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30)이 지난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재계약을 발표했다. 계약의 세부 내용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본 프로야구사상 최고급 계약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승엽은 4년간 최대 총 30억 엔(약 240억원) 이상을 받게 된다.
어림잡아 평균 연봉이 7억5000만 엔(약 60억원)쯤 된다. 올해 그가 요미우리에서 받은 연봉이 1억6000만 엔인 점을 감안하면 1년만에 4배가 넘는, 폭발적인 가치 상승을 이뤄냈다. 이승엽이 단지 2006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냈다고 이런 성과를 이룬 것은 아니다. 상황별로 빠르고 과감한 의사결정으로 자신을 키워왔고 협상 과정에서의 수완도 돋보였다.
일본 관계자들도 이 같은 계약에 놀랐다. 외국인 선수에게 워낙 속고 당했던 요미우리는 검증된 용병과 다년 계약을 체결해도 1년 또는 2년만 보장했다. 또 일본에서 역대 최고 수준 연봉에 합의한 점도 충격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이승엽의 연봉을 A급 선수의 평균치인 3억 ̄4억 엔 정도로 예상했었다.
2010년까지 보장된 초대형 계약을 따내면서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데뷔한 이래 이승엽의 총수입은 4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에서 총 770억원을 벌어들인 박찬호(33.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다음가는 스포츠 재벌에 올랐다.
박찬호가 처음부터 시장 규모가 훨씬 큰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면, 이승엽은 9년간 국내에서 뛰다가 해외로 진출한 토종 브랜드이다. 그것도 숱한 한국 선수들이 쓰러져간 요미우리에서 성공했다. 야구도 야구지만 고도의 경영철학과 기법을 갖추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벤처정신과 빠른 역발상
흔히들 이승엽을 온실에서 자란 화초에 비유한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엘리트코스만 밟아온 터라 그렇게 단정짓지만 사실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없는 반골 기질이 있다. 꼬마 때부터 '국민타자'로 추앙받던 시절까지 한결같았다.
그의 반골 기질은 열 살 때부터 나타났다. 극심한 반대를 뚫고 야구공을 잡더니 주위에서 권유했던 경복중-대구상고 대신 경상중-경북고로 진학했다. 1994년 11월 그는 한양대에 입학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대입수능시험 1교시만 마치고 고사장을 빠져나왔다. 삼성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이승엽은 스무 살 때 또다시 고민한다. 왼손 팔꿈치 부상 때문에 박승호 삼성 타격코치로부터 타자로 전향할 것을 제안받았다. 모험을 선택했다. 97년 최연소 홈런왕과 최우수선수에 오르며 그의 어려웠던 선택은 꽃을 피웠다.
이승엽은 99년 한 시즌 최다 기록인 54홈런을 토해내며 '국민타자'로 인정받았다. 그런 그가 2001시즌이 끝난 뒤 또다시 베팅을 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외다리 타법을 버리고 하체 이동을 간결하게 바꾼 것이다. 국내에서는 상대가 없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다들 "타율 3할에 40 ̄50홈런을 때린 폼을 바꾸는 것은 미친 짓이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2002년 47홈런, 2003년 56홈런을 쏘아올리며 FA(프리에이전트)가 됐다. 세계시장에 진출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이승엽은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꿈, 메이저리그로 향했다. 에이전트와 함께 LA 다저스 등 메이저리그 구단에 직접 자신을 세일즈했지만 조건이 시원치 않았다. 한국에서 2003년 받았던 6억3000만원보다 낮은 연봉을 제시받았다.
대한민국 1등 상품을 미국시장에서 헐값에 팔 수는 없었다. 푸대접을 받고 미국시장에 상장하느니 일본시장을 통해 우회할 방법을 택했다. 마침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롯데가 2년간 총 5억 엔을 내걸었다.
모두가 반대했다. "이승엽의 스윙은 일본에서 통하지 않는다" "못하면 한국야구의 망신이다" 등 가시 돋친 말들이 쏟아졌다. 삼성에서는 4년간 100억원을 미끼로 던졌다. 미국에서 고생하거나 차라리 한국에서 안주하라는 뜻이었다.
삼성그룹에서는 "엄청난 경제효과를 가진 이승엽에게 돈을 아끼지 말라"고 주문했다. 김재하 삼성 단장도 이승엽이 진로를 발표하기 직전까지 "충분한 대우도 약속했고, 미국이 아닌 일본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승엽은 고집스럽게 지바 롯데 마린스 입단을 밀어붙였다. "일본에서 검증을 받으면 미국에서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는 말과 함께. 2년이 지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롯데 잔류가 유력한 상황 속에서 느닷없이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요미우리는 정민태(현대 유니콘스), 정민철.조성민(이상 한화 이글스) 등이 차별 속에서 눈물만 뿌렸던 '한국인의 무덤'이었다. 이승엽은 롯데에서 보장받지 못했던 주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지난 1월 제 발로 무덤으로 들어가 한 시즌만에 눈부신 성공을 이뤄냈다.
