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사도 18,9-18; 요한 16,20-23 / 부활 제6주간 금요일; 2024.5.10.
오늘 복음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근심과 부활의 기쁨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날이 밝으면 체포되시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스승에 대한 애통함으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는 대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하여 매일의 복음 말씀에 맛들임으로써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부활의 기쁨을 놓치지 말 것을 당부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복음을 전하던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환시를 통해 사도 바오로에게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사도 18,9-10) 그 당시 코린토는 그리스의 항구도시로서 매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지중해문화권을 제패한 세력은 로마제국이었으나 물산과 인구는 동방에 몰려 있었으므로 동방의 풍부한 물산이 지중해에서 가장 큰 항구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모였다가, 로마로 실어갈 때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 운행하던 비동력선의 특성상 노 젓는 일꾼들이 쉬어야 했던 길목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중간 기항지로서 코린토에 들러야 했고 그 기회에 물자 교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아네테보다도 더 풍요로운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자 교역으로 경제가 번영했던 만큼 도덕적 타락상도 심했고, 이는 당시 고대 그리스에 만연되어 있었던 다신교의 우상숭배 풍습에 따라 행해졌습니다.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던 로마제국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재위 기원전 10~54년)가 로마에서 유다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칙령을 발표하여 로마에 살던 유다인들을 추방했고(49년, 사도 18,2) 이에 따라 로마에 살던 2만 5천명의 유다인도 코린토 등지로 이주했는데, 이 유다인들도 상당수가 코린토인들의 타락상에 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신교 우상숭배 풍습에 물든 코린토에서 선교함에 있어서 바오로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에페소에서 박해를 받아 돌감옥에 갇혀 있던 처지에서도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 소상하게 적혀 있습니다. 교우들 사이의 분열(1코린 1,10-17; 3,4-5), 불륜(1코린 5장; 6,12-20), 교우들끼리의 송사(1코린 1-11), 우상 숭배 풍습(1코린 8장) 등 심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눈물을 흘리며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내면서, 자신이 사도요 선교사로 겪어야 했던 어려움까지 토로하면서 회개하고 화해하며 신앙에 정진하라고 설득해 마지 않았습니다(2코린 6,3-13).
이런 비상한 노력은 여러 가지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바오로에게 예수님께서 그 도시에 당신 백성이 많으니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격려하셨던 바에 따른 것이었고, 그는 끝내 회개하고 돌아온 교우들 덕분에 코린토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사도 18,8). 그리고 이러한 선교 성과는 코린토를 비롯하여 그리스 전역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였고, 이 복음은 로마를 거쳐 온 유럽을 그리스도교화시키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서방 복음화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무릇 복음화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증언이라는 가치가 실현된 결과입니다. 바오로와 그 일행이 신앙과 증언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치루어야 했던 희생은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끝내 생명까지 바쳐야 했을 만큼 컸습니다. 이 희생의 과녁 정중앙은 신성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까지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에 대해 무지하던 그리스인들에게는 창조주 하느님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쳐 줌으로써 거짓 신과 참된 신을 식별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계시된 신앙을 물려받았으나 편협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유다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음을 증언함으로써 그분의 신성을 증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에게 행한 영의 식별 작업이나 유다인들에게 행한 신성의 증언 활동은 말을 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고스란히 걸으면서 그 부활 증언의 진정성을 입증해 보여야 했습니다.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1코린 1,18)이라고 선언한 것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보편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 더 나아가서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겪어야 했던 이 십자가의 길이 한국 초대교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이벽과 이승훈, 권철신과 권일신, 정약전과 정약종과 정약용 등 한국교회의 초기 사도들과 이를 따른 신자들 역시 무신론적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눈이 가린 유림들과 조정으로부터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 즉 임금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모함을 받았지만, 자신들은 대군대부(大君大父), 즉 임금 중의 임금이시오 큰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생명을 바쳐 증언하였습니다. 