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 강기석
늦가을과 초겨울사이에는 아침 출근길에 안개가 자주 나타납니다. 승용차로 장거리 통근하는 사람들에게 안개는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시력이 별로 좋지 않는 나는 웬만한 안개에도 가까운 곳마저 희미하게 보여서 운전하는데 혼쭐이 납니다. 그래도 나는 안개가 자욱한 분위기를 결코 싫지는 않습니다. 나는 안개에 묻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안개에 묻히고 싶어 하는 것은 안개 속에 있으면 평소와는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개 속에 있으면 내가 다른 사람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과 떨어져 혼자 있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릅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면서도 자기를 떠나서 밖에 살 수 없는 소외된 일상이 자신에 대한 그리움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자신을 만나는 일은 기쁨이며 즐거움이며 또한 행복입니다.
살아가면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어떤 이념이나 제도 혹은 관습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진정한 자기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안개는 우리에게 해방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오늘 아침은 안개가 무척 진합니다. 나는 시골길로 접어들자 산모롱이 빈터에 차를 세우고 안개 속으로 나왔습니다. 길섶에는 부슬비처럼 내리는 안개에 머리가 무거워진 억새가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고, 구절초 연보라 꽃잎이 함초롬히 젖었습니다. 주위는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나는 다소 낯선 기분으로 나를 봅니다. 나를 만나는 일이 참 오래된 일이라서 다소 쑥스럽고 두렵기까지 하지만 용기를 내 봅니다. 내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습니다.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접어든 듯 반백의 머리에 마르고 큰 키 그리고 꺼벙한 어깨를 가진 볼품없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특별히 해 놓은 일도 없으면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것처럼 특별한 모습으로 거기 서 있습니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찾아 피안의 세계를 방황하는 지친 모습으로 거기 서 있습니다. 아직도 꿈같은 꿈을 꾸면서 거기 서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지 못했습니다. 즐거움 뒤에 숨어있는 허무를 부여안고 힘들어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지 못했습니다. 삶이 본래 슬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지 못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각자의 몫만큼 아파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석양을 보면서 첼로를 켜고 싶어 했습니다. 하얀 캔버스 위에 인간의 위대한 삶을 추상하고 싶어 했습니다. 진실한 삶을 산 사람들을 위해 밤새워 긴 시를 쓰고 싶어 했습니다. 첼로 소리는 나 홀로 외롭고, 캔버스는 무의미한 무늬들로만 장식되고, 시는 모래알처럼 부서져도 나는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허영심으로 만족했습니다.
나는 묻습니다. 나는 언제 즐거워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만큼 즐거워하고, 슬퍼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만큼 슬퍼하고, 고민해야할 일 또한 다른 사람만큼 고민하게 될 수 있을지를 묻습니다. 언제 ‘나’를 벗어던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을지를 묻습니다. 안개에 얼굴과 머리가 젖습니다. 마음도 함께 젖습니다.
자책으로 소침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러봅니다. 나에게만 들리는 작은 소리로 불러봅니다. 특별한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달래봅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봅니다. 남과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고 자만해 봅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 웃습니다. 그래도 나는 부조리한 내가 좋은가 봅니다. 자신을 넘어서는 일은 아무나하는 일이 아닌가봅니다. 안개가 옅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나를 떠나보내야 합니다. 세상 속으로 나를 떠나보내야 합니다. 나는 소외의 물결 속에서 나를 향한 그리움을 키워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안개 짙은 날 다시 나를 만날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