, 외수 12인은 그 인원을 그대로 편성하고 부책임자와 회원은 그중에서 최해창 등 6인을 선발하여 편성하니 총원이 36인이었다.공부반의 명칭은 제1반부터 순차로 호칭하며 시학공부와 초강식을 마치지 못한 도인은 마친 도인으로 교체하여 편성하게 하셨다.시법반의 공부방법은 이러하였다. 먼저 책임자, 정급, 진급, 회원 각 1인을 조장(組長)으로 하고 내, 외수 각 1인씩을 조원(組員)으로 한 3인을 1조로 하여 12개조를 구성한다.각 조가 상·하오에 각각 한 시간씩 순차로 시법공부실에 들어가 중앙에 조장, 그 우측에 내수, 좌측에 외수가 횡렬(橫列)로 법좌하고 진법주를 합동으로 연송하며 공부한다.이때 공부반의 교체방법, 인원점검, 봉심행사, 기도방법, 시간교체, 대기방법 등은 모두 시학공부의 방법과 같고 유의사항도 또한 그러하다.다만 봉심행사에서는 시학반보다 먼저 봉행하고 나갈 때의 봉심행사에서는 영대행사를 마친 후 6렬로 우향하여 법단에 법배, 평배 각 4배를 올리고 법좌하여 봉축주 1회와 태을주, 기도주 각 4회를 공부일의 일진 음양에 맞추어 호선(互先)으로 봉송하는 일과 공부 전에 15분간 조원이 합동으로 송주방법을 연습하며 강식을 봉행하지 않는 일이 시학공부 방법과 다르게 하셨다.도주님께서 시법공부의 개시를 명하시고 이렇게 하교하셨다.“시법공부는 즉석강식(卽席降式)이니라. 시학을 마치고 시법만 하면 누구나 도통의 경지(境地)를 찾아 선경에 참여할 수 있으리니 이 곧 유일무이하고 외차무극(外此無極)한 태극의 진법임이니라”“우리 도의 수도공부는 천지운행의 태극진리에 따른 법방이니 어찌 유일무이한 진법이 아니랴. 이로써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며 사람도 5장 6부, 심령까지도 뜯어고쳐 후천선경에 참예할 수 있도록 전환시키는 공부니라. 선성(先聖)들이 태극진리를 후학영재(後學英才)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나 모두 편각(偏覺)이었을 뿐이므로 진정한 용사(用事)를 못하였느니라.”“그러므로 이 공부법방은 총체적으로는 천지 우주의 구성과 운행의 도수인 동시에 개별적으로는 반원 각자의 기도와 수련의 정진(精進)이니라. 그러므로 수본은 자기 지정석이 확정되어 있고 그 외에 보충석이 있으며 회원은 지정석이 아니더라도 자유로이 공부할 수 있으니 노약자(老弱者)와 불구자라도 한 번씩은 공부시키도록 하라”“너희는 시법공부의 신성함을 더욱 명심하라. 그 공부가 진법주 공부며 공부실도 내 법단과 상통함을 보라”“너희가 나를 따르게 된 삼생(三生)의 인연도 중요하나 수도 공부 또한 지중(至重)함을 명심하라”“사람이 죽으면 중천신(中天神) 또는 황천신(黃泉神)이 되나 시학과 시법을 마치면 죽더라도 선경의 신명이 되느니라”수도공부에 전념하기 위하여 학교공부를 중지하려는 대학생에게 하교하시기를,“너의 도를 위하는 마음이 가상하도다.……그러나 문자와 학문이 없으면 도의 진리에도 무식하게 되고…… 남을 위한 포덕과 교화의 공덕을 쌓는 데는 차질이 있으리라.…… 너의 학교공부도 도를 위하여 쓰면 정도(正道)가 되고 수도의 전제(前提)가 되리니 도심을 간직하고 더욱 열심히 면학(勉學)하는 것이 지금 너의 수도생활이니라”하시고,“학식이 있다고 자만하거나 명리(名利)에 현혹되어 부유(腐儒)가 됨은 금물이니 장교자패(將驕者敗)니라”하셨다.