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평창 동계 올림픽 기간이라서 평소에 없던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한껏 부풀어 오른 나다. 누군가 ‘요강 단지’라고 불렀다는 ‘컬링’에 특별히 재미를 느낀다. 규칙이나 득점 하는 방법도 모르지만 자꾸 보니 규칙이나 득점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라보고 내가 즐기면 되는 거였다.
오늘은 한국이 메달 사냥을 한단다. 그러나 밤에 한다고 했다. 초저녁부터 하품을 끼억끼억 해대었을 때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함을 감지했다. 거실에서 아버지와 경기를 관람하다가 잠을 자기 위하여 내 방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나는 졸려서 보지 못하고 아버지만 관람을 하는 것이 내심 억울하다는 듯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경기 관람을 마저 하지 못하는 것은 잠이 많은 내 탓인데도…….
“아부지! 저는 졸려서 들어갑니다. 그런디 거실에서 계속 소리가 나면 제가 자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그러이께 볼륨은 최소로 해주시던지, 아니면 일 찍 들어가 주세용.”
안그래도 난청이라 보청기를 착용할까 말까 하는 아버지에게 가장 꼬맹이인 내가 무슨 상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큰소리친 것이다.
방에 들어와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많이 심했다 싶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하였건만……. 나는 다리가 불편한 나 밖에 몰랐다. 나는 다리가 불편하고 눈이 하나가 없다. 아버지도 연세가 지긋하셔서 귀가 어둡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아버지의 고충을 생각하고 챙겨드렸어야 했건만 이 딸은 그 고충을 이용하는 못된 딸이었으니 두 손 두 발 들 만하다. 그래도 아버지라서 천만다행이다 싶은 것이다. 만일 남이었다면 나라는 사람은 학교 교육은 둘째 치고 가정 교육의 ‘가’자도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 찍혀 부모님 욕 먹일 뻔 했으니…….
‘역지사지(易地思之)’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시골 장터에서 할아버지가 강아지들을 팔고 있었다. 흰둥이, 껌둥이, 누렁이, 점박이 등 각자의 생긴 대로 이름을 가진 포동포동한 강아지들이 꼬물꼬물 움직이며 까맣고 동그란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강아지들을 한참 구경하고 있던 한 여학생이 흰둥이 한 마리를 들어 올리며 이 강아지를 사고 싶다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아이고, 그 녀석이 왜 여기 끼어있지? 그 강아지는 다리가 아픈 애라서 팔 지 않고 내가 키우려고 해. 여기에 튼튼한 다른 강아지를 천천히 골라보 렴.”
하지만 소녀는 다리가 아픈 이 하얀 강아지를 사고 싶다고 계속 말했다.
“그래? 학생 그럼 돈은 안 받을 테니 그냥 데려가. 아픈 녀석 키우기 힘들 테지만 잘 보살펴 주고.”
인심 좋게 강아지를 준 할아버지는 강아지를 안고 걸어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학생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던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의 한자 성어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좀 더 사람 냄새 나는 세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이번 일을 계기로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한 나의 행동과 말을 반성해 보았다.
멀리 갈 것 없었다. 어제 낮이었다. 어머니는 모임에 나가시고 아버지와 둘이서 점심을 먹었다. 밥, 국, 반찬 서너 가지를 준비하고 가신 별명 값 하는 전준비 어머니다.
아버지는 밥을 통째로 국에 말아 잡수셨다. 나는 그냥 마른 밥과 반찬과 국을 번갈아 떠먹었다. 내 밥그릇에 밥이 한 숟가락 분량이 남았는데 더 못 먹겠는 거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여쭈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남은 밥을 아버지 국에다가 띄우며 말했다.
“아버지! 더 못 먹겠네요. 요거 아버지 드세요.”
화들짝 놀라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도 밥이 좀 많은데 니는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이러는 기 어딨노?”
어쩔 줄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얄밉게 밖으로 얼른 나왔다.
이도 버릇없이 나밖에 모르는 행동이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웃어른에게 공손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동방예의지국’이었던 “대한민국”이었다.
지금은 우리 나라에서는 위아래, 예절을 찾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
지금은 생각지도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겉으로 보이는 면을 중시하니 공부를 잘 하여 학벌이 좋아야 한다. 외모도 걸맞아야 하니 의료 과 가운데서도 ‘성형외과’가 가장 성행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늘상 대면하게 되는 텔레비전에서 서민들이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도 시쳇말로 맛이 다 갔다. 원초적이고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니라 막장이다. 시청자들의 이성에 의거하지 아니하고 감성에 호소하니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정을 보면 옳은 가정이 눈 뜯어놓고 봐도 하나도 없다. 어른들은 재미로 본다고 치더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보면 미래에 과연 이들은 올바른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심심한 걱정도 든다.
예의를 모르고 집에서 지가 상전인 체 하는 나도 정신 차리고 아버지,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할 것이다. 곁에 없을 때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해야지 싶다.
그와 더불어 우리 사회도 저 멀리 내뺀 ‘예의’와 ‘인간성’을 찾아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