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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우리가 향하는 두 상반된 죽음의 방향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곧 섬김의 방법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이신 당신이 그들을 씻어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4)
겸손해지려면 먼저 주님이며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수력발전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낮게 흐르는 물은 아무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높이 있는 물은 위치에너지를 가집니다. 그것이 낮아질 때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이것이 겸손이고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오늘 두 제자와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고 하면서도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이 가는 죽음의 방향은 들어 높임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지금 낮아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가는데 어떤 사람은 죽음을 통해 다른 이들을 낮추고 자신을 들어 높이고 어떤 사람은 죽음을 통해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들어높입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은 오래된 자동차 한 대였습니다. 월급의 90%는 기부하고 경제성장률을 상승시켰고 극빈 계층을 위해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의 삶은 죽음입니다.
돈이 없으면 죽고 낮아지면 죽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시민들을 들어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에 가깝습니다.
이 겸손한 죽음은 오직 대통령이 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면서 겸손한 것은 그저 높아지기 위한 비굴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타볼산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높아지셔야 했고 우리도 성체성사로 높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렛대를 이용한 도구에서 다른 것을 들어 높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혼자 떨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 높아졌다 스스로 낮아짐을 선택한다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산성당에 있을 때 김완식 요셉 형제님을 초청하여 사순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무당이었는데 한 천주교 집안에 굿을 해 주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 아이가 천재여서 어린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고 대기업에서 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던 중 정신이상이 되어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는 아이를 사제로 봉헌하기로 했었지만, 아이의 재능 덕택으로
집이 부유해지다 보니 부모님은 옛 약속을 잊고 냉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 명의 대무당이 모여 먼저 자기 집에서 준비 굿을 하였는데 이상하게 그 집으로 보내는 신마다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셋은 그 집에 가서 각자 7일씩 굿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김완식 보살이 7일 동안 굿을 하였지만 어떠한 신도 내리지 않아 코피만 쏟으며 쓰러졌고 나머지 두 무당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대나무를 잡고 굿을 하는데 그 나무가 흔들거리고 방울이 울리더니 이상한 영의 기운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고 김 보살은 몸을 비틀고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혼절하여 버렸습니다.
그 집은 성소자가 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 집을 성령님이 보호하고 계셨고 그래서 어떤 악령도 얼씬거리지 못했고 무당까지도 그렇게 쓰러뜨리셨던 것입니다.
한 번 성령의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니 몇 달 동안은 신들이 자신 안에도 들어오지 않아서 그냥 집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몇 년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김 보살이 요셉으로 세례를 받고 남양성모성지에서 복사를 서고 있는데 미사 후에 한 예수회 신부가 자신을 부르더니 “혹시 김 보살 아니세요?” 하더랍니다. 그분이 바로 자신이 굿을 해 주었던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성당에 다니신 부모님 덕택에 병이 낫게 되었고 나중에 예수회에 들어가 그 좋은 머리로 8개 국어를 하며 성경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은 분명 들어 높임을 받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제가 되어 더 높아지려고 한다면 그건 분명히 순교가 아닌 자살로 가는 삶입니다.
예수회의 신부가 된 분은 자신이 사제가 된 것이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임을 잘 알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더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바쳐 다른 이들을 높이려는 순교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시던 죽음의 방향이었습니다.
낮아져서 높아질 일만 남은 사람이 아닌, 높아져서 낮아질 일만 남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께서 예수님께 다가와 두 아들에 대한 인사청탁을 하는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그리도 오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과 흡사한지, 혼자서 막 웃게 됩니다.
가끔씩 수도원 문을 두드리는 과정에서도 코믹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가끔씩 여성분들이 성소에 대한 문의 전화를 합니다.
저희는 즉시 정확한 안내를 해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남자 수도원이어서 남성들만 성소 모임이 오실 수 있습니다.”
“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 아들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입회 조건이나 절차는 어떻게 되나요?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몇년이나 걸리나요? 해외 유학도 보내주시나요?”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습니다. 더 칼같이 선을 그을수 밖에요. “어머님, 죄송합니다만, 아드님 본인보고 직접 전화하라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눈을 떠도 아들, 눈을 감아도 아들, 그저 아들 잘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들의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야고보와 요한 두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오롯한 일편단심 역시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두 사도의 어머니는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만간 건설하실 왕국은 지상 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어머니와 두 사도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수요일 강론>
(2024. 2. 28. 수)(마태 20,17-28)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0-23)”
이 이야기는, 사도들의 명예욕이나 이해력 부족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의 이야기는 그 가르침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한 상황, 즉 시청각 보조교재 같은 것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사도들의 어머니의 등장에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두 사도가 직접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0,35).
두 사도의 요청은, 앞의 19장 28절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예수님께서 먼저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두 사도는 ‘기왕이면’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만 따로 데리고 가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즉 그 세 제자는 열두 사도 가운데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자기들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왜 베드로 사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 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임명하신 일로 생각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든 두 사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한 것은 ‘명예욕’인데, 다른 사람들보다 두 사도가 더 명예욕이 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부활 전까지는 사도들도 ‘보통 사람들’이었는데,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 강림 후에는 ‘특별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기 전에는 세속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속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욱더 특별한 사람으로 성숙해집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이라는 말씀은, 앞의 16장 24절에 있는 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 자신을 버리고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또는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두 사도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만 보면, 두 사도의 요청에 대한 승낙도 아니고 거절도 아니지만, 두 사도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서 결국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당신에게 권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최측근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황이나 주교직을 맡았다고 해서, 또는 성직자나 수도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세례를 받고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그 자리를 얻고 싶다면 끝까지 충실하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청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실제로 그런 자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도들이 앉는 자리에 높고 낮은 차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 사이에
어떤 서열이나 계급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가 되고, 모든 사람이 다 ‘가장 높은 사람’이 됩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게 되기 때문입니다(묵시 22,3).>
<다른 열 제자가 두 사도의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긴 것은(24절), 두 사도의 요청이 다른 사도들을 자기들보다 낮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도들이 불쾌하게 여긴 것은 속이 좁아서도 아니고, 명예욕 때문도 아니고, 자존심 때문인데, 그런 상황에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특별한 사람들’로 변화되고 성숙해져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나라에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줄 일도, 상처를 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