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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 28. 자기 목숨을 주려 함
마 20: 28. 자기 목숨을 주려 함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
주께서는 자신의 모범으로써 그의 교훈의 무게를 더하신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기 목숨을 그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주님의 사역의 핵심은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의미이다. 그의 사역은 부수적으로 그의 낮아지심과 섬김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도 남을 섬기며 남을 위해 우리의 목숨도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
1]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위대함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속 사회에서 세력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부패하게 되어 지배자들은 쉽게 폭군이나 압제자로 변한다.
세상에서는 그러한 권력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니는 욕구가 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머리가 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는 욕망이다.
예수님은 지난 시간에 배운 마 20: 26 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또 크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욕망 자체를 부인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으뜸이 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은 좋지만 으뜸이 되려는 목적이 무엇이며, 첫째가 되는 것은 선한 것이지만 섬김을 받고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첫째가 되려는 것은 악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인류 역사상 섬김을 받으려고 첫째가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결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들의 대화 역시 '누가 크냐, 누가 킹 메이커냐'에 집중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누가 일등하고 반장 할 것이냐?' 이것 때문에 치맛바람이 일어나고, 직장에서는 '누가 빨리 승진하여 높아질 것이냐?'이며, 회사들은 '누가 재벌 순위 랭킹 일 위냐' 하는 논쟁이요, 싸움이다.
인간의 반만년 역사는 화살에서 핵무기까지 '누가 크냐'는 싸움이다. 이 경쟁으로 발전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전쟁의 비극이 쉼이 없었다.
2] 도리어 섬기려 하고,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는 지배자이신 예수 자신이 섬기는 종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위대하다는 말은 예수의 성품을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사람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예수는 일생을 봉사받기 보다는 봉사하면서 사셨다.
남을 섬기는 삶의 가장 감동적인 실례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장면이며 봉사의 극치는 그 분의 죽으심에서 보였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이려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남을 섬기고 종이 되는 것이 신앙이다. 축복 많이 받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축복을 받고 그 축복을 남을 위해 쓰는 것이 신앙이다. 이 신앙을 오해하면 사랑이 오기나 집착으로 바뀌어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고 결국 축복이 저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높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높임 받으려고 하면 공동체의 하모니가 깨지고 결국은 자기에게 손해다. 그러나 남을 섬겨주면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축복이 주어진다. 모든 삶과 인간관계가 다 그러하다. 받으려고 하면 결국은 손해뿐이다. 그러나 주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것을 얻게 된다.
누구에게 행복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주고, 주고 또 주고 자기 몸까지 주려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 있다. 특별히 연약한 사람을 잘 돌봐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높은 자리다툼이 이번만이 아니다. 갈릴리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다툴 때가 있었다.
* 막 9: 30-37 –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그때 주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어린아이는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처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도 잘 영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무시한다. 없는 사람을 무시할수록 축복은 하나씩 깎일 것이요 없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섬길수록 축복은 하나씩 쌓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우리의 앞날의 축복을 저울질하실 것이다.
성도 여러분! 살아가면서 '얻으려고 하는 일'에만 전념하지 말고 '드리는 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선교와 구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더욱 풍성한 행복감을 선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달라!'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 제가 도울 사람이 없습니까?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 생각나게 하시고 실제로 내 손을 펴서 그를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의 권력 서열을 정해주고 있다. 세상 권력과는 정반대다. 이 세상의 표준과 주님의 표준은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표준이 세상 적인 의미에서 보면 얼마나 역설적인 진리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누가 참으로 위대하며 참으로 으뜸이며 최고입니까? 한마디로 세상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다. 많은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고 기도하는 그 사람이 바로 위대한 사람이다. 물론 세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에서는 남을 지배하고 많은 사람을 부리고 호령하는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남을 위하여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이요, 남을 섬기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다. 하늘나라에서 큰 자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 사람을 섬기십시오, 섬김은 낮아진 자세부터 시작이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한 사람도 섬길 수 없다. 또 여러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자, 여러 사람을 위해 종살이를 많이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자요 으뜸이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죗값을 담당하시려고 죄인들을 위해 몸과 피를 다 회생하여 주셨다. 그뿐만 아니다.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으로 발을 씻어 주셨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예수님이 제일 큰 자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설교만 듣고 가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섬기는 자의 모습, 종의 모습, 희생하는 자의 모습이 있을 때 거기에 빛과 소금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3]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자들은 고난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예고가 세 번씩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메시야적 소명을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정권을 잡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서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싶어서 미리부터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다시금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참된 목적을 정확하게 드러내 주셨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셨다.
