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184〉
■ 송신 送信 (신동집, 1924~2003)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1973년 시집 <송신> (학문사)
*한 이틀 적잖은 비가 내리더니 어제 아침부터는 초겨울처럼 급격하게 추워졌습니다. 며칠 전 토요일이 마침, 이슬이 서리로 바뀌게 된다는 ‘한로(寒露)’이기도 했습니다.
농사는 아니더라도 정원에서 꽃을 가꾸며 자연과 살다 보니 가끔 음력의 24절기를 다시 배우게 됩니다. 농촌에서 특히, 꽃을 가꾸는 분들이 주목하게 되는 절기가,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處暑)’입니다. 처서를 전후해서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고, 특히 풀과 나무들이 성장이 멈추는 시기라 잡초와도 타협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詩는 한로가 지난 시월의 어느 가을날, 돌담 사이에서 구슬피 우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통해 인간의 유한한 삶에 대해 성찰하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귀뚜라미를 발신자로, 자신을 수신자로 설정해서 바라보는 것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이 詩에서는 차가운 한로의 바람과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가을이 깊어졌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귀뚜라미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시인에게, 가을이 곧 끝나간다는 신호뿐 아니라 귀뚜라미 자신의 생도 이제 끝나감을 말해주는 것처럼 들려옵니다. 작은 인기척에도 금방 소리를 그치고 사라지던 이놈이, 지금은 더 이상 자기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뚜라미는 그렇게, 계절이 변하고 가을도 지나 겨울로 가게 되면 모든 존재들이 쇠잔해지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시인 자신에게도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늙어가는 당신의 삶도 곧 끝날 것이라고 말이죠.
시월의 가을은 점점 깊어지며 하늘은 어쩔 수 없는(바이 없는) 청자색의 심연을 저렇게 처연하게 아름다운 빛으로 드러내고 있건만은. Choi.
첫댓글 한로도 지났으니 이제는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오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