이달 23일에 김천방면 김순득(金順得) 포정이 도주님께 배알하니 포덕상황을 하문하신 다음,“포덕은 도인의 수효로 따지지 말고 성심자를 성심으로 찾으라. 도인 중에도 장차 태반이 배신자가 될 운도도 있되 그러나 끝까지 대강전을 받들어 수호하며 진법을 수행하는 성심자만 하더라도 도운은 흥하리라.……너희는 오직 성심을 다하라”하셨다.이어 임원들에게 이렇게 하교하셨다.“도를 믿다가 배도 배신하는 자는 대역죄(大逆罪)니 진리를 몰라 불신(不信)하거나 훼도(毁道)하는 자의 죄와 비교하면 족히 백천배(百千倍)가 되리라. 국가 민족의 반역자가 외국인이 아니고 평민(平民)이 아니듯 도에도 배도 배신자는 항상 도중에서 나고 상급자에 있기 쉬우니라”“대강을 대강전을 떠나 다른 곳에서 찾거나 도통을 내가 설법한 진법공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얻으려 한다면 그러한 생각만 가져도 벌써 배신 배도자가 됨이니 계지신지(戒之愼之)하라”“오늘날 도의 안팎에 사칭(詐稱)되는 진법도 많고 대두목(大頭目)도 많도다. 구천상제께서 무극주로서 물샐 틈 없이 짜놓으신 삼계의 도수를 모르는 인간들의 무지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도를 안다는 자들의 미혹(迷惑)을 나는 더욱 척연(然)하노라. 두목을 자처할 자는 금후에도 무수히 나올지나 모두 천벌을 면치 못하리라. 대두목은 이미 정하신 하나 뿐이니 진도(眞道) 진법의 진주가 어찌 둘일 수 있으랴”이해 정월 28일 갑오(甲午) 주일을 기하여 도주님께서 시학 제 4호의 합강식이 끝난 후 지금까지 시학공부를 마친 총4개호 60개반 중 제1호를 제외한 3개호의 45개반 정원 1,620인 전원이 제1회 봉강식(奉降式)을 봉행하게 하셨다.이날 전원을 소집하셔서 하교하시기를,“이 봉강식은 후일에 있을 대강식(大降式)의 일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봉행하는 예습(豫習)이니라. 그리고 제1호는 특수반(特殊班)이니 이 반의 대강식도 후일 함께 있으리라”하셨다.이어서,“이십팔수응천기(二十八宿應天氣) 세세연년억조송(歲歲年年億兆頌) 이십사절대진법(二十四節大眞法) 무릉도원서광명(武陵桃源曙光明) 무진무량여율령(無盡無量如律令) 사바아”라는 글을 외어 주시며 다음의 봉강문(奉降文)을 하달하셔서 봉강식의 의례절차를 몸소 지휘하셨다.“봉강문대강식은 생략(省略)하옵고 후일을 기하오나 날자나 기념하기 위하옵서 봉강 중이오니 봉강식으로 현알(見謁) 올리옵니다.금수대도술(禽獸大道術)천지대팔문(天地大八門)일월대어명(日月大御命)인간대적선(人間大積善)시호시호 귀신시호(時乎時乎 鬼神時乎)시구시구 조을시구(矢口矢口 鳥乙矢口)대강대강 해원신(大降大降 解寃神)”봉강식 의례절차는 먼저 참례원 전원이 도장 북문 바깥 광장에 모여(당일 합강식을 마친 도인도 모두 함께) 대기하다가 도주님께서 중궁에서 녹명지에 따라 호명하신 도인은 대강전으로 나아가 지정장소에 시립하였으나 제3반 부터는 편법(便法)으로 중궁에서 고수(手)가 전진고(前進)를 연타(連打)하면 일제히 빠른 걸음으로 대강전에 나아가 지정장소에서 영대를 향하여 시립하게 하시고 다음 회부터는 이 편법에 따라 수도사무원이 지휘하도록 하셨다.