① 그는 영광스런 왕의 보좌를 버리시고 오신 분이다.
이것은 도성 인신을 위해 가장 먼저 행사하신 일이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였다. 그는 하나님과 본체이신 독생하신 성자이셨으나 하늘의 영광으로부터 이 낮은 땅을 향해 내려오셨다.
② 그는 종의 신분을 취하셨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종은 섬기는 자이다. 그는 주인에게 속해 있어야 하며 주인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겼고 인류의 종으로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대신 져 주셨다.
그는 섬김을 받아야 할 분으로서 남을 섬기는 모든 자들의 모범이 되셨다.
③ 우리는 그를 위해 우리의 모든 보좌를 내어놓아야 한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오셨으므로 그 주님을 위해 우리가 마음의 작은 보좌를 비워드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일, 또는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그의 참된 사랑에 감격해 본 경험이 있는 자, 다시 말해서 그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결단할 수 있는 삶의 전환점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섬기려고 오셨다.
① 그는 자기의 피조물을 섬기러 오셨다.
본문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는 말은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으실 목적으로 일하셨다면 굳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구차한 세상까지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는 영화로운 자가 아니라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고난받는 종으로 친히 그 몸으로서 인류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오셨다.
② 성도는 예수님처럼 남을 섬겨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섬기신 일, 즉 그의 대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여전히 남들의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도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무미건조한 상태로 전락해가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그분의 성품을 따라 남을 섬길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자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섬김(시간, 재능, 경제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려고 오셨다.
그는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해 어떤 동물의 희생제사나 기름을 태움으로써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다.
대속의 확실성은 오직 생명의 피, 곧 무흠한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질 때라야 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피에 생명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만이 모든 죄를 속한다고 말씀하셨다.
* 레 17: 11 -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① 그는 자신을 희생하셨다.
섬김의 절정은 자기희생이다.
많은 사람이 남을 섬기기 위해 결심은 하지만 여기에서 되돌아가곤 한다. 자신의 경제적 유익과 육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이웃을 위해 의연히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바로 희생이다.
이 희생은 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정신적 즐거움을 송두리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기대 조건 없이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어 주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 바로 희생이다.
예수님께서는 생명과 전생애를 죄인에게 주시는데 충성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고 섬기는 자의 본을 보여 주셨다.
② 성도는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자신을 내어주셨던 그분 앞에서 우리는 응답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희생을 보답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이제 여러분의 전체를 기다리고 계신다. 시간과 재능, 열정과 물질 그리고 온 마음을 쏟는 사랑이 그것이다.
사람은 사랑으로만 보상할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갈보리에서 확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리아 산에서의 순종으로 응답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소유한 전체를 드리는 제사이며 신앙의 참모습이다.
4] 예수님의 삶의 철학 / 송수천 목사
본문 한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섬기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 다음 '많은 사람들은 위하여 대속물이 되신 희생의 삶'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섬김의 삶이요, 희생의 삶'입니다. /할/
본문은 막 10: 45절에서도 취급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원문에 보면 '많은 사람의'에서 이 '의'라는 말이 '무엇을 대신하여'라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을 대신한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이 대속물이란 말은 '교환의 개념이 있는 말'입니다. 그 당시의 노예에게 자유를 줄 때에는 우선 노예를 돈을 주고 삽니다. 몸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그 노예 문서는 태워버린 다음에 노예를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할/
▶ 대속물에 대한 성경적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① 출 21: 30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평소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황소를 기르는데 자기 황소가 그 뿔로 다른 사람을 떠받아 죽였을 때 그것은 속죄하고 피 값을 지불할 때 쓰인 말이 '대속 금, 속죄 금'입니다.
