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 그리고 이웃
[마가복음 12장]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 마음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생들이 하는 사랑을 생각하면 어떤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는 표현을 합니다. 하루 종일 무엇을 해도 상대를 향한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딴 세상인 듯이 여겨지고, 그 사랑에 빠진 상대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또, 인생은 돈을 사랑합니다. 심마니가 엄청나게 오래된 산삼을 발견했다거나, 복권을 산 사람이 1등에 당첨이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의 마음은 다른 아무 곳에도 그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대상에 대해서만 온 마음을 쏟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을 보화로 여기는 자의 예를 드시면서 진주에 비유하셨습니다.
인생에게 인생을 더럽게 하는 욕심이 있기는 하지만, 그 욕심을 진정한 보화에 두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진주의 예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무엇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본 당신은 어떠십니까. 보화를 발견한 듯 하십니까? 굴속에 갇혀 있다가 빛을 본 자의 마음처럼 간절히 굴에서 벗어나 살기를 바라는 희망이 마음에 있는지요. 있다면 그것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목숨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두운 여기에, 유한한 육신을 입은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결국은 죽어 사라질 것이므로 유한한 육신이 갈기갈기 찢기게 된다 할지라도, 설령 죽게 된다고 해도, 이렇게 사라지나 저렇게 사라지나, 사라지는 것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어차피 사라질 목숨인데 살 방법이 있다고 하니까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치 수명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마지막으로 뭔가를 시도해보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한번 해보자”라고 할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은 아예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할까 말까를 생각해볼 여지라도 있겠지만 다른 방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성을 스스로 느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에 대하여 분명한 인지가 있을 때에만 목숨을 다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목숨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뜻입니다. 인생은 자기의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겁니다. 뜻이란 나름의 가치가 부여된 목적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뜻을 세우고, 자기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대의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두는 것이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힘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힘이란 나의 정신과 육체의 기력을 말합니다. 생각을 하고, 그 생각한 바대로 육신을 움직이는 것이 이 힘에 의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했어도 육신에 힘이 없으면 생각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음에 있는 것도 역시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이 힘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에, 영이 죽지 않고 사는 일에 모두 쏟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권유에 의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권유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가진 사람은 자살하기 직전에 있는 사람뿐입니다.
내가 나의 모든 힘을 쏟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쓰려면 나는 그래야만 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든지 죽고 싶지 않으므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안 죽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당신의 모든 힘을 그 일에 쓰라고 말하지 않아도 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누구든지 살아있는 지금이 순간에는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영이 살지 못한 것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저 “명대로 인생만 살다가 죽지 뭐”라는 생각을 하고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좀 더 두고 보자” 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도 샀고, 장가도 가야하고, 밭에도 나가봐야해서” 즉 그곳으로 가서 육신의 힘을 사용해야하는 일이 먼저라 여기므로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르치신 순서를 보면, 마음이 먼저입니다. 인생이 움직이는 근원이 마음의 원함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은 목숨이 붙어있기를 원합니다. 인생은 누구든지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나면서부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를 궁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있고, 살아있다는 것이 인지되어 있는 상태라면, 그 다음엔, 왜 낳아졌고, 왜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그 도착 지점이 어디인지를 깨달아, 바른 뜻, 이치에 합당한 뜻을 세워 헛되이 왔다가 헛되이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뜻이 세워졌다면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온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을 가진 피조물로서의, 유한한 인생으로서의 삶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언급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한 것은 너와 같은 아들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의 아들을 원하는 마음이 곧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다. 사랑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 하는 것이며, 네가 나와 사랑을 하려면 창조주이면서, 영원한 존재이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한다. 네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너와 내가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너를 향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하니, 네가 나의 입장이 되어 나의 아들이 되기를 원하는 다른 이를 사랑해보라.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내가 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데 까지 나타냈으니 너 또한 그를 위하여 너를 십자가 앞에서 죽게 하기까지 네 사랑을 나타내라. 그러면 네가 나를 아는 지식에 다다라 나와 피차간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될 것이다.”
이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인생들도 이런 말을 합니다. “너도 너랑 똑같은 자식 낳아서 키워봐라 그러면 지금의 내 마음을 알 것이다”별 차이 없는 말입니다.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네가 너를 사랑하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원하듯이”, 그리고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내 입장이 되어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랑을 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이지만, 그것을 실천하여 나와 하나님의 사랑이, 개와 사람간의, 피차간에 목적을 달리하는 사랑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교통하는 사랑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그 방법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나는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나를 만든 자존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인 것처럼 그 아들인 나도 마땅히 스스로 있는 자라는 속성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속성을 갖추게 하기 위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입니다. 물론 네 이웃이란 ‘아무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보내주시는 내가 일궈야하는 마음 밭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은 타인을 말합니다. 그를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그는 그 대로,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 안에서 지어지는 그 만의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이렇게 온전히 당신 한사람의 문제입니다.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고, 당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당신 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그렇게 편지를 받지 못한다면 당신은 성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