지정장소는 시학원, 정급은 중궁 영대 앞, 진급은 중궁 복도, 내수회원은 회관 북측, 외수회원은 회관 남측, 내수는 대동문 밖, 외수는 용화문 밖이며 시립이 끝나면 타고를 그친다.이때 제2호책은 중궁, 제3호책은 용화문 밖, 제4호책은 대동문 밖에 시립한 각 반원의 선두에 나아가 구령으로 일동을 정렬, 취석, 면수(首)시키고 중궁의 북소리에 맞추어 봉강문을 큰 소리로 곡조를 넣어 선독(先讀)하면 일동이 일제히 봉독하되 ‘금수대도술’부터 ‘해원신’까지는 3독한 다음 국궁(鞠躬) 예필(禮畢)한다.영대를 향한 봉독이 끝나면 호책들은 일동을 법단을 향하도록 우향(右向)시켜 다시 정렬, 취석, 면수시킨 다음 봉강문을 앞에서와 같이 봉독하고 국궁, 예필, 퇴전시킴으로써 봉강식을 마친다.봉강식 후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이렇게 하교하셨다.“대강식은 후일에 있느니라. 그때에는 도인 각자가 집이든 직장이든 어디에 있더라도 전진고(前進)가 울리면 대강전으로 몰려들어 문이 있는대로 올라오게 되리라. 그리하여 자기가 닦은 공을 자기 스스로의 혜각(慧覺)으로 알아서 자기자리를 찾아 서게 되므로 오늘과 같이 혼잡스럽지 않으리라” 하셨다.“연산인 김일부(金一夫)가 정역(正易)을 지어 선·후천(先後天) 교체를 설(說)하고 불천불역지리(不遷不易之理)를 논하며 상제조림(上帝照臨)을 지(識)하여 무극, 태극의 일부를 밝혔음은 장한 일이니라”“예출어정(禮出於情)이니 정의(情義)가 없으면 예도 없느니라”“불입중문(不立中門)이니 문 가운데 서서 남의 출입을 방해하지 말라. 신명의 발길에 차이리라” “중부도인은 생업(生業)을 위하여 시내에 나가더라도 잠은 감천에 와서 자야 하느니라”“신분(身分)과 팔자(八字)를 아무리 잘 타고 났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공부하지 않고 도통할 수 있으랴” 하셨다.하루는 또 이렇게 하교하셨다.“도는 곧 진리며 태극이니 우주의 자연법칙(自然法則)이며 인간의 당위법칙(當爲法則)이므로 3계의 유일한 법칙이니라”“천지행사왈도(天之行事曰道)요 인지행사왈교(人之行事曰敎)니 도는 각이통(覺而通)하고 교는 학이달이이(學而達而已)라. 그러므로 도를 통하면 무불통지(無不通知)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나 교는 달이부지(達而不知)하고 지이불능(知而不能)이니라. 도통을 예(例)하면 언어, 문자도 무불통지하고 무불능언(無不能言)하므로 만방(萬邦)의 언어, 문자를 통일할 수 있느니라”“법좌(法坐)하였을 때에는 대월상제(對越上帝)를 영시(永侍)하는 심법으로 취정회신(聚精會神)하여 단전(丹田)에 마련(磨鍊)하여야 하느니라”“성대(聲帶)로부터 하단전(下丹田)까지의 법리수(法里數) 9만리를 송주 공부로써 관통하여야 도체도골(道體道骨)이 되느니라”“공부정진할 때의 수 많은 마(魔)중에서 수마(睡魔)가 제일 무섭느니 수마를 이기지 못하면 실패하느니라”“후천세계는 청화명려(淸和明麗)한 유리(琉璃) 세계이므로 인간과 신명이 조화(調化)하여 상합상통(相合相通)하고 구별없이 살게 되느니라”“나의 공부는 50년 고행(苦行)이니 고생은 내가 하고 안락은 너희가 누리리라” 하셨다.

