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여기를 찾습니다.
여기 대문창 영상들이 확 바뀌었군요.
벌써 가을인가 봅니다.
자연의 시계는 올해도 어김없이 대문창의 영상들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카메라맨들을 즐겁게 하군요.
아래 글은 가톨릭 서울대교구 홈페이지 [굿뉴스/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
“환경위기 시계”
(《서울주보》2008/09/28, 3쪽, 제1648호)
시계의 주기성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낱말들은 우리주변에 늘여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멀쩡하게 돌고 있는 태양계의 위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요동쳐 지구가 한 행성과 충돌하면서 인류가 멸망할 것이란 “종말론”은 일부 종교인들이 빈번히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논리입니다.
“지구 종말”이란 우리 입에 자주 올릴 낱말이 아님에도 그들에겐 종말의 뜻을 모르면서 쉽게 말합니다. 게다가 “시계”를 덧붙여 쓰는 것도 우습긴 마찬가집니다. 시계란 일정한 주기성을 가집니다. 그 주기성이 흩어지면 시계로써의 기능은 쓸모가 없지요. “지구 종말 시계”니, “환경위기 시계”니 하는 낱말들은 시계의 주기성보다는 그것의 정밀한 시간 개념을 빗대어 그런 수치들에 공포심을 감성적으로 더 깊이 자극시킬 효과를 내지요.
시계의 생명은 끊임없는 연속성이 주된 기능입니다. 연속성을 잃으면 시계로서의 수명은 다한 겁니다. “지구 종말 시계” 그리고 “환경 위기 시계” 둘은 한 전광판에 고정시켜 설치해둔 시침이나 분침으로 봐야 할 겁니다. 뒤는 해마다 단 한 차례 움직이며, 그도 사람의 손으로 돌려주는 시계일 뿐입니다.
저지난주(9/15일)에 제가 차오던 멀쩡한 손목시계를 내다버릴 뻔했던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십 연 넘게 차고 다니던 아날로그 브로바 시계입니다. 그동안 제 것의 정확한 주기성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그 일이 터졌습니다.
집에 큰 디지털 벽시계가 있어 외출할 때면, 의례 끗 벽시계의 시간에 맞춥니다.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에서 내려 손목시계를 휠 끗 쳐다봤습니다. 당연히 오후 2:00 분을 가리켜 야 될 바늘이 4:15 분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바로 시계점포에 들여 전지를 새것으로 교환했습니다. 그런대로 그날 외출은 만족스럽게 끝냈습니다. 3일 후,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이번엔 분해소제(종로4가 시계골목 '태ㄱ사'에서)를 했습니다. 지난 십 연 동안 단 한 번도 청소를 해주지 못한 탓이라 여겼지요. 그래도 시계의 멈춤은 계속됩니다. 귀신이 곡할 기이한 현상이죠. 이번엔 아예 시계점포에서 1주일 동안 관찰키로 맡겨버렸습니다.
사흘이 지나서야 그 까닭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시계를 늘 놓아두는 한 바구니 한 구석에 제 처가 장난감 자석 한 개를 놓아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겁니다. 그놈의 자석이 종이에 휩싸여져 시계가 돌 힘을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시계가 놓일 자리가 그 자석에 가까워질수록 시계의 주기성은 잃게 됐었지요.
환경위기 시계를 바로 알기
지난주의 《서울주보》(제1648호, 3쪽)는 “환경위기 시간은? ‘9시 33분’”이란 제목아래,“저탄소 생활습관”이 “환경위기 시계를 늦출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그 시계바늘의 위치는 사람들이 만든 환경위기 지수를 나타내지요. 2008년 시-분침이 9:33 분(9/16 발표)이란 얘깁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시계와는 전혀 다른 겁니다. 사람들의 손으로 돌려주는 시간입니다. 자연의 시계처럼 자동 동기화(synchronized)의 기능은 없지요. 사람들의 손끝으로 가는 시계이므로, 한 사건이 일어날 상징성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그 시계는 환경단체 그리고 일본 아사히 재단이 주관하고, 1992년 브라질의 리우환경회의에서 81 개국 대표들이 참가해서 정한 겁니다. 환경 분야의 세계 전문가들(시작 때는 732 명: 한국 41 명 포함)이 설문조사로 얻어낸 답들을 한 데 모아 평균해서 하나의 수치로 나타냅니다. 그 시간의 뜻을 살피면, 3 시간 단위로 묶여집니다. 12-3시(불안하지 않음), 3-6시(조금 불안), 6-9시(꽤 불안) 그리고 9-12시(매우 불안)입니다.
환경위기를 나타낼 세세한 분야들은 경제사회문제들도 모두 포함되지요. 당연히 ‘환경위기 시계’의 주된 목적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 지구의 온난화를 늦추자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의 세계 환경위기 지수(9:33 분)엔 배고픔의 비중이 더 크게 몫을 합니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시계는 10:34 분을 가리킵니다. 다급함의 우리 처지처럼, 그들에겐 미래의 패러다임으로 “저이산화탄소 녹색성장”이란 구호는 아직 없지요. 그래도 우리(9:26 분)보다 1:08 분 앞서 갑니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개념의 핵 시계도 있습니다. 글 시작에서 “지구 종말 시계”란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발행되는 《원자과학자 회보(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ce)》는 세계에서 일어날 핵전쟁의 위기를 나타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전쟁이 끝난 후, 1947년에 시카고 대학에다 세운 시계입니다. 그것이 환경위기 시계와 다른 점은 매년을 한 단위로 정해 수정하지 않습니다. 핵 위기 상황이 생기면, 그때 조정되지요(지금까지 17 번). 핵 시계는 3 시간 단위로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지구 종말 시간을 자정(영시)로 잡아두고 거기에 가까워지는 시간으로 카운트 다운하면서 위기 상황임을 알려줍니다.
벌써 우린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겁니다. TV 뉴스는 설악산 단풍이 산꼭대기로부터 산자락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옴을 영상으로 전합니다. 자연의 시계는 하느님의 창조하심에 따라 어김없이 작동됨을 보여줍니다. 우리 곁에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시계는 동양권에서 화투장에 투영됩니다. 화투의 10월은 단풍잎 그림입니다. “환경위기 시계”는 자연의 시계와는 전혀 다른, 상징적인 한 지표일 뿐입니다.
/주승환 안젤로 2008/09/29 2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