② 가난한 사람이 돈으로 팔려 노예로 끌려갔을 때, 부자 친척 중에서 그를 다시 찾아 나오게 하는 방법이 바로 그 몸값을 지불해야 되는데 그 돈은 가리켜 '대속 금, 대속 물'이라고 합니다.
③ 레 25: 25절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전당 잡힌 것, 또 인질로 잡혀간 곳에서 도로 찾아오는데 지불하는 돈을 의미했습니다.
④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도로 찾아내는데 지불하는 돈은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죗값은 청산하시기 위해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속물이 지불된 공개적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 주, 대속 자'가 되셨습니다. /할/
여기서 '대속 자, 또 구속자'라는 말은 잃어버렸거나 빼앗겨 버린 사람이나 물건을 대신해서 찾아내는 사람을 의미하고, '대속 물'이란 말은 그 사람이나 물건을 도로 찾아내기 위하여 대신 지불하는 정당한 값을 의미합니다.
벧전 2: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이것은 '아담과 맺은 공의로운 행위계약'입니다. 창2: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 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사망의 값을 자신의 죄 없는 몸으로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물의 죽음을 통하여 지불된 십자가를 가리켜 '대속의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할/
▶ 섬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여기 섬김은 두 가지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는 이웃과 형제를 잘 섬기는 생활입니다. 섬김은 인격적인 섬김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크리스천의 생활은 섬기는 생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생활과 형제와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생활'입니다. 섬김이란 영어로는 '서비스'란 말로, 여기에는 예배란 뜻도 있고, 봉사 혹은 섬긴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 그 분이 왜 오셨습니까?
①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모습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사건 자체가 기적이고,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빌 2:5-11절을 참고로 한번 잃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자기보다 높은 사람은 섬기는 것을 쉽습니다. 자기보다 권력 있는 사람은 섬기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은 섬기는 것도 어렵습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나타납니다.
②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우리 삶의 목표로 세워야 합니다. /아멘!/
⑴ 섬기는 생활은 예수님의 제자된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으뜸이 된다든지 제일이 되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으뜸이 될 때는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섬기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모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⑵ 섬김의 삶은 주님 앞에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요12: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 시대에 '앨버트 슈바이트' 박사를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 이유는 하인처럼 섬기는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는 자를 위하여 바쳤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테레사 수녀는 인도 켈커다에서 길거리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자에게 양심과 옷을 주고 그들을 섬겼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써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지금도 그 존경심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섬김의 삶은 하나님께 존귀함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습니다. /아멘!/
▶ 섬김의 원리가 있습니다.
① 섬김의 높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듯 중심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듯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가까운 사람을 잘 섬깁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 잘 사는 사람을 섬깁니다. 안됩니다. 어려운 사람, 못난 사람을 하나님같이 섬겨야 합니다. 섬김에는 높이가 있습니다.
② 섬김의 길이가 있습니다. 언제나 섬김의 자세입니다. 평신도 때, 집사 때 섬기는 자세로 있다가 부자가 되면 섬김을 받으려 하면 잘못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섬김의 자세가 절대 필요합니다.
슈바이처에게 아프리카에서 '행복 하느냐?'고 한 기자가 물었을 때 '나는 봉사할 것을 찾았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섬기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할/
그러나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순간 마음은 빈곤해지고 불평과 불만에 싸이게 됩니다. 가장 썰렁한 교제는 섬김의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원래 집사란 직분은 헬라어원인 '디아코노스'는 '섬기는 자'를 뜻합니다. /할/
▶ 성 프란시스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섬겼습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지나가던 중 보기에도 참혹한 문둥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문둥이가 그렇게 불쌍하고 안타깝게 보였습니다. 그는 마음의 움직임을 받아 말에서 내려 그 문둥이를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그 품에 안긴 얼굴을 보니 그 얼굴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프란시스는 섬기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섬기러 오셨고, 우리들을 위해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섬김의 자세로 살아야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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