감천동 부산도장의 4대문도주님께서 도기 49(1957)년 12월 하명하심에 따라 지금까지 감천동 부산도장에 신축한 4대문.사진 ① 북문인 진경문, ② 동문인 합덕문, ③ 남문인 조화문, ④서문인 상생문.

시법 제1반 편성표도주님께서 도기50(1958)년 1월 1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신 시법공부반의 제1반 편성표.

 

 

 

 

 

 

 

 

 

 

 

 

 

 

工夫終畢과 化天

어느날은 임원들에게 이렇게 하교하셨다.“시속에 군부(君父)의 상(喪)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하고 모상(母喪)을 지붕지통(地崩之痛)이라 하며 처상(妻喪)을 고분(盆)지통이라 하나 천자의 상은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가 칼을 내주고 떠난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 분검(分劒)지통이라 하느니라”2월 초5일에 시학반의 편성을 최종 확정(부책임자 대신 회원 1인을 추가시킨 36인)하시고 이렇게 하교하셨다. “이로써 시학반의 완성이니라. 다시는 변경이 없으리니 시법반도 그러하니라. 이는 본시 진법이며 진법(陣法)이므로 군법(軍法)으로 시행함이니 3개호가 1군단(軍團)이고 1군단이라도 족하나 증원(增員)하려면 4군단이라야 되느니라”“지금은 공부인원이 넉넉하지마는 앞날에는 공부반원 구하기가 농촌에서 늦모 심을 때 인부 구하기보다 어려우리라. 그러므로 도인을 금싸라기 아끼듯 하여야 하느니라. 그러나 대강전만 남아도 나의 일은 다 되리니 낙심할 것은 없느니라”“앞으로 배도자의 기승(氣勝)하는 난동(亂動)과 사술자(詐術者)의 흔천(天) 동지(動地)하는 현혹에 의심나고 땀날 일이 있으리니 그때에도 너희는 궁단속(宮團束)과 법방수행을 잘 하라”“천마산 옥녀봉을 훌훌 날라 다니며 나를 따르라는 자가 있더라도 너희가 현혹되지 않고 도를 믿겠느냐. 도는 청(靑)처짐하게 이루어 지느니라”이달 15일 밤에 윤금현이 여쭈기를 “어느 비결에 ‘청실기주(靑失其柱) 향무일점(香無一點)’이라는 구절이 있사온데 그 뜻을 하교하옵소서”하니,“너희 스스로 알게 되리라” 하셨다.23일 조회시에 박한경에게,“너를 도전(都典)으로 임명하노라. 앞으로 도전은 종전과 같이 나의 시봉(侍奉)만 하는 직책이 아니라 도중사를 책임하여야 하리니 도무(道務)에 충실하도록 하라”하명하시고 오치국에게,“너를 도전에서 해임함은 과오가 있음이 아니라 직제(職制)를 변경한 연유니라”하셨다.이에 앞서 1년 전에 부전 이인호가 상고도 없이 산실(産室)에 출입한 부정(不淨)이 있음에도 도장에 올라와 근신(謹愼)하는 기색이 없으므로 해임하시고 후임을 공석으로 두시더니 이달 24일에 유철규를 임명하셨다.이날 밤 초경에 회룡재에서 학정 김영하와 도정 영대시봉 이창로가 소관업무 관계로 시좌(侍坐)하였을 때 숭도부인(崇道夫人)께서 도주님께,“한경의 위인이 나약(懦弱)하여 도중사 전반을 책임하는 도전으로는 미흡하지 않나이까”하고 사뢰니 말씀하시기를,“나도 그러함은 아오. 그러나 협의회가 있으니 부인은 과념(過念)하지 마시오. 상제님 앞에도 경석(京石)이 있지 않았소”하셨다.