또한 온갖 조상을 신으로 섬기는 무속과 역술 행위를 업으로 삼던 이들이 천주교는 서양 종교라서 믿을 수 없다고 배척한 데 대해서도, 하늘에 뜨는 해는 동양에서 보건 서양에서 보건 똑같은 태양이며 어디서나 귀한 쇠붙이로 취급받는 금처럼 진리는 그 자체의 성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사람들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깨우쳐주는 한편, 무속인들이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섬기는 조상신에 대해서도 조상은 공경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일 수 없으며, 단지 그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숭배해 온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을 올바로 계승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한국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수행한 영적 식별 작업이었으며 올바른 신성을 증거하려던 노력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영의 식별과 신성의 증거라는 활동은 우리가 신앙 선조들을 이어 받아서 계속해야 하는 선교 활동이자 사도직 활동입니다. 이를 위해서 바오로를 비롯하여 보편 초대교회 신자들이 바친 희생은 로마의 복음화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결실로 인한 기쁨이 그간의 희생으로 인한 고통을 능가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한국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의 희생 그리고 우리가 물려받을 이 사도직 활동과 선교 활동을 통해서 민족 복음화라는 결실을 맺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복음화가 유럽 대륙 복음화의 발판이 되었듯이 민족의 복음화는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어줄 것입니다. 또는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이 두 교황의 충언에 의하면, 민족의 복음화는 한반도의 평화와 함께 우리 교회가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나설 때 덤으로 주어질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민족의 복음화나 아시아의 복음화라는 목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복음화의 희망을 내다보면서 영을 식별하고 신성을 증거하는 활동을 멈추지 말고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에게 내려주신 격려의 말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활약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한국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대희년을 앞두고 열린 대륙별 주교 시노드 가운데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지난 2천 년의 복음화 역사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전망하였습니다: “제1천년기에는 십자가가 유럽 땅에 심어지고, 제2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심어졌던 것처럼, 제3천년기에는 광대하고 생동적인 아시아에서 신앙의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그리스도교 제3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갈 것입니다.”(교황권고, ‘아시아교회’, 1항)
2천 년 전 사도 바오로가 활약하던 고대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교회가 출현한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고, 당시 문명의 중심이 로마였으며,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영토 안에서 다신교의 우상숭배 풍습이 만연하고 있었던데다가 무력통치에 의한 죄악이 극성을 부렸으므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예수님의 복음을 서진하여 전해야 했던 불가피했던 사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던 아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대륙이고, 세계 인구의 3분의 2 가량이 거주하고 있는 땅이며, 고대 문화와 종교가 발생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아시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착취로 억압받고 있습니다. 2천년 전 그리스와 로마, 유럽 등지에서 세상의 죄악이 극성을 떨치고 있었듯이, 오늘날의 아시아에서도 서 복음은 절실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16세기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처음으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한 이래, 아시아의 복음화는 지지부진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시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서양의 성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교회 또한 제국주의 정책으로 식민지를 정복하고 약탈하던 서양 세력의 배후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서양 종교로 간주되어 있으며, 가톨릭 신자 비율은 고작 3% 미만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나마 인구 대부분(약 8천만 여 명)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을 제외하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떨어집니다.
그리하여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주교들과 함께 아시아의 복음화라는 거대한 사명에 직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이시기도 하신 분, 모든 제자의 모범이시며 복음화의 빛나는 별이신 마리아께 그리스도교 제3천년기의 문턱에서 아시아 교회를 맡겨드리는 기도를 남겼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딸이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 아드님께서 아시아 땅에 심으신 교회를 자비로이 돌아보소서. 또한 교회가 아시아에서 당신 아드님의 봉사와 사랑의 사명을 지속하도록 그 모범과 길잡이가 되어 주소서. … 아시아인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 자녀들인 저희를 위하여 이제나 언제나 빌어주소서!”(아시아교회, 51항)
교우 여러분, 일찍이 2천 년 전에 코린토를 시작으로 그리스와 유럽에 복음을 전하려던 바오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여라.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사도 18,10)고 말씀하셨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요한16,2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시아에는 그리스도인이 적지만 복음을 들어야 할 하느님 백성은 무수히 많습니다.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 근심을 우리가 기쁨으로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