그의 자기경영 스타일은 독단적인 편에 속한다. 그의 외곬 기질도 한몫했지만 참모들이 항상 안전한 길만 가라고 조언했던 탓도 있다. 그러나 이승엽은 최고의 자리에서도 불확실성에 자신을 내던지는 벤처정신이 있다.
그는 요미우리 입단을 결심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왜 남들이 가라는 반대로만 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선택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끊임없는 R&D에 놀란다
이승엽은 특유의 모험심으로 진로를 선택했다. 그러고는 목표달성을 위해 자신을 쉬지 않고 개조했다. 기업으로 치면 연구개발(R&D)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사실 한국시장만을 염두에 둔다면 그는 자기개발이 필요없는 수준이었다. 30 ̄40홈런 시대에 정체되어 있던 한국 프로야구를 20대 중반에 40 ̄50홈런 시대로 끌어올린 선구자였고, 자신을 당해낼 경쟁자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엽은 일본 진출 첫 해인 2004년 쓴맛을 봤다. 타율 0.240, 14홈런, 50타점. 최고인 줄 알았던 그의 힘과 기술이 한 단계 높은 일본야구의 장벽에 부딪혀 보기 좋게 고꾸라졌다.
이승엽은 생애 처음 맛보는 패배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외국인 선수 입장에서 신인급들이 참가하는 가을 캠프에 합류해 1만 차례 이상의 스윙을 했다. 당시 이승엽을 코치했던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은 "곱게만 자라온 이승엽이 손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훈련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승엽이 김 감독을 코치로 초빙한 이유도 별나다. 고액 연봉을 받고도 성적을 내지 못했던 그지만 롯데 구단에 1000만 엔 이상이 드는 김 감독의 영입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롯데는 한국 케이블채널로부터 이승엽 연봉(2억 엔) 이상의 중계권료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공짜로 이승엽을 쓰고 있는 셈이었기 때문에 이승엽은 자신에 대한 추가 투자를 요구할 수 있었다. 보통 선수 같으면 그 같은 여건을 파악할 생각도 못하고 기만 죽어 있었을 터였다.
이승엽은 한국으로 돌아와 며칠간 방황했다. 삼성 선수들과 훈련할 수도 있었지만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롯데에서 준 유연성 강화 프로그램만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승엽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오창훈 대구 헬스클럽 관장을 찾아가 "여기서 프로그램대로 운동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오 관장은 "내 생각에는 유연성보다는 강도 높은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파워를 더 키워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승엽은 망설임 끝에 관장의 말을 따랐다.
지옥 같은 훈련이 시작됐다. 이전까지 남들 하던 만큼만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던 그는 하루 4시간 동안 몇 차례나 자신의 한계를 오갔다. 구토도 했고 운동이 끝난 뒤 옷에 밴 땀을 쥐어짜면 유리컵으로 한 잔은 족히 됐다.
이승엽은 못 견딜 만큼 피곤해도 헬스클럽에서 쉬었다. 지인들과 술 한잔 걸쳐도 헬스클럽에서 잤다. 85㎏이었던 체중은 96㎏까지 불어났다. 물론 순수한 근육의 증가였다. 롯데 관계자들은 2005년 스프링캠프에 나타난 이승엽을 보고 "어떻게 두 달 만에 몸이 그리 좋아질 수 있는가"라며 놀라워했다.
이승엽은 2005시즌 타율 0.260, 30홈런, 82타점을 기록했다. 일본시리즈 3경기에서 홈런 3개를 토해내며 우승에 기여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데도 강도 높은 웨이트 트레이닝은 그해 겨울에도 계속됐다.
진로선택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이승엽은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진다. 야구에서의 R&D도 마찬가지다. 남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핵심기술을 개발해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전까지 무리한 사업확장은 없다.
이승엽이 더 큰 부를 원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미모의 아내 이송정(24)씨는 3년 전부터 일본 연예계로부터 뜨거운 러브콜을 받아왔다. 한국인이 볼 때도 스타성이 있는 인물이지만 일본에서는 더욱 인기가 좋을 스타일이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일본의 대형 연예기획사에서 후한 조건으로 이씨를 유혹할 때마다 이승엽이 나서 "내 야구를 완전히 이룰 때까지 내 가족은 날 도와야 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이승엽의 고집대로 그가 야구에서 이정표 하나를 세울 때마다 부가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치솟고 있다. 연간 20억원대이던 요미우리 중계권이 100억원 가까이로 뛰어오를 전망이다. 이는 이승엽의 연봉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또 이승엽은 삼성전자.해태제과.국민은행 등의 대형 CF를 따내면서 10억원 이상의 과외 수입을 챙겼다.