이튿날 낮에 도주님께서 시봉을 부르는 초인종을 울리시므로 박한경이 대령(待令)하니 말씀하시기를,“너는 나를 시봉만 하는 도전이 아니니 초인종이 울려도 네가 오지 말고 다른 시봉을 보내고 너는 임원들과 상의하여 도무를 처리하라”하셨다.25일 밤에 박중하가 도주님께 여쭈기를,“이번에 임명하신 도전의 직무는 종전의 시봉원 책임자와 어떻게 다르옵니까”하니,“전 도전은 시봉원 수임(首任)이 주무(主務)였으나 신 도전은 시봉원 수임 겸 도중 제원의 업무 전반을 책임지되 협의회의 의결에 따르면 되느니라”하셨다.박중하가 종전의 제도와는 상이(相異)한 말씀이므로 다시,“그러하오면 어떻게 되겠나이까”하니,“방촌지목(方寸之木)도 가사고어잠루(可使高於岑褸)니라”하셨다.박중하가 그 뜻을 더욱 깨닫지 못하겠음을 사뢰니,“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그 끝만을 보면 천마산 꼭대기에 세운 숟가락이 산보다 더 높아보일 수 있다는 뜻이니라. 모든 임원이 권한만 알고 의무를 모르면 범람하여 본말(本末)이 전도(轉倒)되기 쉬우니 너는 협의회 의장으로서 한경이 그리 되지 않도록 책선(責善 : 친구끼리 서로 착한일을 하도록 꾸짖고 권함)하라”하셨다.26일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도인(盜人 : 도둑)을 비방하랴 음인(淫人 : 음탕한 사람)을 매타(罵咤 : 욕하고 꾸짖음)하랴. 남의 말을 하지 마라. 마음 지키기가 죽기보다 어려우니 너희들 스스로의 심도(心盜 : 마음에서 우러나는 도둑질), 심음(心淫 : 마음에서 우러나는 음탕함)을 신명이 매타함을 두려워하라. 도인은 오직 무자기(無自欺 : 스스로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음)니라”하고 가르치셨다.또 이렇게 하교하셨다.“내 일찍이 구천상제의 명과 교를 받들어 무극대도의 진체(眞體)를 체득(體得)하고 태극진리를 진용(眞用)으로 설법하여 오늘에 이름은 오직 군생(群生)을 광구(匡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오늘에 가도(假道), 비도(非道)가 천하에 횡행하며 방자하게 세인을 혹(惑)하고 있으니 실로 가탄지경(可歎之境)이니라”“어찌 오늘 뿐이랴. 장래에는 무극의 진체와 태극의 진용을 봉대(奉戴)하면서도 도인의 수도와 미도인(未道人)의 포덕을 오도(誤導)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迷惑)하게 할 자가 있으리라. 이 실로 가체 가용자보다 더욱 이단난적(異端亂賊)이 되리니 너희는 오직 정도(正道)를 닦고 정법을 지켜라. 구천상제께서도 공명(孔明)과 마속(馬謖)의 고사(故事)를 들어 경계하셨느니라.” 하셨다.27일 낮에 도주님께서 박중하, 이윤섭에게,“너희들이 나의 주송소리를 유심히 들어보았느냐”하고 하문하셨다.그들은 평소에 도주님을 측근에서 시종하면서도 공부내용을 규시절청(窺視竊聽)함이 막중한 금기(禁忌)임을 명심 봉행하였으므로 “없나이다”하고 사뢰니,“주송은 항상 음률(音律)에 맞아야 하느니라”하셨다.이날 밤에 그들은 각기 마음 속으로 도주님께서 하문하심은 필시 들어보라고 하신 뜻으로 생각되었으나 서로 말하지는 못하고 각자 은밀히 법단 옆에 나아가 경청(傾聽)하니 그 고저청탁(高低淸濁)은 물론 유량청아(淸雅)하심이 마치 선악(仙樂)을 듣는 것과 같음에 심취(心醉) 되었다가 그 경청한 행동이 금기사항(禁忌事項)임을 깨닫고 고대 물러나왔다.이튿날 박중하가 이윤섭에게 지난 밤의 경청사실을 말하니 이윤섭도 그러하였음을 말하고 함께 감복하였다. 28일에 도주님께서 지난 해 11월 18일 시학공부 시작할 때 설석하셨던 백일공부를 마치신 다음 상급 임원들을 중궁에 시좌(侍坐)시키시고 다음과 같이 명교(命敎)하셨다.“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볼 도수는 모두 마쳤으니 이로써 종필(終畢)이니라. 앞으로 남은 일은 오직 너희들이 나의 50년 공부 종필로써 짜놓은 진법의 법방을 수행하여 대도를 성취함에 있느니라”“내가 이제 구천상제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풀었다 함을 너희들이 바로 요지(了知 : 깨달아서 앎)하느냐. 때가 이르면 나도 인신(人身)을 해탈(解脫)하고 옥경(玉京)으로 돌아가리니 진실로 이 말을 헛으로 듣지 말지니라. 이미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요 운래청룡시사월(運來靑龍是四月)이니라”“나의 공부종필의 참뜻을 다시 한 번 말하리라. 구천 무극주께서 친히 9년공사로써 도수를 짜놓기만 하셨으니 그것은 체요 원리니라. 나는 도로써 용하여 만수도인을 만들어 기르고 무극, 태극의 창도(創道)를 함이니 이 실로 무극의 정(定)에서 생겨난 태극진리의 기동도수니라. 그러므로 나의 공부는 도를 어떻게 믿고, 배우고, 닦고, 행하라는 진법이니 솥이 있어야 시루를 쓰는지라. 이로써 증정지도(甑鼎之道)와 증정지덕(德)과 증정지교(敎)와 증정지학(學)과 증정지수(修)와 증정지화(化)가 성취됨이니라”“나의 공부는 곧 구천상제의 도수와 음양이며 동정(動定)이며 본말(本末)이며 전후(前後)며 백중(伯仲)이니라. 음이 있고 양이 있음으로써 태극이 기동함이니 이로써 종필이니라” “너희들이 나를 보고 나의 법방으로 도를 알고 닦음은 실로 다행한 일이나 후세에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도인들의 신심은 더욱 커야 하리라. 나의 인신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너희와 길이 함께 있으며 또 도와 함께 있으니 도인의 심령신대(心靈神臺) 가운데 나도 항상 함께 하고 도도 함께 함이니라. 상제께서 ‘내가 너희 앞에 있은들 알며 뒤에 있은들 알랴’ 하심은 나의 일이니라”“내가 명한 수도법방은 공부종필의 총결정(總結晶)이며 전무후무한 삼계의 진법이니 유구(悠久) 5만년 도인의 규구(規矩)라. 수신(修身), 수도, 영통(靈通), 도통이 이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느니라”이날밤 자정에 정급 신경희(申景熙)로 부터 ‘도주님께서 갑자기 미령(靡寧)하시다’는 전갈(傳喝)을 받은 상급임원들이 황망히 법단에 올라가 뵈니 환후가 위중(危重)하시므로 옥체를 회룡재 정침(正寢)으로 옮겨 모시고 밤새워 시탕(侍湯)하였으나 차효가 없으셨다.날이 밝기를 기다려 도중가족들에게 전편(專便) 또는 서신으로 알리는 한편 최근욱(崔根郁), 김재복(金載福)등 의사를 불러 양방(洋方), 한방(韓方)의 약물, 주사, 침구 등 지극성심으로 치료하였으나 어환(御患)은 여전하셨다.도주님께서 치료를 받으신지 7일째인 3월 초5일 인시(寅時) 경에 몸소 기동하셔서 산회당(山會堂)으로 옮겨 누우셔서 가족과 임원들이 올리는 약과 미음을 드시지 않으시며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분부하셨다.“이제까지 7일간이나 너희들이 나의 병구원을 할만큼 하였느니라. 