평가 불가 '브랜드 이미지'
다시 요미우리와의 계약 과정을 뜯어볼 필요가 있다. 그의 경영학적 수완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이승엽은 지난 1월 지지부진했던 롯데와의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왔다. 수비 위치 보장도 2억 엔이던 연봉 인상도 이뤄질 것 같지 않자 스스로를 세일즈하기 시작했다. 실무적으로 대리인과 통역원이 움직였지만 요미우리를 선택한 주체는 그 자신이었다.
그는 올해 요미우리와 계약금 5000만 엔, 연봉 1억6000만 엔 등 총액 2억1000만 엔을 받았다. 30% 정도의 세금은 자기부담이었다. 반면 롯데는 연봉 2억 엔을 고스란히 받고 세금 1억 엔가량은 구단이 대납해 주는 조건이었다. 롯데와의 계약기간은 1 ̄4년 안에서 이승엽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이승엽은 약 5000만 엔의 손해를 감수하고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다. 계약기간은 단 1년. 올 시즌에 승부를 보겠다는 의미였다. 지난해 30홈런을 때리면서 올해는 충분히 일본시장을 점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상대와 스스로에 대한 분석을 자신있게 끝낸 결과였다.
일본 잔류가 확실했던 상황에서 방향을 틀자 잡음이 많았다. 당시 지바 롯데 코치였던 김성근 감독은 "롯데와의 신의를 저버린 일"이라고 진노했다. 이승엽은 "여기서 안주하면 더 이상 발전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자신을 저평가했던 롯데에서는 성장동력을 찾을 수 없었다.
올 2월만 해도 이승엽은 요미우리에서 또 다른 용병 딜런과 주전 1루수를 놓고 경쟁하는 처지였다. 그는 주전경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불안한 마음으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 출전했다.
이승엽은 일본과의 두 차례 경기와 미국.멕시코전에서 결승 홈런을 터뜨렸다. 홈런 5개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선수 중 1위에 올랐다. 일본의 특급투수, 메이저리그 수퍼스타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자 메이저리그 스카우팅 리포트 구석에 자리했던 이승엽의 입지가 달라졌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던 이승엽의 WBC 참가는 그의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요미우리는 이승엽을 역대 70번째 4번 타자로 임명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요미우리는 시즌 초부터 그를 메이저리그에 빼앗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승엽의 방망이는 박자를 잘 타면서 터졌다. 시즌 막판 왼무릎 부상 때문에 홈런왕을 놓치기는 했지만 센트럴리그 홈런 2위(41개).타율 2위(0.323).타점 4위(108개) 등 눈부신 실적을 올렸다.
이승엽의 가치는 기록 외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외국인 선수답지 않게 팀을 위해 기습번트를 대고, 아픈 몸을 던져 슬라이딩도 했다. 다카하시.고쿠보.니오카 등 주축선수들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빠지는 동안 이승엽 혼자 통증을 참고 고군분투했다. 요미우리는 일본 선수들보다 더 성실하고 헌신적인 그의 플레이에 흠뻑 빠졌다.
이승엽의 꿈은 미국 진출이다. 이승엽이 메이저리그를 입에 담을 때마다 요미우리는 애가 탔다. 이승엽을 붙잡을 수 있다면 요미우리는 기량과 정신력을 겸비한 4번 타자를 확보하게 되고, 중계권료와 용품판매 등 마케팅 수입으로 연간 10억 엔 가까운 돈을 벌 수 있다. 이승엽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줄 태세였다.
이승엽은 이 점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돈도 많이 받았지만 무엇보다 유연한 계약기간을 이끌어낸 점이 눈에 띈다. 요미우리와 이승엽은 매년 계약을 경신하는 방법을 택했다. 잔류하면 연봉이 조금씩 오르고, 기간 중 메이저리그 진출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뒀다.
전략적으로 이용했건 아니건 메이저리그 진출 가능성이 계약 과정에서 이승엽에게 칼자루를 쥐여줬다. 협상의 주도권을 잡아 막대한 돈을 받게 됐고 계약기간에도 제약을 받지 않을 테니 이보다 더 유리한 계약은 없다.
기요다케 요미우리 대표도 "이승엽의 꿈인 메이저리그 진출과 요미우리의 소망인 이승엽 잔류를 모두 반영하느라 아주 특별한 계약을 했다"고 설명했다.
요미우리는 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화합할 줄 아는 그의 품성과 깨끗한 이미지를 높게 평가했다. 이승엽이라는 브랜드가 엄청난 경제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승엽도 자신의 상품성을 계약서에 충분히 반영했다.
이승엽은 실물경제를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프로생활을 하면서 자기 경영 감각을 충분히 키워왔다. 삼성에서 홈런 신기록을 세울 때부터 그의 경제적 가치는 여러 연구소를 통해 발표됐고, 그 스스로도 체험했다. 또 일본 롯데로 진출하면서도 한국과 일본에서의 파급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이승엽은 시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었고, 빠른 판단과 모험심으로 가는 길마다 부와 명예를 이뤄냈다. '1인 기업' 이승엽이 좁은 한국시장을 건너 일본에서 성공신화를 써내려 갈 수 있었던 비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