이는 지금껏 너희들의 원을 풀어주려고 약과 침을 주는대로 받았으나 약은 쓰고 침은 아플 따름이니 이제부터 의약을 전연 쓰지 말라”도주님의 간곡한 분부는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나의 갈 길은 이미 정하여 있으니 오직 구천상제께서 짜놓으신 ‘여아동거’(與我同居)의 도수니라, 내가 일찍이 명교를 받든대로 공부를 종필하고 천계(天界)에 올라 구천상제께 뵈오리니 상제님과 나는 도로써 일체임이니라. 그러한 원시반본(原始返本)의 대도수를 모르고 너희들이 인간의 정으로 걱정함이 안타까우니라”가족과 임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다가 여러가지 의론 끝에 천식(喘息)에 특효약이라는 백복령(白茯笭)과 추석(秋石)의 가루가 맛도 냄새도 빛도 없음을 이용하여 간간이 드시는 냉수에 몰래 타서 올렸으나 이미 아신 듯,“이도 또한 약이니라”하시며 드시지 않으시고 거듭 올리니 냉수조차 물리셨다.이날 낮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구천상제님께서는 화천 직전에 창생의 질병을 대속(代贖)하셨으나 나는 이미 50년 고행으로 대속하여 후천 창생으로 하여금 안락을 누리게 하였노라”하셨다.이튿날 묘시(卯時)경에 환후가 쾌차(快差)하신 듯 의연(毅然)히 일어나 앉으셔서 침구조차 치우게 하시며 소세(梳洗)하신 다음 새옷을 갈아입으시므로 가족과 임원들이 기뻐하면서 수라를 올렸으나 역시 물리셨다.또 진시(辰時)경에는 박한경과 김용화를 존전(尊前)으로 부르셔서 예금통장, 인장, 패물상자는 한경에게, 창화증권(倉貨證券 : 전남 강진 어느 창고주가 벼 700석을 보관하고 발행한 증서)은 용화에게 각각 내려주시며,“이는 도중의 공유(公有)니 너희들이 각기 잘 보관하였다가 후일 공의(公議)에 따라 도중사(道中事)에 쓰도록 하라” 하셨다.사시(巳時)경에 상급임원을 명소(命召)하시므로 모두 나아가 정사 대청에 부복하고 도중가족은 산회당 실내에 시좌하니 대강전의 영대문을 비롯한 도장의 모든 문을 열어놓게 하시고 먼저 장자 청봉(靑峰)에게 하명하시기를,“나의 도는 요·순·우 상전지법(堯舜禹相傳之法)이니 너는 위선봉솔(爲先奉率)에 전념하고 도중사에는 일체 관여하지 말라”하셔서 다짐을 받으셨다. 이어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50년 공부 종필이며 지기금지 4월래가 금년이니라. 나는 가노니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나의 법방과 사업을 푼각(分刻)도 어김 없이 잘 행하여 나아가되 일심으로 믿고 닦아서 다시 만나자”하셔서 또한 일동의 다짐을 받으신 다음 와석(臥席)하셨다.잠시 후에 와석하신 채 손을 좌우로 흔드셔서 내쫓듯 하시며,“도적놈 내쫓아라”하시고 이를 여러번 반복하시므로 임원들이, “여기에는 도적이 없나이다”하였으나,“아니다. 있느니라”하시며 또 반복하셨다.이때 임원들 뒷쪽에서 김재복과 이인호 등이 물러가므로 존전(尊前)에 부복했던 박한경은,“이제 없나이다”하고 숭도부인께서는,“만수도인을 어이 하시려고 이러시나이까”하시니 급히 일어나 앉으셔서 정색하시며,“도인들은 엄려없소. 내가 해놓은대로 하면 되오”하셨다.이때 도주님께서는 노기(怒氣)로 어안(御眼)에서 화광(火光)을 발하시며 박한경의 머리채를 잡아 몇 차례 흔드시므로 숭도부인께서 만류하시니 어수를 내리시고 다시,“도적놈 도적놈”을 반복하시며 와석(臥席)하셨다.이날 하오 1시경에 도주님께서 화천하려 하시므로 시측(侍側) 한 가족과 임원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청봉이 급히 대석(臺石)에 내려가 오르손 약지(藥指 : 무명지)를 돌로 찧어서(이때 상한 뼈는 끝내 접골(接骨)되지 않음) 선혈(鮮血)을 도주님 어구(御口)에 드리우니 호흡을 가다듬으시고,“도연(徒然)한 일을 하지 말라. 구천(九天) 알현(謁見)의 시각만 늦어진다”하셨다.이로부터 30분 후에 “감나무골”을 분부하시며 다시 화천하려 하시므로 비록 금하신 일이나 김재복이 창황(蒼慌)중에 최후의 구방(救方)으로 준비하여 숨기고 있던 강심제(强心劑)주사를 놓아드리려 하니 도주님께서 어수로 주사기를 달라고 신호하시므로 부득이 손바닥에 올려드리자 그대로 방 바닥에 엎으시니 주사기가 파손되었다.이때 용성(龍聲)으로 “대강(大降)대강”하시는 옥음(玉音)과 함께 기식을 거두시고 화천(化天)하시니 이날이 도력기원 50년 무술(戊戌 : 1958)년 3월 초6일(양력 4월 24일)이고 일진은 신미(辛未), 시각은 을미(乙未)시니 하오 1시 37분이며 도주님의 인세향수(人世享壽)는 64년이셨다.화천 당시에 도중 가족 전원과 임규오, 오치국, 박중하, 김명구, 이윤섭, 박한경, 김용화, 유철규, 신상철, 김영하, 이갑성, 김해구 외 10여인의 임원이 시측(侍側) 임종(臨終)하였다.도주님께서 화천하시자 청천백일(靑天白日)에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나고 정사와 대강전으로부터 5색 광채가 충천하였다.이때 시내에 있던 중부 도인들은 산너머(감천)으로부터 비쳐 오르는 광채를 화재의 빛으로 알고 화급히 감천으로 돌아오고 부산 소방서에서는 소방차 2대를 감천 동구까지 긴급 출동시켰다.도본부에서는 도주님 화천을 도 내외에 알리고 전체 도인의 3년 도상(道喪)을 공포하니 애통하는 도인들의 호곡성(號哭聲)이 감천 동학(洞壑)에서 천마, 옥녀에 메아리쳤다.이날 화천이 공포되자 삽시에 몇 만 마리의 참새떼가 구름처럼 날아들어 도장 상공과 천마산, 옥녀봉을 선회(旋回)하다가 해질 무렵에 흩어지더니 그 후 매년 이날을 전후하여 한 번씩 이와같이 하였다.능지는 도주님께서 몇달 전에 임규오 등에게 암시(暗示)하시고 화천 직전에 ‘감나무골’을 분부하심에 따라 정한 천마산 서쪽 기슭 감나무골의 간좌곤향(艮坐坤向)이며 인산대전(因山大典)은 3월 20일에 15일 도장(道葬)으로 모셨다.인봉(因封)을 마친지 3일 후인 22일 낮에 능소 봉분(封墳)의 동반부(東半部)가 갈라져서 몇 자나 가라앉았으므로 도중이 경악(驚愕)하고 당일로 수축하였다.도중에서는 능호(陵號)를 정산릉(鼎山陵)으로 봉대(奉戴)하고 그 경내 동측에 시릉각(侍陵閣)을 지어 능시봉(陵侍奉)을 두고 수호토록 하였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도중의 의례절차(儀禮節次)에 따라 능향(陵享)을 봉행하고 있다.

천마산 정산릉과 시릉각 도주님께서 도기 50(1958)년 3월 초 6일 미시에 화천하시며 유명하신 어의을 받들어 감천동 천마산 서쪽 기슭 감나무골에 간좌 곤향으로 그달 20일 인산을 모신 정산릉 ①과 능소 동쪽 50m 거리에 있는 시릉각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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